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와 강연 이야기

탈레스, 윤동주, 천상병,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by 코리안랍비 2022. 9. 12.
728x90
반응형
SMALL
  • 탈레스 - 그리스 최초 철학자이며 과학자 - 철학의 아버지
    네이버 출처 이미지

 

 



“그래도 별빛은 아름다웠네”
-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 이야기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의 서시를 다시 읽다가 불현듯 탈레스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리하여 예전에 읽었던 탈레스 스토리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핫한 부분을 발췌하여 이렇게 다른 이들에게 내 놓습니다.

서시는 불멸의 시입니다.
한국 사람들보다 일본인들이 더 사랑하는 시가 되었습니다.
그 시가 불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별’ 덕분입니다.
별은 계속해서 비추이고 비추입니다.
칸트가 말한대로, 무엇보다 저 하늘에 별이 있다면
우리 가슴속에 양심이라는 도덕법칙이 있습니다.
별은 바라보는 사람에게 희망을 줍니다.
별을 영어로는 스타라고 하는데, 스타가 된다는 것은 사람들의 별이 된다는 것이니 얼마나 영예롭고 빛나는 삶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별을 사랑한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 라고 주창한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입니다.
이 밀레토스의 현인의 말은 나중에 철학의 아들이라고 불리우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큰 영향을 줍니다.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탈레스를 ‘철학의 아버지’로 불렀으니, 그가 곧 ‘철학의 아들’이 된 것이지요.

그의 위대성은 질문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만물의 근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는 ‘근원 origin에 대한 물음을 던짐으로서 [철학의 문]을 열었습니다.

근원에 대한 물음이 곧 철학입니다.

탈레스는 비가 오지 않는 날이면 하루도 빼놓지 않고 밤에 산책을 나가곤 하였습니다. 현대의 철학자들이나 인문학자들 그리고 자연과학자들도 자주 산책을 나갑니다. 그것은 바로 고대의 철학자들이 만든 ‘걷기전통’입니다. 생각하는 힘은 바로 산책에서 나옵니다. 니체가 그리하였고, 칸트가 그리하였으며, 루소가 그리하였고, 괴테가 그리하였습니다.

탈레스는 산책을 하는 동안 줄곧 별을 관측하였습니다.

천체망원경도 없던 시절에 그는 별자리의 변동 상황을 알아내려고 하였습니다.

당대에 천체에 대한 연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이 연구에 발달된 사람들이 중근동 사람들이었습니다. 성서 마태복음에 보면 이미 동방의 박사들이 베들레헴의 별을 보고 먼 여행을 떠났던 것을 보면 ‘별은 늘 동경의 대상’이었습니다. 탈레스는 저 동방박사들보다 더 선배였습니다. 그에게 별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었습니다. 우선 별자리의 위치변화에 따라서 계절의 변화나 기후의 변화도 알 수 있고, 앞날도 예측할 수 있는 유일한 징조였습니다.

삼국지의 제갈공명이나 사마의도 별자리를 보면서 운세를 판가름하고, 예측을 하였습니다.

그에게 별은 새까만 보석처럼 총총히 박혀 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흥분과 감동을 안겨다 주는 천연의 예술작품이었습니다. 그리스에는 ‘신화적 인물들은 별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사람은 어느 별에서 와서 다시 하늘의 별로 뜬다고 믿었습니다. 탈레스는 매일 같이 그러한 밤의 아름다움을 만끽 하였습니다. 그는 별의 아름다움에 취해 하늘만 바라보고 걷다가 그만 웅덩이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헉’ 그의 짤막한 비명이 밤의 고요를 깹니다.
그리고 적막한 시간이 흘러가면서 자신이 위에서 굴렀다는 것을 직감합니다. 잠시 기절하였던 그는 일어나보니 물웅덩이가 아니라 진흙 웅덩이였습니다.
정신이 들자 탈레스는 우선 그 뻘밭에서 다리를 빼려고 했으나 그 웅덩이는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는 수렁이었습니다.

그러자 본능적으로 외칩니다.
“사람 살려, 탈레스 살려”

그는 살려달라고 외쳤지만 너무 외진 곳이어서 아무도 오는 이들이 없었습니다. 시간이 한참 지나 목이 쉬어 버리고, 아침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조금씩 그 수렁에서 자신이 빠져들고 있음을 알아차립니다. 마치 아마존 영화를 보면 그런 수렁이 있는데, 서서히 빠져드는 그는 이러다 죽을 것이라는 직감을 합니다. 뻘이 그의 옆구리까지 차오르고 꼼짝없이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 순간 “천하의 탈레스가 이렇게 허무하게 가다니” 하면서
그는 다시 하늘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별은 여전히 아름다웠습니다.
그날따라 별이 더 아름답게 다가왔습니다.

  • 구글출처 이미지 - 아테네 학당 철학은 아무나 못한다.



일본에서 쓰여진 서시는 아마도 윤동주가 수도 없이
바라본 별을 노래한 것입니다.
그도 이곳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려고 했는지 몰라도
아름다운 별에 단단히 취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그는 일본 유학중에 목숨을 달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한국인들의 별이 되었습니다.

탈레스는 한순간에 과거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러자 가슴속에 절망감이 차오르고, 그 절망감은 체념으로, 그 체념은 다시 자연에 대한 경탄으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한순간에 가는 인생인 것을,
왜 그동안 무엇 때문에 그렇게 허세를 부리며 살았는가?”

그는 그렇게 별들을 보면서 허망한 마음을 유언처럼 쏟아냅니다. 그런데 멀리서 자신의 집의 집사가 횃불을 들고 나타납니다. “탈레스 선생님, 탈레스 선생님”
탈레스는 있는 힘을 다해 고함을 지르고, 마침내 구조가 됩니다.

“선생님, 도대체 거기까지 뭐하러 가셨습니까?”

“별을 관측하던 중이었네”

그러자 하인이 비웃습니다.

“천하의 가장 현명하신 선생님의 어떻게 머리 위의 하늘만 보시고 발 밑의 웅덩이는 못보십니까? 그래 그 죽음의 웅덩이에 빠진 소감이 어떠십니까?”

집사의 그 말에 탈레스는,

“그래도 별빛은 아름다웠다네. 내 평생 그렇게 아름다운 밤하늘은 처음 보았으니까 말이야”

이 일화를 아는 이들은 거의 없습니다.
누가 탈레스에게 관심을 갖겠습니까? 소.플.아만 보는 사람이 많으니...
여기서 소는 소크라테스, 풀은 플라톤, 아는 아리스토텔레스 3대 그리스 철학자만 운운하니... 철학이 안되지요. 철학은 아무나하나... 아무나 못합니다.

탈레스의 일화는 [이는 현실은 보지 않고 이상만을 추구하다가 결국 넘어지고 만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현실에만 눈이 어두워 이상을 꿈꾸지 않으면 그것 또한 넘어지기는 매한가지입니다. ‘남을 것 같은 현실은 안남아도 안 남을 것 같은 이상은 남는다.’ 제 지론입니다.

“그래도 별빛이 아름다웠다”



천상병 시인은 자신의 명시 ‘귀천(歸天)’에서
다음과 같은 불멸의 싯구를 남깁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룬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몸이 불편하고 막걸리를 사랑했던
천상병 시인도 이 세상을 아름답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탈레스도 별이 아름다웠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자세히보니 시인이나 철학자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를 나는 ‘인생예술’이라고 부릅니다.
비록 수렁에 빠졌어도 별은 여전히 아름다웠다고 외친
탈레스의 그 [여유]를 나는 갖고 싶습니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이어지니
아쉬운 분들을 위해서 다른 유사한 글도 남겨둡니다.

독서를 하면 많은 이야기들이 서로 나의 그물속으로 물고기처럼 들어옵니다.
독서는 바다에 거대한 그물을 치는 것과 같습니다.


도를 깨우쳤다는 한 불가의 스님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에게 유가의 한 선비가 찾아옵니다.

“스님, 도(道)를 깨우친 사람도 밥을 먹어야 삽니까?”

즉 도를 깨우쳤다면 만물의 이치를 알게 된 것인데, 그까짓 목구멍도 하나 해결하지 못하는 도가 무엇이 대단한 것이라는 비아냥이었습니다. <이런 형편없는 질문을 나도 몇 번 받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입 안에 들어갈 밥도 하나 해결하지 못하는 중놈인 주제에 도를 깨우쳤다고 허풍 떨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듣고 스님이 되묻습니다.

“선비님은 도를 깨우쳤습니까?”

“아니오, 저 같은 보잘것없는 인생이 어떻게 도를 입에 담겠습니까?”

“그러면 선비님은 밥을 먹습니까?”

“예, 매일 삼시세끼를 먹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스님이 빈정거리는 투로 말합니다.

“도도 못 깨친 사람이 밥을 왜 먹누?”

그 말에 선비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밥은 현실이요 도는 이상입니다.
즉 스님의 도는 바로 시인 윤동주의 별이요, 탈레스의 별입니다. 스님의 밥은 윤동주와 탈레스가 딛고 있는 땅인 것입니다.

스님은 선비에게 밥의 현실을 들어 도의 이상을 비아냥거리지 말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도도 깨우치지 못한 사람이 밥을 왜 먹느냐?”
라는 가르침을 보면 탈레스가 말한 것이 실감이 납니다.

“웅덩이에 빠져 있어도 별빛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이는 무지한 우리에게 ,

“너는 별빛의 아름다움을 알기는 아느냐?” 하는 반문입니다.

별의 아름다움을 알면 죽어도 여한이 없는 것입니다.
그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 라고 하였지만, 말년에는 ‘만물이 신들로 가득 차 있다’라며 범신론을 주장합니다.

이는 아마도 별을 신으로 모신 그리스인들의 사고방식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별은 신이 아니라 신비한 것입니다.

가끔은 하늘의 별을 보면서 걸어가도 좋습니다.

하늘의 도를 깨우치는 순간을 맞이할지도 모르니...

  • 구글출처 이미지 - 천상병의 시

 

728x90
반응형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