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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서 문학평론가이며 전북대에서 국문학을 강의하시는 왕은철 교수님의 글을 잠시 보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쉘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었습니다. 이 책은 1964년도에 나온 책인데 필자는 1990년도에 처음 읽었습니다. 당시에 트리니다 포울루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을 같이 읽게 되었습니다. 그 두편을 읽으면서 한 편에서는 한 소년이 나오고, 다른 한 편에서는 애벌레가 나옵니다. 여기서 소년이나 애벌레는 비슷한 캐릭터를 가진 등장인물입니다.
두 책의 표지를 잠시 봅니다.
이 표지를 보면 사과나무는 아이에게 사과열매를 줍니다. 처음 표지는 그렇게 됩니다. 일단 제목과 어울리도록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표지는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여 많은 이들을 그 책 속으로 유인합니다. 책의 표지는 집의 문과 같습니다. 문이 아름다워서 일단 그 문안으로 들어가보면 그 제목과 어울리게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제목과 어울리게 구성되어져 있는 것도 있지만 반전이나 반대의 경우도 생겨나게 됩니다.
다음 그림을 볼까요?
처음에는 그토록 사랑하고 애정을 가졌던 나무인데 나중에는 그루터기만 남습니다. 처음 어리고 귀여워던 소년은 늙고 귀여운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초로의 늙은 남자로 변합니다. 그런데 그 사과나무를 다시 찾아갑니다. 그리고 사과나무는 그 남자를 자신의 그루터기에 앉도록 합니다. 중간에 그 나무를 베어서 나무배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나무의 소년에 대한 사랑은 무조건적입니다. 소위 에릭 프롬이 말한 [아가페적인 사랑]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우리들의 부모는 상징적으로 [아낌없이 주는 나무]입니다. 그 나무의 열매를 먹고 자녀들은 자랍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 나무의 가지를 자르고, 몸통까지 베는 경우가 생기기도 합니다. 젊어서는 모르다가 나이가 들어서는 부모의 나이가 되면 비로소 그루터기만 남은 부모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자녀를 낳아보면 자신도 부모의 심정을 알게 됩니다. 다 자란 어린이가 되었을 때는 비로소 허무함과 후회스러움을 갖습니다. 여기에 잘려져 나간 상처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작가 쉘 실버스타인은 그의 표지그림은 아주 다정하고 낭만적으로 그려 놓았습니다. 하지만 잘려 나간 가지와 나무몸통에 대해 그 나무가 받은 상처에 대해서는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저 주는 것만 묘사합니다. 소년에게서 받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소년에서부터 초로의 늙은 남자가 되었어도 여전히 나무는 자신이 몸의 남은 아래 부분을 내어줍니다. 마치 우리의 부모를 연상하게 합니다. 우리는 과연 부모의 상처를 알고 있나요? 부모가 자녀에게서 받은 상처를 알고 있나요? 그 상처는 어떻게 어디가서 보상을 받을 수 있나요? 그의 글의 표지는 일정 환영하지만, 일정 경계를 삼습니다.
나무도 아프다는 것을 묘사했으면 어땠을까요? 그런데 작가 쉘 실버스타인은 1999년 뉴 밀레니움을 앞두고 사망합니다.
다음으로 [꽃들에게 희망을] 을 살펴봅니다.
대학 1학년 시절에는 이 표지의 작품을 읽었습니다. 약 10번 이상 외우다시피 읽어보았습니다.
표지에는 "삶과 진정한 혁명에 대한, 그러나 무엇보다도 희망에 대한 이야기, 어른과 그 밖의 다른 이들을 위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합니다. 이 책은 아주 희망적으로 표지를 그렸습니다. 시작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매우 흡사합니다.
하지만 이 책의 표지를 넘어서 내용으로 들어가보면 제목과 내용이 무척 매칭이 잘 된 느낌을 받습니다.
중간에 줄무늬 애벌레는 많은 다른 애벌레들과 경쟁하며 애벌레들의 탑에 오릅니다.
정상에 올라보니 그것은 애벌레의 탑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내려와야 한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오르막길을 오르다보면 잘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내가 오르는 길이 남을 밟고 올라간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경쟁과 게임을 통해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전부인것 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서 정상에 올라보니 더 이상 오를 때가 없다는 한계를 발견합니다. 그 한계를 알면서 차츰 어른의 길에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상에서 내려와서 이제는 자신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인생의 길에는 발견과 더불어서 의미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살면서 많은 고통과 슬픔, 아픔과 상처도 같이 받게 됩니다. 그러면서 더욱 더 나아진 자신의 변화를 꿈꾸게 됩니다.
시간이 흘러 애벌레는 고치를 틀게 됩니다. 애벌레에서 나비가 되어가는 과정은 반드시 고치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고치의 과정은 외롭고 힘든 시간입니다. 기다림의 시간입니다. 기다림이 있어야 반드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누군가 변화하려고 할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은 기다림과 인내의 시간입니다. 이 시간을 누구나 거쳐야 어른이 됩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천번은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는 말은 맞습니다.
그리고 애벌레는 마침내 나비가 됩니다.
두 이야기는 시작은 우아하고 매력적으로 사람을 이끕니다. 하지만 두 이야기는 결국 다른 결말을 맞이합니다. 아낌없이 주는 삶은 멋지게 미화가 됩니다. 꽃들에게 희망을 주는 나비의 삶은 미화가 아닌 미학을 줍니다. 두 이야기는 그저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깊이 다루고 토론하고 대화한 적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들의 우리들의 삶의 이야기를 그대로 드러내 주어서 어찌보면 필자는 '섬찟한 감정'을 느낍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들을 가지고 강의를 해야 겠다는 다짐도 해봅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상처와 생채기를 당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는 것은 우리 인생에서 차지하는 것이 큽니다. 사람들의 대화를 보면 누군가에 대한 탓과 원망이 많습니다. 그 대화속에서 느껴지는 것은 '나를 도와 주십시오. 헬프 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를 돕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상처받은 사람은 상처를 받은 사람이 치유합니다. 그래서 헨리 나우웬이라는 신부겸 하버드대 심리학자는 '상처입은 치유자' 라는 책을 썼습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꽃들에게 희망을 주는 나비에서 우리는 그 나무 아래 있는 소년과 너무나 닯아 있고, 그리고 날기전에 기어다니는 애벌레와 너무나 닮아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젊어서는 몰랐는데 나이가 들어서는 이제야 비로소 깨우치고 반성합니다. 신이시여, 이 어리석음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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