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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브루타와 코칭 & 멘토링

바이블 하브루타 러닝1, 이스라엘인, 히브리인, 유대인에 대하여

by 코리안랍비 2022.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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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스라엘 성지 - 헤롯 시대의 이스라엘 - 지도
    구글출처 이미지 - 이스라엘은 동서 문명의 교차로


이스라엘인, 히브리인, 유대인에 대하여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창세기 32장 28절


얼마 전에 어떤 분이 질문을 던졌다. 이스라엘인, 히브리인, 유대인에 대한 성서적 구분을 해 달라는 것이다. 물론 나의 대답은 “인터넷을 검색하시면 충분히 답을 얻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여기 저기 사이트를 들어가 보았다. 그런데 의외로 유대민족을 구분하는 자료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있다손치더라도 그 내용이 너무나 종교적이거나, 아니면 역사적인 측면만을 다루어서 일반인들이 이해하기는 어려운 부분도 많았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정립하여 이 민족을 다루어보기로 하였다.


이스라엘인, 히브리인, 유대인은 모두 동일한 민족이요, 선택받은 민족이요, 율법을 준수하는 민족이다. 이 민족은 상당히 종교심이 강한 민족이라는 것이다.

전도서 3장 11절에 보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라고 말씀한다. 이들은 다른 민족들에 비해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강한 민족이다.

또한 잠언 1장 7절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라고 말씀한다. 이 민족은 다른 어떤 민족들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민족이다. 이들은 [경천애인]의 민족이다.

이들은 모두 신앙이 조상이 같고, 이스라엘의 지역이나 지경이 같다. 그리고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공동체로서의 의식도 동일한다. 유대민들이 전 세계로 흩어져 디아스포라로 살다가, 다시 1948년 2500년만에 이스라엘이 독립하여 새로운 국가를 선포하였을 때 이들이 쓴 언어가 히브리어이며, 이들이 하나님앞에 드린 제사의식이 서로 동일하였다는 것에서 정말 놀라운 기적이 아닐 수 없다. 2500년 동안 이들은 여전히 동질성은 같으면서 표현양식만 다르게 살아왔을 뿐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연구해보면, 다른 나라의 발생 기원과다르다는 것에 주목한다. 다른 나라의 역사 기원은 대부분 신화나 전설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인간 아브라함을 부르는 소명(召命)에서 비롯된다. 한 나라가 국가로서 존재하려면 영토, 국민, 주권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그러한 3대 요소가 없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이해할 때는 반드시 위의 3요소보다는 이들을 부르시고 이들을 통하여 역사를 이루어 나가시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이스라엘인]이라고 하면, 하나님과 함께 행동하는 동역의 민족을 말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나의 포도원이요 나의 밭’으로 묘사하였다. 그리하여 같이 일하고 동역하는 존재로서 나타냈다. 그리고 [히브리인]이라고 말할 때는 현세의 삶보다는 미래의 소망을 가슴에 품고 그리고 역사의 저편, 동심원상을 벗어난 신앙과 신념을 갖고 전진하는 민족을 말한다. 그리고 [유대인]이라고 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인 토라를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민족이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각각 동질성을 갖고 있지만 다른 이름으로 불리운 이 민족에 대해서 상세하게 기술해본다.


■ 이스라엘인
이스라엘인은 두 단어가 합쳐진 말이다. 동사 ‘사라’에서 ‘이스라’가 나왔다. 이 말은 ‘그가 싸웠다.’, ‘다투다’ 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엘 ל󰔞 ‘하나님’ 이라는 뜻이 합쳐진 말로서 ‘그가 하나님과 더불어 다투다’ 라는 의미이기도 하고, 어떤 사전에 보면 ‘이스라’라는 말은 ‘왕자’라는 의미도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왕자’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에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싸우는 민족’이라고 보고 싶다.

창세기 32장으로 달려가본다. 원래 야곱은 형 에서가 받을 장자의 축복을 가로채고 삼촌 라반이 있는 멀리 메소포타미아의 하란으로 도주한다. 잠시후 귀국할 것 같았지만 그는 20여년간 혹독한 나그네 생활을 경험한다. 그리고 인간적으로 거부가 되어 성공한 야곱은 그리운 고향에 돌아와서 뼈를 묻기 위해서 팔레스타인을 향하여 출발하였고, 얍복강 나루터에 도착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폭력적인 자신의 형 에서가 두려웠다. 그리하여 가족들과 가축들을 먼저 얍복강을 건너게 하였다. 그리고 홀로 남아 하나님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나타난 천사와 사생결단을 하게 된다.

여기서 야곱은 [씨름꾼]으로 등장한다. 그는 평생을 씨름꾼으로 살았다. 처음에는 형과의 씨름에서 이겼고, 나중에는 삼촌 라반과의 씨름에서 이겼다. 그런데 이제는 천사와 씨름을 겨루게 되었다. 그러면서 32장 26절을 보면 재미있는 구절이 나타난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가 이런 말을 하게 된 것은 그의 환도뼈가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부러지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야곱은 참으로 놀라운 근성의 사람이었다. 끝까지 잡은 샅빠를 놓지 않았다. 우리가 기도할 때 [기도의 씨름]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샅빠를 놓지 않고 내가 이기나 하나님이 이기나 서로 시합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도는 곧 투쟁이다.
그러자 하나님이 놀라운 질문을 던지신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리고 단순하게 “야곱이니이다” 라고 답변한다. 이 야곱이라는 이름 속에 많은 비밀과 코드를 갖는다. 그러자 28절에서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여기서 ‘하나님과 싸워 이겼다’라는 대목은 내 청소년시절이나 청년시절에 늘 의문중에 하나였다. “어떻게 하나님과 붙어서 이길 수 있는가?” 말도 안되는 일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져주시는 하나님’을 나중에 만나게 된다. 져주어야 축복할 수 있는 영적 원리를 발견하게 된다. 이 장면은 바로 야곱의 집념을 말한다. 야곱은 ‘집념의 사나이’였다. 대체적으로 크게 성공하는 사람들을 보면 집념이나 신념이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여실하게 발견한다.

그는 부를 위해서, 복을 위해서,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라면 하나님과 싸움도 불사한다는 각오를 갖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정신(스피릿)이다. 야곱은 자본주의시대에 잘 어울리는 당대의 현대인이었다.

오늘날에도 이스라엘인들을 보라. 이들에게는 ‘후츠파’ 정신이 있다. 있는 ‘뻔뻔한, 기죽지 않는’ 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즉 불가능하고 말도 안되는 것에 도전하는 정신이기도 하고, 강한 개성과 창조성을 갖고서 상상을 현실로 바꾸는 기질을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벤처의 요람’이 되었고, ‘노벨상의 요람’이 되기도 한다.


고대 중동사회를 보면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도 모르는 무수한 민족들이 있었다. 그런데 야곱은 여호와를 발견하고 대화하며 겨루어 이길 정도로 종교심이 강하고, 진돗개처럼 물면 놓지 않는 야성이 강한 민족이다. 그리하여 야곱이 하나님과 대면하였어도 생명을 보존하였다. 그곳의 이름이 바로 [브니엘]이다. 브니엘은 히브리음으로는 ‘파니엘’이다 이는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본 사람은 없는데, 아마도 야곱은 ‘하나님의 얼굴’을 본 최초의 사람이라고 생각이 든다.

어떤 친한 친구가 부산의 ‘브니엘’ 고등학교를 나왔다고하는데, 최근에야 비로소 그 뜻을 알았다고 한다. 그 학교 출신들이 이상하게도 ‘야곱같은 근성’이 강하다고 한다.

하나님은 나중에 그의 이름과 새 정체성을 확정하신다.
창세기 33장 10절과 11절을 본다.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여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하나님은 결국 야곱을 축복하신다.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축복하신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과 할아버지 아브라함보다 더 대단하고 큰 축복을 허락하신다. 물론 자신의 아들들을 통해서도 더 큰 축복의 역사와 물줄기를 이어 나가게 하셨다.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개명하게 하심으로 새로운 정체성을 갖고 하나님의 역사의 주인공이요, 영적인 영웅으로 우뚝 선 야곱을 보면서 현재의 이스라엘 민족의 열정과 불타는 신앙을 발견한다. 참으로 놀랍고 두려운 민족이다.


■ 히브리인
히브리인(이브리인 עברי)이라는 말은 아브라함을 호칭할 때 나온다. 창세기 14장 13절을 보면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고하니” 라고 말씀한다. 아마도 최초로 아브
라함을 히브리인으로 불렀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더 거슬러 올라가면 셈의 아들인 에벨이 나온다. 이는 ‘강을 건넌 자’라는 의미이다. 즉 유브라테스 강을 건나온 자라는 말에서 ‘Hebrew'라는 말이 나왔다고 본다. 바벨론에서 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온 사람들을 가르킨다. 물론 고대 근동에서는 ’하비루 Habiru' 라는 말도 나온다. 이 말은 국경도 없고, 일정한 민족적 소속도 없고, 마치 여기 저기 떠돌아 다니는 부랑자들의 모습을 나타내기도 한다. 물론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천막생활을 하여왔다. 자신들의 거처할 땅도 없이 여기 저기 유랑하면서 보낸 민족이다.

요나서 1장 9절에도 보면 ‘나는 히브리 사람’이라고 당당하게 자신을 밝힌다.

신약에서 보면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5절에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나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다” 이는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기도 하고, 다른 민족과 구분하는 용어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히브리 사람들의 유래는 여호수아에 의해서 명확하게 밝혀진다. 여호수아 24장 2-3절을 보자.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쪽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 온 땅에 두루 행하게 하고 그의 씨를 번성하게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으며”가 나온다.

여기서 보면 히브리인이라는 개념은 ‘강은 건너온 민족’이요 ‘강 건너의 사고를 가진 민족’이라고 보아야 한다. [강 건너편 사고]라는 것은 바로 다른 민족과 구별된 의식과 행동양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살아가는 의식을 말한다. 나는 이것을 [나그네와 외국인 의식]이라고 부른다. 나그네와 외국인은 자신의 땅과 거처도 제대로 없이 지내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순례자나 다름이 없다. 여기 저기,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 순례하면서 천국을 향해 가는 [건너온 사고]를 하는 존재를 말한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여호와는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는 명령을 내린다. 이 말에 순종하여 그는 빛의 도시 바벨론 우르를 떠나서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고, 마침내는 요단강을 건너서 이스라엘 지경으로 온 것이다.

아브라함은 먼길을 걸었다. 강을 건너고, 산을 넘고, 황량한한 사막을 지나서 가나안으로의 수천 킬로를 여행했다
아브라함의 여정은 혼자 나그네가 되어서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떠난 여행이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인생의 먼 여정을 떠날 때 하나님이 함께 가는 민족이라고 불리 운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보면 “우리는 이 땅에서 영적으로 방황하며 천국을 향해 순례하는 나그네”라는 표현이 나온다.
히브리인이라는 것은, [건너온 사고방식]을 갖고 살아가면서, 우리가 이 땅에 온 것이 바로 ‘영적 여행이며, 순례’라는 것을 명심하게 한다. [히브리식 사고]는 많은 크리스찬들에게 필요한 사고이다.

우리가 이 땅에 와서 언젠가는 이 땅을 떠나게 된다. 히브리식 사고는 곧 우리가 이 땅에서는 나그네요. 외국인이라는 의식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나그네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외국인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정체성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자각한다면 우리는 더욱 이 땅에 삶에 대하여 자유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 유대인
유대인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예후다 יהודה 혹은
예후딤 יהודים 이다. 이는 <찬송하다. 칭찬하다. 그를 찬양하다‘라는 뜻을 갖는다. 다른 말로 하면 ‘칭찬받는 민족’ ‘하나님을 찬송하는 민족’이다. 자세하게 말하면 ‘찬송받으실 여호와의 율법을 성실하게 준수하는 민족’이다.
처음 출발은 야곱의 아들 유다라는 인명에서 출발하였으나, 유다지파에서 그 이름이 크게 나타난 것이다.

기원전 926년 분열왕국시대에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남유다 왕국은 다윗의 혈통으로 이어졌으며, 종교와 사상의 중심이 예루살렘과 성전에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이나 유대는 한 가지로 통하였다. 이사야 3장 8절을 본다. “예루살렘이 멸망하였고 유다가 엎드러졌음은 그들이 언어와 행위가 여호와를 거역하여 그의 영광의 눈을 범하였ㄷ음이라” 라고 하였다.

그리고 남유다왕국이 이스라엘의 정통성을 계승하여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이스라엘하면 유대나라, 유대인으로 불리워진 것이다. 오늘의 유대교도 바로 남유다의 전통이며 산물이다.

북이스라엘이 강대국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할 때가 기원전 722년이다. 이때의 수도가 사마리아였고, 이 사마리아는 혼혈민족으로서 우상숭배를 오랫동안 하였고, 하나님의 말씀과 선지자의 예언을 경청하지 않았다. 율법을 버린지 오래된 북조였다. 이들은 말씀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경외하는 신앙이 없이 멸망한 나라였다.
그러나 남유다는 달랐다. 나중에 바벨론에게 멸망을 하였어도 말씀을 버리지 않았고, 제사의식과 안식일을 준수하고, 그리고 율법을 가지고서 망하였다. 즉 나라는 망하였으나 말씀과 토라를 가지고 망한 것이다. 나중 로마에게도 멸망을 당하였지만 벤 자카이나 아키바 등의 랍비는 토라학교를 세우고, 말씀을 지켰다. 그래서 이 민족은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나중에 1세기의 로마 황제는 말하기를 “유대 민족은 다시 일어날 것이다”
최근에 다니엘서를 보다가 나는 하나님의 말씀인 토라와 율법을 지키는 ‘하나님 경외 신앙’의 위대함을 발견하였다. 이들은 바벨론으로 끌려 갔지만 다시 돌아와 이스라엘을 재건하는데 기여하기도 하였고, 이방땅에서 기거하면서 굳건히 자신들의 신앙유산과 전통을 지킨 것이다. 그리고 학술에도 힘쓰고, 정치에도 힘써서 자신들의 민족의 생존을 위해 노력한 것이다. 이를 와신상담(臥薪嘗膽)에 비유할 수 있다.

나는 가끔 에스라서를 읽곤 한다. 가장 뛰어난 학자로는 에스라를 손꼽을 수 있다. 기원전 538년 조국으로 귀환하라는 고레스의 칙명을 받고 유다는 이것을 신명으로 받아들여졌고 그리운 고국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구약을 잘 보면 상당수가 남유다의 역사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신약을 보아도 남유다의 역사의 연장이라는 것도 볼 수 있다. 물론 그후 2000여 년간을 세계의 유랑자로 전전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손에서 율법책을 놓지 않았으며 바빌론에서는 탈무드(성경주석서, 성경해석서)를 완성해 나갔으며, 회당제도와 안식일 예배를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는 유대 민족의 저력이요 강력함이다. 결국 다른 민족들은 다 멸망의 길을 가고, 소멸의 길을 갔지만 유대인들은 멸망에서 부활의 길로, 소멸에서 소생의 길로 나아갔다. 그것이 바로 토라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 탈무드의 보급에 있었다. 유대인들의 가장 큰 공로는 바로 성경과 탈무드를 인류에게 보급한 것이다. 이들에게 감사하고 고마울 따름이다.


시편 114편 1,2절은 구약의 위대한 구속사건을 말씀한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며 야곱의 집안이 언어가 다른 민족에게서 나올 때에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

  • 야곱과 천사의 대결 - 서로 이기는 싸움을 했다. - 그림
    구글출처 이미지 - 야곱과 천사와의 씨름
  • 구글출처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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