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음어 呻吟語] - 중국 명나라의 사상가 여곤(1536-1618)
“세상을 사는 데는 단지 서恕 하나의 글자가 필요하다.”
[處世只一恕字 처세지일서자]
인문학 공부가 참으로 재미가 있습니다.
인문학이라고 함은 철학, 문학, 역사학, 법학, 미술과 음악학, 건축학 등 인간생활에 반드시 필요하고 없어서는 안될 분야를 다룹니다
하지만 철학 하나만 고집한다면 그는 진정 인문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또한 음악이나 미술이라는 예술학에만 빠져 있다고 해도 균형잡힌 인문인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인문은 곧 인간의 무늬를 나타냅니다. 인문학은 종합적이면서 포괄적입니다.
인문학은 사실 산과 숲을 보는 학문이며,
인생의 체계요 대계가 됩니다.
나이가 들면서 인문학에 대한 재미가 솔솔합니다.
예전에 읽히지 않는 책들이 이제는 읽혀지니
그것 또한 재미가 있습니다.
예전에 미처 깨닫지 못한 것들이 이제는 깨달아지니
그것도 또한 재미가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사람이 40전까지는 이공학적으로 살고,
40이후에는 인문학적으로 살아라” 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중반부에 다다른 사람들은 반드시 인문학과의 만남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40이후의 불혹의 삶에는 ‘인문학적인 질문’이나 ‘인문학적인 순간’이 다가옵니다. 그러한 순간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그렇지 못하여 인생이 꼬이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만큼 인문학을 할 정도의 [인생기초]가 결여되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배려’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쉽습니다.
배려라는 것은 상대방의 기분과 입장을 생각해주며, 상대방을 자신보다 높이려는 태도와 자세를 말합니다. 이것이 결여되면 인간관계에서 인간미(humane beauty)가 전혀 없는 사람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인문학을 한다는 사람은 이러한 인간미를 제대로 갖춘 사람이어야 합니다. 남을 배려할 줄 모르면서 인문학을 안다고 깝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었어도 여전히 자신의 혈기와 감정을 못이기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인문학이 필요하지만 사실 사람이 한순간에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서서히 바뀌거나 달라집니다. 인문학은 오랜 시간의 ‘숙성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친구도 오랜 친구가 좋고, 포도주도 오랜 포도주가 좋습니다. 오래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믿음이 가는 것이고, 가치가 지속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소개할 책은 [신음어] 라는 중국의 여곤이라는 사상가의 책입니다.
그의 책은 마치 이스라엘의 위대한 랍비였던 ‘힐렐’의 황금률을 보는 것 같습니다.
또한 신약성서 예수의 황금률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먼저 랍비 힐렐의 이 드라마틱한 일화를 소개합니다.
.
하루는 유대교에 관심이 깊은 이방인 한 사람이 힐렐에 버금가는 다른 한 파의 유대교 지도자 샤마이를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랍비여, 제가 이렇게 한발을 들고 서있는 동안에 당신이 가르치는 율법 전체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시면 유대교로 개종하겠습니다.”
그랬더니 샤마이가 화를 내면서 말했습니다.
“아니 여보시오. 내가 한 평생 공부하고 연구해도 부족한 이 율법을 그렇게 간단하게 한 마디로 설명을 해 달라니 말이 됩니까. 거 참 아주 무례하기 짝이 없구려. 당장 여기서 꺼지시오.”
실망한 이방인은 다시 힐렐을 찾아가서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랍비여, 제가 이렇게 한 발을 들고 서있는 동안에 당신이 가르치는 율법 전체가 무엇인지 가르처 주시면 유대교로 개종하겠습니다.”
온유한 힐렐은 웃으며 대답했다.
“네 잘 오셨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당신에게 싫은 것은 남에게 하지 말라. 이것이 율법의 전부요, 그 밖의 것은 주석에 불과합니다.”
이 말에 크게 감동받은 그 이방인은 유대교에 귀의했다 합니다. 그리고 후세인들은 그 교훈을 ‘힐렐의 황금률‘이라 했습니다.
또한 공자가어인 논어에도 이와 비슷한 구절이 나옵니다.
공자의 제자인 자공이 말합니다.
“스승님 사람이 평생 갖추어야 할 실천덕목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공자는
己所不慾 勿施於人(기소불욕 물시어인)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 베풀지 말라”로 제자를 일깨웁니다.
오늘의 ‘恕 서’자는 정말 심오하고 신비한 말입니다.
공자의 제자인 증자는 ‘忠恕 충서’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 말은 랍비 힐렐도 사용했고, 공자도 사용했습니다.
참으로 동서양의 위대한 사상가들은 서로 생각하는 수준과 깊이가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말을 압축하여 사용한 명나라의 여곤 또한 위대한 사상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라는 예수의 황금율은 ‘적극적 황금률’이라고 한다면, 공자의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 베풀지 말라” 는 소극적 황금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恕 서’ 라는 한자속에 놀라운 인생의 황금률이 들어 있습니다.
이를 나는 ‘서의 정신’이라고 부르렵니다.
오늘의 ‘恕 서’자는 정말 심오하고 신비한 말입니다.
공자의 제자인 증자는 ‘忠恕 충서’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신음서에서 나온 ‘서’라는 것은 자신이 하기 싫어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시켜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곤 선생은 여기에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입니다.
“서, 그것만으로는 충분치가 않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라도 사람에 따라 하고 싶지 않은 일도 있다. 이 점을 이해하고 나면 더할나위 없는 인생의 묘미가 살아날 것이다.”
요즘 ‘갑질’이라는 말이 가끔 나옵니다. 이 말은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싫은 말이나 일들을 하여서 다른 사람들에게 전혀 배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기분이나 감정, 혹은 자존심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거지같은 지위, 되먹지 않은 권위주의를 발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악덕 기업주들’도 이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어용 정치인들’ 이나 ‘온갖 거짓으로 사람들을 혹세무민하는 관료들이나 거짓 목회자들(이단들)’도 이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유연한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면서 정의로운 판단을 해야 하고,
다른 이들을 위하여 기꺼이 제몸같이 사랑하는
‘이웃사랑의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입장에서 남의 형편이나 상황 조건을 살피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역지사지 易地思之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정신이 바로 평생 우리가 간직해야 할 정신입니다.
우리가 인문학을 배우는 이유는 바로 [위인지학]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배워서 남주자’ 라는 것입니다.
‘인문학적 통찰력’을 기르라는 것입니다.
인문학적 통찰력은 그것이 생각에서 출발하여, 깊어지고, 실행력이 생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결국 궁극적인 삶의 재미 - 행복에 다다르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살아가고, 나의 행복을 위해서 남의 불행을 만드는 일을 막는 길이 바로 인문학적 통찰력입니다. 서로 행복하고, 같이 행복하고, 더불어 행복하고, 그리하여 행복한 나가 많아지면 행복사회요 행복국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이 황금률인 -서의 정신을 추구하면서, 더불어 행복한 세상, 더 나아지고 개선된 세상(히브리어로, 티쿤 올람)을 만드는 일에 같이 동참해야 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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