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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과 고전 이야기

세한도의 비밀과 추사의 편지

by 코리안랍비 2022.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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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단전재 절대금지>

세한도의 비밀과 추사의 편지

세한도 (국보 제 180호)

세한도(歲寒圖)의 세한은 추운 겨울을 뜻합니다. 최고의 벼슬자리에 있다가 하루아침에 제주도로 귀양을 가 세상과 단절되었던 추사의 심정, 세한도는 그 처절함과 고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추사 김정희의 내면을 담은 그림 편지인 것이죠.

조선의 글씨를 천하에 세웠다고 평가되는 추사 김정희는 그림과 시, 산문에 이르기까지 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조선 최고의 예술가로서 '추사의 작품은 가짜는 있어도 유찰은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후대에도 높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추사 아트 컬렉션, 세한도는 추사가 남긴 작품 중 그 정점에 있는 보물입니다.

일제 강점기, 추사의 작품은 당대의 애호가들 사이에서도 경쟁이 대단했습니다. 추사의 작품이라고 하면 부르는 것이 값일 정도로 인기가 많았고 경매 예상가 100원의 작품이 2,400원까지 치솟는 일 또한 다반사였죠.

먼저 세한도의 의미, 세한도의 기법과 비밀을 이야기하기 전에 세한도의 소유권과 이동경로를 알아보겠습니다.

후지쓰카와 맏아들 아키나오

세한도의 원 소유자는 추사가 제자 이상적에게 보냈으니 이상적의 소유였고 그가 죽자 제자인 김병석이 소유하다 민영희가 소유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들 민규식이 돈이 곤궁했던지 '경성 민씨 소장품 경매전'에 세한도를 내놓게 되고 이를 일본인 후지쓰카 교수가 구매를 합니다.
소전 손재형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서예가이자 서화 수십가였던 컬렉터 손재형은 전쟁이 끝나면 후지쓰카 역시 일본으로 귀국하게 될 것이고 세한도 역시 국외로 반출될 것을 염려해 '원하는 대로 다 드리겠으니 세한도를 양도해 주십시오.' 부탁을 하죠. 하지만 후지쓰카는 자신도 평생 추사를 존경해 이 작품을 평생 간직하겠노라 거절을 합니다.

결국 1944년,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달하면서 후지쓰카는 세한도를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갑니다. 이에 손재형은 미군의 공습이 한창이던 때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노환으로 누워있던 후지쓰카를 만납니다. 하지만 역시 거절당하고...

손재형은 조선으로 돌아오지 않고 두 달간 매일 후지쓰카에게 문안인사를 합니다. 그런 그에게 일본의 노교수는 얼마나 감동했을까요. 그 해 12월, 후지쓰카는 아들 아키나오를 불러 자신이 죽으면 손재형에게 세한도를 넘겨주라는 유언을 남겼고, 손재형은 마침내 세한도를 돌려받을 수 있었습니다. 추사에 대한 존경심과 학문적 열정이 깊었던 후지쓰카 교수는 돈을 받지 않았고 그저 세한도를 잘 보존해 달라는 부탁만 남겼다고 합니다.
공교롭게도 손재형이 세한도를 가지고 귀국한 지 얼마되지 않아 1945년 3월, 후지쓰카의 연구실이 공습을 받아 그가 가지고 있던 서적과 서화 대부분이 불타버렸습니다. 세한도 또한 한줌 재가 될 뻔한 아찔한 운명을 가까스로 피해간 것이죠.

그 후 세한도는 어찌 되었을까요. 손재형이 정치를 한답시고 나섰다가 잔뜩 빚을 져, 이근태에게 저당을 잡히고, 결국 미술품 수장가인 손세기에게 넘어갑니다. 현재 세한도의 소유는 손세기의 아들 손창근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되어 있습니다.
추사 김정희 초상

추사는 1786년 충남 예산에서 병조판서 김노경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머리가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그는 학문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으며, 24세 때 청나라 연경(燕京)에 가서 대학자 완원, 옹방강에게 금석학과 실학을 배웠습니다. 1819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 추사는 이후 규장각 시교,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병조참판, 현재로 치면 국방부차관에까지 올랐으나
말년에는 옥사에 연루돼 제주도와 함경도 북청에서 12년간 귀양살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유배라고 하면 집에서 난을 치다 심심하면 바닷가 산책을 하는 정도로 생각하기 쉬운데요. 1840년, 추사가 유배(流配)당할 시기 제주도는 절해고도(絶海孤島)의 섬이었고 유배형 중에도 가장 무거운 ‘위리안치(圍籬安置)’에 처해졌습니다. 위리안치란 '가시 울타리를 두른 집안에서 스스로 음식과 의복을 해결'해야 했던 것이죠. 예순을 바라보는 추사의 유배생활은 춥고 고단했으며 풍토병에 시달리곤 했습니다.

그가 집에 보낸 편지를 보면, ‘김치를 얻어먹을 수가 없고, 또 젓국과 새우젓이 없으니, 집에서 절인 무나 보내라‘ 한 것을 보아도 먹고 사는 일이 녹록치는 않았지요.
괴석도, 황산 김유근

추사의 유일한 희망은 어릴 적 친구 황산 김유근이었습니다. 김유근은 안동 김 씨의 최측근으로 순조와 처남 매부지간이었고 추사와는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위치에 있었지만 그들의 우정은 매우 돈독했죠.

‘우리는 서로 만나면 시시비비(是是非非)나 세속의(世俗) 부귀영화(富貴榮華)에 대해 말하지 않고 역사(歷史)나 예술(藝術)에 대한 대화(對話)를 나눌 뿐이다.‘

추사는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허전하다 할 정도로 가깝게 지냈던 김유근이 자신을 구해 줄 것이라 믿고 있었는데, 김유근이 갑자기 사망하게 됩니다. 이에 추사는 권도연에게 편지를 보내 하소연하죠.

‘이 몸이 백번 천 번 꺾여도 한 오라기 목숨을 이어온 것은 친구 김유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죽었으니 제 목숨은 앞으로 어찌해야 합니까? ​어디에 의지(依支) 해야 한단 말입니까?‘

그런 와중에 유배 3년째 그의 부인 예안 이씨가 유명을 달리하게 됩니다. 추사는 이런 사실도 알지 못한 채 부인이 죽은 다음날 병석에 있던 부인에게 편지를 씁니다.

‘먹고 주무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 동안 무슨 약을 드셨습니까? ​아직도 자리를 보존하고 계신지요. 너무 염려되어 잠시라도 가만히 있질 못하겠습니다.‘

( 1842. 11. 14 )
세한도(歲寒圖)는 ‘초묵 법’으로 그려졌습니다. 추사는 이 초묵 법을 ‘소치 허련’에게서 전수받았다고 하는데요. 보통의 수묵화의 경우는 농담(濃淡)을 표현하는데 진한 먹과 연한 먹 두 가지를 쓰는 것이 보통인데, 추사는 하나의 먹으로 오로지 붓의 완급(緩急)으로 농담(濃淡)을 표현했습니다. 즉, 느리게 그리면 진하게 되고, 빠르게 그리면 연하게 되는 원리... 이를 초묵 법이라고 합니다.

서예교실도 가보지 않은 제가 뭘 알겠습니까. 하지만 순간순간의 힘과 속도, 그것을 조절할 완급의 능력이 있어야, 또 필력(筆力)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겠죠.
세한도는 전체 그림은 이중 그림이 들어간 구도이며 중앙의 네모칸은 약 37.3cm, 좌우 공간은 각각 16.6cm, 발문을 포함한 전체 길이는 108.3cm입니다.

종이 세장을 붙여서 그렸던 그림이라 구도에 신경을 쓴 것이고, 맨 왼쪽의 나무와 그림 가장자리 가운데 큰 소나무를 배치하여 전체 구도를 맞추었고 좌우로 정중앙 되는 부분에 집의 지분과 소나무 끝가지를 그려 놓았습니다. 옛 그림이 뛰어난 이유는 구도를 잘 배치하면서도 여백의 미 또한 잘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우선 그림 왼쪽에 나오는 나무와 중앙의 나무는 무슨 나무이며 왜 그려 놨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왼쪽의 나무는 잣나무이고 가운데 나무는 소나무입니다. 소나무와 잣나무를 그려놓은 이유는 두 나무가 추운 겨울에도 푸르른 나무라는데 있습니다. 절개와 변치 않는 신의를 표현할 때 쓰이곤 합니다.

세한도 발문에는 논어가 인용되는 바,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

'추운겨울이 오고 난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르름을 안다.'는 의미입니다.
위, 발문이 적힌 부분의 맨 위에 선을 그으면 왼쪽 낙관의 아래 선과 일치하며, 발문 맨 끝의 낙관 아래 선은 그림에서의 지면 높이와 맞춰지게 됩니다. 발문의 높이까지 계산한 것이죠.

세한도는 추사가 제자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에게 본낸 정표로 당시 추사의 나이는 59세였으며, 제주도로 유배온 지 5년째를 맞고 있던 때입니다. 당시 추사는 지위와 권력을 잃고 세간에서 이미 잊혀진 인물이었죠.

‘세한도’에는 제주 유배지의 스산한 겨울 풍경이 고스란히 전해져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 소나무와 잣나무 몇 그루가 서 있고, 그 사이로 집 한 채가 보이는데 창문인 듯 집을 관통하고 있는 둥근 모양은 그것이 곧 추사의 마음인양 쓸쓸하기 짝이 없죠.
  • 장무상망 인장 - 세한도는 국보다 - 구글출처 이미지
세한도 오른쪽 하단에 찍혀 있는 '장무상망' 인장

그림 오른쪽 하단, 네 글자가 새겨진 사각형의 붉은색 인장은 ‘장무상망(長毋相忘)’이라는 글귀입니다.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 라는 뜻으로, 남녀간도 아닌 사제간에 이처럼 돈독한 우정을 나눴던 것이죠.
추사가 제자 이상적에게 보낸 '세한도'의 발문

얼마나 다정한 글이었을지 읽어볼까요.

"지난해 <만학>과 <대운> 두 문집을 보내주더니 올해에는 우경의 <문편>을 보내왔도다. 이는 모두 세상에 흔히 있는 것도 아니고 천만리 먼 곳으로부터 사와야 하며 그것도 여러 해가 걸려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쉽게 단번에 손에 넣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세상은 흐르는 물살처럼 오로지 권세와 이익에만 수없이 찾아가서 부탁하는 것이 상례인데 그대는 많은 고생을 하여 겨우 손에 넣은 그 책들을 권세가에게 기증하지 않고 바다 바깥에 있는 초췌하고 초라한 나에게 보내주었도다.

태사공이 이르기를 ‘권력으로 합한 자는 권력이 떨어지면 교분이 성글어 진다’고 하였는데, 군(君)은 그러지 않으니 태사공의 말이 잘못된 것인가.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날이 차가워져 다른 나무들이 시든 뒤에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가 여전히 푸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고 했는데, 지금 그대와 나의 관계는 전(前)이라고 더한 것도 아니요, 후(後)라고 줄어든 것도 아니다."

< 아! 쓸쓸한 이 마음이여! 완당노인이 쓰다. >

이에 이상적은 감격하여 스승에게 다시 편지를 보냅니다.

"삼가 ‘세한도’ 한 폭을 받아 읽으니 눈물이 흘러내림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너무나 분수에 넘치게 칭찬해주셨으며, 감개(感慨)가 진실 되고 절절하였습니다. 아아! 제가 어떤 사람이기에 도도히 흐르는 세파 속에서 권세와 이익을 따르지 않고 초연히 빠져나올 수 있겠습니까? 다만 구구한 작은 마음으로 스스로 하지 않을 수 없어 그렇게 했을 뿐입니다. 이번 걸음에 이 그림을 갖고 연경에 가서 표구하여 옛 지기(知己) 분들에게 보이고 시문을 청할까 하옵니다."

< 우선 이상적 >
  • 세한도 구글 출처 이미지 세한도는 국보다

 

이상적은 역관(譯官) 시험 합격 후 중국을 12차례나 다녀온 당대 최고의 역관이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통역만 하는 역관이 아니라 시와 문장에도 뛰어나 헌종 임금이 귀히 여겼으며 중국에선 김정희만큼 유명했습니다.

그의 위상은 1487년 중국 문인들이 이상적의 글을 모아 ​‘은송당집(12권)’이란 문집(文集)을 만들었을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었던 것이죠.

이러한 이상적이 신분적 위협을 감수하며 유배지에 발이 묶인 스승에게 청나라의 신학문 동향을 알려주고 있었으니 추사 입장에선 말할 수 없이 고마웠을 것이죠.

  • 다음 출처 이미지 - 세한도는 국보다

세한도의 발문을 다시 음미해볼까요.

​‘권세(權勢)와 이익(利益)으로 합친 자들은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사귐이 시들해진다고 하였는데 ​그대 또한 시대의 도도한 흐름 속에 있는 사람인데 세상의 권세와 이익에서 초연(超然) 하게 벗어났으니, 사마천의 말이 잘못된 것일까?‘

​‘추워진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의 시들지 않음을 안다고 했는데 그대가 나를 대함이 귀양 오기 전과 후에나 변함이 없으니, ​그대는 공자의 칭찬(稱讚)을 받을 만하지 않은가‘

세한도에는 아내에 대한 애틋한 마음과 ​황산 김유근의 우정, 제자 이상적의 의리가 담긴 그림입니다. 조선조를 빛낸 선비와 재인들, 기개와 예인의 멋스러움을 겸비했던 사람들... 그들은 우리의 조상이자 잊지 말아야 할 우리의 얼입니다.

세한도에 글을 써준 분들에게 감사해요.
이런 글이 없다면 나 자신도 쓸 수 없을 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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