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무드와 논어를 함께 논하다. 1강 <무단전재 절대금지>
1강
새는 알을 까고 나와야 비로소 새가 된다.
나는 배운다. 고로 존재한다.
탈무드와 논어를 가지고 공부를 한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히브리대학 유학시절에 어느 누구도 탈무드를 배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탈무드는 철저히 문외한(門外漢)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겸손한 마음으로 ‘랍비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받기로 하였습니다.
한국에서는 그저 한국과 일본에서 군목 겸 랍비로 활동한 ‘마빈 토케이어’의 저작에만 의존하였습니다. 물론 도서를 수집하는 적독파(책수집가)로서 ‘탈무드에 관한 자료’를 찾으려고 애를 많이 썼습니다. 도서관과 서점을 들락거리면서 많은 자료들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탐독의 순간을 자주 가졌습니다. 배움은 마치 배고픈 사람이 허겁지겁 무엇을 먹으려고 애쓰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배고픈 사람은 맛있게 먹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학문에 대한 갈급함이 강한 사람이 학문의 진정한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고 하지만, 먼저 일견보다 백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글을 알면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공부가 곧 지식을 만들고 지혜를 만듭니다. 탈무드는 “지식은 지식을 만든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식과 지혜가 몸으로 알고 터득하는 경험과 적용으로 이어져야 한다.
히브리대 국제대학원에서 ‘탈무드 강좌’가 있기에 자신의 전공과는 상관없이 무작정 수강을 신청하였습니다. 약 2년간 탈무드를 배울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머리에 둥근 키파(kippa)라고 하는 캡을 쓰고, 검은색 정작을 잘 차려 입은 랍비 선생님은 마치 ‘신선(神仙)’을 대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머릿속에 지혜의 주머니가 너무나 많을 것이 자명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밭에 감추인 진주 같은 지혜를 얻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랍비의 질문에 현명하게 답변하는 것과 탁월하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탈무드 공부는 시작이 되었습니다. 탈무드는 그 이름 자체가 ‘배움 또는 공부’입니다. 그리고 탈무드를 공부하는 사람은 ‘탈미드Talmid'라고 부릅니다. 나는 ‘햇병아리로서 탈무드를 배우는 탈미드 학생’이 되었고, 열심히 경청하고 경청하였습니다. 세 명의 랍비 밑에서 배우면서, 유일한 ‘한국학생’으로서 듣고 있는 나에게 그 분들은 친절과 정성으로 강의를 해 주었습니다. 언어와 지식체계가 심히도 부족했지만 어느새 내 속에서 지혜가 자라나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히브리어로 지혜는 ‘호크마' 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철저히 반복교육을 통해서 호크마가 형성된다고 보는 사람들입니다. 탈무드는 크게 2부분으로 나눕니다. 하나는 ‘구전율법 토라 쉐 알페’, ‘반복’이라는 이름의 ‘미쉬나’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완성’이라는 이름의 ‘게마라’가 있습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탈무드 학자인 ‘스타인살츠’는 ‘성서는 신이 인간에게 물어본 것이라면, 탈무드는 인간이 신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라고 할 정도로 탈무드를 강조하였고, 그리고 미쉬나보다도 게마라에 정통해져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왜 그는 게마리에 정통해야 할까 궁금하였지만, 랍비 선생님들 통해서 배운 것은 ‘사람이 생각하며 말하고 표현하는 언어라는 매개체가 없다면 학문적으로 성장할 수 없고, 그리고 무엇보다 텍스트나 어려운 고전을 읽을 때 읽어내는 능력 곧 해석능력이 출중해야 한다’는 것도 강조하였습니다. 결국 “사실은 10% 밖에 되지 않고 나머지 90%는 해석이다.” 라고 말한 니체의 철학적 언명은 맞는 것입니다. 결국 해석을 어떻게 잘 하느냐에 따라서 학문의 능력을 판가름한다는 것이고, 대답보다는 질문으로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한국에 와서는 성균관에서 유학을 전공한 교수님께 약 2년간 논어를 수강하였습니다. 나보다도 1-2살 젊은 분이었지만 그래도 나의 스승이 되시기에 늘 ‘교수님’이라는 소리를 놓지 않았습니다. 나보다 뛰어난 분에게 배운다는 것은 나이와 상관없이 ‘스승’으로서 존대를 받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사람마다 자신의 스승을 두고 삽니다. 시편 119편 99,100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내가 주의 증거를 묵상하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며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 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는 바로 탈무드에 나오는 유명한 경구인 “모든 사람에게 배우는 사람이 가장 현명하다”라는 말로 대비될 수 있습니다. 나보다 배움이 적은 사람도 스승이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악한 사람에게서도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배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은 배움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고 언제나 배우는 자로 남기로 결단하였습니다. 평생 학생이면서 평생 선생으로서의 2중의 정체성과 두겹줄을 가지고 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삼겹줄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여기서 삼겹줄은 대신, 대인, 대물 관계를 말합니다.
삶에는 여러 가지 방식과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탈무드와 논어는 언제나 막 인쇄되어 나오는 신문과 같은 새로움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주 제 1의 책으로서 탈무드와 논어를 뽑은 것입니다. 성서시대에, 공자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이나 21세기에 살고 있는 사람이나 인간으로서는 기본적으로 변함이 없습니다. 인간의 구조는 같습니다. 그런데 방향이 다른 것입니다. 세계관과 가치관이 다릅니다.
수 천년에 걸쳐서 기록된 인간의 행동양식, 사고방식, 반응, 기쁨과 슬픔의 감정, 고난과 고통, 그리고 성공과 승리라는 것을 우리는 배움으로써 인간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살고 죽어야 하는지에 대한 전체상을 전인적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인간의 인간됨과 한계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탈무드와 논어 만큼 인간을 가장 지혜롭고 현명하게 만들어주는 책은 없습니다.
나는 ‘1만권 독서가’라는 칭호를 갖고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읽고 읽은 독서의 노력은 지금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도 나에게는 ‘좌우서’가 있습니다. 바로 탈무드와 논어입니다.
탈무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의 머리로 전통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는 자는,
남의 손에 의존해야만 하는 장님과 같다.“
물론 탈무드와 논어는 아주 오래된 지적 문화와 명석함의 지혜유산입니다. 20대 후반에 만난 탈무드, 10대 후반에 만난 논어의 공부는 지금도 멈추지 않고 해야 할 소중한 좌우서들입니다. 이 좌우서들이 있는 한 나 자신은 지속적인 고전에 대한 접근과 그리고 수려한 언어의 발전, 고상한 인간관계의 꽃을 피워낼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상 가장 큰 저울로 무게를 달자면 ‘성서’ 한 권으로 나머지 다른 수 많은 명작들을 능히 들어 올 릴 수도 있습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담은 책입니다. 탈무드와 논어는 인간의 생각과 지혜를 집중력을 가지고 담아 놓은 책입니다.
인간은 배워야만 삽니다. 배우는 사람이 있으면 가르치는 사람도 있기 마련입니다. 배운 제자는 가르치는 선생이 됩니다. 배우기만 하고 가르치지 않으면 가르친 스승에 대한 모독입니다.
이스라엘은 과거 ‘산헤드린’이 있었습니다.
탈무드의 [선조들의 어록]에 보면, “모세는 시나이산에서 율법을 받아 후계자 여호수아에게 전해 주고, 여호수아는 장로들에게, 장로들은 예언자들에게, 예언자들은 최고회의 의원들에게 전달해 주었다.” 이를 ‘아담 카드몬이나 토라 포션’이라고 부릅니다. 아니면 ‘카발라’라고도 부릅니다.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지만 ‘전승’이라고 통일되어 부릅니다. 탈무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논어도 그렇습니다. 논어는 공자의 어록을 담은 대화문입니다. 스승과 제자가 서로 묻고 답하는 형식을 담았습니다. 공자 자신은 쓰지 않았지만 반드시 ‘기록관’ ‘서기’가 있었습니다.
탈무드와 논어는 ‘세속에 살면서 하늘을 우러러 본다’라는 의식을 갖추게 한 좌우서들입니다. 세상에는 수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 문제들은 대부분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과 현실에서 발생합니다. 유대인들은 탈무드를 통해서 문제 해결을 처리하는 사람으로서 세속적 일에 대처하였습니다. 중국인들은 논어나 다른 문헌들을 통해서 삶의 중차대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혜안을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머리 위에 우러러보는 하늘과 더불어 발 밑에 땅, 대지’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탈무드에는 ‘물고기를 잡아주기 보다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라’ 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물고기를 잡는 법이 바로 학습이며 배움의 기술입니다. 유대인들은 ‘교육은 칼보다 강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칼보다 강한 펜의 힘, 군대보다 강한 교육의 힘을 더 길러야 하겠습니다. 마찬가지로 공자도 ‘교육은 인간이 제 일 가는 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과 한국의 앞으로의 살길은 ‘교사를 구하고, 교육의 가치’를 높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논어의 1편은 ‘학이편’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첫 시간으로서 논어 학이편을 봅니다.
동서고금의 수많은 책들이 있지만, 배울 학(學)자로 시작하는 책은 오직 논어(論語)밖에 없습니다. 배울 학(學)자는 상형문자입니다. 어린애 + 책상 + 두 손 으로 무엇을 학습하는 모양을 본 뜬 글자입니다. 한문자 5만여 자 중에 가장 중요한 글자는 배울 학자요, 인간의 행동 중에서 가장 바람직한 행동은 배우는 행동입니다. 산다는 것은 어찌보면 배우는 것입니다. 한문에 보보(步步)하면 등고(登高)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한 발짝 한 발짝 걷다보면 높은 곳에 다다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정상에서 만납시다 See you at the top’ 라는 말과 같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부단히 배우려고 합니다. 지식은 인생의 무기요, 학문은 인간의 보배입니다. 왕성한 활동력으로 부지런히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 때때로 익히다’ 라는 말은 가끔씩이나 자주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timely 제 때에, 적시에(just in time)이라는 뜻입니다. 영어에 스마트 라는 단어가 있는데 여기의 끝에 나오는 T가 바로 Timely입니다. 조선조의 위대한 학자 매월당 김시습의 시습이 바로 <논어>에서 따온 것입니다.
탈무드에는 “해야 할 때 하지 않으면 하고 싶을 때 못한다” 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 말은 모든 일에 때가 있다는 이들의 ‘때 사상’을 반영한 것입니다.
한자에 예습과 복습이 있습니다. 이는 원래 중국 사람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일본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원래 복습은 온습(溫習)이라고 합니다. 온은 따뜻할 온자인데, 이는 따뜻할 때 질문한다는 것입니다. 복습한다는 것은 바로 따뜻할 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식어버리면 복습하기 힘듭니다. 배움의 ‘열기’는 있어도 배움의 ‘냉기’는 없습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은 바로 ‘옛것을 배우고 복습하여 새로운 도리(道理)를 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열(悅)자가 있습니다. 말할 때는 ‘설’로 읽고, 기쁠 때는 ‘열’로 읽고, 달랜다고 할 때는 ‘다’로 읽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기쁜 일이 배우는 것인데, 그리고 익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습(學習)’이 된 것입니다.
미국의 MIT의 피터 센게 교수가 ‘학습조직이론’을 만들었습니다.
학습 조직을 구축하기 위해서 5가지 요소를 밝혔습니다.
1. 시스템적 사고
2. 개인적 숙련성
3. 정신 모델
4. 공유 비전
5. 팀 학습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 배울 것인가?’입니다. 또한 ‘자신이 하는 일이 기쁘고 즐거운 가?’ 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필요한 태도는 ‘인문학’입니다. 여기서는 지식의 인문학이 아니라 지혜의 인문학을 말합니다. 지식은 아는 것이지만 지혜는 행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지식은 ‘비나’ 라고 합니다. 지혜는 ‘호크마’라고 합니다. 지식은 그저 단순히 아는 것을 말하지만 그 지식의 행함과 실천은 지혜를 따릅니다. 책을 읽거나, 보거나, 듣거나 하는 행위를 통해서 우리는 지식을 얻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행함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행함이 중요한 것은 알지만 먼저 바른 지식이 없다면 행함도 바르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지식이 바로 훈련된 지식, 숙련된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이를 동양에서는 견식(見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은 바로 판단력과 더불어서 사람의 인격이 배어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결단력이 생깁니다. 인생은 결단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지식이 바로 담대(膽識)입니다. 담식은 담력을 말하고, 여러 가지 상황에 동요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정직하고 솔직한 인성을 바탕으로 하여 용기있고 단호하게 문제와 싸워 나가는 자세입니다. 지식이 견식으로, 그리고 담식으로 가면 상상을 현실로 바꿀 수 있는 실행력과 창조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배움에도 2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인간학 다른 하나는 직업학입니다. 두 학문이 서로 차량의 양 바퀴로써 제 구실을 해야 비로소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배워야 할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래도 배울 수 있다는 것이 기쁨이고 감사입니다. 우리는 배움이라는 방법이 아니고서는 인간으로서 성장하고 성숙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벼가 익으면 고개를 저절로 숙이듯이 배움에 대한 자세와 열의에는 공부의 고수가 되어지면 그저 머리가 숙여집니다. 배우는 사람은 그 가슴에 저 하늘의 별을 품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눈에서 빛이 반짝입니다. 그 빛으로 세상 사람들을 감화시키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갑니다. 배움의 축복은 곧 티쿤 올람(더 나은 세상)의 현실화입니다.
*동국대 전명예철학교수 고 안병욱 선생님의 글에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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