말씀은 살아있는 힘이다.
정경(Canon)은 아니지만 외경서중에 [솔로몬의 지혜서]가 있는데 여기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에게 다가온 방법을 극적으로 표현한 곳이 있다.
“용맹스런 전사가 멸망의 땅 한 가운데로 뛰어내리듯이 당신의 전능한 말씀이 하늘의 보좌에서 뛰어내렸습니다.”(솔로몬의 지혜서 18장 15절)
이는 성경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큰 능력을 가진 용맹스런 전사처럼 우리에게 다가왔다는 것이다. 용맹스런 전사는 적진 한가운데 있어도 두려움이 없이 맞설 수 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존재가 되기도 하고 소망의 존재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을 ‘강한 용사’로 묘사하였다. 그러면서 성경은 믿는 자들이 ‘강한 군사’가 되어야 함도 강조한다.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가 직접 작곡한 ‘내 주는 강한 성이요’가 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원해 내시리로다.
옛 원수 마귀는 이때도 힘을 서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천하에 누가 당하랴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 밖에 없도다
힘 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시라
당할 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 하나
겁내지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대도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그의 찬양을 듣고 있으면, 우리는 절대로 말씀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그런데 말씀을 가지고 장난치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말씀을 농담거리로 여기는 사람들도 많다. 성경이 진리라고 말하면서 성경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찮게 보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자주 논란이 되는 것은 능력의 문제이다. 물론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는 능력에 있다’라고 말을 한다. 교회내에서는 몹시 능력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많다. 과거에도 그렇지만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생활을 하면서 능력받기를 소망한다. 고린도전서 4장 20절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음이라” 라고 한다. 그런데 이 말씀이 진정 무슨 의미일까?
말에는 인간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능력에도 인간의 능력과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 이를 성경에서 찾아보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볼 수 있다. 인간적인 힘과 능력으로 보면 골리앗이 이기는 것이 당연하다.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능력과 권위 아래서 그는 자신의 말과 능력을 의지하지 않았다. 골리앗은 무장을 잘했어도 다윗을 이길 수 없었다. 다윗은 물매돌을 손에 지었지만, 골리앗의 이마에 박히게 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의 능력은 또한 예배의 능력이다. 이 시대에 예배는 낮고 가벼운 이미지를 갖고 있다. 진정한 예배의 능력은 깊은 경외감을 만들어낸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가 거의 사라졌다.
또한 하나님의 능력은 마음을 끌어당기는 능력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를 그리스도께 끌어당기는 능력이다. 이 능력을 그분을 이 세상 누구보다도 그 무엇보다도 높인다. 하나님은 내가 어떤 문제보다도 나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그분을 믿고 의지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으려면 바로 그분에게 이끌려야 하고, 그분의 말씀에 의지해야 한다.
잠언 3장 5,6절을 보면,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우리의 할 일은 그저 삶의 모든 문제를 그분께 맡기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5장 7절에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우리는 과연 삶의 모든 문제를 그분께 맡기고 사는가? 아니다. 그분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이 정말 힘들다.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약속과 조화시키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진심과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
창세기에 보면 ‘야곱의 사다리’가 등장한다. 젊은 야곱은 아버지를 속이고 형도 속여서 장자의 축복을 빼앗은 후 도망가다가 어느 날 밤 환상을 본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창세기 28장 12-15절 말씀이다.
삶의 모든 것은 사실 약속에 근거하여 이루어진다. 우리는 약속의 말씀을 따라서 굳게 서서 살아가는 사람이어야 한다. 하지만 약속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 약속의 형식선만 지키고 산다. 사실 세상살이의 모든 관계도 약속의 기초위에 세워지다. 약속이 깨어지면 문제가 생겨난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에게 3가지 종류의 약속을 주신다.
첫째, 제한된 약속 - 이는 모든 이들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하나님은 오직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해당되는 약속들을 이스라엘과 맺으신 것을 본다. 다른 민족과는 약속하지 않으셨다.
둘째,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일반적 약속 - 이는 그분의 구원과 관련하여 세우신 약속이다. 구원은 만민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즉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주어졌다. 누구나 이 약속의 수혜자들이다.
셋째, 개인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약속 - 구약을 연구하다보면 하나님은 특정한 목적을 위해 개인들에게 특별한 약속을 주시곤 하신다. 이는 인격적인 약속이다.
우리의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면서, 약속의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못하시는 것은 바로 ‘거짓말’이시다. 하나님께는 참만 있고 거짓이 없으시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보여주신 사다리 환상과 비전, 그리고 약속의 말씀은 하늘까지 뻗어 있었고, 야곱의 전일생까지 미치는 것이었다. 그분의 말씀은 우리를 그분의 보좌까지 이끌어 주시는 것이다.
야곱은 이렇게 말했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창세기 28장 16절)
많은 이들이 이 시대의 풍조, 첨단기술, 과학과 디지털 혁명, 얄팍한 요령들, 그리고 이런저런 하찮은 것들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날마다 우리의 삶속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 삶 속에서 그분의 임재를 보려면 그분이 주신 약속들을 보아야 한다. 그분의 약속안에 거해야 한다.
인간의 약속은 결국 실망을 준다. 그 이유는 인간의 마음은 약속을 한다음에 약속을 변경하거나 취소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은 조변석개와 같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부도가 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약속은 망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정하신 약속은 반드시 지키시기 때문이다. 인간은 처음에 지키는 것 같아서 희망을 주는 것 같지만 나중에는 지키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처음에 지키시지 않는 것 같아 절망을 주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지켜주신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속에서 일하게 하자.
이 시대를 분별하자.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속에 나타나면 우리는 우리 주변의 문화와 반대되는 삶을 살 수 있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나 성령의 내적 사역보다 세상의 외적인 것들에 더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언제나 성령은 우리의 밖이 아닌 우리의 내면에서부터 일하신다. 그 반대 방법으로는 결코 일하지 아니하신다.
스가랴서 4장 6절은 선포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예레미야 29장 11절은 선포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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