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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과 고전 이야기

명길묻 23, 문명속의 불만 - 지크문트 프로이트(1930)

by 코리안랍비 2022.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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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속의 불만 - 지크문트 프로이트(1930)

“감상하기보다 분석해야 한다”- 프로이트의 책중에서


고3인 딸이 원서를 써야 할 시기가 되더니, 갑자기 진로를 바꾸려고 하였다. 그동안 교대나 사범대를 진학하려고 하였는데, 자신에게는 [상담심리학]이 맞는다는 것이다. 수시 지원율을 조사해보니 너무나 많은 학생들이 지원하여, 지원율이 무척이나 높은 학과였다. 그래도 축복하는 마음으로 지원했으니 최선을 다해서 들어가라고 당부하였다.

내가 다녔던 두 군데 모교의 심리학과를 알아보았더니 심리학과가 아주 인기가 많고, 요즘 같은 세태에는 현실적으로도 많은 일자리가 보장되고, 상담교사가 부족하다는 통계가 많았다. 딸아아이에게 “명문대 심리학과는 어렵고, 국공립대 심리학과는 무난히 가겠구나, 다만 대학 가기전에 프로이트부터 공부를 하고, 칼 융이나, 알프레드 아들러, 랑크나 혹은 자크 라캉, 스키너 등의 책들을 읽고 가거라” 라고 당부하였다.

프로이트의 책들을 읽어보면 그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알 것이다. 20세기를 움직인 유대인 인물 3명을 뽑으라면, 프로이트, 아인슈타인, 피카소를 뽑는다.
오늘은 프로이트에 대해서 잠시 논하고자 한다.

11월경에 프로이트에 대한 강의가 있어서 준비도 하고 있지만 다각도로 살펴볼 기회가 생겨서 나는 물론 좋다. 무엇인가 흥미로운 분야를 공부하고 연구하는 것은 좋다.

프로이트의 책 중에 [문명 속의 불만]이 있다.
이 책을 읽어보다가 프로이트의 인류사의 공로가 정말 대단하다는 것을 느꼈다. 오늘은 그의 책을 중심으로 나의 글을 전개하고자 한다. 이 책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나 [꿈의 해석]과 연관하여 읽어보아야 한다. 일종의 기초지식이나 바탕지식이 없으면 읽어내기 힘든 책이다.

그래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친절한 필자는 간단하게 글과 도식으로
프로이트 이론을 밝히고 책 이야기를 이어간다.




<문명 속의 불만>

프로이트는 지나치게 개인 심리학의 영역에서만 머무르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의 걸출한 제자들이 프로이트의 곁을 떠났다. 알프레드 아들러는 같은 유대인이었지만 사회주의적인 정치변혁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칼 융은 개인의 심리를 넘어서 [집단무의식]이라는 것에 끌렸다.

그들은 프로이트와는 달리 성욕만이 인간 행동의 원동력이 아니라고 보고, 권력욕이나 명예욕, 그리고 인생을 완성하는 자아실현이나 더 높은 자아의 욕구로 나아가려는 인간의 의지를 밝히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프로이트도 결국 변화의 시기를 맞는다.
그의 나이 50대가 되면서 많은 좋지 않은 사건들을 맞이한다. 스스로를 유대인이 아니고, 게르만인이라고 여기며 살아가는 그가 1차 대전에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몰살하는 게르만인들에 대한 혐오가 있었다. 또한 스페인 독감으로 인하여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 상황도 지켜보아야 했다. 독일경제의 몰락으로 자신도 경제적으로 무척 힘든 상황을 맞이하였다. 또한 자신의 조카 조피가 죽는 사건도 경험한다. 또한 자신은 구강암에 걸려 한동안 고생을 하였다.

온갖 인생의 풍파가 닥치자 그의 우악스럽고 고집스럽던, [리비도]에 대한 것이 전부가 아님을 인식하게 된다. 그는 이제 사람을 움직이는 원동력에는 삶과 일과 사랑을 부추기는 [에로스]만이 아니라 죽음과 파괴와 고립을 바라는 [타나토스]도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무의식에 대한 미지의 신대륙을 발견한 콜롬버스급의 사람이었지만, 인간의 심리와 의식이나 무의식만으로 인간을 규정하는 것은 잘못되었음을 인식하였다.
그래서 1930년도에 [문명 속의 불만]이라는 책이 등장한 것이다. 전쟁과 대공항, 그리고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급변을 보면서 심리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건들과 현상들이 그를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초자아가 강화됨으로써 인간의 욕망을 억제하는 문명이 이룩되지만 이는 이드(ID)에 대한 과도한 억압을 초래한다고 보았고, 결국 불만에 찬 이드에 의해 문명이 파괴된다고 정신분석적 사회심리학을 주창한 것이다.


<고통과 희생 강요하는 문명>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 어느 누구든 차별 없이 귀하게 여기라는 기독교적 가치관이다. <필자도 이 가치관에 입각하여 그냥 [감상주의적 사랑]에 빠져 살았다. >

그런데 정신분석학의 태두로 무의식을 발견해 20세기 세계 지성사에 굵직한 획을
그은 프로이트는 “왜(WHY? ”라며 딴지를 마구 건다. <그가 종교나 문명의 속살을 드러냈다는 것에서 이 책의 가치가 있다.>

인간은 자기를 중심으로 타인과 관계를 맺기에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판단에서이다. 보편적 사랑은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하지만, 긴밀한 관계를 맺은 사람과 생면부지를 동등하게 여기는 데엔 어려움이 따른다. 프로이트는 문명이라는 환경에 놓인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을 담아낸 ‘문명 속의 불만’에서 문명은 인간을 야만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했지만 한편으로는 희생을 강요한다고 주장한다. 높은 도덕률로 무장한 문명의 요구로 인해 본능적 욕구를 억압하는 상황에 놓여서다.


<프로이트가 생각한 종교와 행복>
프로이트는 자신의 책에서 [종교가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여러 노력들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는 논의의 폭을 보다 확대하여 행복해지고자 하는 인간의 열망이 어떠한 노력들로 다양하게 표출되어 왔는지를 살핀다.

그는 이 노력들에 대한 비교를 통해 행복을 얻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이야기한다. 그가 드러내보이고자 하는 것은 인간 삶이 필연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역설적이고 고통스러운 면모들, 해결될 수 없는 욕망의 문제들이다.

이후 제시되는 문명에 대한 분석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앞에서 밝혔듯이, 문명은 인간이 처하게 되는 불행을 해결하기 위해 설립되었지만, 이 문명조차 역설적이게도 그 속에 욕망을 억압하고 불만을 가중시킬 수밖에 없는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나의 판단으로는, 프로이트는 과거나 기존의 문명이 갈수록 사람들의 욕망을 억압하고 불만을 가중시켜서 결국 이 문명의 몰락?을 주장하려고 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그런데 아직 이 현대문명은 여전히 건재하지만 사람들속에 문명의 억압적인 메커니즘에 대한 불만과 불만족을 발견하였다는 것이 대단한 발견으로 보인다.
그의 책에 다른 부분을 보면, 프로이트는 인생의 목적과 의도가 행복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그는 이 ‘행복’이라는 개념을 순전히 쾌락의 원리에 따라 설명한다. 쾌감을 증대시키거나 불쾌감을 줄이는 것이 행복이다.

프로이트에게 이러한 전제는 자명한 것으로 여겨지며, 이후 이루어지는 모든 논의는 이와 같은 바탕에 근거해서 전개된다. 그는 이 책에서도 여전히 [리비도나 에로스]적인 측면은 여전히 부각되는 부분이다.


<대립관계에 놓인 문명과 본능>

다른 이 책을 비평한 인물의 글도 살펴보았다.
프로이트는 문명과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대립적인 관계로 본다. “우리 문명은 본능 억제에 그 바탕으로 두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개인 재산의 일부 -예를 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의식의 일부, 또는 인격에 내포되어 있는 공격적 또는 보복적 성향의 일부 - 를 포기해 왔다. 개인들의 이런 양보가 모여서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문명의 공유 재산이 생겨난 것이다. (중략) 본능 억제에 찬동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회와 맞서는 ‘범죄자’나 ‘무법자’가 된다.”

문명 유지와 발달을 이끄는 중요한 요소는 인간의 죄책감이다. 프로이트는 죄책감을 “엄격한 초자아와 그 지배를 받는 자아 사이의 긴장”으로 정의하며 “자기 징벌의 욕구”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문명은 개인의 공격성을 약화시키고 무장을 해제하는 한편, 마치 정복한 도시에 점령군을 주둔시키듯 개인의 내부에 공격성을 감시하는 주둔군을 둠으로써 개인의 위험한 공격 욕구를 통제한다”고 말한다.

인간이 본능적으로 가지는 ‘원초아(Id, 이드)’는 ‘초자아(Superego, 수퍼에고)’와 ‘자아(Ego, 에고)’의 견제를 받는다. 서로 다른 정신활동이 갈등하는 과정에서 생긴 죄책감은 집단의 요구와 개인의 욕망에 균형을 찾도록 이끌며 문명의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프로이트는 문명 발달에는 죄책감의 증대와 행복감의 축소가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문명은 집단 전체의 응집성을 목표로 하기에 필연적으로 본능 억제와 포기를 전제로 둔다.


<지나친 본능 억제는 신경증을 유발>

문명 발달은 개개인으로 하여금 욕망의 포기를 요구한다. 도덕성이나 교육수준에 따라 문명화에 순응하고 적응하는 사람이 많긴 하지만 지나친 억압에 짓눌려 나름의 출구를 찾는 과정에서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도 있다. 프로이트는 신경증을 가진 사람 상당 수가 과거에 성욕과 관련한 경험을 가진 사실을 확인하고 병의 원인을 문명적 성도덕에서 찾았다. “성생활의 기준을 정해 놓고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행실을 요구하는 것은 명백한 사회적 불공평의 사례”라는 생각에서다.


“문명적 초자아는 명령을 내릴 뿐, 사람들이 그 명령에 복종할 수 있는지 어떤지는 문제삼지 않는다. 문명적 초자아는 인간의 자아가 심리적으로 초자아의 요구를 무엇이든 수행할 수 있고, 자신의 이드에 대해 무제한의 통제력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잘못이다. 정상인들도 이드를 어느 한도까지만 통제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에게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면, 그는 반항을 일으켜 신경증에 걸리거나 불행해질 것이다.”


신경증은 개인을 넘어 집단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전쟁이 대표적이다. 문명이 급격히 성장하고 보다 높은 도덕기준을 요구하자 개인에게 가하는 억압 역시 거세지면서 버티지 못한 사람들의 불만이 폭발한 결과다.


프로이트는 제1차 세계대전이 야기한 환멸을 “대내적으로 도덕 규범의 수호자인 척하는 국가가 대외적으로는 저급한 도덕성을 보여준 것”과 “개인들이 최고 수준에 이른 인간 문명의 참여자로서 도저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잔인성을 행동으로 보여준 사실”로 본다.


프로이트에게 인간은 도덕성을 완전히 내재화할 수 없는 존재다. 성선설과 성악설에 집중하기 보다는 ‘무엇이 인간은 선하거나 악하게 하는가’에 관심을 둔다. 완전히 선하거나 악한 사람은 없으며, 관계나 상황에 따라 선과 악을 오간다. “진정한 문명인”보다 “문화적 위선자”가 많다는 입장도 제시한다.


인간은 이기적 본능을 가지지만 가정교육이나 문명의 요구 등에 따라 이타심을 배양한다는 의미다. 문화적 위선은 문명 유지 과정의 결과이기에 부정적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행복과 쾌감>
행복은 쾌감을 증대시키고 불쾌감을 감소시키는 방법으로 도달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쾌감을 극대화시키는 방법들에는 여러 치명적인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따라서 행복을 위한 대부분의 처세술들은 어떻게 불쾌감을 없앨 것인가 하는 문제에 보다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따라서 프로이트는 불쾌감을 피하기 위한 방법들에 주로 관심을 두고 내용을 풀어간다. 그는 행복이 불쾌감을 피하는데 있다고 보고 이 관점에서 자세하고 상세하게 그 피하는 방법에 대한 논의를 한다.


결국 이 책에서 밝히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행복은 제한적이고 복잡하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쾌락주의자가 행복한 사람이다] 라는 스토아나 에피쿠로스 학파의 견해에 대해서 상당히 반감을 갖고 있다. 인간의 쾌락은 쉽게 설명되어질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육체적 쾌락이 잠시의 행복감을 증진시켜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과연 육체적 쾌락만 가지고서 인간의 궁극적 행복을 증진시키는데 있다고 보면 안된다. 우리가 부부간에도 3가지 사랑이 같이 투영된다는 것은 이미 밝혀진 연구이다. 에로스와 아가페 그리고 필레오적인 사랑이 같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대로면,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도 행복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만족되지 않으며, 우리는 언제나 불만족 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행복을 얻고 고통을 멀리하기 위해 채택하는 방법을 내가 빠짐없이 열거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우리 연구의 결론으로 감히 몇 가지 견해를 말하고자 한다. 쾌락 원칙은 행복해지기 위한 프로그램을 우리에게 부과하지만, 이 프로그램은 결코 완수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든 거기에 다가가려는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 되고, 사실상 포기할 수도 없다. 그 방향으로 나아가는 길은 매우 다양하며, 우리는 목표의 적극적인 측면 ── 쾌감의 획득 ──을 우선할 수도 있고 소극적인 측면 ── 불쾌감의 회피 ──을 우선할 수도 있다. 어느 길을 택해도 우리가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을 수는 없다.”

어떠한 방법도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행복을 주지는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에게 적합한 대로 여러 방법들에 의존해야 한다. 한 가지 방법만을 고집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프로이트의 논리로 보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자주 ‘나는 행복한가, 아니면 불행한가’를 되물어보아야 한다. 내 속에 불만이나 불만족이 많다면 여전히 ‘불행한 감정’에 젖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각자의 행복과 불행도 각자가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프로이트는 종교를 비판한다. 종교는 스스로를 진리라 주장하며 모든 사람이 하나의 획일적인 방법대로 행복을 추구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종교는 행복을 얻고 고통으로부터 보호받는 방법을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강요하기 때문에, 선택과 적응이 작용할 여지를 제한한다. 종교가 채택하는 방법은 삶의 가치를 끌어내리고 현실세계의 그림을 망상으로 왜곡시키는데, 이것은 본질적으로 지성에 대한 위협을 의미한다. 그 대가로 종교는 인간을 강제로 심리적 유아 상태에 묶어 놓고 그들을 집단 망상으로 끌어들임으로써, 많은 사람을 신경증에서 구제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 이상의 성공은 거의 거두지 못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인간이 얻을 수 있는 행복으로 통해 <있을지도 모르는> 길은 수없이 많지만, 확실하게 행복으로 통하는 길은 하나도 없다. 종교 조차도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

결국 <문명 속의 불만>에서 행복과 종교의 관계는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다. 그는 결국 종교가 행복의 수단이 아닌 행복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다소 과격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 심리 구조가 지닌 필연적인 불행에 대한 프로이트의 분석은 매우 흥미롭다. 프로이트가 활동하였던 20세기 초는 두 차례 세계 대전을 전후하여 유럽 전역이 매우 불안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위와 같은 심리적 분석은 당시 사람들이 느꼈던 인간 실존에 대한 비관론과도 잘 맞아떨어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프로이트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다” 라는 것이다.
많은 심리학자들은 프로이트를 존경하는 것 같이 보여도 무시한다. 이성과 과학, 그리고 합리적 지식과 계획만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 것이라는 현대의 문명인들이 속살을 그의 책에서 상당부분 드러낸다. 심지어 기독교라는 종교의 진면목도 꿰뚫어 보는 안목을 보여준다. 우리는 아직도 그가 밝힌 세상에 살아가고 있다.

그래도 마지막 의문이 드는 것은,

“프로이트는 쾌락과 행복, 불행과 고통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과연 행복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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