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스트의 대표주자
프로타고라스 Protagoras
흑백논리가 강한 나라가 한국이다.
이 얼토당토한 논리가 강하다보니
고정관념이 강해지고, 그 고정관념을 마치 진리처럼 꽉 붙들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사실 회의와 의문을 해보지 않고서는 절대 진리에 대한 추구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면에서 한국은 철학이 발달하기 힘든 구조이다. 그러면서 논리와 사상의 전개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구조이기도 하다. 논리와 사상의 전개를 하지 못한다는 것은 곧 학문추구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 기저에는 비판적인 독서(Critical Reading)가 바탕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살면서 고등학교에서 배운 것을 넘어가지 못하는 나라가 한국이라고 한다.
그때가 가장 공부를 많이 할 때이고, 그 때가 사고력이 급증하는 시기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 자신의 생각과 사고보다는 타인들의 생각과 사고를 우선시하고, 역사상 위대한 인물들의 생각과 사고에만 빠져서 결국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얻지 못하고 사는 이들이 많다. 그런 면에서 이제는 [신사고]가 필요하다.
모든 것에 대해서 의심하고 회의하는 [스켑티시즘] 도 필요하다.
고교시절 [윤리와 사상]을 공부하다보면, 자주 등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소피스트 Sophist]들이다.
이들은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들' 이라는 뜻이다.
이들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등의 정통 철학자들에게 호된 비판과 책망을 받았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을 안좋은 시선으로 바로본다.
소위 [궤변론자]라고 부른다. 아니면 [현학적인 체하는 인간들]로 보기도 한다. 그런데 살면서 이런 궤변론자들을 많이 보곤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사람들을 "피상적인 지혜를 이용하여 돈을 벌려고 하는 놈들"이라고 묘사하였다.
말도 안되는 논리로 사람들을 혹세무민하는 사람들로 우리는 오해를 하고 있다. ㄷ하지만 이들을 역으로 제대로 파악하는 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소피스트들은 보편적인 진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절대적인 도덕과 법, 그리고 신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이 인정했던 것은 이상하게도 오직 인간의 지각과 인식뿐이었다.
그것도 개인의 감각을 가장 우선적으로 다루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뛰어난 재능을 팔았다.
수사학, 웅변학, 문학 등에 능통했고, 그것을 매개로 돈을 벌었던 사람들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직업적인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철저한 프로정신에 입각한 뛰어난 학자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들이 남긴 글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우리는 마지막 소피스트인 [이소크라테스]의 단편적인 유작들만 보거나, 아니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에서 이들의 왜곡된 면을 대하고 있다.
어찌보면 20세기 21세기에 들어서서 인간은 실존주의를 부르짖고, 한편으로는 관념론과 유물론을 수용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개인의 삶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만이 위대하다고 부르짖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 사실 그리스 3대 철학자들의 글들을 읽어보면 현실과 동떨어진 철학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리고 개인의 삶에 대한 존중이나 개인의 생각들과 감각들이 상당부분 외면되어지는 것도 볼 수 있다. 그들을 철학자로서, 사상가로서 폄하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제대로 인식하고 있느냐의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그들의 책을 읽으면 마치 고상해지고 교양미가 넘칠 것이라는 것도 어찌보면 자기착각이다. 우리는 그저 우리의 몸에 맞는 옷을 입을 필요가 있다.
이들이 그동안은 빚에 가려져 있다가 다시 재조명되고 있다.
이들은 철저한 직업의식을 바탕으로 전문적인 학자의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었다.
반대로 보면 경제력이 부족한 남편을 비난하던 자신의 부인을 "지상에서 가장 악한 마누라, 악처"라고 몰아세운 소크라테스도 잘 한 것은 없다.
동양에서는 [가화만사성]이라고 하여, 가정의 화목이 모든 성공의 기초인 것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동양인의 시각에서는 서양의 철학자들이나 사상가들이 탐탁치자 않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3대 철학자들은 상당한 '말재주' 를 가진 사람들이었으며, 그러면서 '말장난'이 많았던 사람들로 자신의 [논리철학소고]에서 묘사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소피스트의 대표주자인 프로타고라스에 대해서 말해보자. 그냥 편한 형식의 글로 시작한다.
프로타고라스는 탁월한 선생이었다.
늘 수업준비를 잘하였고, 비싼 수업료를 받았다.
지금으로 말하면 잘나가는 대형학원의 억대연봉을 받는 대강사라고 생각하면 쉽다. 그에게 수업을 받는 학생들은 아테네에서 내로라 하는 귀족층 자제들이었다. 그는 호화주택도 장만했고, 하인들도 여럿이 있었다.
수업이 시작된다.
"어제 말한 대로 오늘은 각자가 준비한 질문들을 풀어 보는 시간을 갖겠다.
누가 먼저 시작하겠는가?"
그러자 한 학생이 질문을 던진다.
"선생님, 신은 정말 있습니까?"
프로타고라스는 질문을 역으로 다시 던진다.
"너는 신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학생은, "예, 하지만 확신이 없습니다."
프로타고라스는, "내게 신이 있다는 확신이 있으면 신은 있다. 그러나 만약 네가 신이 없다고 믿는다면 신은 없다." <<읽는 이들은 궤변처럼 들릴 것이다.>>
"그러면 신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입니까?"
"아니다. 신은 항상 없고, 또 항상 있다. 신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신이 항상 있고, 신이 필요 없는 사람들에게는 신이 항상 없다. 너는 신이 필요한 사람이냐?"
"아닙니다. 저는 신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너에게는 신이 없다. 중요한 것은 신이 아니라 바로 너 자신이다.
신도 종교도 세상도 모두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너 자신을 위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네가 필요로 하지 않는 신이란 존재할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다른 학생이 질문한다.
"선생님, 저희 부모님께서 제게 술을 먹지 말라고 가르쳤는데 그것은 술이 몸에 해롭기 때문입니까?"
"술이 반드시 몸에 해로운 것은 아니다. 건강한 사람이 먹으면 오히려 건강에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병약한 사람이 먹으며 술은 독이 된다. 때문에 술이 모든 사람들에게 나쁘다고 할 수도 없고, 또 모든 사람에게 좋다고 할 수 도 없다. 그 사람의 건강상태에 따라 다른 것이다. 다만 지나치게 술을 많이 먹으면 중독되어 건강을 해치게 되니 건강한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필요 이상으로 많이 먹어서는 안된다....<<중략>>
모든 것은 개인의 상황에 따라 다른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절대적으로 좋거나 나쁜 것은 없다."
이런 글을 대하면 현명한 카운셀러나 상담가의 모습이 보인다.
이제 소피스트에 대한 시선이 달라지지 않는가?
또 다른 학생이 질문한다.
"선생님, 진리가 무엇입니까?"
프로타고라스는 또 되묻는다.
"너는 진리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정의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진리이다. 진리는 항상 일정한 것이 이나다. 사람마다 다른 진리가 있는 것이다. 자신이 진리라고 믿는 그것이 진리인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비록 진리라고 믿는 것일지라도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
"방금 너는 정의를 위한 길이 진리라고 했는데, 정의란 무엇이냐?"
"법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만약 법이 너를 궁지로 몰아넣는다고 해도 너는 법의 편에 서겠는가?"
.... 점점점... 그리고 아무 말도 못하였다.
"보아라, 당장 너조차도 네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인해 피해를 볼 수 있지 않느냐, 진리는 바로 그런 것이다. 진리는 사람들에 따라 다르기도 하지만 입장에 따라 달라질 수가 있다. 말하자면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는 없다는 뜻이다."
프로타고라스는 [모든 것을 결정하는 잣대는 바로 자기 자신] 이라고 가르쳤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정말 맞는 것 같다. 나는 크리스찬이다. 기독교의 진리를 항상 신봉해왔고, 지금도 변함이 없다. 프로타고라스의 이 글을 읽으면서 나는 다시 생각을 해본다.
그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 라는 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프로타고라스는 철저한 상대주의의 입장에 서 있다.
진리나 정의 또한 법은 상당히 절대주의의 입장이다. 그런데 그는 인간을 단순히 만물의 척도만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 척도라고 가르친 것이다.
그는 모든 사물은 자기 자신에게 나타나는 대로 판단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를 철학에서는 [상황윤리] 라고 말을 한다. 종교와 도덕, 신 등의 관념적인 것들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종교와 도덕도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다. 신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고 단정하고 선언하는 것이다. 종교와 도덕이 자신을 억압하고 못살게 군다면 그것은 도리어 인간의 행복에 해가 되는 것이므로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은 선악에 관해서도 각자의 느낌에 따라 느낄 뿐이다" 라고 주장한다. 그는 보편적인 잣대는 없다고 보고 도리어 자기 자신의 잣대로 판단하는 것이다.
진리도 마찬가지이다. 자기가 진리라고 확신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진리관이다. 살다보면 수많은 지성인들을 만난다. 이들에게도 나름 자신들만의 진리관이 있다. 현대판 소프스트들을 우리는 흔히 만난다. 설사 그가 학자요, 교수요, 전문가라고 해도 말이다.
프로타고라스는 결론적으로 말한다.
"개인적인 경험을 넘어선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는 없다. 진리는 단순한 관념이 아니라 경험에 의해서 얻어진다. 때문에 개인의 경험을 넘어선 객관적인 세계를 상정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나는 오늘 그의 글을 준비하면서도 반박과 비판을 할 준비는 되어 있다. 하지만 반대로 이들이 상대주의적. 경험주의적 학문세계는 배워볼만 한 부분이 상당히 많다. 20세기 21세기는 절대주의적인 가치체계가 상당수 와해지고, 상대주의적이고 그러면서 경험주의적인 가치체계가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매스 미디어를 보면 이를 확인해 볼 수 있다.
개인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개인의 생각, 사고, 가치관, 진리관이 존중되어지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오늘은,
소피스트의 재발견을 하는 하루였다.
(2021년 작성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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