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위기, 인간의 위기 1편
<윤재석 경북대 사학과 교수의 강연을 기초로>
인문학은
“인간의 삶에 대한 성찰을 통하여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다운 삶이 어떠한 것인지를 일깨워주는 학문”으로 정의할 수 있다.
시공을 초월한 인간의 본질과 실존적 모습을 문학·사학·철학적 범주의 성찰을 통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품격 높은 삶의 가치를 실현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따라서 선한 인간으로서의 본능을 보듬어 서로를 배려·존중하고 소통하는 공동체의 구현을 통하여 누구나가 마음으로 행복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노력은 인문학자들의 지상과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날 신자유주의는 이윤 창출을 위한 적자생존의 시장원리만 작동하는 경쟁사회를 만들었고, 그 결과 눈앞의 금전적 이익을 창출하지 못하는 인문학은 현실적 대응능력을 상실한 공허한 학문으로 전락해버렸다.
이러하니 인문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세칭 ‘문송’으로 고개 숙이고, 인문학자는 지식소매상으로 평가절하되기에 이르렀다. 인문학의 위기는 세태의 변화에 둔감한 인문학자들이 자초한 측면도 없지 않다. “우주전쟁시대에 당신들은 어떻게 청동기시대의 화살촉 얘기만 하느냐”는 공학도들의 비아냥처럼 인문학의 위기는 과거 학문에 대한 답습과 재해석에 머물거나, 미래지향적 인문담론의 도출에 무관심한 결과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문학은 삶의 외적 조건의 부단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본질과 실존적 삶의 형태에 대한 장기 지속적 탐구의 여정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따라서 인문학자에게 시장맞춤형 지식의 속성 생산을 강요하는 것은 곤란하다.
오늘날 넘쳐나는 ‘인문강좌열풍’이 인문학의 부흥을 예고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입담 좋은 명망가 중심의 인문강좌가 고가로 소비되는 시장 모퉁이에서 대학의 인문학은 고사 직전에 몰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상품성이 떨어진다는 오명을 쓴 인문학 전공 학과들의 축소와 통폐합 나아가 폐과가 다반사로 일어나고, 곧 시행될 ‘강사법’은 인문학분야 강사의 대규모 해고를 재촉하며, 이러한 현상은 급기야 대학원생의 급감을 초래하여 인문학 후속세대의 양성에 치명적 타격을 주고 있다.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진단과 처방이 거듭될수록 인문학의 위상은 이에 반비례하여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 정책 당국자들은 인문학을 실용학문의 변방에 위치한 일종의 보조 학문으로 여기는 듯하다.
통계는 이를 잘 보여준다. 2007년부터 2017년까지 이공계열의 연구개발비 예산이 10.9% 상승한 반면 인문사회분야는 0.3% 상승에 그쳐 양자 간에는 35배의 차이를 보였다. 동기간 4년제 대학의 입학정원은 이공계가 16.4% 증가한 반면 인문사회계열은 15.6% 감소하였다. 인문사회분야 대비 이공계의 우대를 탓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러한 통계가 인문학에 대한 국민과 정부의 인식을 대변하는 듯하여 우울할 뿐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파편화된 개인의 물적 욕구와 쾌락의 실현이 삶의 궁극적 목표가 되어 버렸고, 경쟁에 살아남은 ‘배부른 돼지들’의 각축장으로 치닫고 있다. 이 와중에 세상을 지상낙원으로 만들어줄 것처럼 4차산업혁명의 미래 청사진이 펼쳐지고 있다. 그러나 인문학적 성찰을 거부한 채 기술혁명이 가져다줄 장밋빛 청사진에만 도취한다면 인간의 존재이유마저 사라질지도 모르는 인류의 미래는 암담할 것이다.이러한 점에서 다음 사실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2019년 한국의 인문사회분야 연구개발비 예산이 전체 R&D 예산의 1.5%에 불과한 반면 영국과 미국이 각기 9.4%와 7%라는 사실, 구글을 비롯한 실리콘밸리 기업들이 인문학적 조언을 위하여 철학교수를 채용하는가 하면, 최근 실리콘밸리의 산실인 스탠퍼드 대학은 AI연구소에 철학자를 소장으로 임명하기까지 하였다.
이는 4차산업혁명이 단순히 기술혁명이 아니라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혁명이어야 함을 인지한 결과로서, 한국의 인문학도 인공지능시대의 인간에 대한 성찰로 연구영역이 확장·재편되어야 함을 잘 보여준다. 이를 위해서는 인문학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와 더불어 인공지능시대를 선도하는 인문학담론의 생산과 인문학후속세대의 양성이 상호 선순환할 수 있는 인문생태계의 구축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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