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리와 이익
"이익에 따라서 행동하며 원망이 많다."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
- 공자의 <논어>
가끔씩 공자의 글을 읽어보면
오늘날 우리 현대인들의 사고방식과 충돌을 일으킵니다.
인문학은 사실 현대인들의 사고방식과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 당연합니다.
사람들이나 기업들은 [이익]을 추구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자신이 저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간의 모든 상업은 죄악스럽다" 라고 하였습니다.
의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나 기업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공자가 말씀한, [군자]는 완전한 사람에 가깝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이익보다 의리를 먼저 앞세운다는 것은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자칫 모순처럼 들립니다.
공자의 말을 곧이 곧대로 들어서는 안되지만
앞뒤 진위를 잘 파악하여 읽어야 합니다.
[행간읽기]나 [비판적 읽기]를 제대로 하여야 읽어낼 수 있습니다.
반대로 뒤집어서 생각해 봅니다.
과연 사람은 [이익]만 추구하는 존재일까요?
과연 기업들은 단순히 [이윤추구]에만 집착하는 집단이나 조직일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이나 기업들에도 [의리] 는 반드시 있습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도덕 감정]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나 기업들은 [의리와 이익]을 둘다 추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과 기업은 서로 닮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제학자는 [기업은 사람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이익을 추구하면 면과 의리를 중시여기는 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기적인 면과 이타적인 면]이 서로 공존한다는 것입니다.
[도덕 감정] 이 말은 사실 경제학의 아버지인 아담 스미스가 쓴 [도덕 감정론] 이라는 책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의리는 그의 저서를 빌리자면 [도덕 감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을 쓴 위대한 저자입니다.
[국부론]이 경제적 이익을 앞세우는 책이라면,
그의 [도덕 감정론]은 사람들이나 기업간의 의리나 정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의리와 이익은 서로 양립하는 관계입니다.
사실 아담 스미스는 자신의 위대한 저서인 [국부론]보다 [도덕 감정론]을 더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죽기전까지 여러 번 개정 증보판을 냈다고 합니다.
그는 도덕과 경제는 서로 양립해야 한다고 죽을때까지 믿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법과 도덕도 서로 양립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상인들, 마케터들의 이윤추구를 나쁘다고 보아서는 안됩니다.
이들이 눈앞에 보이는 [이윤추구]만 일삼는 무리로 보아서도 안됩니다.
한국은 [사농공상] 이라는 서열사회였지만, 지금은 그런 서열이 많이 파괴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상인들을 바라보는 입장은 [약간은 사기꾼]처럼 보는 입장이 강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인들도 [의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는 측면도 보아야 합니다. 의리를 추구하는 면이 없다면 반드시 그 이익도 언젠가는 없어집니다. 상인들에게 필요한 덕목이 그래서 [상도덕]입니다.
상인들은 자신들이 얻는 이익과 부가 사회에서 온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이익과 부를 사회에 어느 정도 환원하고, 순환시키는 [사회적 책임감]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의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의리와 이익]은 서로 양립하는 관계입니다.
서로 떨어져 있는 독립변수로 보면 안됩니다.
지금 사회는 갈수록 스텐다드(표준) 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투명성이 강조됩니다.
사람들이나 기업들이 단순히 [이윤추구]만 한다면
오래가지를 못합니다.
오래가는 인간관계, 지속적인 기업의 성장은 바로 [이익을 추구하는 만큼 의리도 추구하는 자세]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먼저는 의리를 앞세워야 합니다.
손해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의리를 앞세우면,
나중에는 그 의리가 큰 이익으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옵니다.
요즘은 이상하게도 [동서양의 지식과 지혜를 둘다 익혀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진정한 리더가 되고, 지도자가 되려면 이제는 [동서양의 지식과 지혜]를 둘다 익혀야 합니다. 경제와 도덕의 양립관계, 이익과 의리의 양립관계도 자세히 보면
동서양의 중심에 흐르는 [사상적 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남과 북이, 동과 서가 가까워졌습니다.
인터넷과 통신의 발달로 가까워졌습니다.
동서양의 공부나 인문학 공부를 하기에 정말 최적의 시대입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19세기의 고루한 사고방식에 젖어서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태어나기는 20세기에 태어나서, 살기는 21세기에 살면서도, 생각은 19세기에
머물러 있다면 이는 일종의 [화석화된 존재]입니다.
이제는 단면만 보고, 한쪽만 보고, 편향된 사고방식을 벗어나야 합니다.
양면을 보고, 양쪽을 보고, 종합되고 조화로운 사고방식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의리와 이익]에 대한 글을 쓰면서 [인문학적인 사족]을 조금 달았습니다.
이 사족은 사실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을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가 이젠 눈앞에 성과나 성공보다 더 중요한 가치이고 방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의리를 이익보다 더 중시여기십시오.
돈보다 사람을 더 중시여기십시오.
[사람의 마음]에 집중하십시오.
'시와 칼럼과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세이, 아는 만큼만 볼 수 있다.!! (0) | 2022.10.01 |
---|---|
에세이, 가을이 오면, 자연스런 인생의 흐름 (2) | 2022.09.30 |
에세이, 가면(MASK)과 얼굴 그 사이에서 - 페르소나의 심리학 (2) | 2022.09.29 |
남자의 눈물과 <바람의 노래> (2) | 2022.09.29 |
인생은 산책이다. (1) | 2022.09.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