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어린이들의 친구, 곰의 세계사
곰의 세계사를 쓰려니까 갑자기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바로 곰브리치라는 세계적인 역사학자이다. 세계사로는 빼 놓을 수 없는 위인이 바로 곰브리치인데 그가 쓴 역사서 [곰브리치 세계사]는 역사명작이다. 그런데 나도 그와 비슷한 명작을 남기려고 한다. 바로 [곰의 세계사]이다. 곰브리치나 곰이나 아마 ‘곰’이라는 이니셜이 같아서 언어의 유희를 잠시 부려보았다.
제목을 ‘지구 어린이들의 친구, 곰의 세계사’ 라고 하였는데 내가 보아도 제목은 참 좋다. 지구상의 어린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동물은 테디 베어, 즉 곰돌이다. 아이들은 곰돌이 인형을 가지고 놀기를 좋아하며, 곰과 관련된 이야기, 동화, 애니메이션, 영화까지 섭렵할 정도로 좋아한다. 어린 시절 친구가 없는 아이들은 테디 베어라고 하는 곰인형을 가지고 놀거나 돌아다닌다. 여기에 칼 융의 [집단 무의식]이라는 개념이 들어간다. 본고에서는 쓰지 않겠다. 이 곰은 세계사적인 동물이다.
<원래 곰은 이런 동물이다.>
사람들은 곰이 무척 귀엽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곰을 만나보면 정말로 무시무시하게 무섭고 잔인한 동물이며, 어머어마하게 큰 몸집을 가진 대식가(BIG-EATER)이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 있다.
고대 유럽에서는 사자가 백수의 왕이 아니라 곰이 백수의 왕이었다. 사자가 백수의 왕이 된 것은 아마도 그리스도교의 영향 때문이다. '아리엘'이라는 히브리어가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사자’라는 뜻이다. 그 말은 곧 그리스도를 가르키는 말이다. 그리고 현대자동차 차종중에 [아슬란]이라는 자동차가 있다. 이 아슬란은 터키어로 ‘사자’라는 뜻으로서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물론 C,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에 나오는 사자의 이름이 바로 [아슬란]이다.
<곰의 어원>
영어에서 곰은 BEAR이다. 이 말은 고대 영어에서는 베라 BERA가 변형된 것이다. 이 단어는 원래 독일어로 베론 BERON인데 아마도 그 뜻이 갈색이란 뜻이 있어서 [갈색 생물]로 불리웠다. 다른 유럽에서도 베라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였고, 나중에는 곰은 없어지고 색깔만 남게 된 것이다. 그래서 유럽에서 곰이라고 하면 ‘갈색’이라는 뜻이 된다.
곰은 원래 원시 인류의 토템신앙의 대상이었다. 곰이 토템신앙의 대상이 된 것은 맹수로서의 이미지와 강한 근력, 그리고 잡식성으로 인간과 활동범위가 겹친다는 이유로 선사시대 이전부터 인류의 뇌리에 충격적으로 남았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위키백과>
고대 국어에서는 곰 웅(雄)자에 해당하는 고무, 고마 등으로 불리웠다고 한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백제의 2대 수도였던 웅진이 나온다. 이 웅진은 고마 웅자와 나루 진자를 써서 사용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그 이름이 그래서 ‘곰주’라고 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충남 공주시로 변했다라는 학설이 있다. 공주시에는 공주가 많은게 아니라, 곰이 많았던 지역이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금강과 계룡산이 있어서 많은 곰들이 서식을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한국의 건국신화인 단군신화에서는 웅녀가 나온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나라에서도 곰을 영물로 여기며 신처럼 떠받들었던 것이다. 곰 웅녀가 단군의 어머니이다. 그렇다고 해서 곰을 국조로 모시는 것은 전혀 맞지 않는다.
매년 백제문화축제가 있는데, ‘고마나루축제’가 같이 열린다. 7월 20일에서 8월 11일에 열린다.
<곰의 속성과 지능>
인도에는 이런 말이 있다.
[당신이 숲에 들어가면
곰은 당신 냄새를 맡고
독수리는 당신을 보고
사슴은 당신이 내는 소리를 듣는다.]
곰은 귀엽게 생긴 외모를 갖고 있지만, 곰은 야생에서는 아주 폭군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몸이 둔한 사람을 [미련 곰탱이]라고 하고, 아니면 [곰같이 아둔한 놈]이라는 표현을 쓴다. 또한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번다.] 라는 속담도 있지만 곰은 보기보다 똑똑하고 행동도 빠르다. 에버랜드에 가면 곰들이 ‘히죽히죽’ 거리며 사람들에게 애교를 부려 과자와 고기조각을 잘 받아 먹는 것을 본다. 이럴 때면 여우보다도 더 교활하고 영리하다.
곰은 후각이 무척이나 발달하여 심지어 개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그래서 깡통 통조림의 밀봉된 표면의 새어나오는 미세한 냄새도 감지할 수 있고, 북극의 얼음판에서도 그 아래 물고기를 감지할 수 있다고 한다. 절대 미련 곰탱이가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보너스인데, 곰탱이는 원래 미련한 사람을 얕잡아 부르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곰 자체를 뜻하는 단어가 아니라 곰탱이는 바로 곰이 만든 잠자리를 뜻한다. 곰은 습성상 잠을 잘 때 풀을 말아서 방석이나 침대처럼 만들어 놓고 웅크리고 자는 특성이 있다. 그래서 곰의 잠자리를 곰탱이라고 부른다.(국립생태원)
곰의 천적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산속에서 곰의 천적이라고 해봐야 사실 자신들이 동족인 곰밖에 없다. 물론 호랑이가 있기는 하지만 개체수가 워낙 적다보니 호랑이와 마주칠 일은 없다. 그리고 곰과 호랑이가 싸운다고 하여도 곰이 그렇게 질만한 수준도 아니다. 대형 불곰은 실제적으로는 호랑이보다 덩치도 크고, 앞발의 힘은 호랑이를 능가한다고 한다. 둘은 서로 안싸우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아시아에서는 곰은 수난받는 동물이다.
곰의 쓸개, 즉 웅담이 좋다고 하여 많이 학살되기도 하고, 곰발바닥 요리가 중국에서는 진귀한 요리로 취급되어 자주 곰은 살육을 당한다. 지금 중국에서는 곰요리가 금지되어 있다.책상다리를 빼고는 다 먹는 중국인들의 몬도가네식 식사가 많이 바뀌었다고 하나 여전히 나아 있는 고장이 있다. 코로나가 창궐하기전에 박쥐나 심지어 천산갑 요리도 먹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솝우화속의 곰>>
이솝우화를 보면 곰이 나타나서 한 친구는 나무 위로 도망치고, 다른 친구는 죽은 척을 해서 살아나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그것은 철저히 동화이야기라서 곧이 곧대로 믿어서는 안된다. 현실의 똑똑한 곰은 냄새를 맡아보고 바로 갈기갈기 찢어서 사람을 잡아 먹을 수 있다. 그래서 곰을 만났을 때는 죽은 척 하는 것은 오히려 위험하다.
그 곰이 사라지자 나무에서 내려온 친구가 궁금해했다.
“친구야, 저 곰이 뭐라고 했어?”
그러자 친구가 말한다. “너 같은 친구랑은 사귀지 말래”
SBS에 [호기심 천국]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이 프로그램에서 동물원 우리에 사람 옷을 입힌 마네킹을 실로 묶어 두고 곰 앞에 두었다가 죽은 척하듯이 눕혀 놓았다. 그런데 우리 속에 있던 곰은 갑자기 돌변하여 옷을 다 찢어버리고 마네킹도 부숴버린 적이 있다. 배고픈 곰은 인정사정을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눈앞에 신선한 고기가 있으면 백이면 백 포식을 한다.
그런데 이솝우화의 곰 이야기를 달리 각색을 해보자.
바닥에서 죽은 척 하는 친구는 살았다.
그렇다면 나무 위로 올라간 친구는 과연 살 수 있을까?
그 친구도 아마 죽을 확률이 높다. 곰은 나무도 잘 탄다.
나무를 탈 수 있는 곰이 많다.
거기다가 나무를 크게 흔들어서 먹잇감을 떨어뜨리기도 한다.
다른 생각도 해보자. 그렇다면 곰도 오르기 힘든 나무위에 있는데 곰이 언제쯤 자리를 뜰까? 보통 6-7시간은 나무 아래서 먹잇감을 기다릴 수 있다고 한다. 이런 것을 보면 곰이 미련할 정도로 먹이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곰을 만날때는 무조건 36계 줄행랑을 치는 것이 좋다. 그래도 죽을 수 있다. 우사인 볼트보다 빠르지 않으면 안된다.
우사인 볼트가 시속 35킬로로 달린다면, 곰은 빠르면 60킬로로 달릴 수 있다고 하니 그렇다면 꼼짝없이 죽는 것이다. 대책이 없다. 그렇다면 아예 만나지 않고, 안보는 것이 상책이다.
<진짜 백수의 왕은 곰?이었다.>
유럽에서는 호랑이나 사자보다도 곰이 백수의 왕이었다.
로마시대에는 아프리카에서 사자를 들여와 곰과 싸움을 하게 했는데 대부분 곰이 이겼다.
우리는 검투사(글라디에이터)들을 생각하는데 이들은 검투동물들이었다. 유럽에서는 오래전부터 곰숭배 사상도 있었다. 고대 영웅시가인 [베어울프]는 곰과 인간 여성 사이에 태어난 영웅으로 그 이름은 곰을 에둘러 호칭한 “벌들을 약탈하는 자” 이거나 “벌의 적” 이라는 의미다. 그렇지만 기독교가 공인되고 나서는 곰을 인정할 수 없었고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는 곰을 이교도 문화의 근원으로 보고 대대적으로 학살하기 시작했다. 성직자들은 곰을 악마의 이미지로 바꾸었다. 곰 대신 유럽에서는 사자를 동물의 왕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 당시 기독교는 아무리봐도 개독교다. 그래서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자연상태의 곰이 한 마리도 남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와서 [곰의 역습]이 이루어졌다. 바로 곰은 곰인형으로 대박을 터트린다. 곰인형이 전세계 어린이들의 집단무의식속에서 다시 부활하였다. 이에 대한 기록을 보려면, <<곰, 몰락한 왕의 역사, 미셀 파스트로>>의 책을 보면 된다.
<곰과 공존하는 사람들>
그러나 러시아나 시베리아에서는 곰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고, 오랫동안 곰은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시베리아의 네네츠 유목민의 말을 들어보자.
“곰은 곰이고, 인간은 인간이란 신념 아래 곰과 공존하는 부족이다. 곰과의 공존은 껴안고 같이 살자는 말이 아니다. 서로의 영역에 침범하지 않고 각자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네네치 사람들 얘기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 곰들의 땅을 인정하고 침범하지 않으면 자연은 회복된다.”
일본 훗카이도의 시레토코 어촌마을도 곰과 함께 살아간다고 알려져 있다.
“인간과 곰이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유일한 땅이다. 네네치 부족은 곰과 생활근거지가 겹치지 않지만 여기는 함께 살아간다. 생활영역이 겹치지만 서로 무시한다. 인간은 음식물을 철저히 관리하고 곰은 풀과 고동을 먹으며 살아간다. 50년간 한번도 사고가 없었다.”(중앙일보 곰 특집중)
<성경속의 곰들>
한때 책을 집필하려고 성서속의 동식물을 연구하였는데, 그 연구한 것이 이렇게 도움을 줄 줄은 몰랐다. 동식물의 상징주의를 가지고 연구했는데, 책은 못냈는데 이렇게 글로 표현할 수 있어서 좋다. 곰은 지구상의 최상위 포식자이다. 성서에도 곰이 자주 등장한다.
곰은 히브리어로 [똡]이라고 하고, 그리스어로는 [알크토스]라고 한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의 곰은 [시라아 회색곰]이라고 하며 북부지역에 주로 서식하였다.
사무엘상 17장 34절을 보면, 팔레스타인 곰은 술의 벌집이나 개미집을 쑤셔 먹고, 새들의 알들도 주로 먹었다. 굶주리면 양떼를 공격하여 움켜먹기도 하였다. 저녁이면 어슬렁거리면서 양떼들을 향해 공격하는 곰은 무서운 동물이었다.
잠언 28장 15절에 보면, 가난한 백성을 괴롭히는 관원을 마치 사자나 곰처럼 먹잇감을 기다리는 존재로 묘사한다. “저는 내게 대하여 엎드리어 기다리는 곰과 은밀한 곳의 사자 같으사”(예레미야애가 3장 10절)
선지자중에 엘리사가 있는데 이 사람은 대머리였다. 그 사람이 벧엘이라는 동네로 가고 있는데 그런데 여러 아이들이 나타나서 “대머리야 꺼져라, 대머리야 꺼져라”라고 놀리자, 갑자기 곰 두마리 나와서 아이들을 죽여서 잡아 먹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엘리사는 갈멜산으로 간다. 이 괴기스러운 이야기가 성서에 등장한다. (열왕기하 2장 23-25절)
이 글을 쓰면서도 머리가 시원한 사람을 ‘대머리야’ ‘대머리야’ 라고 놀리지 말아야 함을 본다 .자칫하면 곰이 나와서 물어 죽일지 모른다.
<중국의 국보, 판다>
혹시 장사를 잘하는 곰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판다곰이다. 그렇다면 가장 폭력적인 곰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팬다곰이다. PANDA는 중국에서도 가장 진귀한 동물중에 하나이다. 원래는 자이언트 팬더인데, 중국 사람들은 [따슝마오]라고 부른다. 그 생김새가 곰과 고양이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래서 살아있는 화석이라고 하여 [훠화시 활화석(活化石)] 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많은 중국인들은 궈바오(국보(國寶) 라고 부른다.
판다는 귀여운 둥근 얼굴을 가지고 있고, 머리와 배가 하얗고, 어깨와 팔이 검은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밥을 먹어도 앉아서 사람처럼 먹는다. 판다는 지금의 쓰촨성에서 약 1000여마리 정도가 서식한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주로 먹는 것은 대나무이다. 1-2년된 대나무가지와 죽순의 껍질을 벗겨 먹고 산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판다를 [BAMBOO BEAR 대나무곰] 이라고 부른다.
판다는 중국에서는 여러 나라들과의 우호의 상징이 되고 있다.
그래서 판다를 [동물외교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곰 세 마리가 한집에 있지 않는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동요중에 [곰 세 마리]가 있다.
곰은 집단 생활이 아닌 단독생활을 하는 특징이 있어서 동요처럼 아빠 곰, 엄마 곰, 아기 곰이 한집에 있지 않다.
거기다가 아빠 곰은 뚱뚱하고, 엄마 곰은 날씬하다.
아빠가 뚱뚱한 것은 미덕이고, 엄마 곰이 뚱뚱한 것은 죄악이다.
어찌보면 편파적인 동요인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집에서는 불과 몇 년전만 해도 이 괴로운? 동요를 불렀다.
재미있는 것은 남미의 여러 나라들이 곰 세 마리를 따라 부르며 한국어를 배운다고 한다. 무엇이든 노래로 챈트로 부르면 외국어를 익히는데 큰 도움이 된다. 그렇지만 곰 세 마리라 한 집에 있는 경우는 없다라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란다.
일담에 의하면, 북한에도 곰 세 마리가 있다고 한다.
바로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을 패러디하여 권력세습한 노래가 있다.
그 가사는 이렇다.
“한 집에 있는 곰 세 마리가 다 해먹고 있어/할배곰 / 아빠곰/ 새끼곰/ 할배곰은 뚱뚱해 / 아빠곰도 뚱뚱해/ 새끼곰은 미련해” 등으로 바꾸어 놓은 곡이 있다고 한다.
<한국의 반달가슴곰>
반달가슴곰은 시베리아에서부터 시작하여 태국이나 히말라야도 있고, 대만이나 일본에서도 서식하고, 백두산이나 설악산, 지리산에도 서식을 하는 곰이다. 비교적 곰치고는 덩치나 키가 크지 않다. 이는 멸종위기종이며, 국제적으로 보호가 되고 있는 진귀한 동물이다. 한국에서는 천연기념물이고 지리산과 설악산에 몇 마리가 방사되어 잘 살고 있는지 없는지 궁금한 곰이다.
일제 감정기에 무려 1039마리가 포획되었다. 그런데 그 반달가슴곰을 복원하려고 각고의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훼손은 1년이지만 복원은 100년이 걸린다. 지금 한국에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수도산이나 설악산에 약 70마리 정도의 반달가슴곰이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고맙습니다 라는 인사말의 유래>
고맙습니다. 라는 인사말의 유래를 아는가? 원래 이 말은 ‘곰스럽다. 당신은 곰처럼 존경스럽다’ 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앞에서 고마가 곰인데, 사람들은 고맙습니다.라는 표현보다는 감사합니다.를 많이 쓰고 있다. 곰에 대한 복원도 중요하지만, 고맙습니다. 라는 문화적인 언어의 복원도 중요하다.
우리나라에서 호랑이가 없어져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런데 반달곰만큼은 제대로 복원이 되어야 한다.
곰이 없어지면 그것은 한국의 상징이 없어지는 것과 같다.
문학속의 곰
<윌리엄 포크너의 곰을 좋아하세요> - 강추, 강추, 강추
문학동네에서 출간한 윌리엄 포크너의 [곰]이라는 소설이 있다.
포크너의 작품들이 대체적으로 어려운데 이 작품은 비교적 평이하다. 이 [곰]의 배경은 19세기 미국의 남북전쟁 전후이다. 그 중에서도 남부인데 어린 소년 아이작은 어른들을 따라 사냥을 나가고, 울창한 숲과 넓은 대지를 누빈다. 그곳에서는 아이작은 [올드밴]이라는 곰을 만난다. 이 곰은 강력한 이데아로 소년에게 작용하고 소년의 가슴에 깊이 파고든다.
아이작은 이 [올드밴]을 반듯히 잡자고 다짐한다. 그러나 인디언들에게 이 [곰, 올드밴]은 존경과 경외의 대상이며, 이 곰과 자신들을 일치시키려고 노력한다. 나중에 올드밴은 총에 맞아 죽고, 그 숲은 철로와 산림개발로 파괴되어간다.
나중 아이작은 가문의 유산을 물려받게 되지만 그는 이것을 거부한다. 그가 받을 유산은 그저 노예제나, 백인혈통의 우수성?, 개척자 가문, 가부장제 등이 모두 자유가 아닌 족쇄로 다가왔다. 아이작은 [곰 올드밴]이 그리워지고, 다시 소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때의 파괴되기전의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 소설은 오랫동안 사람들을 잡아 당기는 힘이 있다. 미국 역사를 정치적으로 알고 싶으면 이 [곰]이라는 책을 만나기를 바란다. 아니면 나이가 들어서도 공감능력이나 동일화라는 감정을 얻고 싶으면 이 책을 만나라. 사람들은 누구나 소년시절 그리고 소녀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욕구가 그 속에 들어 있다. [곰]은 자연의 지배자였다. 그러나 자연과 공존하는 지배자였다. 그 [곰]이 없어진 숲은 적막하고, 인간이 만든 가공할 것들에 지배가 된다.
도시를 보라. 서울을 보라. 한때는 산이었던 곳, 숲이었던 곳, 초원지대였던 곳, 늪지대였던 곳이 지금은 도시계발로 사라지고, 도로가 생기고, 아파트가 생기고, 여러 문명의 물건과 물질이 들어섰다. 그리고 불편한 자본주의와 정치가 판을 치는 곳이 되었다. 윌리엄 포크너의 [곰]은 이번 휴가기간에 읽어볼만한 책이다.
<시읽는 시간 - 어미곰처럼>
내 글의 특징이 마지막은 시를 남긴다는 것이다.
여러 시가 있는데, 아마도 석학 이어령 박사의 <어미 곰처럼>이 좋을 듯하다.
<이어령의 어미 곰처럼 - 80초 생각> 이라는 프로그램에 나왔다.
어미 곰처럼
어미 곰은
어린 것이 두 살쯤 되면
새끼를 데리고 먼 숲으로 간다고 해요
눈 여겨보아두었던
산딸기밭
어린 곰은
산딸기에 눈이 팔려서 어미 곰을 잊고
그 틈을 타서 어미 곰은
애지중지 침 발라 키우던 새끼를 버리고
매정스럽게 뒤고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려요
발톱이 자라고 이빨이 자라
이제 혼자서 살아갈 힘이 붙으면
혼자 살아가라고
버리고 와요
새끼 곰을 껴안는 것이 어미 곰 사랑이듯이
새끼 곰 버리는 것도 어미 곰 사랑
불같은 사랑과
얼음장 같은 사랑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산딸기밭을 보아두세요
아이들이 정신을 팔고 있는 동안
몰래 떠나는 헤어지는 연습도 해두세요
눈물이 나도 뒤돌아보지 않는
그게 언제냐고요
벌써 시작되었어요
탯줄을 끊을 때부터
걸음마를 배울 때부터
손을 놓아주었던 그때부터
무릎을 깨뜨려도
잡은 손 놓아주었던 날을 기억하세요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중에서
곰에게서 뜨거운 사랑도 배우지만 차가운 사랑도 배운다.
시인은 그 곰의 특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우리도 자녀들을 언젠가 차가운 사랑으로 보내야 할 때가 있다.
아프지만 눈물나지만 언젠가 잡은 손 놓아줘야 할 때가 있다.
힘들고 어려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지만,
그래도 먼 길을 가게 하려면 기꺼이 보내야 하는 아픈 사랑이 있다.
우리 부모는 그것을 미리부터 연습하는 것이다.
나의 조부모가 그리하였고, 나의 부모가 그리하였고, 나도 그리하고 있다.
마지막 이 시를 옮기면서도 눈물이 나는 것은 왜일까?
미련 곰탱이가 되어버린 오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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