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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칼럼과 에세이

1240년 탈무드 재판기독교-유대교, 첫 공식 토론의 역사

by 코리안랍비 2022.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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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민족 - 한스 큉 - 책의 민족 - 표지
    구글출처 이미지 - 책의 민족 - 막스 디몬트



1240년 탈무드 재판
기독교-유대교, 첫 공식 토론의 역사


토론(Debate)는 서로 먼저 결론을 놓고 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의 토론과정을 통해서 논리성과 설득력이 강한 쪽이 이기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 가장 불합리한 재판이 있었다. 성서에서 가장 불합리한 재판이 바로 예수이 재판이다. 이 재판은 낮에 열려야 하는데 밤에 열렸고, 유대인 예수이기에 유대인들식의 재판으로 거행되었다. 물론 최종 승인은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1240년 6월 12일 프랑스 파리 루부르 성(城)에서 국왕 루이 9세가 참석한 가운데 세기의 재판이 열렸다. 이 때는 프랑스가 3차 십자군 원정을 마친 시기였다. 이 ‘파리 논쟁’으로도 알려진 이 재판은 열리기 전에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두 가지 이유인데 무엇보다도 피고가 ‘탈무드’이다. 필자는 탈무드에 대한 역사를 번역하면서 이 부분을 눈여겨 보았다. 소송을 제기한 원고는 가장 큰 수도단을 거느린 프란체스코 수도회였고, 원고 측은 유대인들의 율법서이자 주석 모음집인 탈무드를 모두 압수해 불태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기독교 계통의 주석가들은 탈무드 관련된 주석을 몰래 연구하였다고 한다. 구약을 이해하는데 탈무드만큼 좋은 텍스트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논쟁은 기독교와 유대교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교리를 가지고 토론한 최초의 재판이었다.

이 탈무드 재판(Trial of Talmud)라는 이 재판은 처음부터 판결이 난 상태에서 거행되었다. 원고 측의 후가 유대교의 멸절을 원하던 교황 그레고리오 9세였기 때문이다. 원고 측 대표이면서 검사 역할에는 니콜라스 도닌 수사는 탈무드를 낱낱이 분석해 35개의 죄목을 찾았다. 이 도닌 수사는 유대인 변절자로서 개종하여 교황을 부추겨 재한을 성사시킨 사람이었다. 도닌의 상대는 랍비 4명인데 대표격인 여히엘 랍비는 15년전 도닌을 파문한 주인공이었다.

이 재판의 모순은 바로 유대인이 유대인의 탈무드를 ‘탄핵’시키는 것이며, ‘사형’시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문헌을 다시 살펴보면, 도닌은 먼저 탈무드에 “예수가 지옥의 펄펄 끓는 배설물에 흠뻑 젖어 있는 죄인으로 묘사되어 있다” 라고 포문을 열었다. 그러나 여히엘 랍비는 “탈무드에 나오는 예수는 3명으로 지옥의 예수와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는 다르다”며 이는 마치 “루이라는 이름을 가진 프랑스 사람이 모두 왕이 아니다” 라고 맞받아쳤다. 랍비들은 너무라 불리한 조건에서 묻는 말에만 답변하도록 강요받았으나 토론에서는 결코 밀리지 않았다. 랍비들은 토론의 왕자들이다. 그러나 재판은 원고 승소로 끝났다. 재판을 마친 루이 9세는 “유대인들과 논쟁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그들을 칼로 찔러 죽이는 것”이라는 격한 말도 남겼다.

2년간 탈무드를 수강해본 필자도 탈무드 어느 곳에도 그런 내용은 찾아 볼 수 없다. 아직도 유대인들은 ‘메시야 논쟁’을 하는데, 가장 유력한 메시아 논쟁의 1순위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재판은 유대교에 대한 인식을 바꾸게 하였다. 유럽에서 유대인들에 대해서 나름 우호적인 입장을 가졌던 국가들도 유대인에 대한 강력한 차별이 이어지기 시작하였다. 적어도 구약성서보다 탈무드를 중시한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유대인에 대한 차별이 심해졌다는 것이다. 사실 유대인들은 구약의 토라를 탈무드보다 더 중시여기고 앞세운다. 탈무드는 이들에게 구약성서의 대표적인 보조교재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크나큰 오해는 결국 유대인들을 서유럽에서 몰아내거나 박해하는 것이 되었고, Jesus Killer라는 별칭을 지어서 독일과 중부 유럽으로 이주한 유대인들도 박해를 피하기가 힘들었다. 이들이 자유와 안녕을 찾아서 전 세계를 떠도는 유랑의 역사는 멈추지를 않았다.

재판의 직접적인 결말은 마차 24대 분량인 약 1만권의 필사본 탈무드가 소각되었다. 유럽 각국의 회당이 불타고, 여러 유대인들이 무참히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다.

거기에 종교개혁의 기수요 선구자인 마르틴 루터마져도 유대인 탄압을 거들었다. “유대인들의 탈무드는 사탄의 책이다. 불태워라” 라고 까지 하였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에 대해서는 나는 그의 신학적 대발견인 이신칭의(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에 대해서는 극찬을 하여도 그의 유대인에 대한 반셈족주의는 극악이라고 본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다. 탈무드가 마치 성경을 대체하는 책으로 여기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유대인들에게 탈무드는 생명과 같이 여기는 귀중한 책이다. 이들의 정신문명과 정신문화의 근간인 성서와 탈무드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이다. 이들의 고난사와 더불어서 함께 해온 탈무드이다. 그런데 이제 탈무드는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호의적인 책이 되었다. 책의 민족, 유대인들에게 많은 것을 배운다. 이제는 탈무드도 양질의 토론 교재로서, 영재교육의 교재로서 활용되고 있다. 왜냐하면 세계 노벨상의 30% 이상을 유대인들이 받기 때문이다.

이렇게 흩어졌던 민족이 모이는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스라엘의 회복과 더불어서, 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선두권 민족이 되었다. 이스라엘 국가의 아랍인들에 대한 호전성에 대해서는 전혀 동의하지 않아도 유대 민족의 고난사와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와 DNA는 높이 살만하다.


우려되는 것은 4차 혁명을 주도하는 유대인들은 이제 무소불위의 민족이 되었다. 이들에게 한편으로 배워야 하기도 하지만 비판도 할 줄 아는 사람도 되어야 한다. 정의롭지 못한 기독교도 문제이고, 정의롭지 못한 유대교도 문제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쓴 하버드의 사회학교수 마이클 센델도 유대인이다. 그가 남김 말이 생각이 난다. “정의를 고민하는 삶은 곧 최선의 삶을 고민하는 것이다.”

이 말을 보면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각자의 좋은 삶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함을 말한다. 기독교가 지난동안 ‘전도’라는 미명하게 많은 이들에게 종교의 선택을 주지 못하였다. 또한 다른 타종교에 대한 배척정신이나 이분법적 사고들이 치우친 면이 강하게 나타났다. 그래서 정신발전이 크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오늘날 유대교의 ‘정신발달’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고 본다. 갈수록 정신이 퇴보하는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자주 목격한다. 성서연구나 성서사상이 사라져가는 한국기독교는 정신위기라는 빨간 불이 켜져 있다. 이제라도 성경읽기운동이나 말씀중심의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 유대인들을 능가할 정도의 의의 실천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유대인들을 사사로이 공격하는 것은 멈추어야 한다. 지금까지 유대인들의 고난사를 보면 하나님의 섭리가 크게 작용했음을 보여주는 역사이다.

  • 네이버 출처 이미지 - 한스 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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