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사티의 짐노페디'를 들으며
비가 추적 추적 내리며 이제는 여름을 재촉한다.
이쯤되어서 커피와 더불어 생각나는 클라식이 있다.
가끔 어디선가 들은 것 같은
그런 음악이 있다. 바로 '짐노페디'이다.
이 곡을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나는 잠시 이 곡을 들려주고 싶다.
명상곡이라고 불러도 좋고
축제곡이라고 불러도 좋다.
그리고 힐링음악이라고 불러도 좋다.
짐노페디를 작곡한 에릭 사티는
이상하게 불우하게 살아간 불후의 인물이다.
고호나 니체를 만난 듯한 인생을 주는
에릭 사티....
그가 남긴 명곡을 여기에 남긴다.
`짐노페디'는 고대 그리스 스파르타에서 행했던 아폴론를 찬양하는 연중 축제이다. 이 축제에서는 전라의 젊은 남자들이 합창과 군무로써 춤을 추며 신을 찬양하였는데, 이 의식 무도를 `Gymnopaedic'이라 하였다. 엄격함과 혹독한 훈련으로 잘 알려진 스파르타의 교육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에릭 사티가 이를 인용하여 `짐노페디'라고 이름을 붙였다. 사티는 22세에 이 이색적인 소재를 프로벨의 소설 `사란보'의 일부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1888년에 3곡의 피아노 모음곡으로 작곡하게 된다.
20세기 음악계의 이단아였던 에릭 사티는 당시 평론가들에겐 인정받지도 못했고 기존 음악계가 쌓아놓은 기법과 미학을 무시하고 자신의 고집대로 평생을 빈곤 속에서 살다 갔다. 파리음악원을 졸업한 후 1884년부터 피아노곡을 중심으로 작곡계에 뛰어든 그는 〈오지브〉, 〈세 개의 사라방드〉, 〈세 개의 그노시엔느〉 등을 통해 감정의 표출을 절제한 채 단순하면서도 기발한 단일 선율의 투명한 음악들을 선보였다. 그의 엉뚱한 아이디어와 신랄한 유머, 그리고 신비주의와 순수성이 그 특유의 음악세계를 만들어냈다. 1899년 몽마르트로 이사 간 후 그는 기괴한 옷을 입고 클럽에서 피아노를 치며 생계를 이어갔다. 드뷔시와 친교를 가지기도 한 이 시기 항상 주변에서 아마추어로 취급받는 것에 불만을 느낀 사티는 스콜라 칸토룸에 입학하여 알베르트 루셀에게 다시 음악을 배웠으나 그의 음악은 과대망상증, 기벽증으로 치부되었다. 1917년 장 콕토의 대본과 피카소의 무대장치에 의한 발레 〈파라드〉의 음악을 맡으면서 그의 가치는 반전되었다. 시대를 초월한 대담한 작곡법과 혁신적인 그의 사상은 미래주의 출현을 예고해 주었고, 초현실주의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는 죽을 때까지 외로웠다. 화가 르누아르와 드가의 모델이자 화가로도 활동했던 수잔 발라동과의 일생동안 단 한 번의 사랑으로 짧지만 격렬했던 석 달간의 사랑 후 격렬한 말다툼 끝에 수잔은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다. 다행히 죽지는 않았지만 그 뒤로 둘은 영원히 헤어졌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방에 들어간 친구들은 문 위에 걸린 두 장의 그림을 볼 수 있었다. 하나는 사티가 그린 수잔의 초상화이고 곁에 걸린 다른 하나는 수잔이 그린 사티의 초상화였다. 사티는 그의 일기에서 “나는 이 낮고 낮은 땅에, 왜 왔을까. 즐겁기 위해서? 형벌로? 무언가 알 수 없는 임무를 갖고? 휴식 삼아? 아니면 그냥 우연히? 나는 태어나 얼마 안 된 때부터 내가 작곡한 음들을 흥얼거리고 노래 불렀지. 그래, 내 모든 불행은 거기서 시작된 거야…”라고 그의 인생을 되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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