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능력을 구하는 자들 vs. 하나님께 능력을 구하는 자들
<창세기에 나오는 꿈의 사람, 요셉 스토리를 중심으로>
유대인들은 토라읽기를 일생의 축복이면서 영적인 유산으로 생각합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신학에서는 ‘모세오경’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의 토라읽기는 거의 ‘목숨’을 걸 정도입니다. 평생동안 읽고 읽어서 거의 외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무엇이든 100회독 이상을 하게 되면 거의 외우고, 그 외운 것이 평생을 갑니다. 그리고 그 외운 것으로 자녀들에게 전달합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토라는 지적이면서 영적인 유산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서 가장 많이 읽히는 책은 어디일까요? ‘창세기, 베레시트’를 가장 많이 읽습니다. 물론 종교인들은 신명기나 레위기를 무척 중시여깁니다. 신명기는 마치 저들에게는 법학서이고 레위기도 법의 실천서라고 봅니다. 그래도 창세기를 선호하는 이유는 바로 창세기가 ‘이야기체’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의 힘은 위대합니다. 다른 사상이나 이론들은 보통의 사람들에게 오래 남지 않으나, 이야기는 오래 오래 남아서 구전되고 후세에 전달됩니다. 그 이야기가 후세에 잘 전달되려면 바로 ‘교훈과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반성과 성찰’이 들어가야 합니다. 여기서 성서속에 있는 ‘인문학적인 배경’을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에는 ‘창조 스토리’ , ‘아담과 하와’의 스토리, ‘가인과 아벨의 스토리’, ‘대홍수와 노아의 방주 스토리’, ‘이집트 왕자 모세 스토리’ 등은 여전히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습니다. 유대인들의 학교에서도 어린 학생들에게 이런 이야기와 동화들을 많이 해줍니다. 한국의 주일학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에서도 그 이야기와 동화를 자주 들려줍니다. 이런 이야기와 동화를 듣고 자란 아이들은 나중에 큰 꿈을 꾸고, 비전을 갖고, 저 위대한 성서의 인물처럼 되고자 하는 의식을 갖습니다. 또한 인본주의보다는 신본주의의 의식을 갖습니다.
이 글을 쓰는 필자도 어려서 성경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처음에는 ‘황당하고 허무맹랑한 이야기’처럼 들렸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그 이야기들이 정말로 사람을 키우는 이야기임을 발견하였습니다. ‘창세기읽기’를 지금도 가장 즐겨 읽습니다. 성서를 가까이하면 확실히 죄악을 멀리하게 됩니다. 성서를 멀리하면 확실히 죄악을 가까이하게 됩니다. ‘성서읽기’의 이유가 신앙을 더욱 고취하는 의미도 있지만 무릇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일임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성서 창세기를 읽어도 너무 부분적으로, 제한적으로 읽어서 어느새 타성에 젖습니다. 매너리즘에 젖어서 감동도 잊고 비전도 상실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많은 수의 크리스찬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것은 바로 성서읽기를 ‘문자적으로만 읽는 문자주의’에 빠져서 그렇다고 진단할 수 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문자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와 뜻을 찾아 나가는 읽기로 나아가야 합니다. 또한 그 의미와 뜻을 찾았으면 그것을 삶속에 적용(application)하고 체화(embodyment)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변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변화의 능력’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수박겉핧기’식으로 성서를 보면 결국 ‘재미’를 잃게 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묵상’입니다. 얕은 물에서 첨벙대는 수준이 아니라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는 수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조용히 생각하는 시간’ ‘성찰과 나아감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급한 마음으로 ‘읽기’에 급급하지 말아야 합니다. 스토리에 집중하면서도 스토리 이면에 숨겨져 있는 깊은 의미와 뜻을 찾아가는 노력이 곧 ‘묵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묵상을 라틴어로는 ‘렉티오 디비나 LECTIO DIVINA' 라고 합니다.
묵상이 너무 하기 힘든 것이라면 차라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묵상은 절대 강요해서 할 일이 아닙니다. 그저 기쁘고 감사해서 하는 것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독일 나치의 손에 손에 죽기 몇 년 전까지 자신에게 신학을 배웠던 사람들과 정기적으로 서신을 주고 받으며 끝까지 ‘기도와 묵상’을 하라고 격려했습니다. 최전선에 있는 한 군인에게 쓴 편지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날마다 내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고요히 묵상하는 시간은(단 몇분간이라도) 내 삶의 질서가 분명해지는 순간이다. 묵상은 평안과 인내와 기쁨의 원천이다. 그것은 우리 삶에서 질서에 공헌하는 모든 힘들을 한데 끌어오는 자석과 같다. 그것은 깨끗한 표면에 구름과 태양을 비추는 깊은 물과도 같다. 묵상은 또한 우리 삶 속에서 자기 훈련, 침묵, 치유 및 만족의 영역에 지존하신 분을 모심으로써 그분을 섬기는 일이 된다.”
이 묵상에 대해서 잘 모르면 ‘시편 1편’을 보면 어느 정도 캐치를 할 수 있습니다.
묵상을 하는 것은 정적이지만 지극히 동적이다. 묵상을 하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고 성서를 멀리하는 사람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람에 나는 겨’가 아닌 ‘시냇가에 심은 나무’ 처럼 사는 길을 모색해야 합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질문은 지극히 인문학적인 질문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은 ‘자유’라는 미명으로 ‘바람에 나는 겨’처럼 살려고 노력(?)합니다. 여기서 저가 ‘창세기 읽기’를 가지고 묵상의 위력을 펼쳐보입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은 사람을 성서에서 찾아보십시오. 나는 ‘요셉’이라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떠오릅니다. 오늘 제목과 걸맞은 인물이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 스토리는 창세기에서 살펴보면 아주 흥미롭고 의미심장합니다. 그는 인간의 능력보다 하나님의 능력을 추구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시기심이 많은 형들로 인해 노예로 이집트에 팔려갔습니다. 또한 유혹하는 보디발의 아내의 이간질로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꿈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심으신 꿈’입니다. 그 꿈이 여러 시련을 겪고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요셉은 ‘이집트의 총리’까지 올라갑니다. 창세기에서 가장 많은 스토리의 주인공이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의 아버지는 야곱입니다. 야곱은 모든 아들 딸중에서 요셉을 가장 사랑하였습니다. 이 죽은 줄만 알았던 요셉은 나중 이집트 총리까지 되었다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꿈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유대인들은 ‘꿈이 이루어진다’는 개념을 [성공의 개념]으로 삼지만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꿈을 ‘진정한 꿈의 성취’로 봅니다.
요셉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창세기 49장 22절)
‘시냇가에 심은 나무’ ‘샘 곁의 나무’는 모두 같은 뜻입니다.
인간에게 도움을 구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도움을 구한 요셉의 스토리는 그 자체로 ‘위대한 꿈, 위대한 성취’를 보여줍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이나 환경에 타협하거나 믿음을 배반하지 않고 변화 무쌍한 일들을 헤쳐 나갔습니다. 그는 뿌리가 깊은 나무였습니다. 자기 주변의 땅이 얼마나 말라 있든지 바람이 얼마나 세차게 불어오든지 간에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수백년 후에 선지자 예레미야는 말합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합니까?
인간에게 도움을 구하는 자와 하나님을 향해 도움과 능력을 구하는 자들의 삶을 대조합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 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건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 렘 17장 5-6절]
이것이 바로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삶이죠.
그런데 그 다음절에는 시편 1편을 다시 보는 인상을 줍니다.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정하면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렘 17장 7-8절]
시편은 다윗 왕이 기록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1편에 ‘하나님이 말씀을 묵상’ 하는 자 즉 ‘토라를 묵상하는 자’의 축복을 말합니다.여기서 묵상을 하는 것은 하루 종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업과 할 일을 하면서, 인간의 의미를 망각하지 않으면서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묵상으로 인하여서 복있는 자는 ‘그 가지가 담을 넘는 일’도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성공은 요셉이라는 인물안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공할지라도 그 성공의 대부분은 축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가지가 담을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지가 그 담을 넘을 때 우리의 직계 가족을 넘고, 우리의 사회를 넘어설 것입니다. 즉 벽을 넘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다른 곳으로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 남자, 요셉의 꿈의 유산, 영적 유산은 지금도 유대인들에게도 미칩니다. 또한 그 스토리를 읽고 감동을 받은 사람들에게도 미칩니다. 지성과 신앙을 조화롭게 잘 겸비하십시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될 것인가, 아니면 바람에 나는 겨로 살 것인가는 본인의 선택입니다. 성서는 절대 그 사람에게 억지로 살아가는 것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따라 살려고 하는 자들에게 반듯히 축복으로 갚아주겠다고 약속합니다. 하나님은 무능력한 분이 아니라 능력 있는 분입니다.
그의 능력안에서 우리도 변화 무쌍한 사회속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I can do everything through him who gives me strength.(Phi. 4:13 N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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