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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토라와 탈무드 이야기

성전(거룩한 경전) , 성서와 탈무드를 대하는 태도

by 코리안랍비 2022.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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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거룩한 경전) , 성서와 탈무드를 대하는 태도

“학문(學文)의 길은 쌓아가는 것이고,
도(道)의 길은 없애 가는 것이다” - [경전, 7첩 반상 중]


많은 사람들이 소위 ‘경전(經傳)’ 이라는 고전중의 고전을 읽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이 '경전을 어떻게 읽는지'에 대해서는 반문해 보아야 합니다.

저명한 비교종교학의 권위자인 오강남 교수는,
“경전을 읽는다는 것은 그 강을 거울삼아 내 자신을 비추어 보는 것이다”

각 나라와 민족마다 자신들 고유의 자랑스러운 ‘경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교는 ‘숫파니파타’나 ‘금강경’ ‘법구경’이 있고, 인도에는 ‘바가바드 기타’, 중국에서는 ‘논어 맹자 그리고 중용’이 있습니다. 동양고전중에 가장 먼저 접해야 할 ‘도덕경’도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동경대전’이 있습니다. 물론 이 글을 쓰는 필자도 이러한 책들의 대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읽어본 것은 거의 없습니다. 있다면 논어나 도덕경이 될 것입니다. 이 논어와 도덕경도 필자에게는 침대 맡에 두고 읽어도 될 ‘좌우서’입니다.

이 경전들은 인류의 지식과 지혜의 원천이 되었고,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서 깊고 높은 성찰과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전중에 제대로 한권만 소화하여도 아마 그 사람은 ‘선각자’나 '철학자요 영적 지도자' ‘랍비’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경전들을 읽는다고 해서 삶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무용지물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이 경전들을 대하는 태도는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선은, ‘학문으로서의 경전들’입니다. 학문으로서 경전을 보는 사람들은 학위공부를 하거나, 인문학공부나 마음공부의 일환으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학문으로서 경전을 대하게 되면 많은 지식을 얻고 지평을 넓히는데 큰 도움을 줍니다. 많은 신학교에서는 바로 성서와 탈무드를 '학문으로서의 경전'으로 대합니다.

다음으로, ‘진리의 도와 덕으로서의 경전들’입니다. 도와 덕을 합쳐서 ‘도덕’이라고 합니다. 도와 덕을 함양하기 위해서 경전을 대한다면 다분히 종교윤리나 윤리철학에 접근하는 방식입니다. 또한 종교성이나 영원성을 두드러지게 하는 행동입니다.
이것은 일반 평신도들이나 종교참여자들에게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도와 덕이라는 것은 수련이나 수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참여와 교제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서와 탈무드를 오랫동안 살펴보고 살펴본 필자로서는 성서와 탈무드가 ‘학문으로서와 도와 덕을 추구하는 것’의 두가지를 다 포용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많은 경전들은 사실 그 자체로 읽어내는 것도 어렵거니와 접근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성서와 탈무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달리 생각해보면 “왜 다른 경전들은 사람들이 멀리하고 성서와 탈무드 두 성전(거룩한 경전)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을까?” 그것은 바로 ‘쉽게 쓰여져 있고, 각 나라와 민족의 언어로 쉽게 번역이 되어서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천재 언어학자이면서 세계 제1의 지식인으로 평가받는 노암 촘스키라는 유대인 석학이 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나는 살면서 많은 경전들을 언어학자 두루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접근하기 어려운 경전들은 사람들로부터 외면받지만 접근하기 쉬운 경전들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습니다. 동양의 경전들이 쉽게 서구세계에 번역이 되어 나간다면 서구사회에서도 동양경전에 대한 열풍이 불 것입니다. 그런데 바이블이나 탈무드는 세계 거의 모든 언어로 번역이 되어지면서 이제는 세계를 움직이는 책이 되었습니다.”

이 말에 동의하는 면도 많지만 동의하지 않는 면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가장 동의하는 면은 ‘성서의 부족한 점을 탈무드가 채워주고, 탈무드의 부족한 점을 성서가 완전케 한다’라는 것을 봅니다. 학문으로서의 성서와 탈무드, 도와 덕으로서의 성서와 탈무드가 서로 조화롭게 다루어져서 지식과 지혜, 명철과 총명함을 더해주는 플러스 요인이나 시너지가 일어남을 봅니다.

‘학문과 도’라는 두가지 바퀴가 같이 굴러가야 합니다.
학문에 치우치면 감성과 영성이 메말라갑니다. 도에 치우치면 지성과 논리성이 메말라갑니다. 그래서 필자는 ‘지성과 영성(혹은 신앙)’이라는 두 가지는 반드시 함께 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시인이 목련을 보고 과학적으로 접근하면 이상하듯이, 반대로 과학자가 목련을 보고 시적으로 접근하면 이상하듯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서 나아가야 합니다.

많은 JUDEO-CHRISTIANS(유대교-기독교 일신주의자)은 배타성이나 독단성이 강합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을 참조)그래서 다른 경전이나 가르침들에 대해서 멀리하거나 배척하는 경향도 강합니다. 도리어 불교나 유교에 속한 사람들이 성서나 탈무드에 더 관심을 갖는 모습도 보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마치 칼 융이 말한대로, 3,40대에는 저런 종교적인 ‘페르소나 - 가면’을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사람들은 ‘개인화’의 과정을 겪게 됩니다. 인생의 단맛과 쓴맛을 보면서 경전이 말하는 가르침과 교훈이 어느 순간 스며들게 됩니다.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인류의 고전인 경전은 잘 차려진 ‘식탁’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것 하나 좋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경전을 읽고 대하면서 결국은 추구해야 할 일치점은 바로 TRANSFORMATION '변화‘입니다. 결국 ‘나이 나됨을 추구’하는 것이 경전읽기와 실천하기의 중점입니다. ‘나로 산다는 것’은 가면을 벗고 자신의 진면목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한 시기가 바로 40이후라고 생각됩니다.

젊어서는 혁명을 꿈꾸다가, 나이가 들어서는 안정을 꿈꾸다가, 더 나이가 들면 행복을 추구하는 것으로 갑니다. 학문이나 도를 얻고자 하는 무수한 노력들도 어느새 지나친 욕심이라는 것도 배웁니다.



이제는 성서나 탈무드를 대할 때 우리는 ‘잘 차려진 밥상’이라는 것과 ‘숙성되고 잘 발효된 음식’처럼 대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사실 경전은 도구일 뿐입니다. 다만 이 도구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삶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집니다.
참 좋은 진리의 도구, 은혜의 도구가 곁에 있는데도 이를 게을리하고 소홀히한다면 그 도구가 녹스는 것이 아니라 쓰지 않는 사람이 녹슬어버립니다. 우리는 녹슨 사람이 아니라 익어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녹슬어 죽느니 닮아서 죽어야 합니다." - 법정 스님

학문으로서든, 도와 덕으로서든 경전을 가까이 대하면서 더한 행복을 얻어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삶은 더욱 간결해지고 단순해져야 합니다. 거기서 지혜와 능력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삶의 지혜중의 지혜는 최대한 단순화하고 간결화하는 것이다.” - 셰익스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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