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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형진 교수의 닫힌 사회와 열린 사회 - 중앙시평

by 코리안랍비 2024.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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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사회와 열린 사회
중앙일보
입력 2024.06.21 00:57

서울신문 출처 이미지






양형진 고려대 명예교수

찬 물건과 뜨거운 물건을 같이 놓으면 찬 건 더워지고 뜨거운 건 식는다. 뜨거운 곳에서 찬 곳으로 열이 흐르기 때문이다. 찬 곳에서 뜨거운 곳으로 저절로 열이 흐른다면, 굉장한 일이 벌어진다. 요즘처럼 더운 날 자동차 탑승 공간에서 뜨거운 엔진으로 열을 흐르게 할 수 있다면, 탑승 공간은 열이 빠져나가 시원해지고 엔진은 흘러온 열에너지로 작동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연료 없이 시원한 자동차를 타고 여행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설명하는 게 열역학 제2법칙 혹은 엔트로피(entropy) 증가의 법칙이다. 엔트로피는 열역학과 통계역학, 정보이론에 두루 나오는 용어지만, 그 의미를 직관적으로 파악하기 좋은 건 아마도 정보이론일 것이다.

닫힌계에선 불확실성 증가하고
열린계에선 생명이 성장하듯이
소통·교류하는 열린 관계 위에서
다름 받아들여야 발전할 수 있어

정보이론에 의하면 엔트로피는 대상을 완벽하게 파악하기 위해 얻어야 하는 정보량이다. 대상을 완벽하게 파악하려면 내가 얼마나 더 알아야 하는지를 알려 준다. 보통 시험이 얼마나 아는지를 측정하는 것과 달리, 엔트로피는 얼마나 모르는지를 측정한다.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것은 대상에 대한 정보가 점점 불확실(uncertain)해진다는 것이다. 컵에 풀어 놓은 커피 가루가 잔 전체로 퍼지는 것은 커피 가루의 위치 정보가 점점 불확실해지는 과정이다. 가루가 퍼지기는 하지만, 퍼졌던 가루가 저절로 한군데로 모이지는 않는다. 쓸어 모은 낙엽이 흩어지고, 정리해 놓은 서랍이 어지럽혀지고, 애써 암기한 것을 잊게 된다. 이 모두는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한, 정보가 사라지게 된다는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지금까지의 설명과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게 생명이다. 어린아이가 성장하는 건 고도의 정보가 담긴 신체가 커가는 과정이다. 진화의 역사에서 고등생명체의 출현 역시 정보량이 증가하는 과정이다. 생명체의 성장이나 진화엔 정보량이 증가하고 엔트로피가 감소하는 과정이 있다. 열역학 제2법칙과 다른 방향으로 진행하는 이런 과정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건 법칙의 전제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경우처럼 자연과학에서도 전제는 매우 중요하다. 열역학 제2법칙의 전제는 닫힌(closed) 시스템이다. 닫힌계에서는 엔트로피가 증가한다. 이와 달리 물질이나 에너지를 외부와 교환할 수 있는 열린(open)계에서는 얼마든지 정보량이 증가할 수 있다. 노력하기만 한다면 흩어진 낙엽을 모을 수 있고, 어지럽혀진 서랍을 정리할 수 있으며, 잊어버린 것을 복습하면서 기억해 낼 수 있다.

열린계의 대표적인 예가 생명이다. 생명은 얼핏 보면 닫힌계처럼 보인다. 세포막이나 피부처럼 자신과 외부를 구분하는 경계면이 있기 때문이다. 생명체의 안팎은 물질의 구성 성분과 농도, 온도뿐 아니라 시스템의 구조와 역할 등에서 서로 전혀 다르다. 이처럼 생명은 경계면을 사이에 두고 주변과 극심한 비평형상태(non-equilibrium)를 유지한다. 이 경계면이 무너지면 서로 다른 안팎의 세계가 뒤섞이면서 비평형상태가 붕괴한다. 과다 출혈이나 감염 등을 거치면서 목숨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 경계면이 없다면 트로이의 목마를 성안으로 들여와 파멸에 이르듯, 생명은 아마도 자기동일성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환경에 조건 없이 개방하지 않는다는 것만 보면, 생명은 닫힌계로 보인다. 하지만 생명은 닫힌계가 아니라 열린계다. 왜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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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형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주위와 경계면을 설정하지만, 이는 주위와 차단하려는 게 아니라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려는 것이다. 성을 쌓되 성문으로 왕래하듯이, 경계면의 창구를 통해 주변과 물질을 교환한다. 영양분을 끌어들이고, 이를 에너지로 변환시켜 사용하고, 이 과정에서 나오는 노폐물을 방출한다. 신진대사라는 교류와 소통의 과정을 통해서만 생명은 자신의 살아있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돌이 생명이 아닌 것은 자기 자신을 닫아 놓고 주위와 소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명은 경계면으로 자신과 주위를 구분하지만, 외부와 차단하지 않고 소통하는 열린 세계다. 어린아이가 성장하고 진화라는 기적이 지구 위에서 이뤄진 것은 생명이 열린 세계였기에 가능하다. 숨 안 쉬면 죽는 것처럼, 닫힌 세계는 결국 죽음으로 가는 길이고 열린 세계는 생명으로 가는 길이다.

생명이 열린 세계여야 하는 이유는 그 스스로가 자족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주위와 연관과 의존 관계를 형성하여 자신의 부족한 점을 보충해야 하기 때문이다. 개인이든 사회든 자신이 부족하다는 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부족하다는 것을 모르는 게 부끄러운 일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자각하고 다른 세계를 받아들여 성장하는 게 생명의 지혜다. 부족하므로 성장하는 게 생명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지혜를 받아들인 교류와 소통이 없었다면 과학혁명도 없었을 것이다. 성장하고 향상하고자 한다면, 교류하고 소통하면서 자기정체성을 유지하고 확장하는 절묘한 조화와 균형의 지혜가 필요하다. 그게 건강한 생명이고 건강하게 발전하는 사회다.

양형진 고려대 명예교수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7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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