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에서 철학을 한 진정한 쾌락주의자
에피쿠로스 Epikouros를 논하며
“육체는 항상 무한한 쾌락을 요구하지만, 지성은 뒤따르는 불편을 고려하여 욕망을 제한한다.” - 에피쿠로스
철학(哲學 사람을 밝히는 학문)이라는 말은 동양에서는 일본인들이 만든 한자이다. 그런데 그리스어로는 [지혜학]이라고 붙여야 맞는 말이다. 철학은 지혜에의 추구이며 사랑이기에 그렇다. 소피스트(Sophist)는 ‘지혜의 추구자’들이라고 부른다. 그리스에 가보면 왜 이곳이 철학이 발달한 곳인지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그리스의 복잡한 지형과 수많은 섬들, 리아스식 해안선 등을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교류하며 지식과 정보를 나누고, 수많은 학교가 지어지고, 그리고 각 폴리스별로 자신들만의 문화를 만들어냈다. 그리스는 다양성의 나라이다. 헬레니즘은 다양성을 추구하면서 발전한 문명사이고 문화사이다. 그래서 그리스가 서양문명의 젖줄이 되고, 서양학문의 근간을 이룬 곳이 된 것이다.
다양성의 추구가 가능한 땅, 그리스
이곳에서는 철학도 다양한 양상으로 나왔다.
오늘은 지난번 데모크리토스에 이어서 에피쿠로스라는 걸출한 철인을 소개하고자 한다. 물론 고등학교나 대학교에서 피타고라스, 스토아, 퀴레네, 에피쿠로스 등의 학자나 학파는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나이가 많이 들어서 다시 이러한 헬라파 철학자들을 등장시키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이가 들면 사람들은 철학이 주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게 되어 있다. 물론 대체적으로 철학서를 쳐다보지 않겠지만, 나 같은 사람이 있으니 가능할지도 모른다. 철학서는 무척이나 어렵고, 복잡하여 단순한 독서력으로 파고들어가기 어렵다.
오늘의 소개할 인물은 에피쿠로스다. 그런데 이 인물이 성서에도 등장한다고 하면 믿어지는가?신약성서 사도행전 17장 18절에 보면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을 사도 바울이 만나서 격렬하게 토론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토론을 통해서 바울 사도는 [철학에는 전혀 구원이 없다]라는 것과 [그리스도안에 진정한 구원이 있다]라는 것을 밝힌다.
에피쿠로스는 서기전 341년 1월에 이오니아의 사모스 섬에서 태어났다. 아테네에서 이사하여 사모스 섬 지방에 태어났지만 학자풍 가풍을 이어받은 에피쿠로스는 일찍이 플라톤의 제자인 ‘팜필루스’아래서 4년간 철학수업을 받는다.
그는 18살에 아테네에서 군생활도 하게 된다. 그의 군생활이 그의 행로를 바꾸었을 것이다. 군생활을 마친후 그는 자연주의 철학자인 당대의 최고가는 선생인 데모크리토스의 제자인 나우시파네스 아래서 공부하게 된다. 그에게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과 쾌락주의는 그의 철학전반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데모크리토스는 대부분의 육체적 쾌락을 배격한 인물이다.
그는 인간이 감각적인 욕망이나 즐거움에 이끌리지 않고 조용히 자연의 전체적인 진행과 조화를 이루면서 사는 것을 쾌락으로 보았다. 그래서 평생 독신의 길을 걸은지도 모른다.
에피쿠로스도 데모크리토스의 이런 관점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는 자연 그 자체를 결코 평온한 곳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자연의 본성은 사나운 것이라고 했고, 그래서 그 자연의 본성으로부터 멀어져서 자기 내면에 있는 평화를 유지하며 사는 것이 최고의 쾌락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람프사쿠스에서 학교를 세우고, 기원전 306년에는 아테네에서 그의 학파를 위한 [만남의 광장]을 만들었는데, 그 장소가 바로 [정원 Garden]이다.
그리고 정원 입구에 다음과 같은 세네카의 편지에서 인용한 기록을 남긴다.
[방황하는 나그네들이여, 여기야말로 당신이 거처할 진정 좋은 곳이요. 여기에 우리가 추구해야 할 최고의 선(善) 즐거움이 있습니다.]
다른 문헌을 보면 에피쿠로스는 우정을 행복의 재료로 중요시 여겼고, 학교는 친구들과 함께 사는 공동체라고 종종 비유하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정원]에 노예나 여성, 심지어 창녀까지도 학파에 불러들이는 당시로는 파격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는 그리스의 중심인 아테네에 [남녀평등사상]을 심어주려고 하였다.
한 스토리를 보면, 아테네 창녀중에 레온티온이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에피쿠로스의 열렬한 팬이었다. 에피쿠로스가 34살의 나이로 [정원학교]를 열었을 때, 그녀는 가장 먼저 입교를 신청했다. 그녀의 신청이유를 살펴보면 놀랍다.
“인간의 지적 우열과 빈부의 귀천은 모두 후천적으로 습득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학문과 수행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비록 몸을 파는 창녀가 되었으나, 오랫 동안 학문에 갈증이 있어왔고 무엇이 진정한 삶의 가치인지에 대해서 고민해왔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다행히 학문 기회에 있어서의 평등을 주장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취지에 비추어 저도 선생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받아주실 수 있는지요?”
이때 에피쿠로스는 말한다. “물론 학생이 될 수 있다. 레온티온은 훌륭한 철학자가 될 것이다. 다만 지금의 창녀 생활을 계속 한다면 공부하는 것은 어렵다. 나의 정원학교에 입학하면 단체생활을 하게 되며, 정해진 규칙에 따라 공동체 생활을 할 것이다. 그래도 가능하겠는가?”
레온티온은 기꺼이 하겠다고 말하며, 그 후에 에피쿠로스 학파의 가장 모범적인 학생이 되었다고 한다. 레온티온은 그를 흠모하고 육체적인 욕망까지도 품었었다. 에피쿠로스는 그녀의 욕망을 인정하면서 그녀와의 성관계를 멀리하였다. 다만 이들은 평생의 연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 둘은 무려 12년 가량을 함께 하였고, 에피쿠로스가 52살이 되었을 때 레온티온은 사망하게 된다.
그러한 사망에 눈물을 흘리지 않으며 오히려 축배를 든다.
“이 굳세고 아름다운 벗이 먼저 자리를 떠났도다. 임종 장면은 얼마나 훌륭했는가? 모든 사람은 지금 막 태어난 그날처럼 짧은 순간에 떠난다. 죽은 친구에게 우리의 감정을 보여주자. 그의 죽음을 비탄하면서가 아니라, 그의 아름다운 생전의 모습을 즐겁게 기억하자. 우정은 춤추면서 세상 주위를 돈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외친다. 일어나서 행복한 삶을 칭송하라.”
과연 에피쿠로스 답다. 자신의 사상과 관념을 끝까지 실천했다.
그는 자연과학에는 원자론적 유물론을, 윤리학에 있어서는 쾌락주의를 주장하며 나중 쾌락주의 철학의 시조가 된다. 그의 쾌락은 방탕자의 환락이 아니라 고통과 혼란으로부터 해방되는 일종의 ‘평정, 아타락시아 ataraxia' 를 말한다.
그렇다면 ‘평정’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평정이나 평정심]은 상당히 종교적인 수준의 단어이다.
동양의 맹자도 군자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중의 하나로 [평정심]을 강조하였다.
그 당시 그리스는 알렉산더 대왕의 사후에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대 혼란기였다. 권력투쟁의 혼돈과 더불어서 외세의 침입으로 그리스는 국력이 약화되었다. 세계의 질서가 급격히 변하고, 국가를 지탱하는 중산층의 몰락이 왔다. 전쟁에서 죽는 이들도 많아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한 미래에 대한 공포가 만연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에피쿠로스가 등장하여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과 혼란한 삶 가운데서 마음의 평정(아타락시아)를 회복하는 방법, 고통을 줄이고 행복하게 사는 법을 설파하며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그래서 그의 학파의 이름이 [정원학파]라고 불리운 것이다. 그는 더 이상 그리스 중심이 세계통일이라는 목표나 거대한 전체국가를 이루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고 물질에 대한 물욕과 권력에 대한 정치욕을 버리는 소박한 삶을 꿈꾸게 하였다.
그래서 그를 어떤 학자는 [개인주의 individualism 의 선구자]로 보았다.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고전적 철학자들은 영혼불멸을 믿었다. 죽은 후에 몸은 썩어 없어지지만 영혼은 불멸하게 된다는 사상이다. 참고로 기독교는 영혼불멸 사상이 아니라 몸의 부활을 믿는다. 에피쿠로스의 특이한 점은 바로 영혼불멸을 믿지 않았다. 그리하여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보았고, 죽음의 공포를 해결하는 것이 인생을 즐기는 중요한 과제로 보았다.
“우리가 존재할 때 죽음이 존재하지 않으며,
죽음이 존재할 때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 [에피쿠로스의 역설]이라고 부른다.
또한 그는 신을 숭배하는 그리스의 전통을 깨뜨린 최초의 인물이다. 자신의 스승격인 데모크리토스는 어느 정도 신의 숭배를 인정하였지만 에피쿠로스는 신들이 인간의 삶에 대해서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그가 궁극적으로 원했던 것은 바로 고통의 부재였다.
고통의 부재는 곧 죽음의 공포와 신들의 인과응보로부터 자유로운 만족감과 고요함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그에게 있어서 신들에 대한 생각은 우상타파적이고 미신타파적이었다.
그는 나중에 요로결석을 앓아서 71세의 일기로 죽게 된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친구인 이도메네우스에게 이런 편지를 남긴다.
“나는 이 편지를 내 삶의 마지막이기도 하지만 기분 좋은 날에 쓰네. 소변을 볼 수 없는 고통스러운 상황인데다가 세균성 이질까지 겹쳐 내 고통은 더 이상 심각해질 수 없을 정도네. 그렇지만 내 철학적 사색으로부터 오는 기쁨이 이 고통을 상쇄시켜준다네”
그는 또한 사람들에게 [단순한 삶을 살아라] 라고 말했다.
그는 절제되고 욕심을 버리는 삶을 권하였다.
그의 저작에 나온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부의 영광을 과도히 추구하지 말라.’
‘음식이나 친구들 같은 소소한 것들을 즐기면서 이름없이 살라.’
‘주변 사람들과 친구들에게 친절하라’
‘얻을 수 없는 것을 욕심내지 마라’
‘저택을 살 돈이 없으면서 저택을 사려고 욕심내는 것은 좋지 않다.’
‘도달할 수 없는 자리에 오르려고 평생을 고생하면서 허비하지 마라’
에피쿠로스 자신도 독신주의자였다. 아마 나중에 쇼펜하우어가 그렇게 산 것도 에피쿠로스의 영향을 받아서 그럴 것이다. 그는 결혼이라는 것을 올가미로 생각하고, 정신적 쾌락을 앞세우다보니 육체적 쾌락을 멀리하였다. 그에게서 행복이라는 것은 성취를 높여가는 게 아니라, 욕망을 줄여가는 것에서 생긴다고 주장한다.
[물욕을 버려라. 정치욕을 버려라. 불멸에 대한 갈망을 버림으로써 죽음에 대한 공포를 떨쳐 버려라. 공적인 삶보다 작은 공동체에서 가까운 친구와 더불어 지적 교류를 하고 토론하는 삶을 즐겨라]
정말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있다.
근현대에 와서도 에피쿠로스의 영향력은 정말로 대단했다.
물론 유물론과 심지어 무신론에 영향을 주었다.
칼 마르크스의 박사학위논문이 무엇인지 아는가?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점]이다.
또한 아서 쇼펜하우어에게 고통과 죽음에 대한 유명한 회의론자들의 견해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또한 쇼펜하우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프리드리히 니체도 에피쿠로스를 무척 존경하였다. 니체는 에피쿠로스의 고통스러운 얼굴 속에서도 활기참을 가지고 있는 철학을 매우 존경했다.
어떤 철학자는 철학은 결국 [허무주의 아니면 쾌락주의]로 가게 되어 있다고 한다. 어떤 아름다운 말로 포장하고, 온갖 생각의 도구와 기능을 사용하여 멋지게 미화하더라도 결국 그렇게 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니체도 결국 허무주의(Nihilism)나 쾌락주의(Hedonism)의 철학에 집착했다는 것으로 봐도 좋다.
얼마 전에 다시 단테의 [신곡 Las Comedia]를 다시 보았다.
거기를 보면 에피쿠로스와 제자들이 지옥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영혼의 불멸성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테의 신곡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책]이다.
에피쿠로스는 데모크리토스와 더불어서 다시 부활한 것은 르네상스 이후이다. 그리고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화려하게 철학의 꽃을 피우게 된다. 유럽에서의 지성인들 사이에 그들의 인기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 이상이었다고 한다.
그것이 가능하게 된 것이 바로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시집이다.앞으로 이 시집도 잠시 다루어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이 시집을 두고서 “시대정신에 완전히 흠뻑 빠지지 않은 사람에게
루크레티우스의 시는 마법으로 작용할 것이다.” 라고 격찬했다. (*나는 아인슈타인의 전문가중에 하나이다)
미국의 3대 대통령인 토마스 제퍼슨은,
“나는 에피쿠로스주의자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미국의 독립선언서에 ‘평등권’이나 ‘행복추구권’을 넣은 것은 바로 에피쿠로스나 루크레티우스의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이다.
생전에 에피쿠로스는 300여편의 책을 썼다고 하지만 대부분 소실되었다. 다만 그의 책 [저작집]과 [신약성경]에 잠시 소개될 뿐이다. 다만 그가 말한 행복은 [마음의 평정이나 평화]이며 우리가 진정으로 철학으로 돌아가면 우리가 찾는 행복이 거기에 담겨 있음을 주장한 에피쿠로스에게서 큰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 따뜻한 물에 앉아 목욕을 하면서 손수 기른 포도로 빚은 포도주를 마신후 기분 좋게 세상을 떠났다. 인생의 마지막까지 즐거움을 만끽하면서 평소의 자신의 지론처럼 아타락시아의 상태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몇 해전 어떤 아는 사람이 40후반의 나이에 폐암이 왔다. 그런데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나는 그를 방문하여서 에피쿠로스 같은 생각을 말해주었다.
“이제라도 먹고 싶은 것 먹어요. 의사가 금하는 그렇게 먹고 싶은 삼겹살 고기도 먹어요. 와인도 드십시오. 지금은 마음이 무겁고 즐겁지 않겠지만 입이 즐거워지면 마음도 즐거워진답니다.”
그러자 내 말이 통했는지, 얼마 후 병원에서 금하는 삽겹살 고기도 구워먹고, 듣고 싶은 발라드나 찬송도 듣고, 목사들의 설교도 열심히 듣고, 다른 사람들과 유쾌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는 시간도 가졌다. 그리고 몇 달 후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 죽음에 대한 큰 두려움은 없어 보였다. 그저 평안하게 천국으로 갔다고 들었다.
이 글을 작성하면서 엷은 미소와 더불어서 눈물이 잠시 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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