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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브루타와 코칭 & 멘토링

탈무드 하브루타 러닝 2, 지혜의 왕 솔로몬과 명재판 이야기

by 코리안랍비 2022.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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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왕의 재판에 대한 랍비들의 생각과 하브루타


솔로몬왕 하면 ‘지혜의 왕’ ‘하캄 - 지혜자’ ‘현명한 재판장’ 이 라는 호칭이 따라간다. 물론 솔로몬왕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슐로모’라고 하여서 ‘주는 평화’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런데 정작 유대땅 이스라엘에서는 솔로몬에 대한 호.불호가 크게 갈린다.

그가 왕이 되기 전에 기도를 드린다. 성서 사무엘서 본문으로 들어가보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에게 무엇을 주기를 바라느냐? 나에게 구하여라” 하셨다. 솔로몬이 대답하였다. “주의 종에게 지혜로운 마음을 주셔서, 주의 백성을 재판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많은 주의 백성을 누가 재판할 수 있겠습니까?” 주께서는 솔로몬이 이렇게 청한 것이 마음에 드셨다.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스스로를 생각하여 오래 사는 것이나 부유한 것이나 원수갚는 것을 요구하지 아니하고, 다만 재판하는 데에, 듣고서 무엇이 옳은지 분별하는 능력을 요구하였으므로, 이제 네 말대로,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준다. 또한 네가 달라고 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화도 모두 너에게 주겠다. 네 일생 동안, 왕 가운데서 너와 견줄 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 열왕기 상 3:5-13, 표준번역)


이 말은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취임감사예배를 드리고 그날 밤 꿈 속에서 하나님과 나눈 대화의 일부다. 이스라엘을 잘 다스려 보려는 솔로몬왕은 무엇보다도 먼저 올바른 재판을 할 수 있는 지혜를 구했고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올바른 재판은 우선 하나님의 뜻( 선한 것과 악한 것)을 잘 알고 복잡한 사건들을 바르게 판단하여 상 줄 사람에게는 상을, 잘못한 사람에게는 벌을 주는데 있다. 그리하여 사회정의를 실천하고 질서를 바로잡아 백성들의 원망을 없이 하고 나라를 평화롭게 하는 것이다. 올바른 재판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며, 오늘날도 가장 중요한 재판관의 덕목이기도 하다.


법과 사법제도를 보면 그 나라와 그 사회의 문화수준과 지도자의 품격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도 옛날부터 법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다.

예를 들면 구약성경 중에 처음 다섯 책을 “법전” 혹은 “모세의 법”이라 불렀다.
사실 이 다섯 책이 모두 법조문만을 기록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은 부분들은 조상들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알려주는 신앙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이야기 속에는 이스라엘사람이 꼭 지켜야 할 규정들이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십계명(에세레트 미쯔보트)이다. 그 뿐만 아니라 살인자나 유괴범, 사기꾼들은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 또 너무 가난하거나 의지할 데가 없는 사람들을 어떻게 도와주어야 하는가? 예배(제사)는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 이와같은 것들을 중요하게 보았기에 전체를 법전이라 불렀다.

  • 솔로몬 재판 풍경 - 이 재판으로 솔로몬은 유명해진다.
    구글출처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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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율법들은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보완되어졌다. 또 이해하기 쉽고 지키기 쉽도록 해석되어서 전승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전혀 사용할 수 없는 법도 있다.그러나 유대학자들이나 랍비들은 이런 법들이 왜 생겼으며, 근본정신이 무엇인가를 열심히 연구해 왔다. 그리고 이 법들이 실제로 언제 그리고 어떻게 사용되어 졌던가를 알려주려고 노력했다. 그리하여 의문과 질문의 책인 거대한 학문의 바다, 탈무드가 탄생하였다. 사실 탈무드의 대부분은 이런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그래서 탈무드 연구자들은 토라에도 정통해야 하고, 그리고 일반 법과 사법제도에도 어느 정도 정통해야 한다.


그러면 옛 유대인들이 어떻게 법을 실제로 적용 했는가를 보자. 그 가장 대표적인 것이 솔로몬왕의 재판이다. 솔로몬 왕이 과연 올바르고 지혜롭게 재판을 했는가? 다시 의문이나 딴지를 걸어보자.

구약성경 열왕기서 3장에 보면 ‘진짜 어머니를 찾아주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한 집에 두 젊은 여인이 함께 살았다. 탈무드에는 두 여인이 형제 혹은 올케와 시누이 사이었으며 남편들은 이미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묘하게도 거의 같은 때에 각각 아들을 낳았다. 그러데 한 아이가 갑자기 죽었다. 아이가 죽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자 죽은 아이의 어머니는 함께 사는 여자가 자기 아이를 죽이고 몰래 산 아이와 죽은 아이를 바꿔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살아있는 아이가 자기 아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산 아이의 어머니도 자기 아이를 포기 할 리가 없다. 틀림없이 한 여자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도 본 사람이 없고 또 현대처럼 과학적으로 조사할 수도 없으니 누가 산 아이의 참 어머니인가? 그 동네에 사람들의 머리나 힘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아 결국 지혜로운 왕의 재판을 요청하게 되었다.

랍비들의 전승에 의하면 당시 솔로몬왕의 나이는 12살 (‘유대사’의 저자 요세푸스는 14살 이었다고 함)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어린 왕이 어떻게 이 어려운 사건을 해결 할것인가? 이 때 솔로몬왕은 칼을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산 아이를 둘로 나누어 두 여자에게 나누어 주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한 어머니는 아이를 죽이지 말고 상대 여자에게 주라고 왕께 사정했고 다른 어머니는 왕의 명령대로 공평하게 아이를 반으로 나누어 달라고 했다. 그러자 왕은 아이를 살리려는 여인이 진짜 어머니라고 판결했다. 결국 아이를 죽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진짜 어머니를 찾아 주었다는 이야기다. 이 ‘솔로몬의 명판결’은 오랫동안 전 세계인들에게 감탄을 주었다. 어머니의 모성애를 이용한 아슬아슬한 판결이었다.]


탈무드에는 이 판결에 대한 랍비들의 의견이 대강 두 가지로 기록되어 있다.

첫째는 솔로몬 왕은 참으로 지혜스러운 왕이다.그리고 왕의 지혜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산 아이를 둘로 갈라 나누어 주라”는 명령은 비정하고 문제해결 만을 위한 것으로 보기 쉽다. 소위 서로 간의 잘못을 인정하는 타협적인 해결방법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은 이런 방법으로 참 어머니를 찾아낼 수 있었다.바른 재판(사법제도)은 옳고 그른 것을 분명히 밝히고 상 받을 자에게는 상을 주고 벌을 받아야 할 자에게는 벌을 주는 것이다. 동시에 이스라엘의 정의는 항상 자비와 함께 적용해야 한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은 최종 결정권(판정권)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왕의 지혜는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머니의 바른 태도( 모성애)는 아이를 빼앗기는 한이 있을지라도 아이를 살리는 것이다.


둘째는 솔로몬왕의 판결은 위험하고 사려가 깊지 못한 것이라고 보는 랍비들도 있다. 왜냐하면, 왕은 조사를 전혀 하지도 않고 독단적으로 판결했다. 즉 여자들이나 지혜자들에게 물어보지도 않았고 또 조사관을 보내지도 않았다. 요즈음에 쓰는 거짓말 탐지기는 없었더라도, 증인들을 찾아보았어야 했다는 것이다. 증거가 없이 재판을 하는 것은 재판의 오류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솔로몬 왕을 어린 아이처럼 여겼다는 것이다. 솔로몬 왕이 아름다운 성전도 짓고, 국가재정도 풍부하게 했으나 한편 나중에는 수천의 많은 아내들을 두고 국고를 낭비하고 나라를 어렵게 만들었던 어리석은 왕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랍비 유다 벤 일라이는 솔로몬왕의 결정은 칭찬할 만한 것이 결코 못된다고 하면서, “만약 내가 그때, 그곳에 있었다면 나는 솔로몬왕의 목에 밧줄을 걸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 아이가 죽은 것만 해도 충분한데 또 둘째아이도 둘로 갈라놓으라고 명령을 내리다니…” 하며 분개했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이나 이야기들을 곧이 곧대로 받이들이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특히 랍비들을 보면 그렇다. 우리는 너무나 곧이 곧대로 받아들여서 ‘비판적 능력’이나 ‘사유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살면서 가장 중요한 능력이 [판단 능력]이라고 한다. 판단 능력이 결여되면 그것은 거의 ‘치매기운’과 같다고 본다. 잘된 판결이 아닌 잘못된 판결이 가져오는 결과는 어마어마하다.

“내가 감히 성경을 함부로 해석하고 비판할 수 있는가?”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외면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한국 기독인들이 모습이다. 물론 성경의 권위를 깊이 인정하는 것은 중요하다.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은혜로, 오직 성경으로, 오직 믿음으로'를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 권위를 앞세우면서 ‘맹목적인 믿음’이나 ‘과한 믿음’을 가진다면 그것은 성경에 대한 바른 태도가 아니다. 성경은 읽어야 하지만, 바른 해석을 하여야 하는 책이기도 하다. 성경은 다른 이름이 없다. ‘비블리아’ 라는 말은 ‘책’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바른 성경적 사고를 갖추어야 한다. 그러한 사고에서 성경적 가치관이 나온다.

그런데 일반 책들도 우리가 비판적인 사고나 논리적인 사고를 요구하면서 성경 책에 대해서는 그런 사고를 외면한다면 우리는 정말 성경에서 더 멀어질 수 있다. 우리는 성경이 영감의 책이라고 한다면 그 영감을 얻기 까지 읽고, 살펴보고 질문하고, 토론하고 그리고 심지어 다른 시각과 관점으로 볼 수 있는 눈도 길러야 한다. 나는 이것을 ‘니고데모의 안경’이라고 부른다.(요한복음 3장을 살펴보라)
니고데모는 랍비 예수님을 찾아와서 서로 하브루타를 하였다. 그리하여 놀라운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이 나온 것이다.

솔로몬왕은 정말 위대한 저작을 한 위대한 작가이다. 잠언과 전도서 또는 아가서를 보면 너무나 놀랍고 신기하기만 하다. 그러면서 솔로몬의 말년을 보면 정말로 형편없기 짝이 없다. 이 솔로몬의 [명판결] 스토리 하나만을 보고 그저 솔로몬이 지혜롭고 현명한 왕이라고 여긴다면 이것은 후대의 사람들이 지향해야할 성경적 태도이다.

성경은 솔직한 책이다. 잘한 일도 기록하지만 못한 일도 기록한다. 성경은 또한 죄를 밝히고 그 죄에 대한 죄사함도 밝히는 책이다. 다르게 말하면 믿음의 책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성경연구에 무한한 감사와 기쁨을 느끼는 사람중에 하나이다.
유대인들은 바로 ‘하브루타’를 통하여서 성경공부와 성경해석에 있어서 분명한 지평을 만들어왔다. 우리는 너무나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이 만들어 놓은 것에 쉽게 노출되어져 있다. 그것이 옳은지 틀린지도 분간하지 못하고, 그저 너무나 쉽게 받아들이고 수용한다. 사유하지 않고, 건전하고 바른 비판력이 없이 수용하는 것은 사실 제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다.

껍데기만 벗겨보면 아무 것도 아닌 ‘무용지물 신앙’이 많다.

잠시 솔로몬 왕에 대한 랍비들의 관점과 생각을 보았다.
예수님도 랍비였다는 것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예수님도 토라를 중시여겼고, 심지어 탈무드에 등장한 랍비들의 위대한 어록들도 인용하셨다는 것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예수께서 유대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받을 때 말씀으로 이겼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말씀이 힘이고 지혜이다. 그런데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데서 우리는 힘과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솔로몬의 이야기 한편을 더 안다고 해서 힘과 지혜를 얻는 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말씀화’ 되고 ‘성육신화’ 되어야 한다. 성경은 우리가 바른 해석과 바른 비판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어진 거룩한 책(Holy Scripture)이며 믿음의 책(Faithful Bible)라는 것도 명심해야 한다. 우리도 랍비처럼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랍비가 아닌 사이비가 많다.

 

 
  • 솔로몬 - 책소개 - 어떻게 유혹을 이길 것인가?
    구글출처 이미지
  • 구글출처 이미지 - 솔로몬의 명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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