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의 평가는
그가 권력을 어떻게 행사하느냐를 가지고 할 수 있다.”
피타쿠스Pittacus [탈무드 리더쉽]
이스라엘 유학중에 여러 지도자들을 만날 기회들이 있었습니다.
한국의 지도자들과 대비되는 면을 보았습니다.
한국의 지도자들의 특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수직적 리더들이 많습니다.
쉽게 말하면, 라인이나 줄을 타고 올라가는 리더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특히 정치적 리더들에게서 이런 상황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유력한 정치인이나 권력자들의 줄을 서고, 그들이 세월이 지나 그들의 자리를 자신을 잘 따르는 사람에게 맡깁니다.
이러한 리더쉽의 문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기회나 가능성을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능력이 되고, 실력이 되는 사람들에게 길을 트여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국은 지긋지긋하게 허상의 [인맥] 이라는 것에 묶여 있습니다.
갈수록 학연 지연 혈연이라는 공통의 [인맥]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는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한다는 반증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상당부분 [진영논리]라는 것에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조직을 [꼰대 조직]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두 번째, 실력이 아닌 학력을 갖춘 리더들이 많습니다.
실력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저 학력이 좋거나, 배경이 좋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기서의 학력은 學力 힘 력자로서의 학력이 아닙니다. 바로 學歷 역사 역자로서의 학력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리더들을 많이 맡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리더는 있어도, 제대로 된 리더쉽은 없다”라는 말을 합니다. 물론 한국인들은 일을 잘합니다. 무엇인가 주어진 책임감도 강합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러한 것도 먹히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수많은 국민들이 학력 콤플렉스가 많습니다. 많은 수의 리더들이 다수가 가진 학력 콤플렉스를 이용하여 자신의 학벌을 마치 재벌처럼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국에 유난히 폴리페서(정치하는 교수)가 많은 이유도 그렇습니다. 많은 교회에서도 학력 콤플렉스를 이용하는 허상의 리더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특징은 바로 자신들의 권한이나 권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목사는 어느 대학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아서 왔습니다.
학위라는 것은 교회의 건강한 부흥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박사학위를 가지면 정확한 신학이나 바른 신학적 입장은 견지할 수 있으나,
신학이 많은 수의 평신도들에게 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요?
평신도들은 자신을 이끌어 가는 리더가 바로 신자들을 의의 길로 이끌어가는 존재여야 하고, 그리고 높은 도덕성과 윤리성을 갖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온유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그 목사와 대화를 나누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몇 년 지났는데, 그 교회는 많은 수의 신자들이 떠났습니다.
목사의 인간적인 결함이 적은데도, 그 교회는 많은 수의 신자들이 떠났습니다.
그것은 그의 설교에서 보면 마치 교회가 아니라 강의실에 온 느낌이었습니다.
신자들은 교회에 온 것이지, 강의실에 온 것이 아닙니다.
학교가 학교다운 것은 좋습니다. 교회가 교회다와야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교회답기가 쉽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와 평신도들간에 대화와 타협을 잘해야 합니다.
서로 대화하지 않는 조직은 오래가지 힘듭니다. 교회도 조직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목회자는 교회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목회자들을 폄하하는 것은 아닙니다. 목회자는 사실 ‘기독교 현실주의자’가 되어야합니다. 자신을 비우는 연습을 많이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형편과 조건, 상황과 현실을 제대로 알고서 목회를 해야 합니다. 세상조류에 흔들려서도 안 되지만, 세상변화에도 지혜로와질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탈무드에서 말하는 리더쉽을 말하면서 서론이 길어졌습니다.
19세기 영국이 액튼 경은, “권력은 부패하며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유대인 권력자들의 부패율은 너무나 적습니다.이를 연구한 논문들이나 저작들이 있는데, 한결 같이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신뢰와 존경의 리더쉽”을 이용한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지도자들과 달리 이스라엘이나 유대인 지도자들의 모습을 살펴봅니다.
이들의 문화를 보면 수직적이기보다는 수평적입니다.
물론 이 대목은 모두다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의 현장은 아직도
수직적 리더쉽이나 강압적이고 실리적인 리더쉽에 머물러 있습니다.
리더쉽도 종류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어느 지도자를 따르는 것은 그가 원하는 것을 그들 또한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 리더의 리더쉽은 다른 사람들과 같은 위치에서 있음으로 해서 나오는 것이지 그들 위에 군림하는데서 나오지 않습니다. 리더는 끌고 가는 사람이지, 군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세계적인 리더쉽의 대가인 존 멕스웰 박사는,
"리더는 길을 아는 사람이며, 길을 가는 사람이며, 길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리더의 솔선수범을 말합니다. 먼저 배우고 확신하며 도전하며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다른 이들이 따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군림하는 형태의 리더쉽이 많습니다.
그것은 리더쉽이라고 부르지 않고 헤드쉽이라고 부릅니다.
유대인들은 리더쉽을 행사할 때, 권력지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권한지향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권력은 전근대적이고 군주제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권한은 바로 그 자리에서 적재적시에 자신의 힘과 능력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리더쉽은 바로 [명예추구]에 가깝습니다.
많은 리더들이 높은 자리에 앉게 되면 마치 사람들을 종의 자세나 하인의 자세로 [서번트 리더쉽]을 사용할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곧바로 그 자리의 힘을 이용합니다. 물론 직급이 아래인 사람들이나 부하직원들은 맹목적으로 따릅니다.
이 글을 쓰면서 광고업체에서 근무할 때가 생각이 납니다.
급여를 많이 주는 좋은 회사이지만 이름을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대표와의 만남을 가끔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 대표는 CEO이기에 매우 높은 사람입니다.그 대표에게 90도로 절하였습니다. 그렇게 절하면 마치 인정을 받을 것 같았습니다.그런데 시간이 지나서 그 대표의 인정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 대표는 바로 자신에게 ‘돈을 잘 벌어주는 직원’을 최고로 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인성이 아무리 좋아도, 가능성이 많아 보여도, 돈을 잘 벌어주지 못하면 그는 무능력하고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집니다.
세상은 그렇습니다. 쓸모있는 사람을 데려다쓰고 쓸모없어지면 버리는 것이 사회이고 기업입니다. 그 기업에서 유학을 가게 돼서 그만 두었습니다. 그렇게 나오다보니 그 회사의 대표가 이웃의 구멍가게 아저씨보다 못하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조직을 잘 보십시오. 그것은 마치 군대에서는 사단장이 높지만, 제대하고 보면 그의 리더쉽이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구멍가게 아저씨는 매일 보면서 깍듯이 인사를 합니다. 그분과 잘 지내야 이웃으로서 잘 지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신약성서를 연구하다가 놀란 부분이 있습니다.
세상은 쓸모 있는 사람을 데려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버립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쓸모 없는 사람을 데려다가 쓸모 있는 인생으로 바꾸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이것은 예수의 분명한 의지요 목표요 방향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부였던 제자들은 나중 사람을 낚는 어부들이 되었고,
인류의 성자들이 되었습니다. 이게 진짜 리더쉽입니다. !!
나의 삶을 흔들고 이끄는 존재는 바로 [신뢰와 존경을 받는 리더]였습니다.
바로 나를 가르친 목사님과 사부님들이 나의 리더들였습니다. 그렇지만 이분들은 무척이나 원칙중심이었습니다. 그저 남과 둥글둥글?하게 지내면서 타협하는 분들이 아니라, 삶의 진리와 신앙의 진리를 따라서 사시는 분들이었습니다. 원칙 중심의 리더쉽을 가진 분들이기에 도리어 세월이 지나서도 중요한 가치가 남아 있습니다.
탈무드식 리더쉽이라는 것도 그리 복잡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러한 풍토나 문화를 만드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도 밝힙니다.
조직문화나 기업문화가 수직문화보다는 수평문화로 가는 것입니다.
권위주의보다는 권한주의로 가는 것입니다.
신뢰와 존경을 추구하는 리더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지도자들이 거의 넥타이를 매지 않습니다.
지도하는 교수들도 넥타이를 매지 않습니다.
가까이하기엔 너무먼 당신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일단 넥타이를 매게 되면 서로의 포지션을 정하는 행위로 봅니다.
그러면 서로 가까워질 수 없고, 친밀해지기 어렵습니다.
일단 교수들이 넥타이를 매지 않으면 학생들은 즐거이 질문하고 물어봅니다.
그럼 교수들도 즐거이 목의 힘을 빼고, 어깨의 힘을 빼고 다정다감하게 답해 줍니다.
물론 정치판은 다를 것입니다. 정치판은 늘 싸움터를 방불케 합니다.
잘못된 결정이 내려지면 잘못된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넥타이를 매지 않고 서로 토론과 협의를 통해서
더 나은 결정과 판단이 나오게 됩니다. 비단 넥타이를 매지 않아서 이렇게 되었다는
인과율은 높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넥타이를 매지 않는 것에서 평등하고 서로 거리를 좁히면서 더 나은 솔루션이 나오게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한자에 보면 윗 상자와 아래 하자가 있습니다. 상(上)과 하(下)를 잘 보십시오.
여기서 상에서 하나 1을 남기고 하에서 하나 1일을 남기면 바로 = 이 됩니다.
갑을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 평등한 입장에서 나오게 되면 좋은 리더쉽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이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변해가면 리더쉽도 변해가야 합니다.
변해가지 않으면 리더쉽이라는 것이 헤드쉽으로 변합니다.
리더와 보스는 엄연히 다릅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을 최고로 여기고 최상의 나라로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우리나라대로 최고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나라마다 민족마다 문화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국에는 [신바람] 문화가 있습니다. [풍류문화]가 있습니다.
흥이 많고, 신이 많이 나면 엄청난 폭발력을 발휘하는 민족입니다.
한류열풍이 전 세계적으로 분 것도
바로 이러한 흥이 많고 신이 나는 민족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잘 살리는 리더쉽이 필요합니다.
한국은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나라입니다.
코로나에, 경제역풍에, 여러 안팎으로 고통받는 시절이 되었습니다.
이럴 때 리더들의 역할이 더 한층 중요해졌습니다.
그래도 서로 구성원들간에 대화와 타협으로 가야 합니다.
더 나은 솔로션(해법)이 있는 질문들이 나오고, 의문들이 나오고 그러면서
문제해결도 이루어지고 미래지향적인 조직으로 나아갈 길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무신불립 無信不立 - 신뢰가 서지 않으면 결코 서지 못한다는 공자의 경구도 있습니다.
서로 머리를 맞대면서 [신뢰 TRUST]를 형성해 나간다면 갑은 존경을 받고, 을은 인정을 받습니다. 서로는 필요한 존재니까요. 그리고 가능성이 많은 존재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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