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움베르토 에코라 불리우는 석학이 있다.
바로 김용규 박사이시다.
이 분은 프라이부르크에서 철학과 신학을 전공하고
두 개 분야의 박사를 한 석학이다.
현역에서는 교수생활을 하지 않았지만
그는 이미 가장 뛰어난 저술가로, 강연가로, 학자로
정평이 나 있는 인문학자겸 신학자이다.
그가 쓴 책중에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이라는 책이 있다.
그 책은 고 이병철 회장의 질문이 담겨 있고,
이 질문에 응답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이 담겨 있다.
인간은 히브리어로 '에노쉬'라고 하는데,
이는 '질문하는 인간'이다.
탈무드 미쉬나에 보면,
신이 십계명을 주셨을 때, 원래 11계명을 주셨다고 한다.
그 11계명은 다름 아닌, "질문하고 배우라" 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나 자신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편의상 '하나님'이라고 부르겠다.
김용규 박사가 쓴 저작을 중심으로해서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들을 나름의 방식대로 풀어가고 싶다.
제 1 질문은,
"신(하나님)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드러내 보이지 않는가?"
어렸을 때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어보면서
신은 늘 존재하는 것이라고 그냥 믿으면서 읽었다.
또한 내가 살던 고향에서는 유교적 가풍이 강하여서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기도 하고
죽으면 사람이 혼령이 되거나, 귀신이 된다는 것에 대해서도
암묵적으로 동의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이성이 발달하면서 자연스럽게 신의 존재에 대해서 의심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신의 존재에 대한 흐릿하지만 무엇인가 우주에는 절대법칙이 존재할 것이라는 지각도 생겨났다.
초등학교 5학년 시기에 나는 자연과학서들을 보다가 '이 지구가 한치의 오차도 없이 도는 것' 그리고 '태양계가 서로 충돌하지 않고 도는 것'에 신기하였고, 무엇보다 내가 차고 있는 시계보다 더 정확하다는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나는 그 후로 내가 믿는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었고, 그리고 신앙의 세계에 들어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만약에 제우스(Zeus)라는 신이 있다면 우리는 이 신의 존재를 인정하려고 할까?
나 자신도 인정하지 않지만, 김용규 박사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럴려면 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또한 제우스 신이라는 것이 신화적인 신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쉽다. 그것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조작하여 만든
허구적인 신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의 존재를 규명하려고 한다면 신은 그 모습을 더욱 숨길 것이다.
김용규 박사는 신의 존재를 과연 입증할 수 있을까? 어떻게 가능한가? 그리고 그 의미는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나 자신도 그런 탐사나 탐험은 수시로 하고 했다.
그럴려면 우리는 구약성서, 히브리 성서로 달려가보아야 한다.
구약에 보면 야곱이라는 사람이 묻는다.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십시오"
그러자 하나님은 "어지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라고 답하신다.(창세기 32장 29절)
그래서 이사야라는 걸출한 대선지자는 "스스로 숨어계시는 하나님"(이사야 45장 15절) 이라고 묘사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하나님의 존재를 밝힌 곳이 한 군데가 있다. 바로 지도자 모세가 호렙산에서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 신을 만나는 장면을 기록한 출애굽기 3장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80세가 된 노인 모세에게 이집트에 가서 노예로 사는 히브리인들을 구출해 내라고 명한다.
모세는 누구인가? 그는 이집트 궁정에서 자랐지만 사람을 죽이고, 도망쳐서 미디안 광야까지 간 인물이다.
그런데 여기서 당돌한 질문을 모세는 던진다. 3장 13절에 보면,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으로 그들에게 말하리까?"
여기서도 구체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밝히시지 않는다. 그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라고만 하신다.
출애굽기 3장 14절이다. 이 구절에서 '야훼' 하나님이 등장한다. 이 뜻은 "그는 있다. He is" , 또는 :"He exists" 그는 존재하신다. 라는 뜻이다. 이를 히브리어로 하면 "에흐에 아세르 에흐에" 이다.
여기서 모세의 질문에 하나님이 답변은 놀랍다.
"나는 존재한다" 라는 것이다. 이 말에서 이 글을 쓰는 나 자신도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은 "나는 존재다" 라는 말로 바꿀 수 있다.
히브리인들에게는 그냥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믿음인 것이다.
이를 다른 사람에게 접근시켜보자.
누군가 자신을 소개할 때 "나는 사람이다" "나는 살아있는 사람이다" 라고 할 때
이 말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리고 언어자체에 모순을 안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모순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일까?
오래전에 유대인 회당에 다닐 때,
이들은 이 기도를 자주 드린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엘로헤이 아브라함, 엘로헤이 이치하크, 엘로헤이 야코브" 이라는 하나님의 호칭을 사용한다. 혹은 "만군의 야훼 - 아도나이 쩨바호트"
이를 들으면서 이들의 기도에는 '하나님의 존재'를 깊이 인정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렇다면 '존재' 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이 존재는 철학적인 의미를 갖는다. 존재란 무엇인가? 서양신학에서는 '모든 존재물이 그로 인해 생겨나서, 그 안에서 살존재하다가, 그 안에서 소멸하는 무한한 바탕'이라고 본다. 어떤 존재가 없다면 존재물도 없다는 것이다.(김용규의 책 29p, 철학자 파르메니데스 인용)
로마서 11장 36절을 보자.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도 돌아감이라"
이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서 나온 것이 위에 있는 말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그저 우리가 보는 물건이나 물질과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존재물들을 있게 한 존재로 묘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이태리에 가보면 시스티나 성당에 보면 '천지창조와 인간창조'의 그림이 담겨 있다.
이 그림에는 아담과 신의 손가락이 등장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할아버지는 다름 아닌 제우스신이다.
신을 사람의 형상으로 만들어서 표현한 것 자체는 성경에 크게 위배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본질을 나타내는 그림이 아니다. 성서로 돌아가보자.
성서에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다" 라는 것을 가장 많이 앞세운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낼 때면 천둥, 바람, 불등의 것으로 자신의 위용과 능력을 보여준다.(출애굽기, 신명기등) 꿈과 환상을 통해 나타내시기도 한다. (창세기, 열왕기서, 다니엘, 에스겔) 또한 천사의 모습이나 인간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다니엘, 창세기) 또한 사람들과 대화하고 말씀을 나누는 분으로도 묘사된다.(출애굽기, 민수기) 하지만 이것이 신이 자신을 나타내는 여러 방법일 뿐, 신이 가진 본래의 모습은 아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자신을 숨기신다.
그래서 신약을 살펴보자.
요한1서 4장 12절을 보면,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라고 한다.
디모데전서 6장 16절을 보면,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으되" 라고 한다.
그래서 에스겔 선지자는 신의 모습을 "멀리 계시는 하나님 - 여호와 샴마" 라는 말을 한 것이다.
멀리 계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로 다가온다면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이 되신다.
그래서 인간의 모습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론'이 등장하게 된다.
의심의 화신인 사도 도마가 있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이 다시 살아났다는 말을 듣고,
"내가 그의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가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한복음 20장 25절) 라고 외쳤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우리 인생에게 믿을 것인지, 의심할 것인지의 자유까지도 허용되는 존재임을 본다. 우리에게 신은 자유의지를 주어서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며 살아가게 한 것이다. 그런데 이 도마의 말에 예수께서는 이렇게 답하신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한복음 20장 29절)
나는 도마만한 사도는 없다고 본다. 그는 나중에 '도마복음'을 남긴다. 의심의 화신이 확신의 화신이 된 것이다. 영국에 토마스라는 이름이 많은 것은 도마의 전도를 받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흠모하기 때문이다. 인도에는 아직도 도마교회의 흔적과 남은 자들이 있다. 심지어 가야과 신라에는 도마의 전도를 받고 온 허황후나 김수로왕의 이야기들이 남아 있다. 놀라운 일이다. 신화인지, 전설인지는 모르지만 도마라는 사람의 존재는 그 자체로 신비한다. 도마의 하나님은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신비한 것이다.
요즘에 불가지론자나 무신론자들 중에는 다양한 신에 대한 부정을 한다.
하지만 이들은 그렇게 할 자유의지는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의 말을 또 믿어야 한다.
일종의 신앙이나 종교적인 태도를 요구한다. 우리가 신을 파악할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신이 아니다.
우리가 신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그분은 신이 되시는 것이다.
기독교가 단순히 말하는 하나님은 모든 존재물들을 존재하게 하는 근원으로서 그것들을 통해 태초부터 지금까지, 혹은 종말까지 자신의 존재를 부단히 그리고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 기독교의 답이다. 단지 우리가 이를 인식할 수 없을 뿐이다.(김용규의 책 41p) 왜 인식 못하는가? 이는 우리가 신은 무한하고, 불가시적이며, 이성으로는 도무지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대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인 아우구스투스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신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 뭐 그리 놀라운 일인가? 만약 네가 그분을 파악한다면 그분은 신이 아니다."
그렇다면 윌는 볼 수도, 인식할 수도, 파악할 수도 없는 신의 존재를 도대체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라는 난제중에 난제가 따라온다. 이것이 첫 번째 이병철 회장의 질문인 것이다. 두 번째 질문은 시편 14편과 53편을 가지고 풀어본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성경에서 가장 큰 죄는 교만 같아도, 실은 어리석음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다루기로 한다. 김용규 박사님이 계시니 든든하고 참 좋다.
[잊혀진 질문] 이라는 책을 쓴 고 차동엽 신부의 책도 같이 살펴볼 것이다.
또한 [메멘토 모리]를 쓴 고 이어령 박사의 책도 같이 살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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