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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이야기

알베르 카뮈, <페스트> 그리고 의사 리원량 , 2021년 봄

by 코리안랍비 2022.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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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와 코로나19


“숲에서는 마녀가 살고 있어.
모든 불온한 공기는 숲에서 온다.
숲에서는 이반자, 역도의 무리가
마녀의 꾀를 쫓아 마녀의 형상대로 산다.
아시아의 초지에서 비단길을 따라
유럽의 숲으로 잦아들고
한 톨의 불씨가 초원을 불태우듯
마녀가 길들인 들쥐 한 마리가
도시를 페스트라는 이름의
불온한 기운으로 감싸버렸다.“

-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중에서....



2020년 21세기 [페스트]가 다시 돌아왔다.
중국의 후베이성의 우한발 코로나19가 바로 페스트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수많은 인명들이 죽어나갔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중에 신음하고 있다. 매일 100여명의 사람들이 죽는 참혹한 코로나바이러스의 위력에 충격을 금치 못한다. 중국을 비롯하여, 동북아의 일본과 한국도 코로나19로 인하여서 극심한 어려움에 봉착하고 말았다. 요 며칠사이에는 대구 경북의 [신천지발 코로나 19의 확산]이 일어나고 있다. 연일 보도되는 뉴스를 보면 사람들의 모습은 코로나19의 악영향으로 인하여서 생활전선이 무너진 것을 볼 수 있다.

이럴때 나의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이 하나가 있다.
바로 문학속의 질병인 [페스트]를 살펴보는 것이었다.


인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우리는 이제 위기속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위기인문학이 필요하다.
위기를 현실로 보고, 이에 완강히 대항하고 저항하고 싸워나가는 사람들의 현장을 다루는 것이 위기인문학이다. 나는 세월호 사태이후 [위기인문학]의 필요성을 강조한 사람이다. 인문학속에서 우리는 지혜를 찾고 대신에 우리의 어리석음과 무지를 발견해야 한다.


알베르 카뮈의 1947년작 [페스트]는 당시 많은 프랑스 사람들과 유럽인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킨 작품이다. 그는 이 소설이 그저 단순한 소설이 아니라 연대기(Cronicles)로 불리기를 바라였다.


페스트는 14세기 중세 유럽을 덮친 죽음의 공포였다.
유럽인구의 4분의 1의 인구를 없애버리는 무시무시한 질병이었다.


14세기 유럽,
야생의 설치류 사이에서 유행하던 이 병이 밭다람쥐 등을 통해 잡쥐에 전염되고, 다시 인간들 사이에 퍼진 것이다. 1347년 몽고의 킵차크 부대에 의하여 아시아 내륙의 페스트는 유럽에 전파되고, 이 병으로 인하여 유럽이 고통의 도가니에 시달리게 되었다. 페스트가 주는 공포는 문학과 사상으로 이어졌고, 당시 중세의 경제기반인 장원제도나 봉건제도가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다. 페스트균은 1894년 프랑스의 세균학자 예르생이 그 실체를 발견하였고, 나중에는 항생제의 발달도 사람들의 기억속에 잊혀진 질병이 되었다.


그러나, 그러나 카뮈는 [페스트]라는 작품을 남기면서,
당시 사람들의 역사적 기억을 다시 소환하였고, 그 공포와 위력을 상기시켰다.
여기서 인문학의 힘을 나는 발견한다.인문학의 힘, 이는 읽어보고 느끼고 성찰하는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힘이다. 그 힘은 서서히 스며들어서 사람들의 사상속에 자리를 잡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을 움직이게 한다. 우리는 움직여야 산다.

카뮈의 [페스트]는 사람들속에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게 하고, 그리고 또다시 다른 [페스트]가 올 것이라는 가정을 갖게 한다. 그리하여 싸울 준비를 하고, 대비를 하면서, 자신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긍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카뮈의 두껍지 않은 이 [페스트]를 읽어 보았을 것이다.
나도 2번에 걸쳐서 그의 이 책을 읽어 보았다. 최근에 코로나19로 인한
사태로 인하여서 다시금 [페스트의 공포와 위력]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21세기가 되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강력하고 지긋지긋한 적에 노출되어 있다. 여기서 인간의 연약성(weakness)을 여실히 보여준다. 인간은 그저 단순한 바이러스에도 생명이 오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취약성(vulnerability)을 또한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인간의 위대성(greatness)을 살펴보는 계기가 된다.


카뮈는 과연 [페스트]에서 무엇을 보여주려고 한 것일까?
그것은 바로 [반항정신]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위대한 선언도 있지만

카뮈는 “나는 반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는 선언을 이 책에서 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며, 찾아올 수 있는 위기의 순간이 있다.
이 위기에 굴복하느냐 이 위기를 극복하느냐는 강렬한 의지와 용기가 있어야 한다. 강렬한 의지와 용기가 있다면 절망속에서도 희망은 있다.
카뮈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이 소설 [페스트]는 제 2차 세계대전이후에
심리적 공황상태나 부조리에 빠져 있던 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준 것이다.

코로나 19의 확산을 경고하고 경고했던 의사 리원량을 기억하라.
그는 안과의사였지만, 중국 우한에 새로운 신종 바이러스의 거대한 확산을 다른 7명의 의사와 함께 알렸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괴담유포자로 몰려서 경찰의 처벌을 받았다.중국 공산당 정부는 이들을 처벌하면서 중국사회를 교란하는 사람들로 판단하고 이들의 말을 무시하였다. [과학적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중국인데도, [과학자의 주장을 틀어 막는 무지한 공산주의]로 전락한 중국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들이 의사들의 말을 듣고, 강력하게 초기에 대응을 했더라면 아마도 이런 대형사태로 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카뮈의[페스트]를 읽었다면 달라질 수도 있었다.

카뮈의 [페스트]가 다시 주목받는 소설이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간단하다.
알제리 항구 도시 오랑에 쥐가 페스트를 몰고 온다.
정부는 오랑을 페스트 재해지구로 선포하고 도시를 전명 봉쇄한다.
(마치 중국의 우한을 연상케 하는 스토리 전개를 보여준다.)
외부 세계와 철저히 단절된 채 죽음과 투쟁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페스트는 담고 있다.
여기서 죽음과 투쟁하는 인간들의 모습은 그 당대의 [반항아들]의 모습이었다.
어느 사회나 어느 시대나 반항아가 있기 마련이다.

이런 사람들은 영웅으로 불리기도 하고, 의인으로 불리기도 하고, 그저 평범함속에 위대함을 가진 존재로 불리우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그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존재들이었다. 이들의 사투와 노력 덕분인지 어느날 홀연히 찾아온 [페스트]는 홀연히 사라진다.

도시는 다시 활력을 찾고, 사람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여기서 나는 일상의 소중함과 고마움을 느낀다.
이런 일상으로 돌아오게 하려고 노력하는 수많은 의인들, 시민들이 있었기에
이 넓은 도시에서 우리는 살아갈 원동력을 얻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우리는 세가지 방식으로 페스트에 대항하고 저항하는 인간상을 보게 된다. 먼저 파늘루 신부를 본다. 그는 페스트를 이기려고 초월적 신념으로 극복하려고 한다.

“거대한 나무토막이 이 도시의 하늘에서 소용돌이치다가 닥치는대로
후려갈기로 피투성이가 되어 다시 솟아올라 마침내 진리의 수확을 준비하는 파종을 위하여 인류의 피를 뿌리는 고통의 광경“을 사람들에게 연상시켰다.

그러나 나중에 어느 어린 아이의 죽음을 보고서 그는 사실상 초월적 신념을 포기하고 의사 리외와 더불어서 페스트에 대항하는 [보건군대]를 형성한다. 많은 종교인들의 통념은 ‘기도하면 신이 들어주신다’라는 것이다. 물론 그 통념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통념은 사실 무능할 뿐이다.

그 다음으로 행정적이고 관료적인 관점에서 판단을 유보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정부나 공무집단이다. 그렇지만 이 소설에서 조제프 그랑이라는 행정직 서기를 볼 수 있다. 그는 페스트 사태에도 불구하고 묵묵하게 자신의 일을 성실하게 수행한다. 자신의 일이 남을 구하는 일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일해야 사태가 더 줄어들 것이라는 낙관론을 가지고 움직였던 것이다.

중국의 우한사태에 대해서 중국정부는 그동안 제대로된 액션을 취하지 않았다.
불성실로 일관하다가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지자 그제서야 행동을 취한다. 러시아의 체르노빌 사태가 바로 그것이다. 체르노빌 원전이 폭발하였을 때 러시아 공산당 정부는 그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고, 축소하고 은폐의 공작을 일삼는다. 위기상황에 어벤저스같은 행동은 나오지 않는다. 정부의 무능을 안타깝지만 우리는 여실히 보게 된다.

랑베르라는 신문기자는 [이기적인 도피주의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은 오랑의 시민이 아니고, 파리사람이라서 이 도시를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고, 이 도시의 재앙과 자신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치부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애인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온갖 방법으로 행복을 찾으려고 탈출을 감행한다.

그 다음으로 소설속의 주인공 베르나르 리외라는 의사를 만나게 된다.
그는 종교적인 초월적 신념도 행정적인 관료로서의 신념도 회피한다.
그는 오로지 구체적인 진실이나 실천만을 따른다.

그는 어느 날, 계단에서 죽어 있는 쥐 한 마리를 발견하고,
많은 사람들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죽어가는 것을 본다.
그리고 성실하고 무서운 태도로 의사의 임무를 완순한다.
[성실함]을 그는 자기 신념으로 삼는다.

마치 중국의 리원량이라는 의사가
그저 성실하게 의사로서의 사명과 직임에 충실하듯이 말이다.
그는 페스트의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위기상황에서 완연하게 대응해 나간다.
다른 이들은 체념하고 도피하였지만 그는 당당히 맞서는 반항을 보여준다.

위기 상황앞에서 인간의 모습은 철저히 이기적으로 변신한다.
그것은 일종의 본능이나 본성와 같은 행동방식이다.
리외는 의사로서의 자신의 좋은 직업을 즐기는 물질화된 사람이라기보다는
의사는 병들고 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저 바른 의학적 지식과 더불어서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임해야 하는 존재로서 인식한다.

“솔직하게 당신의 생각을 말해주십시오. 당신은 이것이 페스트라고 확신하십니까?”

라는 보건당국의 질문에 베르나르 리외의 대답은 정확하게 반항자의 모습이다.

“질문을 잘못하셨습니다. 이건 어휘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 문제입니다.”

사실 페스트가 발생하든, 페스트가 발생하지 않든,
의사 리외에게는 그것이 어휘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문제로 해석한다.
정확하게 진단한다고 해서, 정확하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의사 리외의 아내도 나중에 이 [페스트]로 인하여 죽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의사로서의 자기 직분을 변함없이 성실하게 수행한다.
이 소설속에서 그는 [생활속의 영웅]으로 자리를 잡는다.
그러면서도 그의 행동은 지극히 영웅적이지 않다. 신화적이지도 않다.
다만 그가 보여준 행동에서 우리는 [정의 justice]를 발견한다.

플라톤은 자신의 저서 [국가론]에서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말을 남긴다.

“자신의 맡은바 자리에서 책임과 직임을 다하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정의라 하면 불법을 자행하지 않고, 악법을 멀리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것은 정의의 일부만 나타내는 말이다. 정의란 [자신의 주어진 임무와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하는 것]에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삶속에서 정의를 행하는 시민으로서의 모습이 필요하다. 위기의 상황, 절망의 상황속에서도
우리는 부정속에서 긍정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절망속에서 희망을 찾아야 한다.


그 소설에서 수많은 무고한 생명들이 목숨을 잃어간다.
그리고나서 안정적인 결말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그리고 소설은 이렇게 리외의 말로 마무리를 한다.

“인간들 속에는 경멸할 것보다도 찬양할 것이 더 많이 있다는 것”을...

여기서 인간은 페스트에 진 것인가?
아니면 인간에게 페스트가 진 것인가? 그렇게 결론을 내서는 안된다.
페스트와 비슷한 일들이 사람들이 살아가는 동안에, 사람들의 역사속에서 계속 일어난다. 페스트균은 결코 죽지 않으므로 우리는 항상 경계하고 대비해야 한다는 것을 [페스트] 라는 작품을 보여준다.

카뮈의 이 연대기적인 소설에서 다음과 같이 리외의 입을 빌려 말한다.
“성자가 될 수도 없고 재앙을 용납할 수도 없기에 그 대신 의사가 되겠다고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개인적인 고통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수행해나가야 할 것에 대한 증언일 뿐이다”

카뮈의 말속에서 저항하는 인간상도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 인간을 향한 연민과 긍정적인 사랑의 인간상도 보여주고 있다.

이번 코로나19 사태가 어서 진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일상의 소중함을 더욱 발견하고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서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하는지 성찰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아울러 위기에 반항할 때 우리는 새로운 인생의 중요한 기회라는 것을 발견하였으면 한다.

이 위대한 소설 [페스트]를 읽으면서....

그리고 코로나 바이러스와 사투를 벌이며 싸우다가
죽어간 닥터 리원량과 같은 많은 생활속의 영웅들의 명복을 빕니다.

  • 참으로 가슴 아픈 일 - 우리는 그를 여전히 애도한다. - 리원량 의사의 죽음은 곧 우리의 죽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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