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포의 성자, 어거스틴 이야기
어느 기관에서 '크리스찬 인문학'을 강의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다.처음에는 거절을 하였다. 그렇게 대단한 학자이거나, 교수로서의 입장이 못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스로 기독교와 인문학을 연결하여 재구성 할만큼 뛰어난 '영감의 소유자'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기관의 대표가 몇번이나 부탁을 하여서 '기독교 인문학, 크리스찬 인문학'을 강의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나에게도 좋은 경험과 도전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크리스찬 인문학] 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크리스찬의 라이프와 기독교 고전에서 인문학적인 요소를 찾아서 밝히는 분야가 바로 '기독교 인문학'이다. 이것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존재를 밝히며 바른 신앙과 인성으로 세상을 밝히는 것을 말한다.
기독교 인문학은 어찌보면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을 같이 혼재시키는 방식이라고도 볼 수 있다. 쉽게 말하면 신학과 철학을 서로 조화시키는 방식이라고 보아도 좋다. 헤브라이즘의 대표는 신학이고, 헬레니즘의 대표는 철학이다. 그래서 기독교 인문학을 하려면 신학과 철학에 조예가 있어야 한다. 물론 나보다 더 뛰어난 학자들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반인들에게 보편적이고 쉽게 기독교 사상을 전달하고, 성서를 이해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남을 잘 이해시킨다는 것은 그것은 사실 '독서'를 하면서 나름대로 익힌 좋은 감각에서 비롯된다. 좋은 감각과 센스를 키우는 것은 다년간의 노력이 정말로 필요하다. 나는 그래서 '독서의 노력'을 오랫동안 기울여왔다.
그래서 먼저 시작한 것은 바로 [어거스틴의 연구]였다.
어거스틴은 기독교권에서 최초의 '기독인문학자'로 들어간다.
그는 성서학자로서 성서를 진리의 책으로 알고 다각도로 연구한다.
성서를 맹목적인 믿음으로 신봉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철학이라는 눈으로 성서를 보면서 최대한 논리성을 갖추어서 연구하던 사람이었다.
어거스틴의 [신국론]으로부터 시작하여, [자유의지] [ 삼위일체론] [참회록]을 연달아 읽으면서 나중에는 어거스틴의 생애에 영향을 받은 학자들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야스퍼스의 제자요,하이데거의 제자로 알려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쓴 한나 아렌트는 '어거스틴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유대인 학자였다.
유대인으로서 어거스틴을 연구한 학자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어거스틴에 대한 지평]을 넓혀 나가게 되었다. 그러면서 어거스틴의 사상보다 스토리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 사람의 사상을 알려면 오랜 기간 연구해야 하지만, 그 사람의 스토리를 보면 그의 사상도 볼 수 있다.
어느 시인은 "사상보다 위대한 것은 스토리이다" 라고 하였다.
우리가 듣는 설교를 살펴보면, 사도 바울의 서신은 그리 남지 않는다. 하지만 성서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남는다. 사상이라는 것은 사실 빈껍데기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스토리에 더욱 집중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인문학도 바로 '스토리'에 집중해야 한다.
어거스틴의 스토리를 보면서 어거스틴을 보는 눈을 더욱 기르게 하였다.
그 한 스토리를 여기서 밝힌다.
어거스틴이 지중해 연안의 히포(지금의 리비아 해변) 해변을 거닐다가
어느 아이를 발견한다. 그 아이는 바닷가에서 모래사장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 아이는 자신의 손으로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 그곳에 바닷물을 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어거스틴은 그 남자 아이에게 말을 한다.
"아이야, 바닷물을 그 작은 웅덩이에 담아 보려고 하니?"
"예, 어거스틴 선생님, 저 바닷물을 여기에 다 담아보려고 합니다."
"그래, 그것은 참 어리석은 짓이야. 너가 보이는 이 바다보다 더 큰 바다가 있단다. 그래서 너의 행동이 우습구나"
그러자 그 아이는 어거스틴에게 한방 먹인다.
"그렇다면 선생님은 그 주먹만한 머리로 왜 우주의 지식을 담으려고 하시나요"
그 지혜롭고 재치있는 말에 어거스틴은 충격을 받는다.
자신의 주먹만한 머리로 삼라만상의 지식과 지혜를 담으려고 했다니...
그러면서 지적교만에 사로잡힌 자신을 내려 놓고 겸손히 자신을 낮추는 연습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 인생은 오랜동안의 겸손의 연습이다] 라는 말을 실현시키고자 노력한 인물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참회록에서 '사람이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다" 라고 말을 하였다.
나는 이 어거스틴의 스토리를 몇번이고 읽으면서
자신에게 인문학적인 성찰을 해보게 되었다.
"나 자신의 작은 머리에 무엇을 채워야 할까?"
많은 지식을 백과사전적으로 아는 나 자신이지만,
그래도 항시 지식에 배고프고,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여전히 많은 지식이 자신을 미치게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아, 나의 많은 지식이 나를 미치게 하는도다"
그런 의식이 들면서 결국 지식을 그치고 지혜를 높여야 함을 발견한다.지적 교만을 버리고 도리어 어리석어지려고 노력해야 함을 발견하게 된다.
어디를 가도 나보다 많은 책을 보는 이들은 별로 없다.
하지만 그러한 많은 책들이 나에게는 어느새 짐이 되었다.
어깨에 어떤 이는 한두권의 책을 지고 가는 이도 있지만
어깨에 백여권 이상의 책을 지어보라. 얼마나 무겁고 힘든지 모른다.
나의 모습이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많은 좋은 생각과 사상을 가지고 있지만
이것은 어찌보면 나에게 짐이 되도 부담이 된 것이다.
나의 작은 머리에 수많은 것을 담으려고 하는 것 그 자체가 나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책을 읽고, 공부를 하고, 지적 활동을 하는 것은,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온유하고 겸손하게 대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나의 [자유와 행복]을 위한 일이라는 것을 결국 발견하게 된다.
[자유와 행복]을 얻은 사람들을 보면 어리석어 보이게 살아간다.
그런데 알고보면 지혜롭고, 부족하지만 충만하고, 약하지만 강하고, 가난하지만 부유한 사람이다.
기독교의 신학과 일반 철학과 고전을 보면서 나는 나름대로 즐거움과 위안을 많이 얻게 되었다. 신학에만 빠지면 종교주의자나 근본주의자로 전락한다. 물론 신학 그 자체는 아름다운 학문이다. 하지만 합리성이나 인간성을 고양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또한 철학이나 인문학에만 빠지면 인간성의 고양은 높아지고 좋아지나 영혼의 문제, 신앙과 영생의 문제, 구원과 갱생의 문제에서는 무기력해지게 된다. 기독 인문학은 바로 이 두가지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점을 충분히 제공해준다.
어거스틴 연구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바른 영성을 가진 신학자이지만
바른 인성을 가진 철학자로서의 어거스틴
이 분은 내가 가장 닮고 싶은 인물중에 하나이다.
작은 머리로 많은 지식과 진리를 담아보려고 노력하였지만
겸손한 가슴과 온유의 법칙으로 살아간 어거스틴은
성자(SAINT)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분이다.
나의 남은 평생의 작업중에 하나는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가교를 놓는 것이다.
성서와 탈무드 연구, 인문고전에 대한 연구, 시사와 신지식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결국 영성과 지성의 균형을 맞추는 것, 잘 조절하는 것에서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나의 내적인 문제는 신학적으로 해결하고, 나의 외적인 문제는 철학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나의 생각과 행동은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다.
그래서 '책임있는 인간'의 모습을 갖추려고 노력하는데서
기독인문학, 크리스찬 인문학의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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