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서갱유와 권력무상의 인문학
진시황의 사람 이사(李斯), 그의 영화와 추락
<새옹지마의 교훈>
최근에 어떤 잘 아는 사람의 급격한 몰락과 추락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 있다. 그 사람의 몰락은 그 사람의 잘못된 삶의 방향에서 비롯된 것이다. 상당수의 삶의 문제는 [본인 탓]이다. 특히 무엇이든 잘못되는 것은 [본인 탓]이다. 그런데 자신의 잘못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남의 탓이나 시대 탓으로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몰락의 길, 패망의 길을 가게 되어 있다. 그것이 바로 ‘교만’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교만은 참으로 무서운 악덕이다. 특히 자신의 실력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들에게 자주 나타나는 일이다. 자아(自我)가 깨지지 않고, 겸손하지 않은 사람이 무엇인가를 하게 되면 반드시 탈이 나게 되고,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많은 사람들이 위험해진다. 결국 본인도 그런 길을 가게 된다.
인생은 전반전과 후반전으로 나눈다. 그런데 전반전이 화려한 사람이 후반전까지 화려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생 말년에 몰락의 길을 가고, 추하고 더러운 꼴을 보는 이들을 너무나 많이 봐왔다. 일찍부터 교회를 다니며 성경을 읽고, 역사책을 즐겨 본 나로서는 세상이 ‘허무하다’라는 결론을 잠정적으로 내리고, 그저 주어진 삶을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면서 지내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았다. 그러나 주어진 자신의 일만큼은 최선을 다하고, 책임을 다하는 정신은 유지하였다.
어려서부터 나 자신은 권력이나 부귀영화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다. 일찍부터 삶에 대한 회의감과 속두려움이 강한 탓이었다. 그리고 인간답게 사는 것에 대한 강한 열망이 많았다. 교육자인 아버지와 그리고 온유하신 어머니 사이에서 나 자신은 그저 평범하고 편하게 사는 것을 추구하고 싶었다. 내 자신이 실컫 하고 싶은 것은 그저 하루 세끼 맛있는 것 먹고, 그리고 가족이 무탈하고, 늘 사랑하는 책과 음악을 가까이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공부를 하여 대학을 가고, 대학원을 마치고, 대기업체서 일을 하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차 사람들은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를 얼마나 중시여기는지 알게 되었다. 특히 권모술수(權謀術數)나 이해타산(利害打算)에 밝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사회적 압력이었다. 재리의 욕심, 이생의 자랑,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을 잘 추구하여야 제대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그리고 세상의 이치를 잘 깨달은 것처럼 미회된 세상이었다. 그런데 평소 책과 고전을 즐겨하면서 세상과는 반대로 살아가라는 것이 현인들의 지침이고 가르침이었다. 무엇보다 성서와 탈무드를 공부하면서 더욱 현인들과 지혜로운 선생들의 말에 더욱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사람들은 나보고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라고 지적하는데, 막상 그러한 사람들을 보면 별로 사회적으로 알아주거나, 대단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도 아니었다. 그저 무시해도 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평소 뉴스와 신문기사를 즐겨보는 나로서는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몰락과 추락을 지켜보곤 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의 특징이 역사가 가르쳐주는, 고전이 가르쳐주는 인생의 방향과 가치관을 확고하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다. 간단하게 높은 자리를 생각해 본다. 높은 자리에 오르면 반드시 적을 많이 만들게 된다. 인간은 시기와 질투의 동물이다. 누군가가 잘되고 승승장구하는 것을 결코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편으로 잘되고 승승장구하면서도 자신을 절제하고 스스로를 수신(修身)하며, 자신을 관리(管理)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험하고 악한 세상에서 자신을 다스리고, 보이지 않는데서 스스로를 삼갈 줄 아는 겸손과 윤리성이 결국 자신을 지키게 한다. 결국 우리는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수시로 [역사공부]를 해야 한다. 역사를 왜 배우는지를 알면, 우리는 인간간의 본질과 본성을 잘 헤아리게 된다. 사람을 보는 눈과 시대와 세상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서 사람은 때를 잘 알아야 하고, 상황파악을 잘 하고, 사리분별을 잘해야 한다.
<이사라는 사람에 대하여>
오늘은 한비자의 계승자인 이사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이 사람은 진시황의 최측근 권력자요, 권모술수에 능한 정치가였다. 하지만 그의 최후는 비참했다. 그가 인생을 [새옹지마(塞翁之馬) ]라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 이유에서였다.
‘새옹 노인의 말’이라는 고사성어는 반드시 새기고 기억해야한다.
인생이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것을 관료사회에서는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오래전부터 중국고전에 침작한 나로서는 ‘역사의 교훈’이 얼마나 중요한지 발견하곤 한다. 새옹지마는 인생을 중용(中庸)의 도로서 바라보면서 잘된다고 하여서 자만하지 않고, 잘 안된다고 하여도 좌절하지 않도록 해준다. 충청도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그러려니 해라’ 라는 말과 비슷하다.
중국 제일의 대학자이자 권모술수에 능한 정치가인 이사(李斯)는 사리사욕으로 자신을 망친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사(李斯)에 대한 내용을 알고 싶으면 ‘지식검색’만 하여도 좋은데, 내가 찾고자 하는 것은 ‘역사적 교훈’이다. 그리고 그 교훈을 오늘에 되살려 내적으로는 겸허해지고, 외적으로는 정직해지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정직’한 적이 많은가? 그렇지 않다면 역사를 통해서 배우기를 소망한다.
압축하고 압축해서 이사(李斯)의 영화와 그 대척점인 몰락에 대해서 논해본다.
그가 진(秦)나라 승상(국무총리)으로 있으면서 위세(威勢)가 하늘을 찌를 때, 스승인 순자(荀子)가 “재물을 멀리하면 태평성대를 이룬다”라고 충고하던 말이 생각났다. 그런 그는 자신이 승상의 지위까지 올랐으니 물러설 줄도 알아야 한다고 여긴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들과 함께 고향인 상(上)채(菜)로 돌아가 개나 키우면서 유유자적한 삶을 보내려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인간의 가장 크고 오래가는 욕망이 [권력욕]인지라, 그는 권세에 대한 욕망이 너무 강하여 스승의 말이 귓전에만맴돌았다. 결국 그는 스승의 진심어린 충고를 뒤로 한 채 사리사욕만을 탐했고, 결국 자신과 아들 부자(父子)가 모두 참형에 처해지는 파국을 맞게 된다.
[사마천의 이사열전과 부귀영화를 위해 학문을 한 이사]
나는 그 이유를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리 보아도 그의 공부의 목적, 학문의 목적이 순수하지 못한 탓으로 보인다. 사마천의 사기 - 이사열전을 보면 그의 일화가 소개된다. 이사가 하급관리로 있을 시, 그가 뒷간에서 일을 보다가 쥐가 사람의 변을 먹는 것을 보았는데 사람과 개가 오자 재빨리 도망을 갔다. 얼마후 그는 나라의 곡식창고에서 쥐를 보게 되었는데 종일 곡식을 먹어서 포동포동하게 살이 쪘고, 사람이 와도 놀라거나 무서워하지 않은 채 태연히 돌아다녔다. 이것을 본 이사는 장탄식을 하면서 스스로에게 말했다.
“사람이 잘나고 못난 것이 쥐와 같으니, 그것은 스스로 처한 상황에 달렸을 뿐이로구나”
즉 사람이 무능하고 유능한 것은 쥐와 같아서 스스로 살 궁리(窮理)를 모색할 수 밖에 없고, 능력이 있으면 곡식창고 안의 쥐가 될 수 있지만, 무능하면 화장실 안의 쥐 처럼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본 것이다.
이 일화를 보면 이사의 인생관이나 가치관을 잘 살펴볼 수 있다. 이 일을 계기로 이사는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제나라로 갔고, 당시 한비자의 사상의 대가였던 [성악설]의 순자를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그는 원래는 공자계열의 유학을 계승하였지만 유학에 개혁(改革)적인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비자의 [법가]사상에 매료되었다. 그는 “인(仁)으로 나라를 다스린다”는 정통유가의 주장에 법치(法治)사상을 많이 가미하였다. 이것이 바로 이사의 구미(口味)에 너무나 맞았다. 그는 순자에게서 [제왕의 통치술]을 배웠다. 당대에 맹자에게서 배웠더라면 이사가 잘못된 길로 가지 않게 되었을텐데, 그는 순자의 가르침을 받고 나중에는 학업을 마친 후 하직인사를 하게 되었다.
순자가 그에게 당대에 가장 강력한 나라인 진나라로 가는 이유를 묻자,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큰 치욕은 미천한 출신이며, 가장 큰 비애는 가난입니다. 남보다 뛰어나고자 한다면 크게 성공해야 합니다. 제나라 왕도 기를 펴지 못하고, 초나라 역시 현실에만 안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오직 진나라의 왕만이 제와 초를 합쳐 천하를 통일할 야심을 품고 있습니다. 만약 제나라와 초나라만을 중시한다면 머지않아 망국의 백성으로 전락하게 될 것인데, 이런 나라에 어찌 미래가 있다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진나라고 가서 기회를 찾으려고 합니다.”
순자는 이사가 진나라로 가는 것을 허락하였지만 중용(中庸)을 지키고, 성공(成功)이 눈앞에 있을 때 “재물을 멀리하면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다” 라는 말을 깊이 생각하라고 충고하고 다짐시켰다. 또 “앞만 보고 달려서는 안 되고 반드시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후퇴하고 멀리할 여지할 남기라”고 덧붙였다.
이사는 진나라에 도착한 후 당시 태후(太后)의 두터운 신임을 받는 명재상 여불위의 식객이 되었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발휘하여 여불위의 신임을 얻어 하급 관리가 되었다. 비록 관직은 낮았지만 진왕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하였다. 그는 아직 자신의 위치로는 문력이나 무공, 그리고 정치적 책략으로 두각을 나타낼 수는 없지만, 자신 스스로 생각하기에 진왕에게 상소(上訴)를 한다면 반드시 진왕이 자신을 등용(登用)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그는 진왕에게 상소문을 올리게 된다. 그 상소문은 진왕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주는 것이었다.
<이사의 상소문 전문>
“무릇 능력있고, 성공한 사람은 모두 기회를 잘 포착했습니다. 과거 진목공 시대에 나라의 힘이 강성했지만 중국을 통일할 방법이 없었던 까닭은 첫째, 당시 주나라 천자의 세력이 강성한데가 위왕이 존재해서 정권을 전복시키기에 쉽지 않았기 때문이옵니다. 둘째 진나라와 비교하여 별 차이가 없을 정도로 당시 제후들의 세력을 막강하였습니다.
그러나 진효공 이후 주나라 천자의 세력은 급격히 쇠락하고, 각 제후들간에 세력 다툼이 끊이지 않았는데, 진나라는 이 기회를 틈타 점차 강성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나라의 힘은 강성해지고, 대왕께서는 어질고 덕이 많으시니 이때 육국(六國)을 평정해야 합니다. 지금이 제왕의 사업을 세우고 천하를 통일할 절호의 기회이니, 대왕께서는 부디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시옵소서”
이 상소문을 읽고 진왕은 이사를 장사(長史)로 삼았다. 당시 장사(長史)라면 사관과 같은 자로서, 늘 임금의 옆에서 임금의 언행을 기록하고, 임금의 의중을 파악하는 사람이었다. 그야말로 권력의 실세가 된 것이다. 이사는 부국강병을 추구하여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려는 진시황에게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는 진왕에게 뇌물로 육국의 임금과 신하들을 포섭하고, 그들간에 불화와 반목을 심어서 육국이 합심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서로를 공격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이사는 객경(客卿)이라는 벼슬에 봉해진다. 객경(客卿)은 자신에게 오는 식객이나 손님을 맞이하는 자리인데, 수많은 사람들이 벼슬을 하려고, 권력의 한자리를 얻으려고 애쓰는 시대이다 보니 그의 지위는 승승장구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진나라에서는 나중에 식객(食客)을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여기서 식객(食客)이라는 사람은 진나라 사람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사람이 진나라에 가서 벼슬을 하고 높은 지위를 얻은 것을 말한다. 한나라와의 관개수로 문제로 갈등을 빗은 진왕은 자신의 아래에 식객들을 멀리 내보내기로 하였다. 이름하여 [축객령]이다. 이는 일종의 [추방제도]라고 할 수 있다. 이사도 추방대상이 되었는데, 나중에 그는 다시 진왕에게 상소를 올린다. 이름하여 그 유명한 [간축객서]이다. 그는 진나라가 지금껏 강성대국이 된 것은 바로 식객의 공헌이 얼마나 컸는지를 사실적이고 이치에 맞게, 간곡하고 진지한 문장으로 논했다. 이것을 읽은 진왕은 크게 감동하고 축객령은 철회하고 대신을 보내 이사를 돌아오게 하여 그를 정위廷尉 라는 높은 벼슬을 준다.
< 친구 한비의 등장>
진나라에서 이사의 입지가 높아지고 신임을 얻자. 그와 동문수학을 하던 한비(韓非)가 진나라에 왔다. 이는 이사에게 크나큰 도전이었다. 한비는 한나라 사람으로 한왕의 동족이고, 박학다식하며, 기발한 사고력과 재치를 가진 전국시대 말기의 사상가이다. 그의 학설은 순자의 법치사상을 이어받아서, 나중에는 온건한 전제군주론을 주장하였다. 이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한비자]이다.
한비는 나중에 여러 책들을 기술하였는데, 이러한 책들을 본 진시황은 이사보다도 한비의 글 솜씨와 재주에 놀랐다. 이사의 상소문을 무시하고, 한비자의 사상에 매료되었다. 평소 한나라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기에 한비만 있으면 한나라를 자신의 것으로 복속시키는 것은 일도 아니라고 여겼다.
“과인이 이자를 만나 사귈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사는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한비를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감언이설을 진왕에게 하게 된다.
“한비는 한왕의 친족입니다. 폐하께서 지금 한나라를 치시고자 한다면 한비는 당연히 반대할 것입니다. 한비가 한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진나라를 위하지 않을 것은 자명합니다.”
이사의 말을 들은 진왕은 한비를 옥에 가두라고 하였지만, 그를 제거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이사는 다시 한번 진왕에게 간청한다.
“주군, 한비가 한나라오 돌아간다면 계책을 짜서 우리를 공격할 것이 분명합니다. 이는 진나라에 결코 이롭지 않사오니, 세력이 아직 미비할 때 그를 제거함이 옳은 줄 압니다.”
이사의 말이 일리있다고 여긴 진왕은 한비에게 사약을 보내 자살하도록 하였고, 한비는 이사의 간사함을 뼈저리게 느꼈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자신의 정적을 제거한 이사는 더욱 기고만장해진다.
<분서갱유>
진시황은 기원전 221년 육국을 차례로 정벌하여 중국 역사상 최초로 통일왕국의 대업을 달성한다. 그가 통일후 제일 먼저 직면한 과제는 통일국가를 잘 관리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승상은 ‘왕관’이었는데, 그는 주나라처럼 토지를 제후들에게 봉하여 다스리는 봉건(封建)제를 시행할 것으로 주장했다.
그러나 이사는 봉건제가 아닌 군현제(郡縣制)를 통해 다스릴 것을 주장했다. 두 신하의 말을 듣고 고민한 진시황은 결국 이사의 제안을 받아, 전국을 36개의 군으로 나누고, 그 밑에 현을 세우는 군현제를 실행한다. 그러나 ‘왕관’ 편인 순우월이라는 사람은 봉건제 시행을 여전히 주장하여 진시황의 노여움을 샀다.
이사는 순우월이라는 자가 옛것만 고집하고 변화를 싫어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 고서를 읽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진시황에게 책을 불사를 것을 제안하였다. 이사의 규정에 따라서 상당수 [제자백가의 책들]은 불태워졌다. 그리고 그 책들을 논하는 자들은 처형하고 그 시체를 거리 한복판에 내다 걸었다. 이사가 만든 중국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문화대학살 작업이 바로 분서갱유(焚書坑儒)사건이다.
분서는 고전을 태우는 것을 말한다면, 갱유는 바로 460명의 함양에 있는 유생들을 생으로 매장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인류 문명에 대한 모욕이묘, 인간 존엄에 대한 박해였다. 나중 이것이 화가 되어 진나라는 가장 빨리 멸망의 길로 가게 된다. 이사는 진시황의 환심을 사서, 자신의 목적한 바를 이루었지만 그는 무자비하고 교활한 양심을 잃은 지식인이었다. 법치(法治)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눈여겨 볼 사람이 바로 이사이다. 그는 진정한 선비도 아니요 학자도 아니다.
<이사의 비참한 말로>
이사의 비참한 말로는 자신과 비슷한 이해관계를 가진 [조고]라는 인물 때문이다. 진시황이 죽고 [호해]라는 아들이 즉위하였는데 이 사람이 바로 [진이세]이다. 진시황과는 달리 호해는 멍청하고 어리석은 인물이었다.
그래서 이사는 간사한 조고와 더불어서 진시황의 유언을 날조하게 된다. 그러면서 호해는 온종일 향락에 빠져서 조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고, 정사는 조고와 이사가 좌지우지 하게 된다.
글이 길어지는 관계로 이사의 죽음을 논하겠다.
호해는 나중에 조고의 누명을 받고 이사에게 오형(五刑)을 내렸고, 삼족을 멸하게 된다. 이사의 가족과 친지도 모조리 붙잡혀 시장 한복판에서 참형을 당한다.
이사는 자신의 차남을 보면서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내가 진작 너와 함께 누렁이를 데리고 고향으로 가서 여행을 보냈어야 했는데, 교활한 토끼(조고)의 꾐에 빠졌으니, 이미 너무 늦었구나”
이사의 얼굴에 먼저 묵형이 가해졌고, 코를 베이고, 다시 좌우 발이 잘려나간 후, 머리가 베어졌으며, 마지막에는 허리가 잘려나갔다. 이게 오형(五刑)이다.
진시황의 중국을 통일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중앙집권 관리체제인 군형제를 실시하는데 힘을 쏟았던 이사의 공적은 대단할지 몰라도, 그가 행한 악행과 더불어서 권력과 명예를 위해서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고, 비참함을 안겨준 그도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우리가 이사를 통해서 주목할 점은 [이 땅에 선비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도 [양심있고 강직한 선비]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요즘 서울시장과 부산시장을 선출하는 재보선선거가 이루어졌다. 물론 국민의 힘의 압승이다. 민심은 곧 천심인 것을 보여준 선거였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선비계급]들이다. 또한 민주당이든, 국민의힘 이든 모두 걸출한 인물들이 많다.나름 학자적인 소양과 능력을 갖춘 인물들이다.
그런데 이사의 교훈을 통해서 살펴보면, 많은 이들이 배움을 구할 때는 진정으로 나라와 백성을 걱정한다. 그런데 막상 벼슬을 하게 되면, 자신과 가족 걱정에만 급급할 따름인 것은 무엇 때문인가? 더욱이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서는 양심도 헌신짝처럼 버리거나 댓가를 치를 수 있다는 이사와 같은 벼슬아치들이 도처에 널려 있는 것도 사실이다.
관료사회의 병폐는 인간의 영혼에 악영향을 미치고, 민족정신을 흐리게 한다. 조선의 사색당파들도 그리하였다. 서로 백성과 나라를 위한다고 하면서도 명분만 있었지 자신들의 권력유지와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바빴던 것이다. 양심있는 학자나 선비들은 유배를 가고 고통과 박해를 받아야 했다.
우리가 신분이나 지위에 아래에 있을 때는 정말 헌신적이고 양심적인 자세로 일을 하고 사람을 만난다. 그런데 위로 올라가면 반드시 많은 적들을 만들고, 삶이 피곤해진다. 그래서 일정 벼슬을 하면 물러날 생각을 해야 한다. 자꾸만 올라갈 생각을 하다가는 인생 후반전에서 비참해지는 것을 너무나 자주 목격한다.
정치현장에서, 경제현장에서, 교육현장에서, 심지어 교회의 목회현장에서도 발견한다. 그래서 선현들과 현인들의 가르침과 교훈을 깊이 새기고, 반드시 그 교훈을 실천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늦기 전에 말이다. 특히 학자와 선비된 사람은 그리하여야 한다. 책을 읽고 후학을 양성하고, 제자를 양육하는 사람은 미래의 인재를 양성하되 반드시 역사적 교훈과 반듯한 가르침으로 해야 한다. 겸손함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교만함은 패망의 지름길이다.
이사의 글을 준비하면서 떠오르면 ‘타락한 리더들’ 몇 명을 생각해 본다. 그들은 리더가 아니라 보스였다. 나이가 들수록 역사책이 주는 교훈과 가르침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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