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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브루타와 코칭 & 멘토링

논어의 붕우, 아람어 하베르 그리고 하브루타

by 코리안랍비 2022.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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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의 붕우(朋友), 히브리어의 하베르(친구) 그리고 하브루타(친구관계)


최근에 [하브루타 Havruta] 유대인 학습법이 인기를 끌고 있다. 한국교육의 신선한 바람을 불어 일으키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지속적인 하브루타의 바람이 계속 불지는 미지수(未知數)이다. 그 이유는 하브루타가 학습모델이나 교육철학의 입장에서만 본다면 오래가기 힘든 점이 있다. 무엇인가 오래 가려면 즐겁고 좋아야 한다. 지속적인 즐거움과 순간순간의 좋은 기억과 기쁨을 가져야 진정한 학문의 길도 열리고, 인간관계의 길도 열리는 것이다.

필자는 유대인 학교에서 학업을 하면서 유대인들의 학습패턴이나 교육적인 동선을 살펴볼 기회가 많았다. 이들은 하브루타를 [질문하는 공부법이나 둘씩 짝을 지어 서로 질문하고 답하며 배우는 과정]이라고 본다. 이러한 정의가 맞는지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빠져 있다.


그런데 그 어원이 Haver(친구)라고 한다면, 뭔가 달리 해석해야 한다. 바로 [친구간의 지적 친교]라고 부르는 것이 더 낫다. 아니면 줄여서 [친구관계]라고 보는 것이 더 낫다. 학습도 사람간에 이루어지는 행위로 본 것이다.

자꾸만 한국의 교육학자나 학생들을 지도하는 입장에 서는 사람은 하브루타를 [방법론이나 학습모델]로 여기는 착오를 범한다. 그렇다면 동양에서 바라보는 친구의 개념을 새롭게 온고지신(溫故知新)할 필요가 있다.

몇 해 전부터 [논어]를 잠시 공부할 기회가 있었다.
논어의 [학이편]은 워낙 알려진 부분이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아]라 하여 [학습]이라는 단어를 공자는 역사상 처음 사용한다. 학습이나 교육은 정말 중요하고 중요한 일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이다. 그 다음으로 ‘친구’라는 개념이 두 번째 문장에서부터 등장한다.

유(有)붕(朋)자(自)원(遠)방(方)래(來), 불(不)역(亦)낙(樂)호(乎)

여기서 친구에 해당하는 글자는 [유붕]이다.

논어학자인 이한우의 [논어로 논어를 풀다]를 보면 이 단어에 대한 치밀한 해석을 해 놓았다.

[먼저 학습과 책 이전에 벗이 있다. 그리고 자신처럼 배우고 늘 쉬지 않고 몸에 익히기를 좋아하는 그 벗이 먼곳에서 돌아오니 나 또한 그로부터 새로운 식견을 얻을 수 있어서 즐겁지 않겠는가] 라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해석대로 하면 [유붕]이라는 것은 원래는 가까이 있다가 어딘가 먼 곳에 다녀온 친구를 지칭한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신정근이라는 한학자는 달리 해석한다.
아주 감성적인 해석을 한다. [유붕은, 예전에는 자가용이나 비행기와 같은 교통수단이 없던 시절이니 옛날에 보았던 사람이나 친구가 멀리서 찾아와 그 사람의 가슴이 몇 번이나 닫혔다 열렸다 하는 일]이라고 보았다.(공자씨의 유쾌한 논어 중(中)

  • 공자 -학이편 - 학문의 즐거움 - 친구의 즐거움
    구글출처 이미지


보통의 독자들은 ‘친구가 멀리서 찾아오면 즐겁지 아니한가’ 에 나오는 친구는 우리가 일상에서 사귀는 친구 일반을 지칭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율곡 이이의 ‘친구관’을 다시 살펴보자.

[어려서 한 떼의 고기처럼 놀고, 커서도 두각(頭角)이 성글어짐이 없는 이런 사람을 벗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다. 한 동리에서 자라고 동문수학(東文受學)하여 단 하루도 못 봐도 마치 삼추(三秋)를 떨어져 있는 듯이 생각되는 이런 사람을 벗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아니다. 서로 부모가 뵙고 통가(通家)까지 하며 그야말로 정이 교칠(膠漆)과 같아 흉회를 털어 보일만한 사람이 어찌 벗이 아니겠나, 아니다. 벗이라고 하는 것은 지(志)를 벗하고, 도(道)를 벗하는 것이다.”

(율곡 이이의 [성학집요] 중에서)


이 대목을 보면 마치 [탈무드 원전을 놓고서 같은 교실에서 두 사람이 갑론을박하면서 뜻(志)을 해석하고, 그리고 도(道)를 논하는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가, 이들이 바로 서로가 서로에게 [하브루타]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도(道)에 대해서 잠시 말해보자.
탈무드나 논어에서 말하는 도(道)의 개념은 자칫하면 우리는 형이상학(形而上學)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도(道)는 마치 신비하고 이상세계나 어울리는 단어로 착각한다. 도(道)에 대해서 논어나 탈무드는 전혀 도를 신비하거나 내세적인 단어로 만들지 않았다. 도(道)는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의 행동이나 태도를 지칭하는 것이지 전혀 이상세계의 논리가 아니다.

율곡 이이 선생도 바로 지(志)와 도(道)를 이상의 세계에서 현상의 세계로 끌어 내려서 설명한 것이다.

20대 때에 어떤 교수가 나에게 질문을 했다.
“너는 왜 공부를 하는가?” “예, 공부하는 그 자체가 즐겁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 말은 공부하는 순간이나 그 자체가 좋지 직업이나 돈을 벌기 위해서 라고 대답한다면 공부 그 자체는 환멸이 되어 버린다. 신학이나 철학을 공부하는 것도 그 자체가 갖는 아름다움이 정말 크다. 물론 사람은 직업이나 노동을 해야 한다. 그것도 공부와 마찬가지로 그 직업과 노동 그 자체를 즐기려고 하는 자세와 태도가 필요하다. 단지 ‘돈벌이’에만 급급하면 일정 돈은 손에 넣을지 모르나, 정말 커다란 인생의 가치와 교훈은 얻을 수 없다.

프랑스의 작가 파스칼 키냐르(Pascal Quignard)는 [은밀한 생]이라는 책에서 말했다. “배우는 것은 강렬한 쾌락이다. 몇 살을 먹었든 간에 배우는 자의 육체는 그때 일종의 확장을 체험한다. 즉, 문이 없는 곳에서 갑자기 문이 열리고, 문 자체와 함께 육체가 열린다”

  • 구글출처 이미지


탈무드와 논어를 공부하면서 느낀 것은 결코 [좋은 직업이나 많은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니라, 공부 그 자체가 즐겁고 좋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벗과 함께 공유하고 나누는 것이야말로 즐거운 일이다.

논어(論語) 학이편에 나오는 마지막 경구가 있다. [인부지인불온, 불역군자호] 이는 남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아도 원망하지 않으면 군자가 아니겠는가? 이다. 결국 우리가 학습을 하고 친교를 맺는 이유가 바로 [군자됨]에 있다는 것이다.
배우고 익히는 사람은 ‘학생이며 선생’이며, 다른 벗들과 교류하면 ‘친구이며 동지’요.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스스로 향기를 발하는 난초 같은 사람이 군자가 되는 것이다. 나는 이 ‘군자됨을 바로 인간됨(Humanitas, 지행합일의 존재)’이라고 부른다.
배병삼 교수는 위의 율곡 이이의 [성학집요]에 나오는 논어해석에 근거하여 친구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붕은 어릴 적 이웃집 친구나 초등학교 동창생을 의미하지 않는다. 살아가는 방식이 비슷한 동행자요 같은 길을 걷는 도반(道伴) 또는 같은 뜻을 가진 사람(同志)가 붕(朋)이다. 그러니 붕(朋)이란 여태 한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이어도 좋다.

우리가 사회에서 만나는 사람이라도 얼마든지 붕(朋)이 될 수 있다. 동지(同志)요 도반(道伴)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를 히브리인들도 ‘하브루타’라는 단어를 만들어서 표현한 것이다. 이들도 원래 같은 지역에서 나온 사람이기도 하지만, 원근각지 사방에서 모여서 온 사람들이다. 그래서 같은 목적과 방향을 가지고 ‘탈무드와 토라’를 자신들만의 우수한 학습방법을 가지고 연구하고 참여하는 것이다. 이들은 동지요. 도반으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하브루타는 교육이나 학습과 관련되는 하나의 바퀴와 축이 있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우정과 친교와 관련되는 또 다른 바퀴와 축이 있는 것이다. 두 축이 만나서 ‘탈무드’라는 거대한 지혜의 바다를 만드는 것이다.

또한 이들이 가까이 있는 친구들을 뜨겁게 우정과 사랑을 나누면서 학문을 연마하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헤어지고 흩어지게 된다. 어떤 이는 선생으로, 어떤 이는 경제인으로, 어떤 이는 법률가로, 어떤 이는 사업가로, 어떤 이는 다양한 직업인으로 나타난다. 이런 사람들이 [탈무드나 토라]를 여전히 연구하고 고찰하며, 새로운 견문을 쌓아서 찾아온다. 새로운 견문이라는 것은 타학문이기도 하고 신학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견문을 서로 말하고 들으면서 하브루타가 또 이루어진다. 그것이 마치 탈무드를 만드는 작업과 비슷하다.

맹자의 [맹자]를 보면 섭공이라는 사람이 나온다.
이 섭공이 맹자에게 덕치주의에 대한 가르침을 얻고자 할 때,
“가까운 이들이 즐거워하면, 먼곳에 있는 이들도 찾아온다”
라고 말해주었다. [섭(葉)공(公)문(問)정(政), 자(子)왈(曰), 근(近)자(者)열(說), 원(遠)자(者)래(來)]

이 말은 친구들이 배움 또는 통치와 관련해서 먼 곳으로부터 오는 상황을 묘사한다. 그런데 멀리서 친구가 오려면 이 친구를 맞이하는 사람의 수준 또한 그에 걸맞는 수준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므로 동문수학을 한 사람은 서로 흩어져 있어도 각자의 자리에서 지(志)와 덕(德)과 도(道)를 위해 애쓰다가 만나는 것이다.

여기서 원근각지에서 오는 친구는 바로 나의 길(My Way)를 알아서 찾아와 공감을 표시하거나 핵심을 잘 찔러서 비평해주는 사람을 말하는 붕(朋)이다. (배병삼, [한글세대가 본 논어] 이러한 설명이 과장되었다고 보아도 좋다.

하지만 필자의 경우 초등친구나 어려서 죽무고우들을 생각해본다. 같은 곳에서 낳고 자랐지만 가는 방향이나 인생 목적이 서로 다르다. 그래서 이런 친구들은 동지나 도반이 되지는 않는다. 다만 그중에서 뜻을 같이하고, 같은 길을 가는 친구들이 있다. 이런 친구들은 나의 길(My Way)에 동행하는 친구들이요. 단순한 친교 이상의 목적의식을 공유하는 친구들이다.

지(志)라 함은 함께 학문을 연마하는 것이요.
도(道)라 함은 함께 진리의 길을 걷는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하베르는 [하브루타]랑 같은 의미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어느 책을 저술하면 ‘하브루타 셸리’라는 말을 쓴다. ‘그는 나의 하브루타’라고 하여 자신과 함께 지(志)와 도(道)를 같이 한 친구를 높여 부른다. 이 개념이 나는 [유붕]이라고 본다.

  • 세데르 - 기도문 - 서로 읽기 - 하브루타 - 질문하기
    구글출처 이미지 - 이스라엘 예시바의 탈미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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