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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칼럼과 에세이

구원의 욕망 그리고 돈의 욕망 - 2021년 글

by 코리안랍비 2022.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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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욕망 그리고 돈의 욕망
‘저울은 공정하고, 추는 정확하게’
  • 무텐틴 - 대금업자와 그 부인 - 어느 교수의 글 인용
    구글출처이미지



제목이 특이하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동안 인문학을 추구하면서 결국 스피노자가 자신이 쓴 [에티카]에서 말한데로
"인간은 욕망 그 자체" 라는 말로 나는 인간을 정의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물어보는 질문이 있다.
"왜 당신은 교회에 다니십니까?" 그들의 대답은 한결같다.
"구원받기 위해서요" "천국에 가고 싶어서요"

그런 대답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구원받고 싶고 천국에 가고 싶다고 하는 것은
믿음인가, 아니면 그저 욕망인가, 라는 것이다.
그게 욕망이라면 기독교는 그저 위안이나 주는 수단에 불과한 종교로 전락하게 된다. 스피노자가 말한데로,인간이 욕망 그 자체라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돈의 욕망도 추구하면서 구원의 욕망도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룩함과 돈은 서로 형제.자매의 관계가 된다.

원래 히브리어나 그리스어에서 돈과 거룩은어원이 서로 같다.
다른 말로 하면 서로 백짓장 같은 관계라는 것이다.

예전에 유학시절에 어느 성서학 교수의 강의를 들은 적 있다.
그 교수가 영어로 강의하면서, "여러분들의 경제생활은 어떠한가요? 양심적인가요? 아니면 비양심적인가요?" "비양심적이라면 여러분들은 구원받을 수 있나요?"

이 물음앞에 앞이 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그 이유는 그 교수가 강의한 부분이 성서였고, 그 성서에서도 레위기와 신명기 말씀이어서 그렇다. 이미 성서는 자본주의의 욕망, 즉 돈의 욕망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주고 있어서 그렇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토라는 절대적인 말씀이다. 특히 레위기나 신명기의 말씀은 거의 그들에게 있어서 법전이나 마찬가지이다.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사용하라 나는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 땅에서 나오게 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레위기 19장 36절)

너는 네 주머니에 두 종류의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네 집에 두 종류의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 것이요
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길리라
이런 일들을 행하는 모든 자, 악을 행하는 모든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하니라 (신명기 25장 13절 ~ 16절)

성서의 곳곳에서 신앙인들이나 종교인들의 상행위에 대한 윤리를 자주 담고 있다. 레위기나 신명기만 아니라, 잠언이나 시편, 욥기나 사무엘서에서도 '공정한 저울추'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을 "경제적으로 심판하겠다"는 의도가 말씀속에 담겨 있다는 것이다. 이를 잘 반영한 그림을 오늘 소개하겠다. 나는 물론 미술학자나 미술평론가는 아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미술과 성서와의 관계를 살펴본 사람중에 하나이다. 또한 내세를 추구하는 신앙과 현세를

  • 그림은 글보다 더 많은 말을 한다. - 쿠엔틴의 그림이 주는 시사점 - 그림읽기를 통해서 풍성한 토론을 해보자
    구글출처 이미지 - 명작산책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밀접한 관계도 파악하는 사람중에 하나이다
.

바로 16세기 벨기에의 플랑드르 화가 쿠엔틴 마시스(Quentin Massys, 1464~1530)의 ‘대금업자와 그의 아내’ 라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단순해보이지만, 상징적 의미가 큰 작품이다. 정교한 묘사, 대조적인 색상, 사물의 상징적 배치 등 조형적 돋보임과 의미심장한 오브제, 인물의 모습에 담긴 의미가 깊다. 화면을 보면 부부로 보이는 남녀가 있다. 동전의 무게를 저울로 달고 있는 남편과 그러한 행동을 바라보는 아내의 모습이다. 부부의 표정은 무표정해 보인다. 그러나 유심히 들여다보면 남편은 손의 힘줄이 도드라질 정도로 돈 계산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고, 아내는 그러한 남편의 행동을 조심스럽게 바라보고 있다. 두 사람의 앞에는 고급 유리병, 귀금속, 보석 등 부를 상징하는 진귀한 물건들이 놓여있다. 뒤로 보이는 선반에도 책과 각종 서류, 남자의 머리 위로 과일이 보인다. 이는 선악과를 뿌리치지 못한 인간의 탐욕을 상징하는 듯 보인다.(어느 미술평론가의 글 일부 인용)

이러한 구성 속에 정작 화가가 전하고 싶은 진실은 다른 곳에 숨어 있다. 바로 아내가 만지작거리고 있는 성경책과 그 앞에 놓인 볼록거울*이다. 펼쳐진 책 속의 성모자상(대금업자 아내와 성모상 옷이 같은 계열의 색)과 볼록거울에 비친 십자가(창틀)와 교회 종탑을 통해 인간이 돈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것을 경계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결국, ‘대금업자와 그의 아내’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속이지 않은 정직함을 지녀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동시에 삶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는 당장에 눈앞의 현실(돈)보다 아직 가보지 못한 또 다른 세상(창밖)에서 발견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미술평론가 이은화 교수의 글을 잠시 인용하면, 벨기에의 안트베르핀은 16세기 유럽의 제일가는 무역항이자 상공업의 중심지였다. 외국 상인들이 몰려들면서 환전상이나 고리대금업으로 큰 부를 축적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신흥 부자들은 호화 주택을 짓고 부르조아(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패러디)의 삶을 누렸다.

그 안트베르핀의 화가가 바로 크벤틴 마시스이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욕망을 불러 일으키며 그 꽃을 화려하게 피어왔다. 자본주의(資本主義)사회의 핵심은 물론 돈money이다. 돈은 어찌보면 욕망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나 돈은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만들어진 물질일 뿐이다. 설사 돈으로 모든 것을 살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이 반드시 행복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돈은 ‘실력과 권력’이 아닌 인간의 ‘도덕성과 양심’을 가늠할 수 있는 ‘저울과 추’다. ‘저울은 공정하고, 추는 정확해야 한다’라고 ‘대금업자와 그의 아내’의 그림틀에 적혀있던 글귀처럼 사회의 안정은 법의 공정성과 정확성이 지켜지는 바탕에서 유지된다.


우리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서 살아가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욕망, 구원의 욕망이 도리어 돈에 대한 욕망을 이기고 나와야 한다. 욕망의 노예가 되어서 양심마저 저버린다면 결국 신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이 그림은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이 그림을 보면서 어떤 수천의 말보다 강력한 메세지를 발견한다. 이 그림이 전하는 궁극적 메세지는 돈과 욕망이 지배하는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여전히 우리는 양심이라는 인간성을 지키고 살아야 하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책무와 중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욕망은 멈추지 않는 전차와 같다. 그래서 욕망을 잘 제어하지 않으면 우리는 곧 욕망이 이끄는데로 가게 된다. 그래서 이성의 힘을 발달시키고, 절제력을 높여야 한다. 그것이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첩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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