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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과 고전 이야기

명길묻 18, [마지막 수업], [마지막 강의] 인문학적 읽어내기

by 코리안랍비 2022.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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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데의 마지막 수업 - 슬프면서 의미심장한 이야기 표지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 일러스트 구글출처 이미지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
그리고 랜디 포시의 <마지막 강의>


살면서 가끔은 '시나 소설처럼 살고 싶다'라는 의식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아직도 내 마음에 그런 감수성이 남아 있다면 여전히 가능한 삶입니다. 하지만 삶이라는 것이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며 숨가쁘게 돌아갑니다. 다양한 상황들이 펼쳐집니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돈이 마치 전부인 것 같은 인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세상 근심에 사람들은 '전쟁 같은 나날'을 보낸다고 말을 합니다.

세상은 전쟁터와 비슷합니다. 그냥 물리적인 전쟁만 아니라 경제 전쟁도 있고, 종교적으로는 영적 전쟁도 있습니다. 거기에 우리 속을 보면 마치 '쓰레기장'처럼 복잡하고, 많은 사람들과 사건들과의 관계속에서 피곤하고 지친 자아를 갖고 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때 나는 나름대로 처방이나 클리닉을 내립니다. 바로 '명작'이나 '고전'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분명한 답보다는 '더 나은 답'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또한 답답한 현실에 짖눌리지 않고 시나 소설처람 사는 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의식을 갖추게 되는 시기는 아마도 고등학교 시절의 문학수업이었던 것 같습니다. 문학을 가까이 하는 것이 바로 나 자신을 정화시켜주는 순수의 기능과 그리고 나 자신의 감수성을 여전히 유지해주는 역할을 감당하기 때문입니다.

고1 문학수업에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과 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알퐁스 도테라는 사람의 글은 마치 소년이나 소녀가 써내려간 것 같은 아름다운 그림이나 풍경을 연상하게 만들었습니다. 몇 번이고 읽고 읽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단편소설을 거의 외우다시피 하였습니다.

또한 프랑스에 언젠가 여행을 가서 알퐁스 도데의 프로방스 지방도 방문하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의 대부분이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방을 배경으로하였기 때문이며 그곳의 아름다운 경치와 그 곳 사람들의 생활상이 잔잔히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 구글출처 이미지

 

오늘
글과 그림은 같은 어원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글이나 그림은 둘다 '긁다'에서 어원이 왔다고 하는데 글과 그림이 같이 어우러져 있는 작품을 알퐁스 도데는 담아 낸 것입니다. 거기에 그는 사람들 사이에 피어나는 사랑의 감정, 기쁨과 슬픔을 서사적으로 담아내는 것에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독일의 헤세나 프랑스의 도데나 이들은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거나, 고등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문학기법이나 양식도 제대로 익힌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만의 색채와 감정으로 자신들만의 글과 문학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들은 '자기 삶의 아트스트'였습니다.

도테의 작품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아이들에게 문고전집을 사주면서였습니다. 세월이 벌써 흐르고 흘러서 이제는 소년 소녀 시절의 감성은 무디어졌지만 자라나는 아이들의 가슴속에 그런 문학적 감수성은 힘들고 우울한 현실에 대한 보상이요 치료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수시로 '문학읽기'를 강조하였습니다. 사람이 글을 읽고 쓸줄 아는 나이가 되면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마땅한데, 이상하리만큼 한국사회는 표현에 인색하고, 질문에 인색하고, 풍부한 감정을 갖추는데 인색하다는 것입니다.

집에는 수많은 문학서들이 있지만 결국 그 문학서를 읽는 사람은 나였습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내는 과제를 할 때만 책을 보고, 평상시에는 '휴대폰 삼매경'에 빠져 지내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알퐁스 도데의 책을 둘째 딸아이가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서 나에게 말했습니다.

"아빠, 알퐁스 도데를 아세요?"
"그럼 너무나 잘 알지"
"아빠, 알퐁스 도테는 왜이리 글을 예쁘게 썼죠, 책이 여류작가가 쓴 것 같아요"
"알퐁스 도데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소중한 어린 시절의 기억을 간직하는 것과 같단다"

고등학교 1학년 시절 몇번이고 읽었던 <마지막 수업, 별>에 대한 기억은 지금도 강렬하여 나는 다시 그의 단편을 읽었습니다.


<프란츠라는 소년>

마지막 수업에는 '프란츠'라는 한 소년이 등장합니다. 지금도 생각해보면 이런 어린이는 어디나 있습니다. 학교를 다니면서도 지각하기 일쑤이고, 그리고 수업을 못 따라오고, 제 멋대로인 그런 어린 학생들은 항시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린 프란츠의시각으로 도데는 조국에 대한 사랑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도데는 젊은 시절 군복무를 하면서 [보불전쟁]에 참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조국 프랑스에 대한 강한 애국심과 자기 민족에 대한 민족애도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단편에는 '아멜 선생님'이 등장합니다. 평소 무섭고 화를 잘 내는 아멜 선생님은 마지막 수업 날이 되어서 늦게 온 프란츠를 혼내지 않습니다.

"프란츠, 하마터면 너를 빼놓고 수업을 시작할 뻔했구나. 어서 네 자리로 가거라"

평소에 초등학교 시절에 지각을 하는 아이들은 담임에게 많이 혼났던 것이 기억납니다. 하지만 6학년 졸업할 무렵이 다가오면 담임은 마치 온순한 어린 양처럼 학생들에게 온유하게 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장난도 많이 치고 개구장이 짓도 많이 하고, 친구들과 많이 다투기도 하였던 초등학교 시절이지만 졸업할 때는 너나없이 진지해지고 결국에는 졸업식 노래를 부르면서 눈물을 쏟습니다. 손에는 꽃다발을 들고, 졸업장과 부상으로 받은 상품을 지고서 사진을 찍습니다. 담임 선생님은 하나 하나 웃으면서 사진을 같이 담습니다. 그리고서 그 선생님과의 마지막 인사를 합니다. 마음은 벌써 중학교에 가 있습니다.

<마지막 수업의 풍경>
아멜 선생님은 초록색 프록 코를 입고 검은색 비단 모자를 쓰고서 학생들을 기다렸습니다. 교실 안에는 다른 마을 사람들도 와 있었습니다. 당시 프란츠의 알자스는 독일의 침공으로 프랑스어를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아멜 선생님은 진지하게 마지막 수업을 진쟁합니다.

"자 모두 주목하세요. 여러분은 내일부터 독일어를 공부하게 돼요.
새 선생님이 오셔서 독일어를 가르칠 거예요. 알자스와 로렌 지방의 학교에서는 이제 독일어 외에는 공부할 수 없게 되었거든요. 오늘 여러분은 저와 함께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프랑스어 수업을 하게 되었어요. 마지막 수업이니만큼 여러분 모두가 내 말을 끝까지 귀기울여 주기 바랍니다."

아멜 선생님의 이 말에 짖궂고 장난끼많은 아이들은 모두 상기된 표정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이를 어쩌지? 나는 아직 프랑스어를 제대로 쓸 줄도 모르는데, 이제 더 이상 프랑스어를 배울 수 없다니 ! 프랑스어를 더이상 배울 수 없다니....."

그 순간 프란츠는 물새알을 찾아 풀숲을 뒤진 일들, 얼어붙은 강에서 얼음을 지치던 일들, 그렇게 헛되이 보낸 시간들을 후회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프랑스어를 배울 수 없다는 것과 이제는 오랜 친구들과 헤어져야 하는 아쉬움, 거기에 40년 이상 학생들을 가르친 아멜 선생님과의 헤어짐에 그는 프란츠는 슬픔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을 무서워하고 미워하던 나쁜 기억들도 사라집니다.

마지막 수업에서 , 아멜 선생님은 이런 저런 생각으로 복잡한 프란츠에게 "프란츠에 네 차례다" 그러나 프란츠는 프랑스어의 동사 변화를 제대로 외울 수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실수를 연발합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그러자 아멜 선생님은, "프란츠야, 널 야단치지 않으마. 넌 충분히 반성하고 있을 테니까 사람들은 항상 '우리에게 시간은 충분해. 오늘 못한 일은 내일 하면 되는 거 아니야' 하고 말하지.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고 내일 할 일은 모레로 미룬 결과가 어떻지?"

아멜 선생님의 이 대사를 보면서 초등학교 교실로 다시 타임머신을 타고 간 기분이 듭니다. 초등학교 5학년까지 나는 제대로 공부를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흔한 동화책도 제대로 읽지도 못했고 선생님이 물어보는 질문에 제대로 답변해 본 적이 없습니다. 공부를 제대로 못하면 정말 사람구실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지만 책은 나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프란츠, 너 혼자만의 잘못은 아닐 거야. 우리 모두 반성해야 할 일이지. 한 푼이라도 더 벌어 보려고 너희들을 학교 대신 밭이나 공장으로 보냈던 너희의 부모님들도 반성해야지. 그분들은 너희들의 교육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으셨으니까"

가난하고 헐벗은 시절의 누나와 형들은 일찍 상업이나 실업계 학교를 가고, 방직공장에 취업하기도 하고, 야간 고등학교를 다니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이 부모와의 관계를 상실하게 하고 벽을 쌓게 하였습니다.

"프랑스어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말이다. 국민이 설혹 노예의 처지가 되더라도 국어만 잘 지키고 있으면, 스스로의 손에 감옥의 열쇠를 쥐고 있음과 다름 없다" 라고 말하면서 그는 프랑스어를 절대 잊어버리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프란츠는 마지막 수업을 정성을 다해서 들었습니다. 아멜 선생님은 칠판에 '프랑스, 알자스, 프랑스, 알자스'라고 썼습니다. 그 두 단어에 그저 학생들은 가슴이 매였습니다.

그 순간 풍뎅이 몇 마리가 교실로 날아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풍뎅이보다는 선생님의 마지막 프랑스어수업에 집중하였습니다. 또한 비둘기가 울기도 하였습니다. "과연 비둘기들도 독일어로 지저귀게 될까?"

선생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서 수업을 진행했고, 애써 눈물을 참고 있었습니다. 프란츠는 "나는 죽을 때까지 마지막 수업을 잊지 못할 것야!" 이런 생각에 잠길 때 밖에서는 프로이센 병사들이 훈련에서 돌아와서 부르는 나팔 소리가 교실 창문 밑에서 울려 퍼졌습니다.

그 순간 아멜 선생님은 교단에 올라서서, ' Vive La France 프랑스 만세'를 썼고 어지러운 듯 칠판에 이마를 대고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말없이 손짓합니다.

"자, 수업 끝났어요. 모두들 돌아가요"

이렇게 짧은 단편은 끝나고 프란츠에게는 그 아멜 선생님이 키가 그렇게 커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고 말합니다. 선생님은 누구보다 큰 사람입니다. 마음속에 큰 사람을 두고 프란츠는 살아갔을 것입니다. 마음 속에 큰 사람이 있는 사람, 모국과 모국어에 대한 사랑이 있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아멜 선생님의 마지막 모습도 실루엣처럼 펼쳐집니다.

 

  • 스브스 뉴스 - 마지막 수업 - 프랑스 만세 - 슬픈 역사
    스브스 뉴스 출처 이미지



<알자스 . 로렌에 대하여>

원래 알자스와 로렌은 독일계 사람들의 땅이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이 오스만투르크와 싸우는 틈을 타서 프랑스가 그곳을 침공하여 자신의 땅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독일어보다는 프랑스어를 가르치게 하였고, 독일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알자스보다 먼저 합병된 로렌은 결국 프랑스어화가 되었지만 알자스는 오랫동안 독일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소설의 모순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원래 독일어를 사용하던 알자스 사람들이 초등학교에 가서는 기초 프랑스어를 배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프란츠는 프랑스어가 싫었던 모양입니다. 자신의 모국어외에 다른 나라의 언어를 한다는 것은 그리 달가운 일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고향 알자스에 대한 강한 향수를 가지고 있는 알퐁스 도데는 프랑스어에 대한 자부심도 강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수업은 '프랑스 만세'라는 말로 끝났던 것입니다.

또한 주인공의 이름부터가 프랑스어식 프랑수아(Francois)가 아니라 독일식인 프란츠(Franz)에서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알자스 지역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독일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프란츠가 프랑스어를 제대로 못하게 된 것도 익숙한 말이 아니어서 그렇습니다.

한국의 전재경 작가는 <최후의 교실>이라는 소설을 씁니다.
아마도 도데의 작품을 보고서 연상한 것 같습니다.

"학생들, 이것이 최후의 조선어 시간이요."

그러나 그 다음 말이 그만 막히고 말았다.

마지막 수업에 어느 누구도 아무 말도 못하였음은 그 분위기가 얼마나 엄숙하고 비장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약 10여년전에 읽었던 <마지막 강의>가 생각납니다.

  • 알자스 로렌 - 스브스 뉴스 출처 이미지
    스브스 뉴스 출처 이미지 - 프랑스어와 독일어
  • 스브스 뉴스 출처 이미지




<마지막 강의 - 랜디 포시>
카네기 멜론 대학의 컴퓨터공학부 교수였던 랜디 포시가 있습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종신교수(테니어)라는 명예를 얻었습니다. 그가 만든 단어가 바로 'virtual reality 가상현실'입니다. 그는 2007년 9월 "당신의 어릴 적 꿈을 진짜로 이루기"라는 제목으로 마지막 강의를 합니다. 그의 마지막 강의가 있기 몇 달 전 랜디 포시 교수는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고 그는 강단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시한부 6개월'은 최강의 독재자 시간이 내리는 '사형선고'였습니다. 그 당시 그의 나이는 46살이었습니다. 그는 늦게 결혼하여 자녀들은 무척 어렸습니다.

카네기 멜론 대학의 교수강의를 접고 그리하여 그는 가족들과 함께 버지니아 주에 거주하였습니다. 그런데 생을 얼마 남겨 놓지 않고 대학에서는 마지막 특강을 요청하였습니다. 이 강의에서 랜디 포시 교수는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고백하고, 학생드에게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해 왔는지를 역설하면서 희망과 용기를 주는 내용으로 특강을 진행합니다.

그의 강연중에서 마치 자신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수많은 난관과 역경을 물리치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코 앞에 다다랐는데 '너는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을 들었던 모세와 같은 심정이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에게 닥친 장벽을 생각하였고, 자신의 어린 자녀들을 생각하였고, 자신이 가르친 제자들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절망하며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는 행복한 삶은 지금이며,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것이며, 매일 매일을 감사하며 살기를 당부하였습니다. 오늘을 힘겨워하는 우리에게 내일을 살아갈 용기를 선사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잃어버렸던 어린 시절의 소중한 꿈을 되찾는 방법도 알려줍니다. 그의 아름답고 찬란했던 순간은 고스란히 <마지막 강의>에 담겨 있습니다.

그의 인상깊은 구절 몇 가지를 지면을 빌려서 남겨봅니다.

"지금이 마지막이라면 어떤 지혜를 세상에 나눠 줄 수 있을 것인가,
내일 당장 사라진다면 무엇을 유산으로 남길 것인가"

"당신 스스로 당신의 꿈을 허락하라"

"경험이란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때 얻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경험은 당신이 가진 것 중 가장 가치 있는 것이다"

"시간은 당신이 가진 전부다. 생각보다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 장벽은 당신을 가로막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제외한 사람들을 걸러내기 위해 존재한다"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가장 지독한 항암치료를 기꺼이 받으며 어떻게든 살아서 세 아이에게 아빠라는 존재를 선물해 주고픈 그였습니다. 그토록 그가 원했던 오늘을 살고 있는 나로서는 그의 <마지막 강의>라는 책에 오열을 하고 말았습니다. 나도 세 아이의 아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직 살아있는 것을 감사하면서 하루하루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해서 보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만약 나에게도 <마지막 수업>이 있다면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나는 떠납니다. 잘 있어요" 가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심사숙고하여 '유언장'도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지나치게 도덕적이기 보다는 높은 모범을 보이려고 노력하고 싶습니다. 또한 주어진 삶을 즐기면서 살렵니다. 물고기에게는 물이 중요하듯이 사람에겐 삶을 즐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삶을 즐길 줄 아는 사라은 행복에 가까이 있고 삶을 즐기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에 가까이 있습니다.


랜디 포시 교수는 세상에 3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착하지만 가끔은 악한 사람
악하지만 가끔은 착한 사람
그 중간의 사람

세상에는 악하기만 한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착하기만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선과 악의 기준이 다르며, 선과 악의 정도도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사람도 나쁜 사람이라고 매도해서도 안되고, 나 자신도 나쁜 사람이라고 매도되어지는 것도 주의해야 합니다. 세상의 사람들중에 나쁜 사람이 아니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다른 영혼들을 매도하는 순간 결국 나는 세상에 속한 사람으로서 악한 존재로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 글을 준비하면서 사람들은 결국 두 종류가 있는 것 같습니다.
떠나는 자와 남는 자입니다. 만나는 자와 헤어지는 자입니다. 우리는 일생 누군가를 만나고, 누군가와 교제하고 대화를 나눕니다. 그리고 이별하고 헤어지는 일을 반복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만날 때 진실해야 합니다. 진실된 사람을 만나야 하며, 나 자신도 정직하고 진실된 사람으로 남아야 합니다. 그래야 함께 먼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진정한 동행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살면서 매일 맑은 날만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모든 땅이 삭막하거나 사막으로 변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소중한 하루하루의 선물을 아낌없이 써야 합니다. 낭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많은 장벽과 걸림돌에도 불평하거나 성급하게 굴지 말고 인내심을 가지면서 살아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살아온 기적이 있습니다. 앞으로는 살아갈 기적이 있습니다.

"내일이 내 인생의 마지막이라면 나는 오늘 어떻게 살 것인가?"를 스티븐 잡스는 수도 없이 되뇌이면 하루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도 랜디 포시 교수처럼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은 지금도 생생하게 우리 가슴속에 남아 있습니다.

알퐁스 도테의 <마지막 수업>과 랜디 포시의 <마지막 강의>라는 것의 인과관계는 서로 적을지 모르지만, '마지막 Last' 라는 말에서 적어도 '진지하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반추하는 귀한 시간을 갖자'는 의식이 생깁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죽음을 앞두고서야 인생의 소중함을,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걸까요?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살기도 바쁘게 살고, 죽기도 바쁘게 죽습니다. 전쟁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지만 금새 세월은 흘러 늙어가고, 병들어가고, 죽음을 향하여 갑니다. 그럴때 중간중간 삶의 쉼표를 찍으면서 생의 여행을 해보아야 합니다. 내 인생의 마침표를 찍는 날은 반드시 옵니다. 정녕 그런 시간은 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하루의 삶에서 악덕을 덜어내고 미덕을 쌓아야 합니다. 여전히 꿈꾸고, 여전히 사랑하고, 여전히 배우는 사람으로 남아야 합니다.

그래서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고 영원히 살 것 같처럼 배우라"는
탈무드의 말을 진중하고 엄숙하게 생각하는 하루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렌디 포시 - 카네기 말론 대학 교수 - 가상현실을 만든 사람
    구글출처 이미지 마지막 강의에 경의를 표합니다.
  • 렌디 포시 - 사망을 앞두고 가족 사진을 찍은 모습 - 눈물나는 사진 - 안녕히 가십시오.
    랜디 포시 교수의 3자녀와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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