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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과 고전 이야기

미술사, 책이 죽어가는 세상과 책읽는 여인들

by 코리안랍비 2022.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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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 여인

- 코로, 르느와르, 프라고나르 그리고 윤덕희

괴테는 일찍이 “여성적인 것이 세상을 구한다” 라고 일갈했다. 그런데 여성적이라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문학적인 것’을 말한다. 여기서 문학적이라는 것은 여성의 이성과 감성을 대변하는 말이다.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감수성이 강하다.

역사적으로 여성들은 책을 읽는 것에 대해서 남성들이 도외시하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성들의 사회진출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이었으며,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우월적인 지위를 갖는 것에도 상당히 반대하였다. 동양사회에서나 서양사회에서 ‘공부나 학문’은 남성전유물이었다. 실제 한자를 보아도 ‘공부(工夫)’는 남자가 하는 일라고 보았다. 조선에서도 여성들은 과거시험도 치룰 수 없게 하였다. 이런 폐쇄성이 강한 나라에서는 여성이 기를 펼 수 없다. 서양사회에서도 여성들에게는 많은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저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가정에 충실하기만을 기대하였거나, 여성은 그저 남성들의 유희의 대상으로 여겼던 것도 역사적인 사실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한가지 사실이 있다. 여성들도 남성들 이상으로 높은 수준의 지성과 관념을 가진 이들이 많았다. 사회적인 제약과 차별에도 불구하고 책을 잡고 글을 쓴 여성들중에는 상당수 걸출한 이들도 있었다.

오늘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여성의 책읽기’이다.
현대사회에서 책을 가장 많이 읽는 사람들은 누굴까? 바로 ‘여성’이다. 물론 어린이들이 가장 많은 책을 읽는다고 하지만 그러한 책들도 상당수 엄마의 리더쉽에서 나오는 책읽기가 많다. ‘책 읽는 여성’의 수가 그 나라의 저력을 말해준다는 통계도 있다.

요즘 들어 책을 읽는 여성들의 수가 줄면서 출판사에는 빨간 불이 켜져 있다. 상당수 남자들이 책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 문학을 멀리하고 술과 오락에 많이 빠져 있는 남자들이 많다. 그리고 일에 중독되거나 사회생활에 지독하게도 매장되어 살아가는 남성들이 많다. 그에 반해 여성들은 상당수가 아직도 책을 붙들고 글을 쓰며, 자신만의 감성과 이성을 살리고 있다.

가끔 스타벅스나 도서관에 가보면 책 읽는 여성들이나 책을 보면서 자신들의 글을 쓰는 이들을 자주 본다. 인터넷 공간에서나 사이버 공간에서도 책에 대한 글이나, 자신만의 에세이나 일기를 쓰는 이들은 거의다가 여성들이다. 그런데 남성으로서 여성에 대한 옹호적인 글을 오늘 쓰고 있다. 여성에 대한 옹호적인 글이라고 하여서 내 자신이 ‘페미니스트’가 되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페미니즘 현상’이나 ‘여성의 사회참여’ 그리고 남성들의 자리를 상당수 차지하는 여성들의 ‘노동력’이나 ‘리더쉽’도 상당히 많이 보게 된다. 그러한 배경에는 바로 ‘여성들도 공부하고 책을 읽는 문화’가 가장 큰 역할을 하였다고 본다.

공부와 학술이 남성들의 전유물에서 이제는 남성과 여성의 ‘공유물’로 변화하고 있다. 그리고 상당부분 남성들보다 더 나은 학문성이나 지성력을 보여주는 여성들이 많다. 정치계나 학계를 보아도 여성들은 상당수 높은 포지션과 리더쉽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미술가를 소개하는 글에서 서두가 너무 길었다.
‘책 읽는 여인’에 대해서라면 세 명의 작가를 꼽을 수 있다.
코로아 르느와르 그리고 프라고나르다. 조선의 윤덕희이다.



장 밥티스트 카미유 코로는 풍경화로 유명한 화가이다. 그는 현대적인 풍경화를 개척한 인물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의 인생의 말년에는 ‘이지적’인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는 다른 작가들보다 가장 많은 ‘책 읽는 여성’에 대한 그림을 그렸다. 그는 당대에는 인정을 받지 못하였지만 그러나 인생 말년에 풍경화보다는 스케치에 몰두하고, 여성에 대한 그림들을 자주 그렸다. 그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많은 여성 그림을 그린 화가였다. 소녀에서 중년의 부인까지 그는 여러 연령대의 여성들의 모습속에서 유독 ‘독서하는 여성의 모습’을 그리는 것에 몰두하였다.

코로의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책을 읽는 여성의 모습이 상당히 수수하게 그려져 있다. 머리도 특별히 손질을 하지 않고 그저 외모도 평범하다. 하지만 책을 읽는 모습에서는 사색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색이라는 것은 외적인 측면에 대한 강조보다는 자신의 내적인 측면의 성찰과 자기 발전에 기초를 두고 있다.

프랑스의 여성들은 책을 많이 읽는 것으로 소문이 나 있다. 아마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책을 읽는 여성들이 바로 프랑스 여성들이다. 오죽하면 프랑스 입시는 ‘바칼로레아’라고 하여서 논술이 주종이다. 논술로 학생들의 80%가 대학을 가는 나라이니 책을 읽지 않고는 배기지 못한다. 코로가 그린 [책 읽는 여인]은 독서에 열중하면서도 그 방안의 다른 물건들은 대체로 생략되거나 흐릿하게 그려져 있다. 그는 다른 것보다 ‘독서 그 자체에 몰두하는 여인’의 모습을 인상적으로 그려 내었다.

 



코로와 더불어서 가장 많이 ‘책 읽는 여성’의 모습을 그린 사람은 ‘피에르 오귀스트 르느와르’를 꼽을 수 있다. 르느와르는 아마도 미술계의 ‘페셔니스트’라고 불러도 좋다. 그의 그림에서는 코로의 그림과 달리 수수하기보다는 화려하고, 평범하기보다는 아름답고 젊은 여성의 미(美)를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살짝 드러나는 가슴선과 팔의 풍만함을 강조하고 있다. 아마도 독서보다는 여성이 아름다움을 더 강조한 것 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화려하고 아름다운 여성일지라도 책에 대한 관념이나 사랑이 강하다는 것도 보여주고 있다. 사실 가난한 자나 부한 자나, 외모적인 모습으로 ‘독서’를 평가해서는 안된다. 독서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만국의 공통어이다.

만국의 공통어로서의 ‘독서’는 사람의 외적인 모습을 우아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지적인 ‘패션’이라고 불러도 좋다.

청소년기에 보았던 르느와르의 ‘책읽는 소녀’를 기억하는가? 독서에 열중하는 소녀의 모습은 창밖에서 흘러들어오는 부드러운 햇살과 어우려져 절묘하게 포착되어 있다. 날이 빛나는 시간에 책을 읽는 모습은 더욱 그 소녀의 모습을 빛나게 만든다. 르느와르는 그 소녀의 모습을 ‘빛을 머금은 살결’이라고 표현하였다.

이 그림이 실제 모델인 소녀는 파리 몽마르트 언덕에서 품을 팔던 어려운 처지의 소녀였다고 한다. 청소와 심부름을 닥치는데로 하던 소녀가 어려움 환경에서도 ‘책을 읽는 모습’에 감동을 받아 르느와르는 그 소녀를 ‘모델’로 청했다고 한다. 독서로 충만한 그 소녀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게 보였는지 르느와르는 그 작품으로 일약 유명해진다. 그 작품은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다음으로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의 ‘책 읽는 여인’에서는 르느와르보다 더 야하게 묘사되어 있다. 귀족 여인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자태를 보여준다. 그의 작품에서는 여성의 나체(裸體)와 책을 연결하여 섹슈털리티(성적인 미)를 상승시키는 효과를 주고 있다.

그의 작품중에 하나가 ‘책 읽는 소녀’인데 그는 로코코 양식의 대표적인 화가이다. 그는 프랑스 작가였지만 이태리를 여행하고나서 종교화나 역사화 등을 포기하고 소녀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고 한다.

프라고나르는 그림을 그리는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서 하루에 한편의 그림을 그릴 정도로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이 그림도 하루만에 그려낸 그림이라고 한다. 이 그림에서 소녀는 오른 손으로 가볍게 책을 쥐고 있고, 책 읽기에 완전히 몰입되어 있다. 얼굴과 몸이 빛을 받고 있으며, 벽면에 희미한 그림자가 보인다. 레몬 색깔의 드레스를 입고 있는데, 깃은 힌색이며 엷은 자색이 섞인 리본 장식이 있고, 몸통과 목 머리 등에 두루 액센트를 주고 있다. 이 그림은 전체적으로 내밀하고 고독한 행위로서의 책 읽기를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소녀의 조그마한 손에 잡힌 조그만 책 속의 세상을 누구도 깰 수 없다. 우리는 그저 그 소녀가 책을 놓고, 눈을 떼고 현실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뿐이다. 프라고나르가 그린 이 소녀의 이름은 아직도 모른다고 한다. 이 그림은 다만 소녀가 다른 사람이 아닌 책에 몰두한 옆모습을 담고 있다. 그래서 프라고나르는 말했다.

“소녀가 책을 쥔 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면 이 그림은 그저 한 인물의 초상화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 그림은 워싱턴 내셔널 겔러리에서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의 수도에서 18세기 프랑스의 화가의 그림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미국도 ‘책 읽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상징한다.

한국에는 과연 ‘책 읽는 여인’에 대한 그림이 있을까?
한국은 책 읽는 선비나 남자들에 대한 그림이 너무나 많다. 답답하고 폐쇄적인 나라, 가부장적이고 유교적인 나라다 보니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외로 여성에 대한 그림들이 많다.

삼봉 정도전 선생이 쓴 시(詩)가 있다. 바로 [책 읽는 여인]이다.


옥같은 고운 여인 빗질, 화장 마치고
종일토록 눈길 모아 무슨 글을 보는가?
하녀들 서로 볼 뿐 말 한마디 없으니
곁에 가서 남은 패옥 얻어 낼 방법 없네

윤덕희라는 18세의 화가의 [책 읽는 여인]의 그림도 있다. 이 그림에서보면 여인이 종일토록 책 읽는 모습에 열중하고 있다. 혼자서 읽는 모습인데 마치 “곁에 가서 패옥(佩玉)을 얻어 낼 방법 없네” 라는 대목이 연상된다. 독서는 패옥으로 외모를 가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살찌우는데서 보물을 찾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윤덕희는 조선 시대의 문인화로 유명한 ‘윤두서의 아들’이다.

윤두서는 바로 박학다식한 천재 ‘윤선도’의 손자이다. 이 집안은 아마도 <시서화문사철>에 능통했던 것 같다.

  • 다음 출처 이미지

 



이 그림은 조선조 미술사에서도 보기 드문 그림이라고 한다. ‘책 읽는 여인’은 보기 드문 작품이다. 서양 중세 사회에서 남성중심의 권력이 기독교적인 교리와 결합하면서 여성의 독서를 금지했다. 역사적인 기록을 보면 ‘독서는 여성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때문에 허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류의 원죄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브의 호기심에서 비롯되었듯이 여성이 책을 읽어서 호기심을 강하게 갖게 되면 남성들을 타락시킨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랜 기간 동안 독서는 여성에게 일종의 ‘금기활동’이었다.

이런 사정은 우리 나라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조선시대에 수많은 서당은 소년들에게만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주었고, 유교를 가르치는 성균관이나 지방의 향교에서는 철저히 남성위주의 학습이 이루어졌다. 그만큼 여성들을 바보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작가 마리 폰 에브니 에센바흐는 “여자가 책을 읽는 것을 배웠을 때 여자의 문제가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라고 말했다.

여성이 독서를 하고 책을 읽는다는 것은 사회학적으로 남성에 종속된 여성의 삶을 이제는 여성 스스로가 자각을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단순히 출산과 양육이라는 경계나 족쇄를 넘어서 당당히 이 세상에 눈을 뜨고,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역할이나 통로가 되는 삶을 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독서를 가벼이 여기지 말아야 한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바로 생각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에게 독서를 한다는 것은 ‘한줄기의 빛’을 주는 것과 같다. 그 빛은 ‘희망의 빛’이기도 하고, ‘새로운 탄생을 이루는 빛’이이기도 하다. 특히 소년 소녀가 어려서 읽는 책은 평생의 자산이 된다.

신약성서에 예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고 하였다.
그런데 독서하면서 깨우친 진리가 여성을 자유케 하는 것이다. 그래서 독서를 하면서 ‘자각하는 정신’을 우리는 기리는 것이고, 세상을 향하여 당당히 자기를 표출하는 것이다. 독서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행위이다.

‘책이 죽어가는 세상’이 오고 있다. 특히 ‘종이책’이 죽어가는 세상이 오고 있다. 자칫 문학이 박물관 속으로 들어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성들의 책을 계속 손에 잡고 읽는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생각하지 않고 책을 읽지 않으면 천박해질 뿐이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알고 싶어한다면 반드시 책을 보아야 한다. 무엇인가 변화를 주고 싶다면 반드시 책을 보아야 한다. 무엇인가 나를 바꾸고 싶다면 책을 보아야 한다. 무엇인가 다른 이에게 영향을 주고 싶다면 책을 보아야 한다.

그래서 Leader is Reader. 지도자는 바로 탁월한 독서가이기도 하다. 여성 지도자들이 많이 대거 이 시대에 등장하고 있다. 이 여성 지도자들의 공통점을 바로 ‘독실한 독서가’라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소년 시절에 많은 책을 탐독해왔다는 것이 이들의 공통점이다.

단순히 오늘은 미술 작품을 가지고 [책 읽는 여인]을 등장시킨 것은 아니다. 미술도 인문학이기 때문에 등장시킨 것이다. 미술의 힘은 지금 4차 혁명 시대에도 빛난다. 인공지능이 도저히 할 수 없는 감성의 공간을 채울 수 있는 강력한 인문학적인 전략이 바로 미술(예술)이다. 인생은 짧다. 다만 예술은 길 뿐이다. 여성적인 감성을 가지고 예술을 하라. 그리고 독서하며 글을 쓰는 일을 하라.

우리는 이제 인생의 디자이너가 되어야 하고, 아티스트가 되어야 한다. 인생은 이제 예술로 전환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책 읽는 여인은 아름답다. 진리가 여성을 자유롭게 할 것이다.

  • 구글출처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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