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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 동식물의 문학사 & 탐험사&세계사

동서양의 세계사18, 모자의 세계사, 모자의 나라 조선

by 코리안랍비 2022. 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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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의 세계사
‘모자의 나라’ 한국을 소개합니다 !!


나는 모자수집광 중에 하나이다. 집에 족히 모자가 100개쯤은 될 것이다. 사계절 모자가 있으니 아빠를 따라서 모자를 쓰는 것이 생활화된 가족이다. 나는 자주 모자를 쓰는 편이다. 등산을 할 때는 등산모자를 챙긴다. 관광지를 가면은 반드시 그 지역을 상징하는 모자를 사서 쓰고 다닌다. 야구장에 가서는 응원팀의 모자를 쓴다. 충청도팀인 ‘한화’를 응원하는 사람이라서 한화 야구모자만 3-4개 정도 된다. 물론 명품모자도 하나 쓰고 다닌다. 연예인들이 좋아하는 ‘구찌모자’를 쓰고 다니는데, 모자를 너무 좋아하는 나를 위하여 ‘처형’이 선물로 챙겨준 것이다.

미국의 메이저리그에서 선수들이 착용하는 모자는 상당수가 한국산이다. 메이드 인 코리아 ! 한국에서 만든 모자를 쓰고 많은 선수들이 경기를 치룬다. 또한 이들이 입고 있는 야구 유니폼도 한국산이 많다고 한다. 세계 모자시장의 점유율 1위는 단연 한국이다. 세계 시장의 70%를 한국이 점유한다

구한말의 어느 미국 선교사가 한국인들이 쓴 갓을 보고 궁금해 하였다.
"남자들의 머리위에 쓴 저것이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하자.

그러자 "저것은 갓(god)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미국인 선교사가 깜짝 놀라한다.
"조선사람들은 머리에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다" 라고 기록했다고 한다.
또한 "조선사람들은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이다" 라고 기록했다고 한다.
바로 'CHOSEN PEOPLE' 즉,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뜻이다.

  • 구찌모자 - 구글 출처 이미지


<모자의 정의>

우리는 매일 모자를 쓰고 다니는 사람들을 자주 본다. 모자야말로 현대를 있게 한 물건이라고 할 수 있다. 모자는 넓은 의미에서 머리에 쓰는 모든 것으로 추위나 더위로부터 머리를 보호하기 위한 실용성 위주의 것과, 더욱 아름답거나 위엄 있어 보이기 위한 장식성 위주의 것, 예를 갖추고 차별화된 신분을 표현하기 위한 대사회적인 의미의 것 등, 머리에 쓰는 모든 것을 통틀어 일컫는 명칭이다.

 

 
 

<모자와 제복이 잘 어울리는 연예인>

<모자의 역사>
모자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인류가 쓰고 지냈던 물건임에 틀림없다.기원전 3200년경 이집트 나일 강가에 형성되었던 테베스(Thebes)의 무덤 벽화에서 밀짚모자를 쓰고 있는 남성의 그림이 발견되었다.

이를 보면, 인류가 모자를 착용한 시기는 그 이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기원 450년 이전, 고대 그리스 초기에 프리지아 노예들은 그리스와 로마에서 해방 된 이후, 프리지언 모자를 착용하기 시작했었다. 처음 머리를 감싸는 단순한 형태에서 시작되었으나, 시간과 환경에 따라 모자의 틀과 챙도 많은 변화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챙을 달아 사용한 최초의 모자는 페타소스(Pethasos)인 것으로 전해진다. 중세의 이르러 모자는 아름답게 보이려는 여인들의 멋, 머리 장식의 한 형태로 발전했다.

화려하고 다양한 모양으로 패션화 된 것은,
중세 초기 1400년 경, 에냉(hennin) 모자가 유행하면서 부터이다. 에냉 부인은 자신의 고안대로, 딱딱한 천을 사용하여, 원추형 모자를 만들어, 머리 뒤쪽으로 기울게 착용했다. 이 원추형 모자 위에 원형의 베일을 덮어 어깨 위로 늘어뜨린다. 여성들을 위해 디자인이 된 것으로 15세기 중엽까지 전성을 이루었다.

그리고 1200년대 중반,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기독교인들과 구별하기 위해 뾰족한 모자를 착용했고, 동족에게 강요하기도 했다. 19세기 초경에 들어, 많은 여성들이 챙이 없는 큰 모자를 쓰기 시작했고, 큰 모자에 리본, 꽃, 깃털 등의 악세사리 장식을 달아 착용했었다. 부, 신분, 미적 감각이 어울려 발전을 거듭하면서, 유럽에서 오랜 세월 동안 모자 스타일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20세기 초반부터 여성들이 짧은 머리스타일을 선호하게 됨에 따라, 모자도 헬멧처럼 머리를 감싸는 형식이 되었다. 이 시기부터 새로운 패션스타일의 모자들이 경쟁하듯 쏟아져 나왔고, 다양하고 화려한 형태의 모자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18세기 영국에서 특별 신분의 상징이 된 모자는 구입하기 위해 많은 세금을 지불해야만 했었다. 서구의 모자가 브랜드화 되기 시작한 것은 샤넬에 의해서였다.



<동양에서의 모자의 역사>
동양에서도 모자 역사가 오래고, 인식 또한 귀한 것이었다. 모자는 오래전 우리 선조때부터 의복 못지 않게 중시된 것이었다. 그래서 때와 장소, 신분에 맞게 모자를 착용했었다. 우리 선조들에게 모자 없는 임금님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었다. 의복은 고사하고 모자만 해도 평민들에게는 부러운 것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결혼식 때, 단 한번, 최하위직 관료의 복장을 하고 식을 치루었다. 그 중 하나가 사모(紗帽)란 모자였다.


조선시대로 들어서면 초기부터 개화기까지 남성들은 갓이란 모자를 착용했었다. 그리고, 시대에 따라 폭이 넓거나 좁았다, 길이, 높이, 장식의 변화도 많았다. 대원군의 의관개정 이후, 작은 갓으로 정해졌지만 말이다. 고려시대부터 착용했던 갓인, 전립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무관들이 착용했는데, 상급 군인은 품질 좋은 “안올림 벙거지”, 하급군인, 신분이 낮은 가마꾼 등의 신분이 낮은 사람은 “벙거지” 혹은 “벙테”를 착용했었다. 박쥐문양의 갓은 부호나 귀족, 사대부들이 사치용으로 착용했다. 서양 화가가 그린 장기두기의 그림에는 모든 사람들이 갓, 망건, 탕건을 쓰고 있었다니, 우리 조상의 모자 사랑을 짐작할 만하다.

이로 보건데, 우리는 모자의 나라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가 싶다. 오죽하면, 갓 위에 덮어 쓰던, 빗물 가리게 갈모(雨帽)가 있었을까? 그리고, 여자 난방용 모자 남바위, 돌모자 백립, 복건, 아기수모기, 그리고 조선시대 왕이 조정에서 신하로부터 축하를 받거나, 외국사신을 접견할 때, 강사포를 입고 원유관을 섰었다. 특히,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말의 깃털이나 꼬리털로 만든, 2층, 3층 전후좌우 봉루리의 기복이 있고 상부가 트인 정자관을 착용했다.

유생들은 평상시, 혹은 서원, 향교, 과거 시험장에 갈 때, 제에 잠석할 때, 유건 혹은 민자건을 착용했었다. 신분 구별없이 남자들은 패랭이, 여인들은 추위 방지용인 풍차(風遮), 조바위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모자 기원설에는, 한서 방지를 위한 실용설, 예의를 갖추기 위한 윤리설, 미적 장식의 예술설, 원시 신앙 유래설인 종교설 등이 있지만, 고고학적 증거는 충분치 못하다.


<성경속 모자이야기>
성경에 모자 이야기는 함므라비 법전 시대 이전, 기원 4000년 전 욥이 생존했던 때에 나타난다. 욥은 “나의 영광을 벗기시며, 나의 면류관을 머리에서 취하시고”라 했다. 이스라엘 출애굽 후, 하나님은 광야에서 모세에게 “제사장을 위한 제복을 만들되, 거룩한 직분을 위해 관을 만들어 영화롭고 아름답게 하라” 하셨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영화와 존귀의 관을 씌우셨고, 그를 믿고 의뢰한 자들을 위해, 정한 관, 생명의 면류관, 승리의 면류관, 기쁨의 면류관, 영화와 존귀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를 약속하셨다” 했다.

지금 쓴 모자는 무엇며, 미래, 쓰게 될 것은 무엇이 될까?<모자의 역사 中에서>

 

 
 


<서양모자의 종류들>

다음은 우리 나라에서 사용한 대표적인 서양모자의 종류이다.

① 캡(Cap) : 머리모양에 따라 꼭 맞게 된 브림(brim)이 없는 모자를 말한다. 크라운(crown)이 낮은 것과 높은 것이 있으며, 앞챙이 있는 것도 있다. 야구모(Baseball cap)·수영모(Swimming cap)·스키모(Ski cap)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근래에는 젊은이들은 운동시에는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야구모를 즐겨 착용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② 해트(Hat) : 넓게는 캡도 포함되는 모자 전체를 뜻하는데, 캡과 구별할 때에는 크라운에 브림이 붙은 것을 말한다. 크라운이나 브림의 변화에 따라 여러 가지 해트가 있다. 보다 세분하면 다음과 같다.

㈀ 중산모 : 더비 해트 나 보울러(Bowler)의 별칭이다. 딱딱한 펠트제로 만들어져 영국신사의 대명사로 되어 있다.

㈁ 중절모(Soft hat) :“소프트 펠트 해트(Soft felt hat)”로 가장 일반적인 비즈니스 웨어용 모자이다. 부드러운 펠트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모양이 자유롭게 변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 밀짚모자 : 밀짚으로 만든 모자의 총칭이다. 챙이 있으며 남녀모두 사용하였다. 남자의 밀짚모자 중에는 맥고모자라고 하는 것이 여름에 많이 사용되었다.

㈃ 실크 해트(Silk hat) : 예장용의 모자. 원통형의 크라운으로 챙이 비교적 좁게 되어 있다. 모닝 코트·연미복 등 최고급의 예장용에 쓰인다. 원래는 17세기 후반부터 대유행하였던 “비버 해트”가 기원이며, 격감된 비버 모피를 대신하여 실크천이 쓰여진 것이 이 모자의 시초이다. 오페라 해트(Opera hat) 등의 종류가 있으며, 구미에서는 톱 해트(Top hat), 하이 해트(High hat) 라 부르기도 하고 토퍼(Topper)라는 속칭도 있다.

㈄ 파나마(Panama)모 : 스트로 해트(밀짚모자)의 일종이다. 원래는 에콰도르·콜롬비아 등 중남미 야자류의 섬유로 짜진 챙모자를 말한다. 우리 나라의 풍속으로는 국상에 백립을 쓰는데 단발령으로 상투를 자르고 갓을 착용하지 않게 되자 고종의 국장 이후 파나마모를 써서 백립을 대신했다고 하며, 이후 한복에 중산모·중절모 등 서구식 모자를 착용하는 복식혼용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③ 베레(Beret) : 둥글 납작하고 부드러우며 챙이 없는 모자를 말한다. 스페인과 프랑스 국경에 위치한 바스크지방에 사는 농민의 모자로, 원래는 울로 만들었으나 지금은 소재가 다양하다. 교복을 비롯한 제복용 모자로도 사용되지만 여성에게는 패션품목 중의 하나이다.

④ 클로쉐[Cloche(프)]: 프랑스어로 “종”이란 뜻이다. 크라운이 높고 브림이 아래쪽으로 향할수록 바깥모양이 종과 비슷한 데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1920∼30년대에 신여성 사이에서 유행하였고, 덕혜옹주가 양장에 클로쉐를 쓴 사진도 있다.

⑤ 보닛(Bonnet) : 뒤에서부터 머리 전체를 싸듯이 가리고 얼굴과 이마만 드러낸 모자이다. 크라운이 부드럽게 처리되어 있으며 어원은 힌두어인 “Banat”에서 유래되었다. 개화기 초기에 일부 여학생 교복에 사용된 적이 있으며, 오늘날에는 첫돌 이전 아기용 모자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⑥ 터번(Turban) : 중동 아시아나 인도지방에서 많이 쓰는 모자이다. 긴 천을 머리에 둘러 심한 더위를 피하고 또 바람을 막기 위해서 쓰며, 우리 나라에서는 여성용으로만 사용한다.

⑦ 토크(Toque) : 작고 챙이 없으며 머리에 꼭 맞도록 쓰는 모자이다. 장식은 깃이나 베일로 한다. 근래에는 혼례용으로 웨딩드레스에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⑧ 헬멧(Helmet) : 머리를 보호하기 위한 모자종류의 일종이다. 쇠나 알루미늄제, 플라스틱제 등이 있다. 각종 운동경기모, 공장에서의 작업모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⑨ 후드(Hood) : 머리 전체를 덮어 싸는 부드러운 모자이다. 어깨 근처까지 오도록 만든 것도 있다. 코트나 재킷에 붙은 후드를 비롯하여 스키 등의 스포츠용으로 고안된 것도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中>



<넷플렉스, '모자의 킹덤' 조선에 반했다>

2019년, 넷플릭스를 통해 방영된 드라마 ‘킹덤’의 반응이 놀랍다. 특히 흥미로운 건 킹덤을 본 많은 외국인들이 조선시대 사람들의 모자, 특히 ‘갓’에 매료됐다는 점이다. 트위터에 올라온 짧은 리뷰들을 보면 ‘팬시 햇’ ‘어썸 햇’ ‘뷰티풀 햇’ 등의 표현이 많다. “당신은 넷플릭스에서 킹덤을 꼭 봐야 한다. 좀비와 정말 팬시한 모자 때문이다” “킹덤을 통해 조선의 역사와 모자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졌다”

2017년 국립민속박물관과 천안박물관이 공동으로 기획한 ‘모자 품격의 완성’ 전시의 도록을 보면 실제로 조선은 ‘모자의 나라’였다. 개항기에 조선을 방문한 프랑스 민속학자 샤를르 바라와 같은 외국인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신분을 막론하고 각양각색의 모자를 쓰고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를 ‘모자의 나라’ ‘모자의 발명국’ ‘모자의 왕국’으로 부르며 극찬했다고 한다. 프랑스 화가 조세프 드 라 네지에르는 “모자에 관한 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자문을 해주어도 될 수준”이라며 감탄하기도 했다.

우리의 모자는 단순히 패션 소품이 아니라 의관정제를 통해 품격을 완성했던 일종의 문화라고 정의할 수 있다. 『한국복식사전』 저자인 강순제 가톨릭대 명예교수는 “고대부터 우리나라는 관모를 쓰지 않은 맨 머리(상투만 튼)의 남자는 상놈으로 분류했다”며 “신분과 용도에 맞는 다양한 모자가 존재하는 우리나라를 일본이 매우 부러워했다”고 말했다. 특히 양반들은 국정을 논의하러 갈 때 쓰는 모자와 집무를 볼 때의 모자, 집에서 쓰는 모자 등이 다 달랐을 만큼 그 종류가 다양했다.

특히 킹덤에 자주 등장했고 외국인들이 가장 많이 매료당한 갓에 대해 강 교수는 “우리민족이 만든 고유한 모자로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형태를 가졌다”한국의 갓도 한류의 하나가 될 날도 멀지 않았다.<2019년 중앙일보 출처>



<전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한국산 모자>

전 세계인이 쓰는 모자의 70%는 우리나라 회사들이 국내외에서 만든다. 가슴 뿌듯한 일이다. 한국전쟁 후 숙련공이 없던 시절 달랑 재봉틀 몇 대와 몇 조각의 천으로 시작한 모자 회사들이 경제 패러다임 변화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신속하게 대응해온 덕분이다. 대한민국의 성공적인 경제 성장 맥락에 발을 맞추며 글로벌 회사로 성장해 세계 모자 시장을 이끌고 있는 것이다.

전 세계 시장은 4차 산업혁명의 트렌드 안에서 생산자와 소비자 환경의 변화에 요동친다. 국내 모자산업도 여기에서 자유롭지 않다. 글로벌 모자산업의 리더로 가격보다는 가치, 제품보다는 작품으로 변화하는 소비자의 구매 인식을 분석해 모자를 새로운 상품군으로 확장해야 하는 때다.

19세기 초 조선을 방문한 서구의 많은 외교관과 기자·여행객이 조선의 발달한 모자문화에 감탄하며 찬사를 보낸 기록물이 많이 있다.

모자가 한국이 세계 시장을 점유하고 있다는 것만 보아도 대단하지 않은가 !! 다음에 쓸 것도 미리 정한다. 바로 ‘마스크’이다. 전세계에서 마스크를 생산하는 나라가 무척 적다고 한다.한국과 중국이 마스크를 거의 독과점하고 있는 것이다.

  • 모자 쓴 여인 - 구글출처 이미지


<100년 기업 뉴에라 캡 컴퍼니를 소개합니다.>

모자의 역사를 새로 써온 뉴에라 캡
1920년대 개츠비 스타일 모자부터, MLB 선수들이 착용하는 뉴에라의 아이콘 59FIFTY의 개발까지 모자의 역사를 새로 써온 뉴에라캡컴퍼니(CEO: Chris Koch 이하 뉴에라)가 올해로 100주년을 맞았다.

뉴에라의 CEO 크리스 콕(Chris Koch)은 “증조부인 에드하르트 콕(Ehrhardt Koch)를 시작으로 4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경영자로서 뉴에라의 100주년을 기념하게 되어 큰 영광이며 세계적인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로 발전해 온 것에 큰 보람을 느낀다”면서 “우리는 100년의 헤리티지를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앞으로 100주년을 모멘텀 삼아 또 다른 100년을 준비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뉴에라는 세계 최대의 모자 제조업체이자 브랜드로 1920년 에르하르트 콕(Ehrhardt Koch)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4대째 가업을 이어가고 있는 뉴에라는 미국 뉴욕 주 버팔로에 본사를 두고 있으며 런던, 도쿄, 파리, 홍콩, 멕시코시티, 상파울루, 쾰른, 상하이, 바르셀로나, 서울, 멜버른, 토론토, 볼로냐에 있는 오피스를 통해 전 세계 125개국 이상에서 판매되고 있다.

‘나눔’의 경영철학으로 글로벌 중견기업 일군 ‘모자 왕’ 백성학 회장 <연세대학교 홍보팀 제공>

영안모자의 창업자, 백성학 회장. 그는 ‘모자 왕’으로 불린다. 영안모자는 연간 1억개의 모자를 70여 개 나라에 판매하는 모자 전문회사로, 현재 세계 모자시장의 35%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백 회장을 주목하는 것은 비단 그가 일군 사업규모 때문만은 아니다. 최종학력 초등학교 3학년의 10세 전쟁고아가 일궈낸 성공이라는 점과 그 성공의 바탕에는 일찍이 넓은 세계시장을 겨냥하는 경영전략과 철저하게 사업수익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그의 경영철학이 있었다는 점 때문에 우리는 백 회장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다.

10세의 전쟁고아, 전 세계 ‘모자 왕’되다!

백성학 회장의 최종학력은 초등학교 3학년이다. 10세 때인 1950년 원산에서 피난 가는 고향 형들에게 사탕값을 받으러 배를 탔다가 홀로 남쪽으로 내려와 전쟁고아가 됐다. 그리고는 미군부대서 잔심부름을 하며 전쟁 북새통 속에서 용하게도 모진 삶을 버텨냈다. 그는 16세에 모자공장에 취직해 일을 배우다 1959년 19살 나이에 청계천에서 70개의 모자를 가지고 사업을 시작했다. 모자 하나에 온 정성을 기울인 백 회장은 1970, 80년대 미국 수출로 큰돈을 벌어들였다. 미국 프로야구단의 팬서비스용 모자를 공급하면서 미국시장을 석권한 그는 미국에 3개 공장을 비롯해 코스타리카, 중국,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등 전 세계 10개국에 17개 법인과 31개의 지점을 거느린 세계 최대 모자기업으로 키웠다.

그는 모자 하나로 세계를 제패한 ‘모자 왕’이자 기계산업과 미디어산업을 종횡무진하는 ‘잘나가는 중견기업인’이 되었다.

70억명 소비자를 향해 해외로 눈을 돌리다의 성공비결은 무엇일까?

백성학 회장은 첫 번째로 ‘멀리보기’를 들었다. 1~2년을 위한 계획이 아니라 5~10년 이상을 바라보는 계획을 세우고, 상황이 좋을 때와 나쁠 때의 밸런스를 맞춰 동요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그의 성공 요인은 ‘해외시장 개척’이다. “5천만명을 대상으로 사업을 할 것인가, 70억명을 대상으로 사업을 할 것인가? 더 넓은 시장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중소기업들이 좁은 국내시장에서 대기업과 가진 자들을 상대로 경쟁하며 고전할 것이 아니다.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아직 갖지 못한 중소기업이더라도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에서라면 얼마든지 성공의 기회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모자를 팔아 번 1만원과 해외에서 모자를 팔아 번 1만원은 똑같다. 어디에서 벌었건 1만원은 그저 1만원인 것이다.” 그는 26살인 1966년부터 해외 수출에 나섰다.

역사와 기록을 통해 배우다

그는 개인의 기록에서부터 국가, 사회, 인류 전체의 역사까지 옛 것의 가치를 아끼고 온고지신으로 삼는다.
영안모자 역사관에는 1959년 영안모자 최초의 사업자등록증에서부터 수십 년간 출장을 다닌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수천 장의 비행기 탑승권까지 백 회장의 꼼꼼한 자료수집 면모가 그대로 드러나는 전시물들이 가득하다.

“자랑스러운 역사건 잘못한 역사건 모든 기록을 소중히 남겨야 한다. 후대 사람들이 그 기록을 통해 잘한 것은 배우고 못한 것은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 기록은 문화민족의 뿌리다. 역사를 남기는 일을 국가에만 맞길 것이 아니라 개인, 가족, 지역, 학교 등이 모두 함께 애써야 한다. 유대인들이 보존하고 있는 ‘안네의 집’을 보라. 또한 거북선을 부린 이는 역사에 남고, 거북선을 만든 이는 역사에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논밭을 일구는 이도, 시장에서 손수건을 파는 이도, 저마다의 역사와 자료는 소중하다.


“서양에 팔 모자를 디자인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역사와 문화, 전통을 먼저 파악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서양의 역사와 유물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옛 자료의 소중함을 깨닫는 계기가 됐다.”

수익의 일부는 반드시 사회에 환원한다

마지막 성공 요인으로는 백 회장의 사회공헌에 대한 철저한 철학을 들 수 있다. 그는 수익의 1/3을 사회에 환원하고 있다. “교만해서 한해라도 봉사를 거르면 나쁜 일이 생긴다. 스스로 깨달음을 얻도록 하나님께서 그런 계기를 주시는 거라고 생각한다.” .

자신의 갈 길을 일찌감치 모자사업에서 찾았던 백성학 회장. 그의 기도와 사랑이 닿아있는 연세의 품에서 섬김의 리더십을 발휘하는 제2의 백성학이 수천, 수만명 다시 태어나길 바래본다.

우리나라를 진정 패션의 강국이다.

  • 구글출처 이미지 - 모자의 나라 조선의 남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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