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3개의 사자성어를 가지고 왔습니다.
고전문학의 대가이며 한양대학교의 교수로 재직중인
정민 교수의 어느 칼럼에서 이를 보면서 잠시 사자성어라도 마음에 새기고자 하는
바램에서 이 포스팅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아침에 곰돌이 푸의 말을 자세히 보니 공자의 논어와 흡사하였습니다.
그래서 곰돌이 푸의 말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모티브가 논어였습니다.
그냥 귀엽기만 한 캐릭터속에 엄청난 '노력과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준비한 노력에 대한 3개의 고사성어는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입니다.
노력도 재능입니다. !!
형설지공
형설지공이라는 사자성어는 자주 접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중국의 동진이라는 나라에 [차윤과 손강] 이라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어린 시절 너무나 가난하여 여름 밤이면 반딧불이 수십 마리를 잡아서 어두운 저녁에 글공부를 하였습니다. 반딧불이 수십 마리를 하얀 망에 넣고서 한문서적을 읽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운치도 있고 낭만도 있어 보이지만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이었을까요? 나중 차윤 선생은 과거에 급제를 하고 나중에는 이부상서, 지금의 행정부장관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손강이라는 선생도 어린 시절 차윤 선생처럼 가난하고 불을 밝히지 못하여 추운 겨울 눈 빛에 의지하여 책을 보았다고 합니다. 지독한 독서가이며 공부벌레로서 살아온 손강은 나중에 어사대부 라는 높은 관직에 올랐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이 과학적으로 가능한지의 논란은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일념은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반딧불이가 반짝인다고 해서 글씨가 제대로 보일리 만무합니다. 아마 낮에 보았던 글을 다시 복습차원에서 본 것입니다. 그만큼 독서의 열정이 식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눈 빛은 아무 더할 것입니다. 추운 겨울에 문을 열고서 하얀 눈 빛과 달 빛에 의지해서 책을 본다는 것은 거의 얼어 죽을 일일지도 모릅니다.
형설지공의 교훈은 우리가 책을 가까이하는 것에 대한 열심과 열정을 가지라는 고사입니다.
한국에는 형설이라는 이름의 호를 가진 분들이나 학교, 그리고 출판사 등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쓰지 않는 고사이지만 아직도 내 마음속에는 형설지공의 자세만큼은 가지고 있습니다. 책을 가까이하는 것은 술과 벗을 가까이 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재능은 노력을 이기지 못합니다. 세상에는 재능으로 성공한 사람보다 노력으로 성공한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천재라고 하여도 노력하는 사람을 이기지 못합니다. 거기에 즐기는 사람은 더욱 이기지 못합니다. 차윤과 손강 선생은 둘다 노력이상으로 공부를 즐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공부도 공부 그 자체를 즐기는데서 즐거움이 있습니다.
일슬지공
일슬지공 (一膝之工)
일슬지공은 거의 접해 본 적이 없는 사자성어일 것입니다.
정민 교수의 글에 보면, 조선조에 김간(金榦·1646~1732)의 독실한 학행은 달리 견줄 만한 이가 없었습니다.
하루는 한 제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독서에도 일슬지공(一膝之工)이 있을런지요?” 일슬지공이란 두 무릎을 한결같이 바닥에 딱 붙이고 하는 공부를 말합니다.
스승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내가 예전 절에서 책을 읽을 때였지. 3월부터 9월까지 일곱 달 동안 허리띠를 풀지 않고, 갓도 벗지 않았네. 이부자리를 펴고 누워 잔 적도 없었지. 책을 읽다가 밤이 깊어 졸음이 오면, 두 주먹을 포개 이마를 그 위에 받쳤다네. 잠이 깊이 들려 하면 이마가 기울어져 떨어졌겠지. 그러면 잠을 깨어 일어나 다시 책을 읽었네. 날마다 늘 이렇게 했었지. 처음 산에 들어갈 때 막 파종하는 것을 보았는데, 산에서 나올 때 보니 이미 추수가 끝났더군."
김간 선생의 말은 7개월동안 허리띠도 풀지 않고, 누워서 잠도 안자고, 스스로를 통제하고 감금해서 서책을 가까이 보았다는 것인데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장좌불와의 고사를 빗대일 정도로 공부를 했다는 것입니다. 신돈복(辛敦復·1692~1779)의 '학산한언(鶴山閑言)'에 실려 있습니다.
여기서 한자 '슬'은 무릎을 말합니다. 무릎을 꿇은 채로 책을 읽는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식물중에 '우슬초'가 있습니다. 이는 소의 무릎이라는 의미입니다. 소의 무릎처럼 마디가 생겨서 이름이 그렇게 붙여졌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에도 우슬초가 등장합니다. 정결하고 고상한 이미지를 가진 식물로서 이스라엘에서 제사의식에 사용되는 식물이기도 합니다. 무릎을 꿇는 일은 기도의 자세를 말하기도 합니다. 또한 순복하는 자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주인과 주님의 종들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김간 선생은 아마도 무릎으로 공부를 한 사람입니다. 물론 공부를 할 때는 엉덩이를 깔고 무릎으로 해야 합니다. 머리로 하려고 하면 교만한 사람으로 전락합니다. 공부도 겸손의 자세로 해야 합니다.
조갑천장
조갑천장(爪甲穿掌)
조갑천장이라는 말도 거의 들어 본 적이 없는 사자성어일 것입니다. 이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는 교훈에서 연유합니다. 조선중기(朝鮮中期)의 양연(梁淵)은 호(號)는 설옹(雪翁)으로 15세기 초에 ‘팔도도(八道圖)’라는 조선 팔도의 지도를 만들었던 양성지(梁誠之)의 손자입니다. 양연은 1524년에 문과에 급제했고 1537년에 대사헌이 되었는데, 이 때 참판 윤안인(尹安仁)의 말을 듣고서 하루에 세 번이나 장계를 올려서 김안로(金安老), 채무택(蔡無擇), 허황(許沆) 등 당시의 간악한 무리들의 죄상을 숨김없이 탄핵하여 마침내 그들을 사사(賜死)케 했습니다.
이에 영의정 윤은보(尹殷輔)가 “종묘사직이 거의 기울어질 뻔 했다가 다시 안정을 되찾았으니 축하를 받아야 마땅하다.” 라고 주청하여 품계가 올라가고 관직이 좌찬성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양연이 젊은 시절에 뛰어난 재주로 (자질구레한 일에) 얽매이지 않다가 불혹의 나이가 되어서야 분발하여 마음을 다잡고 왼 손을 꽉 진 채 문장(의 대가)을 이루지 못하면 손을 펴지 않으리라고 맹서했습니다. 그리고 북한산 중흥사에 들어가 글을 읽게 되었는데 일 년 남짓 만에 문장의 이치가 툭 튀었고 시의 격조도 맑고 고아한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하루는 장인어른에게 시를 띄웠는데 말하기를,
책상의 불빛은 어둡고
벼루 씻은 연못엔 물빛이 깨끗하네.
관성(붓)은 내가 바라는 바요.
더불어 저선생(종이)을 기다린다.
대개 문방사우를 찾는 뜻입니다. 장인은 사위가 만학에 빨리 글공부가 이루어진 것을 기특하게 여겨 장난스럽게 답장을 보냈습니다 “양충의는 나이 마흔에 산사에서 글을 읽으니 오호라 늦었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훗날 과거에 급제한 날 그제야 (꽉 쥐고 있던 왼손)손을 펴니까 손톱이 손바닥을 뚫어 버렸다고 전해집니다. 물론 이 말은 손톱이 손바닥을 찌를 정도로 했다는 것이니 그 노력이 정말 가상합니다. 훗날에 영조 임금이 이 일을 듣고 양연의 장인이 보낸 답장의 글귀를 독서당의 글제로 내걸기도 했다고 합니다. (위키.네이버 출처)
이 말은 취업과 임용시험, 고시와 공무원시험에 임하는 사람들에게 자주 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발분망식의 자세로 공부하라는 것인데, 지금으로 말하면 칙센트미하이 말대로 [몰입 FLOW, COMMITMENT] 하라는의미일 것입니다. 사람이 학문에 뜻을 두는 나이는 지우학 15세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중학교 2-3학년 나이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자녀중에 중 2-3학년이 되면 반드시 이 3개의 고사를 말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 시대는 형설지공은 없습니다. 너무나 좋은 조건과 환경에서 우리는 공부하고 있습니다.
또한 일슬지공할 일도, 조갑천장할 일도 없습니다. 불우한 시절에 불후의 인생을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되새길 것은 본질은 갖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부의 본질, 곧 배움입니다. 배우지 않으면 사람은 쓸모없는 사람으로 전락합니다. 배우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고 다른 이들의 모범이 되지 못합니다. 어떤 일을 준비하는 사람, 목표가 강한 사람은 반드시 배움의 열기가 식지 않게 해야 하고,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 그리고 의지력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사람의 다른 이름은 '의지 WILL'입니다. 탈무드의 말입니다. Where there is a will, there is a way.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습니다. 노력에는 그것을 밀고 가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지.정.의가 있는데, 그 마지막에 의지가 있습니다. 의는 뜻을 말하고, 지는 지속과 배움을 말합니다. 배움에 대한 뜻을 지속적으로 갖고 가야 합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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