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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브루타와 코칭 & 멘토링

에세이, 삶과 죽음 사이에서

by 코리안랍비 2022.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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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양 - 저녁 해변 - 우리가 사는 것은 해가 뜨고 지는 사이에 있다. 하루를 24시간으로 나누면 그렇다는 그림
    구글출처 이미지 - 석양

 



삶과 죽음 사이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자였던 장 폴 사르트르는
자신의 저서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에서
"인생은 B와 D사이에 있는 C다" 라고 하였다.

이것은 출생의 BIRTH 와 사망의 DEATH 사이에
사람들은 CHOICE 선택하면서 산다고 하는 것이다.
나는 여러 수많은 명언과 명구중에서
이 구절이 가장 인생을 밝히는 명구로 믿고 있다.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는 것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서 선택하면서 사는 것이다.
살면서 선택의 순간은 수도 없이 일어난다.
사람들은 성서 전도서 3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무엇이든 때를 따라서 움직인다는 것이다.
일어날 때가 있으면 잘 때가 있다.
상처줄 때가 있으면 상처를 싸 멜 때가 있다.
전쟁할 때가 있으면 평화할 때가 있다.
병들 때가 있으면 치유할 때가 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죽음에 대해서는 어느 때가 없다고 전도서 기자는 말한다. 죽음은 마지막 때여서 그럴 것이다.

  • 사르트르 - 인생은 삶과 죽음 사이의 선택- 사진
    다음 출처 이미지 - 사르트르의 명언

 


얼마전에 잘 알고 지내던 지인 3분이 돌아가셨다.
한 분은 같이 연구소를 운영하던 분이셨고,
한 분은 교회에서 막역하게 지내시던 분의 부인이시며,
다른 한 분은 친구의 어머니이시다.

이 분들이 오래 오래 사셨으면 다행이건만
이 분들은 그리 오래 사시지 못하셨다.
연구소를 운영하시던 분은 향년 53세로 생을 이별하였고
교회 집사님의 부인께서는 56세의 일기로 생을 이별하였다.
중고등학교 친구의 어머니께서는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떠나는 것은 슬프지 않은 것이 없다.
다시는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승과 저승은 아득히 멀기만하다.
아쉬운 것은 생전에 내 자신의 행동이다.

나의 행동을 후회한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사랑하고 기억하는 분들에게 애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태어나는 것은 순서가 있지만 죽는 것은 순서가 없다. 다만 이 세상에서 무엇을 선택하여 어떻게 살았는가가 고인들에 대한 평가이다.

우리는 과연 어떤 사람으로 남아야 할까?
사람은 가도 사랑은 남는다고 한다.

잠시 서재를 보다가, [내일이면 못볼 사람들을 위하여]
라는 책을 발견했다.
그 책 제목만 보아도 눈물이 핑돌 듯하였다. 내일이면 못볼 사람들은 계속해서 늘어난다. 그 책속에서 말하는 중심사상은 이것이다.

"남의 인생을 살지 말고 자신의 인생을 살다가 떠나라"
라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은 남이 만들어 놓은 것이나
선택한 것을 따라서 살아간다.
거기에 엄청난 에너지와 자원을 쓴다.
다른 말로 하면 '힘'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물론 그것도 선택이다. 내가 이렇게 살든, 저렇게 살든 무슨 상관이랴 ~~ 하겠지만 한번의 선택이 인생을 좌우하는 일은 어디서나 일어난다.

내일이면 못볼 분들을 위해서 내가 할 일은 무엇일까?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저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에 무슨 효험이나 효능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저 기억하고 싶고, 주어진 삶을 축복하고 싶어서다.

그리고 저들을 위해서 전화하는 것이다.
요즘처럼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전화비가 더 오르지 않는 시대가
그래서 수시로 전화를 하고 안부를 묻는 것은 정말 최고의 인간관계의 기술이 될 수 있다. 그런 기술울 위해서 내가 전화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조금이라도 목소리와 웃음을 듣고 싶어서다.

또한 저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려주는 것이다.
나도 힘들때가 있지만, 저들은 더 힘들다.
가까이에서 만나지 못하지만 멀리 있다고 하여도
나는 저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려줄 수 있다.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곧 사랑의 표시이다.
세상을 떠난 사람들에게도 눈물을 흘리지만
아직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이들을 위해서도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어떤 대학교회 친구가 하나 있었다.
그 친구에게 교회에 초청을 하고
성경을 같이 공부하자고 권했었다.
그 친구는 "성경은 읽겠는데, 기독교는 정말 싫다"고 항변하였다.
그런데 믿음은 말씀을 읽는데서부터 시작되니
요한복음 성경읽기를 권하였다.
같이 성경을 읽고 공부하던중에
그 친구가 갑자기 변화되는 일이 벌어졌다.
바로 성경에서 가장 짧은 구절에 그는 그만 무릎을 꿇은 것이다.

JESUS WEPT !
예수께서 우시니라 !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성서에서 가장 짧은 구절이다.
이 구절에 그 친구는 그만 대성통곡을 한다.
아주 똑똑하고 교만한 친구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면서
기독교 신앙을 깊이 영접하는 일이 벌어졌다.

요한복음 11장에는 예수와 친했던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삼남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나사로 오빠가 몹쓸 병에 걸려서 그만 죽고 만다. 그런데 나사로의 무덤에 오신 예수께서는 나사로의 죽음과 더불어서, 사람들의 불신에 그만 눈물을 흘리신다. 그 대목에서 그 친구는 '신의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그 친구를 평생 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성서 구절을 평생 잊을 수 없어서 가끔씩 묵상한다.
남을 위해서 울어줄 수 있는 사람은 사랑의 사람이다.

성서라는 책에서 나오는 내용이지만,
성서는 다른 이름이 없다. 그저 '책'이다.
그냥 책이라는 것을 읽었을 뿐인데, 어떤 사람은 감동을 얻고, 어떤 사람은 생명을 얻는다. 그것 또한 성서를 읽기로 선택한 결과에서 일어난 것이다.

우리는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한다.
삶과 죽음의 사이에서 중간에 놓여진 존재이다.

사르트르는 인생은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일 뿐이라고 하면서
사랑하고 결혼하고 자녀를 낳고 키우는 것도 허무한 실존주의라고 보았다. 하지만 우리는 삶과 죽음이라는 것을 선택하지 않아도 삶과 죽음을 같이 누리며 살고 있다. 삶은 그 자체로 아릅답다. 그저 세네카가 말한데로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용기를 갖는다.

우리는 가치있게 살라고 이 세상에 부름( CALLING),을 받았다. 오래살라고 부름을 받은게 아니라....

때로는 선택하지 않는 것도 선택이 된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선택을 받았다고 생각해보자.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크게 위안이 되는지 모른다.
또한 죽는 것도 저 하늘이 부르는 것이라고 여기자.
잠시 이 땅에 소풍오고 영적인 여행을 온 여행자로 생각하자.

그리하여 우리 생을 아름답게 만들고 꾸미고,
다른 축복속에서 기억하는 사람들과 즐거이 누리며,
행복하게 짧은 인생 예술처럼 지내다가 지구라는 별에서 떠나자.
그리고 가져갈 것은 신앙과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그리고 좋은 추억이다.

일생을 그저 하루 24시간으로 따진다면,
나는 아마도 오후 3-4시에 가까울 것 같다.
몇년후면 금새 저녁에 가까워질 것 같다.

우리에게 많은 시간이 남아 있지 않다.
내일이면 못볼지 모르니 사랑하는 이들과
자주 기도하고, 연락하고, 식사하고, 눈물흘리는 시간을 갖자.

며칠전 노을지는 강변에 잠시 눈이 머문적 있었다.
석양이 지는데 앞에 갈대밭과 들풀이 펼쳐져 있었다.

성서는 인생은 들의 풀이나 꽃과 같다고 하였다.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다고 한다.
그 말을 실감이라도 하는 듯...
한순간 나는 시인이 되고 철인이 되어 갔다.

"나 아침이면 들꽃으로 피었다가, 저녁이면 노을로 지리"

아름답게 태어난 사람
아름답게 살다가
아름답게 떠나는 것이
나의 긍극적 목표이자 목적이다.

2019년 2월 글

 

  • 구글출처 이미지 - 인생의 황혼녁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사진
  • 다음 출처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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