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단전재 절대금지
정약전의 자산어보(玆山漁譜)
“학자 자산과 어부 창대의 만남이 자산어보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어떤 만남은 인생을 바꾸고 심지어 역사를 바꾼다”
■ 바다에 역사가 있다.
바다는 예로부터 해산물의 보고이다. 우리 나라는 특히 삼면이 바다고 둘러싸인 반도국가이다. 한국의 해안 지역에서는 생선부터 해조류까지 바다의 산물을 중심으로 다양한 식생활이 발달하였다. 한국에는 산도 많은 나라이지만 바다에서 나오는 산물도 풍부한 나라이다. 한국인들은 일찍부터 ‘먹을 복’이 많은 민족이었다.
전 세계 어류는 3만 종이 알려져 있고, 우리 나라에 1200여종이 보고되어 있다.
바다는 한국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담고 있는 살아있는 [역사교과서]이다. 그 역사교과서에서 나는 [자산어보]를 뽑아 보았다.
■ 바닷가 소년의 꿈
어린 시절 5학년 여름방학에 아버지는 서울에서 ‘동서양 해양탐험사’를 사오셨다. 총 5권으로 된 책인데 지금도 그 때의 기억이 아득하다. 당시에 공부하기를 지독하게 싫어하고 놀기만 일삼는 나에게 한국을 넘어서 바다를 넘어서 다른 나라가 있다라는 것에 큰 흥미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바닷가의 사람들은 그저 바다에서 물고기나 잡고 굴이나 갯지렁이, 김이나 미역을 채취하여 살아가면서, 농사를 짓는 것으로 소일거리를 삼고, 직업으로 삼아서 살아간다. 그런 바닷가에서 ‘동서양 해양탐험사’를 읽으면서 주로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대첩이나, 트라팔가 해전, 페르시아 전쟁, 지리상의 발견에 치중하여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 나에게는 꿈이 생겼다. “반드시 바다를 넘어서 다른 나라에 가서 공부하고 사업을 하겠다”라는 것이었다.
5학년 시절에 가졌던 그 생각이 자라고 자라 나중에는 이역만리 이스라엘 땅에 가고, 지중해 연안 국가들을 여행하고, 중동을 여행하고, 아프리카 일부도 여행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사람의 내공(內空)을 키우는 가장 훌륭한 것은 바로 [독서와 여행]이라고 서슴지 않고 말한다. 전 세계를 다루는 ‘지리학’과 ‘세계사’를 많이 읽어야 꿈과 비전도 커진다고 믿는 사람이다. 사실 지리와 역사를 제대로 가르쳐야 사람들이 ‘땅에 대한 이해, 세계에 대한 이해, 자신의 인생에 대한 이해’가 높아진다.
■ 자산의 집안내력과 관직
자산의 아버지는 진주 목사를 지낸 정재원이고, 어머니는 해남 윤씨로 윤덕렬의 딸이자 윤두서의 손녀이다. 정재원은 부인이 두명인데 정약전은 둘째 부인인 윤씨의 3남 1녀중 장남이다. 정약용과 정약종이 동생이다. 누이는 최초의 천주교 영세자인 이승훈(李承薰)과 결혼하였다.
정약전은 경기도 광주에서 살다가 19살에 1776년 영조 52년에 호조좌랑이 된 아버지를 따라서 서울로 오게 되었다. 그는 성호 이익의 학문을 이어받은 권철신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면, 이윤하, 이승훈, 김원성과 교유하였다. 정약전은 26살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이듬해 이벽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1790년 정조 14년에는 증광별시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에 제수되고, 성균관 전적을 거쳐 병조좌랑이 되었다. 이때 정조는 “정약전의 준걸한 풍채가 정약용의 아름다운 자태보다 낫다”라며 총애하였다.
정조가 죽고 노론이 집권하여 천주교를 문제삼는다. 나중 정씨 형제들은 노론의 집권세력에게 혹독한 고문과 고통을 받는다. 결국 유배의 길로 가게 된다. 평소 생태계에 관심이 많았던 약전은 유배지에서도 [지식인]으로서의 풍모를 나타낸다.
지식인은 살아서도 멋있지만 죽어서도 멋있는 법이다.
■ 정약전을 알고 난후
몇해 전에 어떤 인문학자가 ‘정약전의 자산어보’ 인문학 특강을 한 적이 있다. 그 학자의 강연이 나에게는 정말 특별하고 흥미로웠다. 실학자 중의 하나이면서 독실한 천작쟁이였던 ‘정약전’은 해양박물학지를 만들었다는 것에 대해서 너무나 신기하게 다가왔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친 형님이면서 경기도 남양주라는 곳에서 낳고 자란 사람인데 바다와 바다생물에 대해서 이렇게 뛰어난 연구를 했다는 것에 대해서 놀라운 인물이었다.
자산어보에 대한 문헌을 찾다가, 왜 그의 아호가 ‘자산’인지가 궁금했다. 알고보니 그가 유배된 곳이 흑산도 인데,바로 ‘검은 산의 섬’이라는 의미이다. 그런 그에게 어둠과 검은 흑산이라는 단어가 너무나 싫었다. 그런데 검을 흑자 대신에 그는 검을 자 자를 써서 자신의 아호를 [자산] 이라고 부른 것이다. .
한양에서 책만 보던 학자가 해양 생물을 어찌 그리 섬세하고 세세하게 관찰하고 기록했을까? 참으로 신기하고 놀랍기만 하다. 조력자인 [창대] 청년이 없었다면 그의[자산어보]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책 서문에 [창대] 청년을 서술하였다.
“자산 앞바다에 사는 어족들은 매우 풍부하지만 그 이름이 알려진 것은 희귀하여 박물학자들이 마땅히 살펴보아야 할 곳이다. 나는 어보를 만들어보려는 생각으로 섬사람들을 널리 만나보았다. 그러나 사람마나 말하는 바가 달라 어떤 것을 믿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그러던 어느 날 장덕순 창대 라는 사람을 만났다. 창대는 늘 집안에 틀어박혀 손님을 거절하면서까지 고서적(古書籍)을 탐독하였다. 집안이 가난하여 책이 얼마 없었기에 손에서 책을 놓은 적은 없지만 소겨은 그리 넓지 못했다. 그러나 성격이 조용하고 정밀하여 풀. 나무. 물고기. 새 따위를 눈과 귀로 보고 드는 모든 것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깊이 생각하여 그 성질을 이해하고 있기에 그의 말은 믿을 만했다. 나는 마침내 그 사람을 초대하여 함께 묵으면서 생선무리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그 내용을 책으로 엮어 [자산어보]라고 이름을 붙였다.” <<주영하/이태호의 글 중에서>>
<자산어보의 개괄적 내용>
자산어보(玆山漁譜)는 조선시대 영조-순조 당시 학자인 정약전이 1801년(순조원년)에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천주교 박해사건인 신유박해 때 당시 가장 가혹한 유배지로 정평이 난 흑산도에 유배되어 1814년(순조 14년)까지 생활하면서 이 지역의 해양 생물에 대해서 분석하여 편찬한 해양생물학 서적이다. 그 책이 쓰여진 곳은 흑산도의 [사촌서당]이다. 이 서당의 다른 이름은 [복성재]이다. 복(復)성(性)은 “천주교를 버리고 다시 성리학으로 돌아간다”라는 의미라고 하니, 천주교를 믿었던 정약전이 천주교와 단절을 결심한 것인지, 유배에 지친 정약전이 임금에게 쓴 반성문인지 잘 모르는 것이다.
그 복성재 바로 밑에 자그마한 천주교 성당인[사리 성당]이있다. 아마도 정약전이 뿌린 천주교의 씨앗이 지금까지 살아있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그의 세례명이 안드레아였다. 그는 유배 16년만에 우이도에서 사망했고, 그의 묘지는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천진암 성지에 있다.
[자산어보]는 총 3권으로 이뤄져 있으며 원본은 없고 필사본만 남아 있다. 흑산도 근해의 각종 어류와 수중 식물을 인류(비늘이 있는 생물), 무린류(비늘이 없는 생물), 개류(딱딱한 껍질을 가진 생물),잡류(물고기가 아니지만 물에 사는 생물)로 분류하여 총 155개 종의 생물을 설명했다. 그중 잡류는 해충(바다벌레) 해금(바다 새), 해수(바다 짐승), 해초(바다 풀)로 다시 나눈다. 이러한 분류 방식은 당시까지 동양 최고의 박물지인 이시진의 [본초강목(本草綱目)]과 비교했을 때, 새로운 생물군을 찾아내고 좀 더 구체적으로 나누었다는 점에서 우수한 연구사례이다.
자산어보에는 특이하게도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확실치 않은 것도 있으며 무린류 중에서는 인어(人魚 mermaid)가 나오기도 한다.
■ 청(䝼)안(案)
자산어보에는 특이하게도 청안이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이는 청안이란 단어의 뒷부분에 나오는 내용은 정약용의 제자인 이청이 내용을 보충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것이 이청이 스스로 후대에 보충하여 쓴 것인지 아니면 정약전이 정약용의 제자인 이청으로부터 내용을 전해 받은 다음 쓴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정명현 이라는 학자는 <<정약전의 자산어보에 담긴 해양 박물학적 성격>> 이라는 논문에서 청안이라는 말을 다루면서 정약전이 당대로는 중국문헌에 상당히 밝았던 ‘이청’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을 크게 의심한다. 왜냐하면 이청의 경우 바다 생물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부족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청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 유배시절에 18 제자중에 가장 사랑을 받은 제자로, 정조 때 교리를 지냈으며 주로 천문지리에 밝은 사람이었다고 전해진다. 다산의 [여유당전서]나 다산의 여러 책문에서 [청안]이라는 문구가 보이는데 이는 다산의 작품에 제자 이청이 주석을 붙인 것으로 보고, 자산어보에 나오는 [청안]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려는 학자도 있었다. (자산어보의 연구가 진기홍의 문헌에서)
■ 정양전-정약종-정약용 형제들
최근에 감독 이준익은 정씨 일가 삼형제를 주목하여 영화를 제작하였다. 바로 [자산어보]이다. 이준익 감독은 사극의 대가로 알려져 있고, 스스로를 역사 덕후라고 부른다. 그는 지금까지 [사도] [동주][박열] 까지 역사상 실존인물들을 재창조하여 왔다. 이버에는 조선 후기 학자 정약전(설경구)과 그의 제자 창대(변요한)을 다루었다.
정씨 3형제,. 이들은 모두 정도 대왕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로서 실사(實事)야 말고 반드시 구시(求是) 곧, 진리를 찾는데 있어서 중요한 방법론임을 주창했던 인물들이었다. 실사구시의 길은 반드시 서학과 관련이 깊다. 반도국가인 조선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노력들이 바로 실학이다. 이들 삼형제는 모두 외국 문물을 일찍 받아들이려 했던 사람들이다. 곧이어 천주교로 개종하려 했던 것은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최고의 덕목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정씨 형제들을 가장 많이 후원했던 인물은 정조대왕으로서, 그는 가장 맏형인 정약전을 가장 총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가장 뛰어난 학자로서는 [다산]을 뽑지만, 가장 맏형인 정약전이 이들 동생들을 잘 이끌었던 존재로 보면서 가장 아끼고 총애하였던 것이다. 다만 정조는 약전에게 신신당부하기를 “너의 서학이 지나치게 다른 신하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했다. 조선시대에서 가장 똑똑하고 뛰어난 왕이었던 정조 대왕은 천주학쟁이가 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험한 꼴을 당할지 우려했던 것이다. 시대는 그의 예측대로 흘러갔다.
신유박해로 정약전은 원래 전라도 신지도로 동생 정약용은 경상도 장기-지금의 포항으로 유배된다. 그러나 조카사위 황사영의 백서사건으로 두 사람은 다시 압송되어 심문을 받은 뒤에 다산은 강진으로, 약전은 흑산도로 유배지가 옮겨지게 된다. 나중에 약전은 대흑산도를 갔다가 우이도(*신안군 도초면)에 살게 된다.
[자산어보]의 시작은 신유박해의 과정부터이다. 정씨 형제는 가혹한 고문을 받고, 이중 천주교에 대한 배교(背敎)를 끝까지 거부했던 정약종은 지금의 합정동 절두산 성지에서 목이 잘린다. 절두산이라는 이름이 바로 ‘머리를 자른 산’이라는 이름이 붙는 곳이다. 노론들은 남인의 핵심인물인 정약전의 목을 원했지만 정작 정약전은 스스로 배교를 선택하고 막내인 정약용까지 살린다. 이들은 각각 조선에서 가장 외진 흑산도와 강진으로 유배의 길을 떠난다. 이들의 순교자의 길을 걷지 않은 것은 이들의 뛰어난 학문적 업적을 남기게 되는 계기가 된다.
■ 이준익 감독의 정약전과 창대에 대하여
이준익 감독은 정약전(설경구 분)의 일상을 담아내는데 주력을 하였다. 백성은 그 당시에 너무나 무지몽매하였다. 사서삼경은 커녕 학문의 발끝도 경험하지 못한 미개한 인간들이었다. 그러나 글을 탐독하는 섬 청년 창대(변요한)가 있고, 정약전은 그를 유의 깊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창대는 서자 출신으로서 신분 상승을 꿈꾸는 명민한 청년이었다.
무른 지식이 지식으로 머물지 않고 더 큰 세계관으로 나아가기까지는 큰 계기가 필요한 법이다. 무지한 자에게는 학문적 스승이 필요하다. 그러면서 그 스승도 무지한 일상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스승과 제자는 그렇게 서로 주고 받는 관계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관계의 변증법(辨證法)인 것이다.
자신에게 버릇없이 구는 섬청년 창대에게 “이런 상놈의 새끼”라고 성질을 부리던 정약전 선생은 창대에게서 엄청난 깨달음을 얻는다. “홍어가 가는 길은 홍거가 알고 가오리가 가는 길은 가오리가 알지라” 홍어의 길과 가오리의 길을 말하는 창대로부터 정약전은 뭔가 큰 깨달음을 얻고 그 이후 그에게 대학(大學)과 중용(中庸)까지 사사하게 된다. 일약 어부를 학자로 만든 것이다. 이쯤 되면 갈릴리 어부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든 예수가 생각이 난다. 그들은 갈릴리 촌부들이었다.그런데 예수를 만나서 그들은 환골탈태를 하게 된다. 제자의 길에 서게 되고, 장차는 인류의 스승이 되어간다.
자산 정약전은 창대를 통해서 지도자의 길이나 , 목민의 길을 가르칠 수 없었다. 다만 그에게 [인간의 길]을 가르쳤던 것이다. 창대는 처음에는 목민심서의 길을 가려고 했으나, 그 길이 결국에는 썩어가는 세상을 목도하게 하게 하였고, 그도 결국 [권력무상]을 보며 정약전이 말한 [인간의 길]에서 답이 있음을 찾는다.
정씨 삼형제는 권력과 유교이념에 사로잡혀 근시안적이고 부패한 정권에서 벗어나서 멀리 귀양과 유배의 길에서 도리어 자유를 느낀 것이다. 관직에 올라서는 것은 곧 위험한 길임을 알았던 것이다. 도리어 유배과 귀양살이를 통해서 더 높은 학문과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길을 찾았던 것이다.
김 훈의[남한산성]이후로 꼭 보고 보아야 할 영화가 [자산어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우리는 이 시대에 대한 문제를 잘 살펴보고 합당한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질문하지 않는 인생, 생각하지 않는 인생, 사색하고 성찰하지 않는 인생]에는 정말 답이 없다. 답을 구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답답한 것이다. 답답한 가슴으로 나는 늘 [질문]을 찾고, 구하고, 두드린다. 질문으로 세상을 발전해 왔고, 인간의 의식이 발전한 것이다.
■ [자산어보]속으로
자산어보는 우리나라 최초의 어류백과사전으로서 주꾸미, 전복, 민어, 갯장어 등 우리에게 익숙한 식재료들이 다수 포함된다.[ 봄 죽금어(주꾸미), 가을 낙지] 라는 말로 유명한 주꾸미는 제철 풍미와 함께 타우린이 풍부한 건강식 식재료였다.물론 자산이 유배된 [흑산도]는 [홍어]의 본고장이다.
흑산도에 대해서 잠시 기술한다. 섬과 바닷물이 푸르다 못해 검다 해서 붙여진 섬이 바로 흑산도이다. 흑산도는 장보고 장군이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한 뒤에 서해에 출몰하는 왜구를 막기 위한 전초기지로 흑산도에 반월성을 쌓으면서이다.
그 섬은 지금의 신안군 흑산명이며, 전라도 잔치상의 단골손님인 홍어와 가수 이미자씨가 구성지게 불러 크게 히트한 ‘흑산도 아가씨’라는 노래로 유명해진 섬이다. 그러나 지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흑산도는 정약전과 더불어서 면암 최익현 등이 유배간 절해고도이다. 유배지었던 멀고도 깊은 섬 흑산도가 이제는 사랑받는 여행지가 되었다. 이 모두가 자산어보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꾸미는 주로 서해안 마량포에서 잡혔는데, [자산어보]에는 준어(鱒魚) 속명으로는 [죽금어]로 불리웠다. [자산어보]에서는 주꾸미를 두고 ‘모양은 문어와 비슷하나 다리가 짧고 몸은 겨우 문어의 반 정도’ 라고 기록하였다.
바다에 사는 패류는 해조류를 먹이로 섭취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 대표적인 예가 전복이다.
자산어보에서는 “전복 살은 맛이 달아서 날로 먹어도 좋고 내장은 종기치료에 효과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전복이 살과 내장 또한 요오도 함량이 높다. 적당한 크기의 전복을 꾸준하게 먹으면 1일 요오드 섭취량을 충분히 섭취할 수 있다. 특히 전복에는 뇌졸중을 막아주는 혈전용해효소가 많이 들었다고 한다.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이러한 해양식품을 충분하게 먹으니 건강하게 튼튼한 사람들이 많다.
또한 민어는 주로 제주도와 전라남도에서 잡아온 생선이다. 자산어보에는 “민어는 맛이 담담하고 날 것이나 익힌 것 모두 좋다. 말린 것은 더욱 몸이 좋다. 부레로는 아교를 만들다. 젓갈이나 어포가 모두 맛이 있다.” 민어 부레로 만든 아교(阿膠)를 어교(魚膠)라고 부른다. 어교는 접착력이 월등이 뛰어나 고급 가구나 전쟁에서 쓰이는 활인 각궁(角弓)을 만드는데 사용했다. 민어의 부레는 고급 생선요리 재료로도 손꼽힌다.
한편 남해에서 많이 잡히는 갯장어를 두고 [자산어보]는 “개의 이빨을 가진 뱀장어” 라는 듯의 ‘견 아려’ 라고 불렀다. 일본에서는 갯장어를 최고의 진미요리로 여겼다. 국내 어획량의 상당수도 일본으로 수출되여었기에 갯장어는 우리말보다 일본 이름 ‘하모’ 로 더 널리 알려졌다.
조기와 굴비는 우리 나라 사람들이 무척 좋아했던 생산이다. 굴비는 조기를 소금으로 간을 해서 말린 것이다. 예전에는 서해 영광에서 많이 잡았다. 황석(黃石)어라 불리는 참조기는 몸이 황금색을 띄며 입이 불그레하고 옆줄이 다른 조기에 비해 선명하다. 영광에서는 1년 넘게 보관해 간수가 빠진 천일염을 조기에 뿌린 후 공기가 잘 통하는 그늘진 곳에서 오랫동안 말린다. 그중에서 보리굴비는 1년 동안 해풍에 말린 참조기를 항아리에 넣은 후 곰팡이가 슬지 않도록 보리를 채우 보관 및 숙성시킨 굴비를 특별히 이르는 말이다. 굴비가 보리의 향을 받아들여 비린내가 없어지는 한편, 숙성을 거치며 굴비 기름이 표면에 배어 나오기 때문에 누런색을 띄게 된다. 잘 숙성된 보리굴비는 아주 단단하다.<<밥상위의 바다 라는 책을 참고>>
■ 흑산도 홍어
코로 먹는 생선회 - 홍어
홍어는 가오리과의 흰살생선으로 태양어, 분어, 요어 라고 불리운다. 모양이 연잎을 닮았다 하여서 하어(荷魚)라고 불리운다. 그리고 생식이 괴이하여 해음어라고도 불리운다.
옛날 흑산도에서 고기를 잡아 며칠 걸려 뭍으로 오면 생선이 부패되어 먹지 못하는데 유독 홍어만이 요소가 암모니아로 분해되면서 부패하지 않고 톡쏘는 독특한 맛으로 변했다. 그때부터 삭힌 홍어는 흑산도의 명물이 되었는데 [자산어보]에서는 “삭힌 홍어로 끓인 국은 여자의 뱃속에 덩어리가 생기는 복결(復結)병을 제거하는데 효과가 크다” 라고 기록하였다.
■ 정약용, 형 약전을 늘 그리워하다.
조카사위였던 황사영의 백서사건으로 다산과 자산은 서울서 나주까지 함께 내려오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밤을 함께 보낸 곳이 바로 나주 동문 밖 삼거리 주점 율(栗)정(亭)점(店)이었다. 뜬 눈으로 마지막 밤을 보낸 두 형제의 마지막 이별 장소는 지금의 나주역이 있는 영산강 나루터였다고 한다. 약용은 걸어서 강진으로, 형 약전은 배를 타고 흑산도로 향하게 된다.
4형제 중 둘의 우애를 각별했다. 약전과 약용은 유배중에서도 서로의 안부를 자주 물었다. 정약용이 형에게 보낸 편지는 섬 생활에 육식을 하지 못할 형을 걱정하면서 게를 요리하여 먹는 방법을 상세히 적어 보낸 것도 있다. 정약용은 약용에게 서당을 짓고 난 후 서당기를 지어줄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약용은 형이 그리울 때문 다산초당 옆 산자락에 올라 강진만 바다를 바라고곤 하였다. 오늘 그 자리에 [천일각]이 건립되어 있다.
정약전은 유배 15년만인 1816년 흑산도에서 세상을 떠난다. 형의 죽음을 접한 약용은 그 슬픔을 “ 외로운 천지 사이에 우리 손암(정약전) 선생만이 나의 지기였는데, 이제는 잃어 버렸으니 앞으로는 비록 터득하는 바가 있더라도 어느 곳에 입을 열어 함께말할 사람이 있겠느냐. 아내도 나를 알아주지 못하고 자식도 나를 알아주지 못하고, 형제 종족들이 모두 나를 알아주지 못하는 처지에 나를 알아주던 우리 형님이 돌아가셨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라는 애가(哀歌)를 적었다.
■ 국가과학유산에 등록된 [자산어보]
자산이 지은 [자산어보]는 2021년 2월 25일 국가과학유산이 되었다.국립중앙과학관은 정약전의[자산어보]를 비롯해 허준의 [동의보감] 등 모두 7건을 국가과학유산으로 등록하였다. 역사적, 과학적 가치가 높은 과학기술로 후대 계승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과학기술사 자료인 [자산어보]는 진본은 없고 1946년에 필사본이 존재한다. 생물학자가 아니었던 정약전은 실제 보고 느끼고 경험한것을 토대로 내용의 충실을 기했다. 그래서 그도 [해양생물학자]로 분류된다. 세계적으로 해양박물학지로서는 최고로 뽑히는 책이다.
오늘은 이 글을 마치고 잠시 가장 먼저 잠을 자는 유명인인, 이미자 선생님의 [흑산도 아가씨]를 열심히 듣고 따라 부르련다.
'명작과 고전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술인문학, 해바라기 sunflower 그리고 내 친구 고흐 (0) | 2022.10.09 |
---|---|
미술인문학, 베르메르, 진주 귀고리 소녀, 1666년 (0) | 2022.10.09 |
명길묻 79, 리윈탕, 자연스런 인생의 흐름 (0) | 2022.10.08 |
인생의 삼락(三樂)과 은퇴(隱退)의 철학(哲學) (11) | 2022.10.07 |
음악인문학,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를 들으며(2021년 글) (0) | 2022.10.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