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용학의 [요한시집] 을 읽고
세상의 진리를 생각하다
일찍 일어나는 날은 어색하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먹는다'는 격언은 있지만
나와는 상당히 무관하다. 워낙 늦게 자는 올빼미의 모습으로 지내왔다.
밤 12시가 넘어서야 잠을 잘 수 있는 직업이어서 그렇다.
오늘은 일찍 일어났다. 일찍 일어나서 나의 할 일을 계산하는 것도 그리 달갑지 않아서 그저 평소 습관대로 시원한 보릿물을 충분히 먹고, 나의 잠든 것 같은 뇌세포를 깨우는 일부터 한다. 그리고 어제 못 돌렸던 진공청소기를 다시 돌린다. 그러다가 서재에 다가와서 그동안 읽지 않았던 책들을 좌우로 검색해보았다.
오래전에 읽은 기억이 나는 장용학의 [요한시집]이 보이고, 그 책을 끄집어 내어서 먼지를 털었다. 제목이 왜 [요한시집]이었을까? 아마도 그는 천주교인인 모양이었다. 요한은 예수의 가장 사랑하는 제자였다. 요한복음도 지었고, 요한계시록도 지은 사도였다. 그는 자신이 지은 복음서에서 [길, 진리, 생명]이라고 자기선언을 한 예수의 삶을 담아냈다.
나는 여기서 진리를 생각해 본다. 진리라는 것은 "이것을 위해 살고, 이것을 위해 죽을 수 있는 고귀하고 영원한 가치다" 라고 임마누엘 칸트는 말했다.
진리,
이것을 위해 살고
이것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영원한 가치라면
나는 지금 진리를 제대로 추구하고 있는 것인가?
아직도 무한히 어설프고 낯선 말 - 진리
그런데 [요한시집]을 읽다가 [진리]라는 말에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시집인 것 같아도 결코 시집이 아니다.
그것은 시의 집이다. 요한이라는 사람이 사는 시의 집이다.
진리추구자 요한, 구도자 요한, 영혼의 수도자 요한에게서 나는 젊은 날 영감 같은 것이 왔다. 그래서 나는 [요한복음서]를 가장 좋아하는 사람중에 하나였다. 분명한 자기 정체성도 보이고, 그리고 그것을 위해 살고 죽은 그가 멋있기 때문이었다.
요한시집은 그리 두텁지 않고 짧아서 한달음에 읽었다. 그렇게 이른 아침을 지내고 아이들을 깨우서 아이들에게 간편식을 주었다. 콘 프레이크와 우유가 그것이다. 아침을 먹지 않는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아침의 맛을 보여주고 싶은 아빠의 마음이었다. 아이들이 학교 가는 시간, 조금은 피곤하고 졸리지만 그래도 나도 출근준비를 하고 나의 사무실로 걸어왔다.
집과 사무실은 걸어서 3분 거리이다.
사무실에 오면서 [요한시집]을 다시 들고 나왔다.
책은 읽었어도 사색의 시간은 없었기에 나는 다시 반추를 하러 책을 들고 온 것이다. 책에 대한 욕심은 별로 없다. 그저 먼저 태어나 먼저 살아간 사람들의 글을 읽는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잘 아는 나다. 그래서 그들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읽는 것이다. 어느 순간 사람들은 나의 글을 읽고 있었다.
요한시집을 보다가 눈길이 머무는 곳이 있었다.
"우선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무엇보다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진리를 찾는다고 하여 애매한 제스처를 부려서는 안 된다. 차라리 그 진리를 버려야 한다. 그런 제스처 때문에 이 공기가 얼마나 흐려졌는지, 그것을 정확하게 계량해 낸다면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이 시시해질 것이다."
진리는 계산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애매한 제스처를 부려서도 안된다.
어설프게 진리를 추구한답시고 살아온 세월의 속면을 보여주는 것 같은 글귀이다. 반성문이라도 써야겠다.
얼마전에는 내가 아주 아끼고 축복하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글은 소리없는 말이요, 말은 소리있는 글이다"
물론 내가 만든 어록일 수 있지만 글과 말은 곧 그 사람을 나타내준다. 그 글과 말이라는 말이 어렵다면 [문학]을 생각하면 쉽다. 문학은 정말 위대한 발명품이다.
괴테는 [문학적인 것이 세상을 구한다] 라고 하였다.
문학은 상당히 여성적이다. 그래서 괴테는 또 [여성적인 것이 세상을 구한다]라고 하였다.
문학과 여성,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나는 남자다. 그런데 문학과 만나면서 여성적인 것을 추구하는 남자가 된 것이다. 문학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며 그 관문의 끝에는 진리와 지혜라는 여성이 기다리고 있다.
문학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너무나 무미건조할 것이다.
문학은 진리는 아니다.
하지만 진리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문학은 도는 아니다.
하지만 도를 추구하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도구이다.
문학은 그렇다고 돈도 아니다.
하지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깨달음]이라는 선물을 선사한다.
장용학의 [요한시집]을 읽고서 잠시 [진리]에 대해서 생각해 본 순간은 나에게 특별하다. 다른 이들은 특별하지 않을 것이다. 장용학이 누군지도, 그의 작품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나의 이상하고 유별난 [넋두리]로 들릴테이니...
진리,
그것을 위해 살고
그것을 위해 죽는다
칸트는 진리를 그렇게 말했다
기꺼이 죽음도 불사하는 불멸의 가치다.
그것은 참 행복자의 길이기도 하다.
요한사도는 아마 살아서도 행복했고,
죽어서도 행복을 준 사람이다.
그는 90세가 넘도록 살았다고 한다.
그가 오래 살았기에 세상에 오래 남겨두신 그 분의 뜻을 잘 전달하라는 목적에 충실하였던 것이다.
탈무드에 보면
'진리는 구하기 쉬운 돌맹이와 같다'라고 하였다.
구하기 쉬운 돌맹이라는 것... 히브리어로 에벤이라고 하는 돌이라는 것을 우습게 보고 가벼이 여기는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나는 가끔씩 '돌'을 줍는다. 예쁘고 나름 근사하게 생긴 '돌'을 주우면 마치 '진리'를 주운 것 마냥 해맑아진다.
탈무드의 말이 틀린 것이 아니다. 진리는 돌과 같은데 그것은 잠시 나의 허리를 굽혀서 손을 내밀어 줍는 행위와 같은 것이다. '허리를 굽히는 겸손'이 없으면 '진리'라는 돌을 집을 수 없다. 사람들의 대부분은 '허리를 굽히지 않는다' 허리를 굽히면 주울 수 있는 진리는 어디에나 있다. 그런데 그 허리를 굽히지 않는다.
이제라도 허리를 더욱 굽히려고 한다.
돌이라는 진리를 줍기 위해서...
진리는 그리 복잡하거나 힘든 것이 아니라. 그저 허리를 굽혀 손을 뻗으면 되는 이다. 진리를 거창하게 포장하고 , 그리고 마치 진리를 추구하는 것처럼 제스처나 척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많은 성직자라는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오류를 나는 반복하고 싶지 않다.
참 잘 읽은 책 노벨문학상 후보에도 오른 이 창래의 [척하는 삶 The Gesture Life]도 다시 읽어보고 싶다.
노벨문학상 후보까지 오를 정도의 문필가인 이 창래 예일대 교수의 책을 읽을 생각하니 마음속에 [척하지 말고 착하자] 라는 생각이 든다.
글이 길어졌다. 하고 싶은 말을 글로써 표현하니 마음 한켠이 서늘해진다.
오늘도 찬바람은 불어 오고, 그리고 커피는 여전히 쓰지만 달고, 음악은 고요한 금강처럼 흐른다. 이 아침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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