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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칼럼과 에세이

양가감정 - 야누스에 대하여

by 코리안랍비 2022.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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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가감정 - 야누스 Janus

가끔씩 서재에 있는 시집을 보곤 한다.
우리 집에서 다른 책들보다 시집이 유독 많다.
시인도 아닌데 시집을 많이 두고 산다.
시집들이 내 집으로 시집을 온 것이다.
(*하이개그인지 아재개그인지)

약 300여권의 시집이 있는데,
그동안 나름대로 시인이 되려고 사모으기도 하였고
집안에 나름 유명한 시인?이 큰 형님이다.
3,4년전에 아주 잘생긴? 조카를 장가 보내시고
지금은 대학과 대형서점에서 시창작법을 지도하고 있다.

그런데 "책이 많다고 공부를 잘 하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하는데
시집이 많다고 해서 내가 시인이 된 것도 아니다.

미당 서정주 시인은 "시도 써야 시가 된다"고 하였다.
나는 이 말에, "시도 때도 없이 써야 시인이 된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어의 유희가 아니라, 정말 시도 때도 없이 써야 시가 나오고,
결국 시인도 되는 것 같다.
아직은 나는 근시인의 반대인 <원시인>이다.
언젠가는 누군가가 <시인>이라고 불러주겠지...

시한편 쓰는 것이 이상하게도 내 양심과 맞지 않는다.
괜히 나같이 약간은 추하고 더러운 면이 있는 내가
마치 신성해보이고 고결해보이는 시를 논한다는 것이 어불성설 같아서
시창작을 제대로 해 본적이 없다. 그냥 마음내키는대로 쓰라는데 나는 왜이리 어려운지 모르겠다.

조정래 역사소설가가 시인인 김초혜 부인에게
꼼짝을 못하는 이유를 나는 대충 짐작하겠다.

시인 랭보는 "10대시절에 시를 써보지 않으면 시가 나오지 않는다"
라고 하였는데, 이제 10대 자녀들을 둔 나로서는 그 아이들에게 시를 권한다.
첫째가 시집을 읽는다. 둘째가 시집을 읽는다. 셋째도 시집을 읽는다.

우리 집에 유명한 시인들의 시집은 상당히 많이 가지고 있다.
시집이 좋은 것은 일단 짧아서 좋다.
오래 걸리지 않으니 잠시 커피를 마시면서
그저 잠시 스치기만 해도 시가 정말 좋다.



오늘은 서재에서 이경임 시인의 시집을 찾아 보았다.
며칠전 [상처가 꽃이 되는 순서]라는 책을 쓴 전미정 선생의 책이 있었는데
그 책 속에 등장하는 시가 바로 이경임 시인의 시였다.
그 여류시인의 시집을 앞뒤로 스치듯이 읽어댔다.
그중에 <야누스의 나무들> 이라는 시가 자석처럼 이끌렸다.

야누스의 나무들
 
몸의 반쪽은 봄을 살고
몸의 반쪽은 겨울을 산다

꿈의 반쪽은 하늘에 걸얻고
꿈의 반쪽은 땅속에 묻어둔다

마음의 반쪽은 광장이고
마음의 반쪽은 밀실이다

생각의 반쪽은 꽃을 피우고
생각의 반쪽은 잎새들을 지운다

집의 반쪽은 감옥이고
집의 반쪽은 둥지이다.

시는 이렇게 전개가 된다.
이 시를 읽다가 한편으로 이경임 시인에게
한편으로 미안하고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좋은 시를 읽을 수 있고,
낭독할 수 있고
느끼고 누릴 수 있다니...
내일은 이경임 시인이 다른 시집도 사 보리라.

야누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경비대장이다.
눈이 양쪽에 달려 있어서 좌와 우를 다 경비할 수 있는 문지기이다.
그래서 12월은 December지만 1월은 January이다.
바로 전년도와 다음 년도의 경계를 이루는 존재가 야누스였다.

심리학에서는 극과 극의 감정을 [양가감정]이라고 부른다.
물론 [인간의 이중성]이나 [양면성]이라고 불러도 좋다.

나는 이 시에서 나름 웃긴 부분이 있다.

집의 반쪽은 감옥이고
집의 반쪽은 둥지이다.라는 싯구이다.

물론 요즘의 코로나 시국에 아주 걸맞는 시로 적격이다.
몸의 반은 봄이고, 몸의 반은 겨울이다.
몸의 반은 하늘을 이고 있고 몸의 반은 땅속에 묻고 있다.
마음의 반은 개방되어 있고, 마음의 반은 폐쇄되어 있다.
생각의 반은 꽃이 피고 반은 잎이 진다.

인간은 극과 극 사이에서 오가는 존재인가보다.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있다.
예쁜 점도 있지만 안예쁜 점도 있다.
한쪽으로 치우친 사람들은 양가감정이 약하여 자칫 분열로 간다.

정신 분열이라는 것은 원래 [두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양가감정은 그렇지 않다. 일종의 양면성에 가깝다.
음과 양의 조화가 자연의 이치이듯이,
인간은 서로 장점과 단점,
그리고 잘난 점과 못난 점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서 지내야 건강하다.

그래서 인터넷을 뒤져서
이경임 시인의 이 시에 대한 비평이나 코멘트를 찾아 보았다.
전혀 [사색없는 밴드, 사색없는 블로그, 사색없는 카카오스토리] 등만 난무하였다. 참으로 [거지같은 것이나 쓰레기 같은 것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나는 되도록이면 중요한 정보가 아니면, 저런 [전자쓰레기들]을 싹 치우고 순수하게 나의 감정과 이성을 존중하기로 다짐한다.

그러고보면 나도 참 야누스적이다.
지나온 세월을 다시 반추해본다.

총선 투표일인 며칠전에는 아버지의 산소에 다녀왔다.
대학 3학년 시절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는데
뚜렷한 기억은 몇개 있지만, 갈수록 기억도 약해져간다.

아버지는 나에게 기둥이었다. 그것도 큰 기둥이었다.
여러가지로 실패하고 역정의 세월을 보내다가 불의의 사고로
이슬처럼 가버리신 아버지에 대해서 회한의 감정이 여전히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아버지는 아마도 몸의 반은 봄을 지니고, 몸에 반은 겨울을 지니신 분이었던 것 같다. 나도 그 아버지의 나이에 들어섰다. 그런데 내 아버지처럼 이상하게 삶에 자신감이 별로 없다. 겉으로는 강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약한 내 모습을 자주 만난다.

겉으로는 밝고 아름답기만 할 것 같은 인생이라고 여겼는데,
때로는 어둡고 슬픈 것이 같이 상존한다.
맞다. 밝고 아름답기만 한 인생이 어디 있으랴,
어둠이 있어야 별이 더욱 밝게 빛나는 법이다.

이만큼 나이가 드니까 이젠 그것을 몸으로 깨닫고 채득하는 것 같다.
누군가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세월이 그것을 가르쳐 준다.
자연이 그것을 가르쳐 준다.

젊어서는 인생의 밝고 아름다운 면만 추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세월은 그것만을 허락하지 않았다.
인생의 한쪽 면만 추구하도록 우리는 설계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인생이 그럼 너무 간단하고 재미가 없지 않은가...
인생은 수많은 사건과 일의 연속이다.
그런 것들을 통해서 균형을 찾아가고, 조화를 찾아가는 것이다.

인생이 그래서 감옥도 부드러운 둥지가 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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