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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붉은 산수유 열매…성탄제 시인
김종길 고려대 명예교수(1926. 11. 5~2017. 4. 1)
“어두운 방안에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원로 시인이자 영문학자였던 고인(본명 김치규)은 1926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47년 경향신문을 통해 등단했다. 69년 펴낸 첫 시집의 표제이자 국민 애송시인 ‘성탄제’는 성탄절 무렵 도시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다.
고인은 T. S. 엘리엇의 장시 ‘황무지’의 국내 첫 완역에 기여하는 등 시인 특유의 언어감각을 살린 번역 솜씨도 뛰어났다. ‘20세기 영시선’,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폭풍의 언덕’ 등을 국내에 소개했다. 또 한시(漢詩)와 김춘수, 박두진의 현대시를 영역해 영미권에 알렸다.
한국시인협회장, 한국T.S.엘리엇학회 회장, 대한민국예술원 부회장을 지냈고 인촌상, 고산문학상, 청마문학상, 이육사 시 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국민훈장 동백장과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고인은 서양 이미지즘 시학을 받아들이면서도 기교에 치우치지 않고 우리 시가 지닌 고전적 품격을 추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 해 두세 편의 시를 쓰는 과작(寡作)의 시인이기도 했다. “어설픈 시를 내놓을 수 없다”는 엄격한 자세를 유지해 ‘성탄제’(1969), ‘하회에서’(1977), ‘황사현상’(1986) 등 시집 10권을 남겼다. 부인이 떠난 지 열하루 만에 뒤를 따라간 고인. ‘그 붉은 산수유 열매’ 시구가 오랫동안 입안에서 맴돈다.
<2017년 동아일보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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