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Stigma 스티그마
“과연 나는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환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내게 환자로 오신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을까?”
- 설대위(Seel David 전 예수병원 원장)
얼마 전에는 <그 청년 바보 의사> 라는 책을 읽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물론 십여년전에도 읽었지만 다시 읽어도 아직 눈물이 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평소 눈물이 많은 나로서는 조금이라도 감동을 주는 글이나 메시지를 접하면 바로 ‘눈물샘’이 터지곤 합니다. 그럴 때 내면이 정화되어지고, 새롭게 물갈이를 하는 것처럼 신선해집니다.
그런데 사람이 감동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바로 마음에 ‘중요한 흔적’이 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진 사람’ ‘하나님과 합(合)하여 마음에 감동이 있는 사람’ 이 바로 닥터 안수현이었습니다. 그는 나보다는 어린 사람이었지만 나를 부끄럽게 만든 사람이었습니다. 지금도 부끄러운 마음에 감히 그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이 어색하고 쫄리는 기분입니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에게 ‘안수현’이라는 닥터를 소개하는 것은 바로 우리에게도 ‘흔적을 남기는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하루 일과를 마치면 밤 12시가 다 되어 갑니다. 그래도 한 권의 책과 함께 퇴근을 합니다. 퇴근을 하여 나만의 서재에서 다시 책을 읽어봅니다. 물론 그 전에 읽었던 이 책인데, 다시 읽습니다. 이 책은 의인 안 수현 (1972.1.17~ 2006.1.5) 의사에 대한 전기문입니다.
그는 나보다는 1살 정도 어린 사람이지만 아마도 고려대를 다녔으면 기독교 동아리나 단체에서 같이 활동했을 인물입니다. 그의 전기문은 다른 위인들의 전기문과는 다릅니다.
잠시 그의 기도문을 봅니다.
“여호와 라파 치유의 하나님, 우리 A환자 분의 병을 낫게 하여 주십시오. 좀 더 시간을 주셔서 사랑하는 가족들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게 하여 주시고, 무엇보다 예수님을 믿고 신앙을 고백하게 하여 주십시오. 저는 치료만 할 뿐이니,우리 주님께서 몸과 영혼을 깨끗하게 치유하여 주실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닥터 안수현은 이렇게 기도하고 진료를 했다고 합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교회의 문턱을 낮추고 ‘예혼’이라는 헬퍼쉽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삶과 신앙의 일치를 강조하며 누군가 자신이 필요하면 기꺼이 자기 시간을 내어 주었습니다. 가장 극적인 부분은 그가 아무도 모르게 헌혈을 30회 이상을 했다는 것입니다.
2003년 군의관을 지내면서, 2006년 1월 갑자기 그는 [유행성 출혈열]이라는 병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공교롭게도 33세, 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나이게 문득 우리 곁을 떠난 것입니다. 그는 어느 한권의 책도 남겨 놓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를 그리워한 사람들은 그를 위한 한 권의 책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 청년 바보 의사’입니다.
‘바보’ 는 ‘바라볼 수록 보고 싶은 사람’입니다.
‘바보’라는 소리를 들으면 성공한 사람이라고
고 김수환 추기경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쓴 칼럼의 다른 부분도 소개합니다.
“우리 의사들의 직업은 목사와 같은 성직이다.
나는 교회가 목사를 임명하는 것과 같이
의사도 임명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과도 일치한다.
우리가 온 마음과 영혼을 다해 우리의 직업에
몸을 바치는 것도 바로 이 신념 때문이다.”
그는 의사라는 직업을 성직으로 알고 목사처럼 살았습니다.
목사는 영혼을 고치는 사람이고 의사는 몸을 고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경계나 구별은 잘못되었습니다. 목사는 목사로서의 성직이 있고, 의사는 의사로서의 성직이 있는 것입니다. 몸과 영혼을 놓고 기도하면서 자신의 중임을 감당하는 면에서 보면 둘 다 소중한 직분자입니다.
며칠 전에는 ‘이웃사랑’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에 비종교인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남을 사랑하고, 심지어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과연 종교적인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부모를 사랑하고,
형제.자매를 사랑하고,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의 사랑은 경박합니까?
아니면 거룩합니까?
그 청년 바보 의사는 ‘사랑의 사도’였습니다. 비록 젊은 날 떠났지만 그가 남긴 메시지는 ‘서로 사랑하라’ 였고, 그리스도의 ‘흔적 Stigma 스티그마’를 남긴 것이었습니다.
그를 가르친 의대교수중에 ‘김신곤 교수’가 있습니다.
그는 제자의 죽음을 상기하면서 그에 대한 ‘애도문’을 작성합니다.
그 일부를 여기에 남깁니다.
“하나님,
오, 하나님
어찌하여 그리하셨습니까?
이천년 전 나사렛에서 난 청년 예수가
33세의 나이로 무고하게 죽어갈 때도
당신은 그걸 막지 않으셨지요
그래서입니까?
예수의 흔적을 안고 살겠다던 수현 형제를
그 예수와 똑같은 33세에
이렇게 죽도록 허락하신 겁니까?
그래서입니까?
인간의 고통과 고난의 역사에
친히 고통 받음으로 응답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처럼
예수의 흔적, 수현 형제가
그토록 사랑했던 환자의 고통과 아픔을
자신의 육체로 철저히 경험하도록 하신 겁니까?
<중략>
백년을 살아도 의미 없게 살 수 있는 인생을
짧을 만큼 더욱 가치 있게 잘 살아온
그리고 이제 영원한 세계로 초대받은
아름다운 청년, 수현 형제를
살아남은 자들이 박수로 환송하렵니다.”
그리고 생각해 봅니다.
‘진정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종교의식이나 그저 주어진 종교적 의무를 다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는 괴리감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마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닐 수 있습니다.
신앙이 있노라하면서 사랑이 없다면 그는 변화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동료나 친구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아마도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사람에게서 그리스도의 흔적이 없기 때문에 그는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입니다. 나도 거짓말쟁이로 오래 살았습니다. '이웃과 형제를 돌아보는 사랑'에서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잠시 이웃사랑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솔로몬이 지었다는 잠언 27장 19절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사람의 얼굴이 물에 비치듯이, 사람의 마음도 사람을 드러내 보인다”
왜 사람의 얼굴이 거울에 비치지 않고 물에 비친다고 하였을까요? ‘물에’ 비친다는 것은 물에 가까이 자신을 구부릴 때에만 물속에 비친 자신이 형상을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 역시 동료나 친구의 마음 쪽으로 자신이 기울어져야 합니다. 그러면 동료나 친구의 마음 안에서 자신의 마음을 보게 됩니다. ‘눈은 마음의 창’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시선이 어디로 기우냐에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보게 해 줍니다. 어디에 마음이 가있는가가 그 사람을 드러내주는 지표입니다. ‘물에 비친 내 모습’은 곧 ‘성찰의 모습’이며, ‘겸손의 모습’이며, ‘사랑의 모습’입니다.
나는 누구이며,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 청년 바보 의사>를 기억하는 방법이 이 글을 통해서이기도 하고,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흔적 -스티그마’를 갖고 살았던 ‘고 안수현 닥터’
사람의 인생은 삶의 길이로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하루 더 사는 것이고,
우리가 죽어도 하루 덜 사는 것입니다.
엄청난 업적이나 공로도 가슴을 울리는 감동을 주지 않습니다.
고 안수형 닥터는 삶 그 자체로 감동을 남겼습니다.
죽어서도 자신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면 그는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게 어떤 목회자가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예수처럼 33세 안에 성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며 실패한 인생이다”
그 청년 바보 의사 - 안수현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데,
그저 책으로 만났을 뿐인데, 아직 감동의 여운이 가시지 않습니다. 그가 죽은 후 ‘안수현 장학회’가 결성이 되었고 그의 이름으로 여러 어렵고 힘든 청소년들, 대학생들에게 ‘소정의 장학금’이 지급되고 있다고 합니다. 죽어서도 여전히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고 닥터 안수현 님이 거룩하게 보입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누구로 기억되고 싶습니까?
‘감동을 받고 감동을 주는 인생’으로 기억되기를 소망해 보는 밤입니다.
무엇인가 ‘흔적 - 스티그마’를 남기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해 보는 밤입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느니라"
- 사도 바울 <갈라디아서 6장 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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