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피상성을 넘어 간절함으로
“나는 더 이상 이런 식으로 책을 읽지 않겠다”
많은 이들이 바쁜 와중에 책을 읽는다. 그런데 책을 읽는데 바쁜 사람은 별로 없다. 1만권 독서?를 자랑하는 나 자신이지만, 이제는 이런 식으로 바쁜 시간을 쪼개거나 짬을 내어서 읽는 식이 독서를 하지 않겠다. 이렇게 내적으로 선언을 하고 읽으려하니 이전에 다시 읽었던 책들이 눈에 들어온다.
피상성, 최근 이 단어에 나는 집중한다.
사람들을 보아도, 주변 사회나 세상을 둘러보아도 피상성으로 가득차 있다. 본질보다 현상에 빠져 있다. 본질은 현상이 사라져도 남는다. 하지만 현상은 본질이 사라지면 그것마져도 사라지는 속성을 갖고 있다.
피상성은 우리 인간관계에서도 제일 극복하기 힘든 난적(亂賊)이다. 이기기 힘든 상대라는 것이다. 이러한 피상성은 바쁘다는 이유로 항상 사람들에게 핑계를 대게하고, 변명을 하게하고, 자신의 본질(本質)을 숨기게 만든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피상성은 언제나 나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삶을 대충살기에는 너무나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인데, 그 고귀함과 아름다움을 버려두고 그저 바쁘고 분주한 세상에서 인생을 허비하고 사는 것이다.
다시 서재에 와서 나는 코엘료의 작품들을 둘러보았다. 물론 그의 작품들은 처음에는 연금술사로 시작하여서 나중에는 그의 전작들을 다 읽어보게 되었다. 전집으로 읽으려면 엄두가 나지 않는데, 한 편 한 편 나의 온 감각을 사용하여 읽으면서 코엘료라는 작가의 사상과 감정을 충실히 이해하게 된다. 많은 이들은 그저 그의 글에 감동되고 흥분하지만 그것도 역시 피상성이다.
피상성을 벗지 못하는 독서는 깊은 곳까지 스며드는 사고의 깊이를 만나지 못하는 것이다. 코엘료의 책을 몇 권 보다가 결국 나는 이상한 ‘좌절감’을 경험하였다. 이것은 ‘나의 한계’라고 붙여도 좋고, 더 이상 진전되거나 나아가지 못하는 ‘부족함’이라고 해도 좋다. 나는 그의 경지를 따를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의 현상에 집중했지 본질의 집중하지 않았다.독서와 여행으로 인생의 내공을 쌓으려고 했지만 나는 여전히 피상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인문학을 한다고 십수년간 고생을 하였던 사람이지만, 그런데 정작 나는 아직도 껍데기나 피상성을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서재에서 오랜만에 ‘연금술사’를 펼쳐 보았다. 나는 이 책을 1992년도에 구입을 했으니까, 올해로 따지만 한 세대를 지나간 책이라고 보여 진다. 당시 고려원에서 나온 [연금술사]를 다시 보니 그 책을 구입했던 서점도 생각나고, 그 책을 버리지 않고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는 자신이 이상하게 ‘대견’해지는 것 같았다.
나에게 [연금술사]는 오래된 기억이며, 새로운 과거이기도 하다. 다시 그의 책을 여는데 이상한 ‘흥분’이 되고, 그러면서 마치 새롭게 읽는 기분을 자아내었다. 30분간을 읽다가 그의 주옥같은 문장에서 일종의 ‘희열감’을 다시 경험한다.
그의 글은 길이다.
“세상에 이런 좋은 내용이 있었네”
“내가 지금까지 뭘 읽은 거야?”
“독서한다고 하면서 수많은 책들을 건들였지만
제대로 읽은 것은 과연 몇 권 일까?”
나는 다시 그의 책을 보다가 단순 책읽기보다 책 속의 내용에 집중하는 순간이 다가왔다. 너무나 크게 다가온 것은 나의 ‘겉넘기나 피상성’이었다. 나는 그저 책이 좋았고, 그 책에서 위안을 삼았다. 하지만 난 책들을 많이 읽으면 누군가 날 알아주고, 누군가 나를 대단한 사람으로 치부할 것이라는 생각도 강하였다. 그러한 자아를 가진 사람으로서, 그것은 나에게 지나친 ‘욕심’이 된 것이다.
“자아의 신화를 이루어내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부과된 유일한 의무지, 세상 만물은 모두 한가지라네.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네”
다시 코엘료 책을 보면서 그의 젊은 날의 문체가 실로 대단한 것이었음을 직감한다. 다시 30분을 더 읽었다. 그리고 나서 생각해본다.
나 자신도 자아의 신화를 찾으려고 부단히도 노력하였다. 처음에는 나 자신을 위해 살았다. 그저 먹고 사는 것 그리고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식구들을 부양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진이 빠질 정도였다. 나이가 들수록 나는 다른 사람들과 나 자신을 비교하고, 그리고 나 자신이 저들의 비교대상이 되어 살아간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세상은 비교하는 곳이다.” 이 비교에서 우위(優位)를 점하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그 사람을 우대(優待)하지 않는다. 나는 많은 이들에게서 인정과 애정을 기대하였다. 하지만 비교하는 세상에서 인정과 애정이라는 것은 최소한도의 버팀목일 뿐이었다.
그런데 코엘료는 세상일이 참 뜻대로 안되는데 간절히 원하면 우주의 기운이 도와준다고 한다. 그냥 소설의 일부일 뿐이지 생각하였다. 그런데 살면서 나는 정말 간절히 바라고 바랬던 때가 별로 없었다. 나는 나 자신에게 정말 집중하지 못하였다. 바쁘고 분주한 세상, 일도 많고 탈도 많은 세상에서 그저 홍수에 떠내려가는 부유물처럼 되어 버렸다.
‘간절함’은 ‘피상성’을 극복하고 ‘참된 나로 살기’로 선언하는 일이다. 그 간절함이 내 속에 너무나 미약했던 것이다.
<<연금술사>>는 양치기 소년 산티아고가 보물을 찾으러 가는 이야기다. 꿈에서 한 아이가 산티아고를 이집트의 피라미드에 데려가 이곳에 오면 숨겨진 보물을 찾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산티아고 앞에 노인이 나타난다. 성서속에 등장하는 살렘(예루살렘) 왕이란 노인은 양의 10분의 1을 주면 보물을 찾아가는 길을 알려주겠노라고 말한다.
산티아고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인생은 선택이다. 산티아고는 살면서 익숙해진 것과 갖고 싶은 것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노인이 가르쳐 준 것은 보물이 있는 곳에 도달하려면 신(神)이 남긴 표지(表紙)들을 따라가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표지들을 식별할 때 도움이 되도록 <예와 아니오>를 뜻하는 우림과 툼밈이라는 검은색과 하얀색 보석을 선물하였다. <우림과 툼밈은 성서의 제사장이 제사의식에서 사용하는 몸에 다는 보석을 말한다.>
산티아고를 모든 양들을 팔고 아프리카로 떠났다.
하지만 ‘피라미드’라는 자아의 신화를 찾는 것은 너무나 어려웠다. 이 글을 쓰는 나 자신도 피라미드까지 가 보았다. 그런데 거기에는 ‘자아의 신화’ 따위는 없었다. 그 이유는 나는 거기까지 걸어서 가는 도(道)의 과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산티아고는 가는 도중 가진 돈을 몽땅 도둑맞는다. 크리스털 그릇가게에 그는 취직을 한다. 산티아고의 열정으로 그 그릇 가게는 점점 더 흥해진다. 산티아고는 1년 후 양을 살 충분한 돈을 모았다. 크리스털 그릇 가게의 주인의 꿈은 메카라는 성지순례였다. 하지만 그는 꿈을 실현하면 살아갈 이유가 없어질까봐 두려웠다.
‘꿈을 실현하면 살아갈 이유가 없어진다’ 모순되면서도 타당하게 다가오는 것은 목표를 달성하면 웬지 허무해 질 것이라는 인간의 직관(直觀)이다.
그런데 산티아고는 아직 가보지 못한 길을 가는 것이다. 다시 가게를 떠나는 날 산티아고의 가방에서 우림과 툼밈이 떨어졌다. 가게 주인이 삶의 방식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산티아고는 살렘의 왕을 떠올린다.
산티아고는 다시 여행에 나선다. 피라미드를 향하여 가려면 사하라 사막을 건너야 한다. 그리고 중간에 오아시스에 도달한다. 산티아고는 오아시스에서 파티마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연금술(鍊金術)사- Alchemist를 만난다.
오아시스의 족장(族丈)은 마을을 구한 산티아고를 그 지역의 고문으로 임명한다. 오아시스는 상징적으로 도시이다. 그곳에서 산티아고의 삶의 기반은 갖추어지는 듯했고, 충분한 돈을 가졌고, 사랑하는 여인이 있다는 것에서 만족(滿足)을 경험하였다. 하지만 연금술사는 어서 보물(寶物)을 찾으러 가라고 충고한다.
다시 산티아고는 선택의 기로에 직면한다. 우주의 도움이 있어도 선택은 결국 자신이 하는 것이다. 겉에 보이는 삶의 안락한 모습에 그저 만족했다면 산티아고는 다시 자아의 신화를 찾아서 가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그는 양과 보물, 그리고 익숙한 것과 갖고 싶은 것 사이에 선택의 기로에서 갈등한다.
사람에게 선택이 어려운 것은 큰 이유가 있다.
자아의 신화, 자아의 실현, 꿈의 보물을 쫓는 것이 꼭 행복으로 직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꿈에는 반드시 시련이 있고 고난이 있다. 성서에 나오는 꿈의 사람 요셉의 이야기를 보면 그렇다. 꿈이 행복해서 우리는 꿈을 갖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꿈이 없다면 나도 없다”는 간절함이 있어서 우리는 그 꿈을 믿고 가는 것이다.
행복을 가져다 줄 것 같은 꿈도 때로는 불행과 같이 간다는 것을 코엘료는 알려주고 싶었다.
맨 처음 피라미드로 가는 길을 알려준 살렘왕은 그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 상인의 아들을 현자에게 보내 행복의 비밀을 배워오라고 했다. 현자(賢者)는 찻숟가락에 기름 두방울을 담아 한방울도 흘리지 말고 저택 구경을 하고 오라고 했다.
두 시간 후 현자는 집안의 아름다운 집기와 정원을 보았느냐고 물었다. 젊은이는 찻숟가락에 신경을 온통 쓰느라 보지 못했다.그리고 현자는 아름다운 주변 환경을 둘러 보라고 하였다. 그런데 다시 돌아온 젊은이의 숟가락은 비어 있었다.
“행복의 비밀은 이 세상 모든 아름다움을 보는 것,
그리고 동시에 숟가락 속에 담긴 기름 두 기름 방울을 잊지 않는데 있도다”
행복의 비밀은 바로 마음속에 있었던 것이다.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면서 피상성에 기초하여 행복의 비밀을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현자는 행복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생겨나고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이 책을 읽은지 무려 25년이 넘었는데도, 나는 그 때의 현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제 지천명을 넘어서 다시 코엘료의 책을 보면 주인공 산티아고가 그 보물을 찾았는지가 중요하지 않다라는 것이다. 보물을 찾으러 나서는게 결국 옳은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과연 기름 두 방울을 얹은 숟가락을 들고도 아름다운 것들을 마음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어린 왕자]에 나오는 주요 대목이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사막 어딘가에 그 아름다운 것을 숨겨 놓고 있기 때문이야”
나는 내 꿈이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많은 사람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잘못된 데에서 옳은 데로 데려오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다시 코엘료는 <연금술사>에서 세월이 한세대만큼 지나간 이 시점에서 말한다.
“당신의 꿈이 무엇이냐?”
나 자신에게 꿈을 물어본지도 오래되었다.
그저 나이가 들면 꿈을 꾸는 것은 포기해야 하는 것 같은 세태가 내 속에 크게 있었던 것이다. 꿈은 10대나 20대가 추구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야박한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50대, 60대에게 꿈은 중요한 것일까? 코엘료는 “네, 중요합니다. 하지만...이제는 꿈 같은 것은 묻지 말고, 그저 그냥 살던 대로 삶에게 자신을 맡기며 살아요” 라고 말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그들은 단지 금만은 구했네. 자아의 신화, 그 보물에만 집착했을 뿐 자아의 신화를 몸소 살아내려고 하지 않았지”
산티아고는 원래 신학교를 다니던 학생이었지만, 그는 드 넓은 세상을 여행하고 싶었다. 진리를 알고 싶어하는 구도자적인 자세와 더불어서 속박과 비교라는 것에서 자유하고 싶은 산티아고가 선택한 삶은 양치기였다. 양을 치면서 여기 저기 돌아다니는 여행, 그의 존재의미는 여행에 있었다.
그리하여 떠난 여행, 그는 드넓은 세상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그의 목적지는 이집트의 피라미드였는데, 그 목적지를 향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하고 있었던 것도 발견한다. 그런데 그는 도착하는 곳마다 최선을 다하여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주어진 일에 집중하였다.
이제 그는 <연금술사>가 말한, [자아의 신화]를 몸소 살아내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해나간다. 보물을 찾는 것은 자아의 신화에서 그저 일부분일 뿐이다. 자아의신화를 몸소 산다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양을 칠 때는 열심히 양을 치는 것이다.
그릇을 팔 때는 열심히 그릇을 파는 것이다.
사막에 도달해서는 열심히 사막의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다.
도시인이든 시골인이든, 미국이든 한국이든, 2,30대든 5,60대든 우리는 선택의 순간에 맞았을 때 숟가락에 놓인 기름 두 방울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우리가 보이는 현실이나 현상에 매여서 우리가 해야 할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것에 집중하는 것을 놓쳐서는 안되는 것이다. 피상성에 휘말려 들어서 간절함과 순간의 열심을 놓쳐서는 안된다.
산티아고가 결국 찾은 보물은 바로 스스로의 꿈을 잊지 않는 것이었다.
간절함을 잊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연금술사>에 등장하는 여러 사람들이 있다.
크리스털 가게의 주인, 팝콘 장수, 그리고 병사 우두머리 등 인생의 희망없이 사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두 방울의 기름을 잊은 사람들이기에 우주가 나서더라도 도와줄 수 없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너나 없이 인생을 아름답게 살고 싶어한다.
그런데 아름다워질 수 없는 삶을 살아간다. 그것은 바로 아름다움을 보면서 기름 두 방울을 소중하게 간직하는 삶의 태도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우리에게 닥친 현실과 운명에 충실하되 꿈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연금술사>를 덮어가면서 코엘료가 원했던 것은,
우리의 삶은 ‘변화를 추구하는 연금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연금술은 물이 포도주가 되고, 돌이 금이 되게 만드는 기술이다. 이 기술이 우리 인생에게도 있어야 한다는 것, 바로 꿈을 이루는 기술이 있어야 한다.
“나에게 꿈을 물어본 지가 언제인가?”
젊었을 때 우리는 많은 꿈을 품었다.
이 나이가 되어서 이제사 꿈을 꾸는 것이 무슨 소용이 을까마는 그래도 우리는 새로운 꿈을 꾸겠다고 말해야 한다. 그리고 아직도 못 이룬 꿈을 이루고 싶다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아직도 책을 통하여, 여행을 통하여, 만남을 통하여 자아의 신화를 살아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아직 살아 숨쉬며, 건강할 때 아직도 하나의 꿈쯤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용기가 부족하면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라. 믿음이 부족하면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라. 그리고 피상성을 버리고 간절함을 회복하라. 오늘부터는 산티아고가 되어라.
자아의 신화를 이루어내려는 의지와 그리고 무엇인가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아름다운 화음을 낼 때 우주의 기운은 아직 우리를 도와줄 것이라는 것을 믿으면서 말이다.
“현실에 충실한 현실주의자가 되라. 그러면서 이룰 수 없는 벅찬 이상 하나쯤은 가지고 있으라” 라고 말한 체 게바라가 생각나는 밤이다. 그리고 이전보다 간절해지자고 2% 더 용기를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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