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하늘 본향은 이스라엘의 일시적인 기업을 능가합니다(10:36-12:29)
이 설교의 부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데 있어서 인내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 특히 그분의 약속이 단기간에 성취될 수 없을 때, 그리고 오히려 역경이 우리에게 닥칠 때 더욱 그렇습니다. 인내를 뜻하는 단어(헬라어 히포메노, 히포모네 )가 다섯 번 등장합니다(10:36; 12:1, 2, 3, 7). 이 외에도 인내라는 주제는 다음과 같은 다른 방식으로도 나타납니다.
- “뒤로 물러서지 아니함”(10:38-39)
-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을 이루시기를 인내심 있게 기다림(11:9-10, 13-16, 20-22, 39-40)
- 미래의 보상을 기대하며 현재의 즐거움을 포기함(11:26)
- 더 나은 부활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극심한 죽음을 포함한 고난을 겪음(11:35-38)
- 하나님의 아버지적 징계에 지치지 아니함(12:3-11)
- 약해지고 다친 사지를 강하게 함(믿음 안에서 어려움을 겪는 동료 그리스도인들)(12:12-15).
하박국서 서두에서 인용한 내용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란 미래에 대한 그분의 약속, 특히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약속을 굳게 붙잡는 믿음이라고 가르칩니다(10:36-39). 이어서 구약 이야기(11:1-40)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은 그러한 믿음이 어떻게 “옛 사람들”을 감동시켜 “보이지 않는 것들”(11:1)과 “아직 보이지 않는 것들”(11:7)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게 했는지 보여줍니다. 고대 증인들의 “구름”은 성경의 여러 페이지를 통해 하나님이 신실하시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증해 줍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거룩하게 하는 기쁨을 위해 십자가의 수치를 참으신 예수님께 우리의 주의를 기울이는 그들의 증언을 듣고 귀 기울여야 합니다(12:1-11; 2:9-18 참조). 서로를 지지하고(12:12-17) 예배 안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12:18-29)은 지속적인 믿음을 유지하는 열쇠입니다.
인내하는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10:36-39)
하박국 2장 3-4절에 대한 통찰력 있는 해석은 인내하는 믿음(10:36-38)이라는 주제를 제시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이 이 구절을 인용하여 하나님께서 율법을 지키려는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당신의 백성에게 의를 부여하신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롬 1:16-17; 갈 3:11).하박국 2장 3-4절은 인내하는 믿음이라는 주제를 소개합니다(10:36-38).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이 이 구절을 인용하여 하나님께서 율법을 지키려는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자기 백성에게 의를 돌리신다고 주장하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롬 1:16-17 ; 갈 3:11 ).
히브리서 역시 믿음이 하나님의 기쁨을 경험하는 데 핵심이라고 확언하지만, 저자는 하박국서에서 다른 추론도 이끌어냅니다. 첫째, 믿음의 미래적 지향성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에 대한 소망(10:36; 11:1, 39)이며, "오실 이가 오시고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10:37)는 선포에서 드러납니다. 저자는 이사야 26:20-21에서 "잠시 동안"을 덧붙여 오시는 이인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가져오실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으실 것이라는 진리를 강조합니다(9:28 참조). 예수님 자신도 제자들이 불의를 당하는 동안 자신의 재림이 불필요하게 지연되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누가복음 18:7-8). 그러나 그는 또한 자신의 재림 시기는 오직 아버지만 아시는 문제이며 인간의 추측을 위한 주제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마가복음 13:32; 사도행전 1:6-7). 그러니 그가 우리의 일정에 도착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낙담해서는 안 됩니다.이사야 26:20-21은 오시는 그리스도가 재림 때 가져오실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진리를 강조하기 위해 인용되었습니다(9:28 참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불의를 당하는 동안 자신의 재림이 불필요하게 지연되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누가복음 18:7-8 ). 그러나 예수님은 또한 자신의 재림 시기는 오직 아버지만 아시는 문제이며 인간의 추측을 위한 주제가 아니라고 주장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3:32 ; 사도행전 1:6-7 ). 그러므로 그분이 우리의 시간표에 도착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낙담해서는 안 됩니다.
둘째, 반대에 직면하여도 믿음이 끈질 기게 지속되는 것은 선지자가 믿음으로 사는 것과 “뒤로 물러서는 것”(10:38)을 대조하는 데 함축되어 있습니다. 서로 격려하라는 권면(3:12-14; 10:24-25)과 믿지 않는 이스라엘 광야 세대의 부정적인 사례(3:16-4:2)는 역경이 그리스도인들을 예수님 안에 있는 소망을 굳게 붙잡는 대신 고백에서 물러서게 만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10:23). 복음의 빛이 처음 그들에게 도달했을 때, 최초의 청중들은 값비싼 헌신을 보였습니다(10:32-34). 저자는 적어도 그들 대부분에 대해 “우리는 뒤로 물러서는 자가 아니요 믿음을 가지고 영혼을 구원하는 자니라”(10:39)라고 여전히 확신합니다. 그들은 미래의 기쁨을 위해 손실을 감수했던 고대 신자들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습니다(11:13-16, 24-25, 35-40). 하지만 부족함을 느낄 위험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셋째, 주님의 “마음은 뒤로 물러서는” 사람을 “ 기쁘게 여기지 아니 하느니라”(10:38). 이 진술은 그 반대를 함축하는데, 즉 하나님은 인내하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을 기뻐하신다는 것 입니다. 믿음의 상은 법적 정당성, 즉 바울이 하박국 2:4에서 논증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정당화하는 판결(“나의 의로운 자”)입니다. 그러한 믿음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 영혼을 보존하십니다(10:39). 더욱이 믿음의 상에는 하나님의 기쁨이 포함됩니다 . 에녹이 하나님께서 그를 이 세상에서 데려가신 날까지 하나님과 동행한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그를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신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11:5-6). 구약 전체를 통해 하나님은 인내하는 믿음을 증명한 자들을 “칭찬”(즉, “대신하여 증거하신다”, 헬라어 martyreō )합니다(11:2, 4-5, 39).하박국 2:4 .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믿음을 통해 우리 영혼을 보존하십니다(10:39). 더욱이 믿음의 상급에는 다음이 포함됩니다.
고대 신자들은 희망 가운데 고난을 견디면서 약속된 축복을 미리 맛보았습니다(11:1-40)
이전에 우리는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지만, 그 당시에는 오직 아브라함만이 우리의 믿음의 본보기로 언급되었습니다(6:12-18). 이제 저자는 믿음의 선구자들, 곧 성경에 기록된 그들의 삶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하는 “구름 같이 많은 증인들”을 살펴봅니다(12:1). 믿음에 대한 서론적 설명과 고대인들이 믿음을 실천한 것에 대해 하나님의 칭찬을 받았다는 언급(11:1-2) 후, 저자는 창조(11:3)에서 시작하여 아브라함 이전의 성경 기록을 선택적으로 살펴보며, 아벨, 에녹, 노아에 초점을 맞춥니다(11:4-7). 아브라함과 족장들에 대해서도 자세히 다룹니다(11:8-22). 다음으로 모세와 그의 부모의 믿음(11:23-29)이 나오고, 이어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정복할 때 여리고의 함락과 라합의 구출(둘 다 믿음으로 이루어짐)이 나옵니다(11:30-31).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저자는 이스라엘의 사사 시대와 왕 시대, 포로 시대, 그리고 포로 이후의 시련 시대에 살았던 신실한 자들을 간략하게 살펴봅니다(11:32-38). 마지막으로 저자는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이 고대 신앙인들을 위해 증언하셨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들의 갈망과 소망의 대상은 그들의 생애를 초월하여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우리가 경험하는 성취를 기다리고 있다고 결론짓습니다(11:39-40).
11:1-7 저자는 먼저 미래 지향적인 믿음(11:1)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며,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고대 신자들에 대한 우리의 고찰(11:2-40)을 위한 지침을 제시합니다. 많은 영어 번역본의 표현은 믿음의 주관적인 차원, 즉 “확신”과 “확신”(ESV)을 강조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저자는 다른 곳에서 주관적인 확신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했던 단어들( 파레시아 , 10:19, 35; 플루로포리아 , 10:22)을 우회하고, 믿음이 의지하는 객관적 실체를 가리키는 그리스어 용어를 사용합니다 .
- hypostasis : 1:3에서처럼 "실체" 또는 "자연"
- elengkos : “증거”, 평결을 입증하는 증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은 우리의 감각으로 현재 인식할 수 없는 실체 , 즉 과거(창조, 11:3), 현재(11:6, 27), 미래(11:7, 13, 22, 26, 39-40)에 기초합니다. 이러한 실체를 고려하여 믿음 의 사람들은 적절한 행동을 취합니다. 그러한 믿음에 대해 고대 신자들은 "증거를 받았습니다"(11:2). 즉, 하나님께서 그들을 대신하여 증거( martyreō )하셨습니다. 먼저 그들의 믿음에 따른 행동을 승인하시고(11:4-5), 그런 다음 그들의 이야기를 성경에 기록하셨습니다(11:39). 16 하나님께서 고대 신자들을 대신하여 증거하신 것처럼, 구약에서도 그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증인( martyreis )으로서 우리에게 "아직도 말합니다"(11:5)(12:1-2).
믿음과 관련된 첫 번째 성경적 사건은 우주 자체의 창조인데, 이는 어떤 인간 관찰자에게도 보이지 않았습니다(11:3). 오히려 창조 기록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첫 번째 사례이며, 모세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신뢰함으로써만 분별할 수 있는 실체를 증거합니다. 더욱이 창세기 1장에서 반복되는 "하나님이 이르시되"라는 구절은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로 "보이지 않는" 말씀이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광활한 창조 질서를 존재하게 하신 권능을 보여줍니다.창세기 1장의 반복되는 구절인 “하나님이 이르시되”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그 말씀 자체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전의 세 믿음의 사람, 아벨, 에녹, 노아는 죽음 속에서 믿음이 얼마나 값비싼지(아벨), 죽음을 이긴 믿음(에녹), 그리고 “아직 보이지 않는 사건들에 관하여”(노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적으로 응답한 믿음을 잘 보여줍니다(11:4-7). 아벨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와 잔혹한 죽음은 믿음으로 사는 것의 값비싼 대가를 보여줍니다(11:4). 창세기 4:1-18은 주님께서 형제인 카인과 아벨이 드린 제물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셨는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아벨의 믿음 이 그의 제물을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게 했지만 카인의 제물은 그렇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11:4). 주님께서 “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 ”(창세기 4:4)는 것은 그분께서 아벨을 “의로운” 사람으로 “칭찬”( martyreō , “증언하셨다”)하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칭찬을 받은 최초의 고대 신자였습니다(11:2). 하박국서에서 이전에 인용한 표현을 빌리자면, 아벨은 “믿음으로 산” “의로운 자”였습니다. 그러나 아벨은 또한 믿음으로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배척을 불러일으킨 불신앙을 회개하기는커녕, 시기심 많은 형 가인은 그를 살해했습니다(창 4:8). 따라서 아벨은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고 믿음 안에서 죽은”(히 11:13) 많은 사람들 중 첫 번째였습니다. 아벨의 피가 땅에서 그를 죽인 자를 향해 부르짖었습니다(창 4:9-11). 그러나 아벨은 또한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하는 “여전히”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히 12:1). 더욱이, 그의 피는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말을 하는” 예수님의 속죄의 피를 예표합니다. 그 피가 “만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께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12:23-24).창세기 4장 1-18절은 가인과 아벨 형제가 드린 제물에 대한 주님의 평가를 기록합니다. 히브리서는 그것이 아벨의 것이었음을 강조합니다 ( 창 4:4 ). 이는 그가 "칭찬했다"( 창 4:8 )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아벨은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고 믿음 안에서 죽은"( 히 11:13 ) 많은 사람들 중 첫 번째였습니다 . 아벨의 피가 땅에서 그를 죽인 자를 향해 울부짖었습니다( 창세기 4:9-11 ).그러나 아벨은 또한 하나님의 신실함에 대한 증인으로서 구약성경의 페이지에서 "여전히 우리에게 말합니다"( 히브리서 12:1 ).게다가 그의 피는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말씀을 하는" 예수의 속죄의 피를 예시하는데, 우리가 받아 마땅한 형벌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자비를 위해 "모든 사람의 심판자인 하나님"에게 호소합니다(12:23-24).
아벨의 순교와는 대조적으로, 에녹의 드문 경험, 즉 "죽음을 보지 않도록 옮겨졌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으므로 보이지 아니하였더라"는 경험은 하나님께서 그의 의로운 자에게 주시는 죽음을 극복하는 생명을 예시합니다(창 11:5). 에녹이 지상 생활에서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모세의 말(창 5:24)은 하박국 2:3-4을 연상시키는 언어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euaresteō 17)"라고 적절하게 표현됩니다 . 에녹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은 에녹의 믿음을 드러냅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창 11 :6) 때문입니다. 그러한 믿음은 하나님의 현재 적 실체("그는 존재한다")뿐만 아니라 미래의 약속("그는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신다")도 신뢰하며, "보이지 않는 것들"(창 11:1)에 대한 하나님 말씀의 확실한 증거에 의지합니다.창세기 5:24 )는 하박국서 2:3-4 를 연상시키는 언어로 적절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
노아는 하나님께서 “아직 보이지 않는 일들”(11:7)에 대해 말씀하실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 적절한 행동을 취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창세기 6장 9절에서 모세는 노아를 “의로운 사람”으로 묘사하며,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LXX euaresteō , “기쁘게”)” 사람이라고 밝힙니다. 하나님께서 다가올 홍수를 예언하셨을 때(창세기 6:13-21), 노아는 방주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모세는 간결하게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노아가 이를 행하여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준행하였더라”(창세기 6:22; 7:5, 9, 16).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은 단순히 개념에 대한 지적인 동의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 즉 노아의 경우에는 홍수로 악인이 임박한 멸망에 대해 계시하신 것에 응답하여 행동하는 신뢰입니다 . 노아의 적극적인 믿음의 결과는 “그의 가족을” 죽음에서 구원하고 악한 세대(“세상을 정죄하노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었습니다(히 11:7). 마찬가지로 모세는 후에 믿음으로 왕족의 양육이라는 세속적인 특권을 거부하고 “덧없는 죄의 쾌락”과 애굽의 보물을 거부했습니다(11:25-26). 홍수 이전에 노아는 이미 “주님께 은혜를 입었”고, 주님께서는 그를 “의롭다”고 선언하셨습니다(창 6:8-9). 노아는 하나님의 경고에 귀 기울임으로써 자신이 “믿음으로 얻는 의의 상속자”임을 보여 주었고, 하박국 2장 3절의 모습에 부합했습니다.창세기 6장 9절은 그를 “의로운 사람”으로, “ 노아와 함께 걸으며” 방주를 짓기 시작한 사람 으로 묘사합니다(LXX 창세기 6:13-21 ). 모세는 간결하게 이렇게 기록합니다. “노아가 이렇게 하였다. 그는 하나님이 명하신 모든 것을 다 지적으로 행하였다”( 창 6:22; 7:5, 9, 16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은 단순히 개념에 대한 지적인 동의가 아니라, 히 11:7 )을 신뢰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모세는 나중에 믿음으로 왕족의 양육이라는 세상적 특권을 거부하고, “덧없는 죄의 쾌락”과 이집트의 보물을 거부했다(11:25-26). 홍수 전에 노아는 이미 “주님의 눈에 은총을 입었고”, 주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선언하셨다( 창 6:8-9 ). 노아는 하나님의 경고를 경청함으로써 자신이 “믿음으로 얻는 의의 상속자”임을 보여 주었고, 하박국 2:3 의 모습에 부합한다 .
11:8-22 아브라함 (그 후의 족장들인 이삭, 야곱, 요셉과 함께) 의 믿음은 이제 확장된 논의를 받게 됩니다. 저자는 아브라함을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6:12-18; 7:6 참조)의 예로 소개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었던 약속은 고향 , 무수한 자손 , 그리고 "땅의 모든 족속"(창 12:1-3)에게 흘러넘칠 신성한 축복 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 이 선물들은 하나님께서 족장 아브라함을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11:8) 메소포타미아를 떠나도록 부르셨을 때 "보이지 않는 것"(11:1)이었고, 자녀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행보를 살펴보면 먼저 고향 약속(11:9-10)이 묘사되고, 그 다음에 자손 약속(11:11-2)이 나옵니다. 그런 다음 저자는 족장들의 고향 약속에 대한 이해(11:13-16)와 후손 약속 에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의 시험 (11:17-19)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이삭, 야곱, 요셉의 믿음이 미래 세대를 염두에 둔 축복 과 예언 의 말씀으로 표현되었다고 주장합니다 (11:20-22).창세기 12:1-3 ). 이 선물들은 하나님께서 족장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보이지 않는 것들”(창세기 11:1)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며”(창세기 11:8) 자녀를 갖지 못했습니다.
본향에 대한 약속(11:8-10, 13-16). 아브라함은 아직 보이지 않는 본향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으로 메소포타미아를 떠났습니다(11:8; 창 12:3-7). 약속의 땅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의 후손에게 그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창 12:7; 13:14-17; 15:18-21; 17:8).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인내하며, 곳곳으로 옮겨 다니며 “타국 땅”에서 나그네처럼 천막에 거했습니다(히 11:9; 창 12:6-9; 13:3, 12, 18; 20:1). 그의 아들 이삭과 손자 야곱도 그렇게 했습니다(창 26:1-6; 33:17-20). 이 족장들은 평생 동안 스스로를 “땅의 외국인과 나그네” 18 라고 묘사했습니다 (히 11:13).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위해 매장지를 사려고 할 때 그렇게 했습니다. “나는 너희 중에 거류민 이요 나그네 라”(창 23:4). 야곱은 약속의 땅과 메소포타미아에서의 자신의 삶 전체를 “나그네의 세월”(창 47:9)19이라고 묘사했습니다 . 그들이 자신 을 나그네로 묘사한 것은 그들이 “멀리서 맞이한”(히 11:13) 진정한 고향이 그들의 후손이 결국 차지하게 될 가나안 땅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했습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설계하시고 건축하실 터”(11:10, 16)가 있는 영원하고 파괴될 수 없는 도성을 “기대”했습니다. 모든 족장들은 “더 나은 본향 곧 하늘에 있는 본향”(11:16)을 갈망했습니다. 우리는 여호수아 시대보다 오랜 후에 기록된 시편 95편이 다윗 세대(그리고 우리 세대)에게 (대부분 성공적인) 가나안 정복 이후의 (너무나 일시적인) 안식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기회를 제시한다는 것을 들었습니다(4:6-8). "하나님의 안식"은 멸망으로 예정된 이 땅(1:10-11)이 아니라, 장차 올 하늘 나라와 영원한 도성(11:10, 16; 13:14 참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창세기 12:3-7 ). 약속의 땅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의 자손에게 그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12:7; 13:14-17; 15:18-21; 17:8 ).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며 곳곳으로 옮겨 다니며 “타국 땅에서” 나그네처럼 천막에 거했습니다( 히브리서 11:9 ; 창세기 12:6-9; 13:3, 12, 18; 20:1 ). 그의 아들 이삭과 손자 야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창세기 26:1-6; 33:17-20 ). 이 족장들은 평생 동안 자신을 “땅의 외국인과 나그네”라고 묘사했습니다( 히브리서 11:13 ).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위해 장례를 치르려고 할 때 이렇게 했습니다. "나는 이방인입니다( 창 23:4 ). 야곱은 약속의 땅과 메소포타미아에서의 그의 전 생애를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창 47:9 ). 그들이 자신을 나그네라고 묘사한 것은 그들이 "멀리서 인사했던"( 히 11:13 ) 진정한 고향을 암시했습니다. ) 진정한 고향이 그들의 자손이 결국 차지하게 될 가나안 땅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했습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설계하시고 건축하시는 기초"가 있는 영원하고 파괴될 수 없는 성읍을 "기대"했습니다(11:10, 16). 모든 족장들은 "더 나은 본향 곧 하늘에 있는 본향"을 갈망했습니다(11:16). 우리는 여호수아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기록된 시편 95편이 다윗 세대(그리고 우리 세대)에게 (대부분은) (너무나 일시적인) 안식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기회를 제시한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가나안 정복에 성공했습니다(4:6-8). “하나님의 안식”은 멸망으로 예정된 이 땅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1:10-11). 오직 하늘 나라와 장차 올 영원한 도성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11:10, 16; 13:14 참조).
자손에 대한 약속(11:11-12, 17-19). 하나님께서 셀 수 없이 많은 자손을 약속하신 것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들을 낳을 수 있도록 주님께서 전적으로 허락하신 것에 달려 있었습니다. 비록 그녀가 “나이가 들었고” 아브라함은 생식적으로 “죽은 것과 다름없었”(11:11-12)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초점을 맞추지만(롬 4:18-21),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사라의 믿음과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임신을 낳는 생명을 주는 능력에 대한 믿음에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킵니다. 사라, 여리고의 라합(히 11:31), 그리고 선지자들에 의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아이들의 어머니들(11:35)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칭찬하신 믿음의 여인들 가운데 포함됩니다 . 물론 창세기는 아브라함이나 사라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지키실 수 있다는 확고한 신뢰를 보이지 않았 음을 보여줍니다 (창 15:1-8; 16:1-6; 17:18). 결국,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의 약속의 불합리함을 비웃었습니다(창 17:17; 18:12). 그러나 그들의 흔들리는 믿음은 변함없이 신실하신 하나님 께 있었습니다 . 그래서 그들의 결합으로 “별과 모래알처럼 많은 후손이 태어났습니다”(창 22:17; 13:16; 32:12 참조).로마서 4:18-21 ), 히브리서 11:31 , 그리고 선지자들에 의해 죽은 아이들을 살린 어머니들(11:35)도 창세기 15:1-8, 16:1-6, 17:18 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 결국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의 약속의 부조리를 비웃었습니다( 창세기 17:17, 18:12 ). ). 그러나 그들의 흔들리는 믿음은 창세기 22:17 에 있었습니다 (창세기 13:16, 32:12 참조).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가장 큰 시험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하셨을 때였습니다(히 11:17-19; 창 22:1-19). 주님은 이미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하나님의 약속의 상속자로 지명하려는 제안을 기각하셨습니다(창 17:18-21). 따라서 이삭은 참으로 주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수 있는 " 독생자 "였습니다(창 22:2). 따라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과 이 엄청나게 값비싼 명령을 조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이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수 있다고 생각한" "믿음으로"였습니다(히 11:19). 하나님의 천사가 아브라함의 칼을 휘두르는 손을 멈추고 이삭 대신 죽을 숫양을 제공했지만, "비유적으로 말해서"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을 죽음에서 다시 맞이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 대신 죽임을 당한 숫양(히 2:14-16)과 죽음에서 부활한 아들(비유적 의미)은 모두 최후의 희생(히 10:10)이신 예수님과 영원히 살아 계신 대제사장이자 위대한 목자(히 13:20)이신 예수님을 예표합니다.히 11:17–19 ; 창 22:1-19 ). 주님은 이미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하나님의 약속의 상속자로 지명하자는 제안을 기각하셨습니다( 창 17:18-21 ). 그러므로 이삭은 실제로 " 창 22:2 ").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과 이 엄청나게 값비싼 명령을 조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수 있다고 생각한 믿음으로"였습니다( 히 11:19 ). 하나님의 천사가 아브라함의 칼을 휘두르는 손을 멈추게 하고 이삭 대신 죽을 양을 제공했지만, "비유적으로 말해서" 아브라함은 죽은 자 가운데서 그의 아들을 다시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 대신 죽임을 당한 양( 히 2:14-16 )과 죽음에서 (비유적으로) 살아난 아들은 모두 마지막 희생(10:10)이자 영원히 살아 계신 대제사장이자 큰 목자(13:20)인 예수를 예표합니다.
축복(창 11:20-22). 이삭이 그의 아들 야곱과 에서에게, 그리고 야곱이 요셉의 아들들에게 한 축복은하나님께서 미래 세대에 약속을 지키실 것이라는 이 족장들의 믿음을 표현했습니다. 이삭의 축복은 쌍둥이 동생 야곱을 에서보다 높여, 야곱을 하나님께서 구속 언약을 맺으실 혈통의 조상으로 지명했습니다(창 27:27-29, 39-40). 야곱이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한 축복은 이 손자들을 삼촌들과 함께 약속의 땅에서 땅을 상속받을 지파의 수장으로 정했습니다(창 48장; 대상 5:1-2). 주님께서 족장들의 예언적 축복을 성취하시기까지는 여러 세기가 걸렸지만, 그들은 믿음으로 멀리서 그 축복을 보았습니다. 요셉은 그와 같은 선견지명을 가진 믿음으로하나님께서 그의 증조부 아브라함에게 예언하셨던 미래의 출애굽(히브리서 11:22)을 언급했습니다(창세기 15:13-16).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 이 땅의 고향으로 돌아오시리라는 약속을 신뢰하며, 요셉은 약속의 땅에 장사하기 위해 자신의 뼈를 애굽에서 가져오라고 명령했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는 이 명령에 순종했습니다(창세기 50:24-25; 출애굽기 13:19; 여호수아 24:32).창세기 27:27-29, 39-40 ). 야곱이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내린 축복은 이 손자들을 삼촌들과 함께 약속의 땅에서 땅을 상속받을 지파의 수장으로 세웠습니다( 창세기 48장 ; 대상 5:1-2 ). 주님께서 족장들의 예언적 축복을 성취하시기까지 여러 세기가 지났지만, 그들은 믿음으로 그 축복을 멀리서 보았습니다. 하나님 께서 그의 증조부 아브라함에게 예언하셨던 것과 같은 선견지명 있는 믿음으로( 히브리서 11:22 ) 요셉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출하고 지상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믿고, 약속의 땅에 묻기 위해 자신의 뼈를 이집트에서 가져오라고 명령했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는 이 지시에 순종했습니다( 창세기 50:24-25 ; 출애굽기 13:19 ; 여호수아 24:32 ).
11:23-31 모세 와 관련하여 , 두려움 없는 믿음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그의 부모로부터 시작됩니다. 부모는 이스라엘의 갓난아기를 죽이라는 이집트 왕의 명령으로부터 모세를 보호하기 위해 그를 숨겨주었습니다(출 1:15-16; 2:1-2). 모세의 믿음은 네 가지 사건에서 실천되었습니다. 바로의 딸의 양자라는 신분과 부를 거부한 것, 이집트를 떠난 것, 유월절을 지킨 것, 그리고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것입니다. 독자들이 이집트 공주가 나일 강에 떠 있는 아기를 발견하고 왕실에서 양육된 이야기(출 2:3-10; 행 7:21-22 참조)에 익숙하다고 가정하고, 저자는 히브리인 노예를 때리는 이집트 감독관을 죽이려는 모세의 즉각적인 결정에 초점을 맞춥니다(히 11:24-26; 출 2:11-12; 행 7:23-25 참조). 인생을 바꾸는 그 단 한 번의 행동으로 모세는 고통받는 친족과 돌이킬 수 없이 자신을 동일시했고, 왕족의 지위, "덧없는 죄악의 쾌락", 그리고 "이집트의 보물"(11:25-26)을 포기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겪은 학대는 은혜로, 믿음을 통해, 장차 오실 고통받는 메시아와 연합되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따라서 모세는 "그리스도의 능욕"을 자신의 가장 큰 보물이자 상급으로 선택했습니다. 저자는 비난과 손실을 겪은(10:32-34) 청중들에게 예수께서 “성문 밖에서” 배척당해 죽으셨으므로, 그들도 “진영 밖으로 그에게 가서 그가 당한 비난을 짊어져야 한다”(13:12-13)고 상기시킵니다.출애굽기 1:15-16; 2:1-2 ). 모세 자신의 믿음은 네 가지 사건에서 실천되었습니다. 파라오의 딸의 양자로서의 지위와 부를 거부한 것, 이집트를 떠난 것, 유월절을 지킨 것, 그리고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것입니다. 독자들이 이집트 공주가 나일 강에 떠 있는 아기를 발견하고 왕실에서 양육된 이야기( 출애굽기 2:3-10 ; 사도행전 7:21-22 참조 )에 익숙하다고 가정하고, 저자는 히브리인 노예를 때리는 이집트 감독관을 죽이기로 한 모세의 즉각적인 결정에 초점을 맞춥니다( 히브리서 11:24-26 ; 출애굽기 2:11-12 ; 사도행전 7:23-25 참조 ). 그 단 한 번의 삶을 바꾸는 행동으로 모세는 고통받는 친족들과 돌이킬 수 없이 자신을 동일시하여 왕족의 지위, “덧없는 죄악의 쾌락”, 그리고 “애굽의 보물”을 포기했습니다(11:25-26). 하나님의 백성이 겪은 학대는 은혜로, 믿음을 통해 장차 오실 고난받는 메시아와 연합되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따라서 모세는 “그리스도의 능욕”을 자신의 가장 큰 보물이자 상급으로 택했습니다. 저자는 능욕과 상실을 겪었던(10:32-34) 청중들에게 예수께서 “성문 밖에서” 배척당하시어 죽으셨으므로, 그들도 “진영 밖으로 나아가 그분이 받으신 능욕을 짊어져야”(13:12-13)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또한 “믿음으로” 모세는 “왕의 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애굽을 떠났습니다”(출 11:27). 이 출애굽은 첫 유월절(출 11:28)과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 탈출하기(출 11:29) 전에 기록되었으므로 , 애굽인을 죽인 사실이 알려지자 모세가 서둘러 떠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신의 탈출 동기를 솔직하게 기록하면서 파라오가 자신을 죽이려 했기 때문에 “두려웠다”고 말합니다(출 2:13-15). 분명 당시 독자들은 출애굽기 기록을 알고 모세의 두려움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치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의 불가능해 보이는 아들 약속에 의심하며 비웃었던 것을 기억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저자는 구약 성도들의 결점을 부인함으로써 그들이나 우리를 속이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요점은, 그들의 성품과 신뢰에서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연약한 믿음조차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솔직히 기록했듯이) 두려웠지만, 그의 믿음이 두려움을 압도했습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분"(출 11:27)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순식간에 안락과 특권의 삶을 자기 부정과 위험의 삶으로 바꿀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은,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주님을 만나기 전부터 모세가 "보이지 않는 것들"(출 11:1) 가운데 최고의 실재이신 주님을 신뢰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출애굽기 2:13-15 ). 분명 원래 독자들은 출애굽기 기록을 알고 모세의 두려움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치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의 겉보기에 불가능한 아들의 약속에 의심하며 웃었던 것을 기억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저자는 구약 성도들의 결점을 부인함으로써 그들이나 우리를 속이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요점은 그들의 성격과 신뢰 모두에서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에 매달리는 연약한 믿음조차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솔직히 기록했듯이) 두려워했지만, 그의 믿음이 그의 두려움을 가렸습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분"(11:27)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순식간에 안락과 특권의 삶을 자기 부정과 위험한 삶으로 바꿀 준비가 된 그의 모습은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주님을 만나기 전부터 모세가 "보이지 않는 것들"(11:1) 가운데 최고의 실체이신 주님을 신뢰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은 출애굽 사건, 즉 유월절을 지키고(출 11:28) 홍해를 건넌 사건(출 11:29)에서 드러났습니다. 주님께서 이집트 전역에 "처녀의 멸망자"를 보내어 사람과 짐승을 죽이려 한다는 선포를 믿었던 모세와 그의 친족들은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집 문설주에 뿌리고 함께 엄숙한 식사를 했으며, 어린 양의 피를 통해 죽음으로부터 보호받았습니다(출 12:1-30). 이 마지막 재앙에서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쫓아냈습니다(출 12:31-32). 그가 마음을 바꾸어 그들을 추격하자, 이스라엘 백성은 두려워했지만 (출 14:10-12), 주님께서 그들 앞에서 물을 갈라놓으셨기 때문에(출 14:21-25) "믿음으로" 홍해를 마른 땅처럼 건넜습니다.출애굽기 11:4-9 ), 모세와 그의 친족들은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집 문설주에 뿌리고 함께 엄숙한 식사를 했으며, 어린 양의 피를 통해 죽음으로부터 보호받았습니다(출 12:1-30). 이 마지막 재앙에서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쫓아냈습니다(출 12:31-32). 그가 마음을 바꾸어 그들을 추격하자, 이스라엘 백성은
여리고 성벽의 무너짐과 출애굽 40년 후 라합의 구출은 저자가 간략한 요약으로 넘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서술하는 사건입니다. 히브리서 3장 7절에서 4장 13절은 이미 그 비극적인 40년의 중간 기간을 논했는데, 그 기간 동안 한 세대 전체가 불신앙으로 광야에서 멸망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했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예외였습니다(3:19-4:2; 민수기 14:6-9, 24-30 참조). 그 믿지 않는 세대의 자녀들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7일 동안 여리고의 견고한 성벽을 돌았고, 주님의 나팔 소리와 백성의 함성에 성벽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수 6장). 그 파괴 속에서 창녀 라합은 주님의 무적의 힘에 대한 소문을 믿고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기 때문에 살아남았습니다(여호수아 2장; 6:22~25; 야고보서 2:25 참조).히브리서 3:7-4:13은 이미 그 비극적인 40년의 중간 기간을 논했는데, 그 기간 동안 한 세대 전체가 불신앙으로 인해 광야에서 멸망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했던 여호수아와 갈렙만은 예외였습니다(3:19-4:2; 민수기 14:6-9, 24-30 참조 ). 그 믿지 않는 세대의 자녀들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7일 동안 여리고의 견고한 성벽을 돌았고, 주님의 나팔 소리와 그의 백성의 함성에 성벽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수 6장 ). 그 파괴 속에서 기생 라합은 주님의 무적의 능력에 대한 보고를 믿고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기 때문에 살아남았습니다( 수 2장; 6:22-25 ; 야고보서 2:25 참조 참조 ).
11:32-38 저자는 이스라엘 역사 전반에 걸쳐 믿음으로 이끌렸던 사사, 왕, 선지자들의 이야기를 모두 자세히 이야기하려면 "시간이 부족할 것"이므로 간략한 요약으로 서사를 마무리합니다. 구약 성경에 대한 청중의 친숙성을 활용하여, 저자는 "믿음으로" 거둔 승리에 대한 온전한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는 이름들을 언급합니다(11:32). 기드온이 미디안을 무찌른 300명(삿 6장), 바락이 가나안 사람들을 정복한 것(삿 4-5장),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을 멸망시킨 것(삿 15-16장), 입다가 암몬 사람들과 아모리 사람들과 싸운 것(삿 11장), 새로 기름부음받은 다윗이 블레셋의 용사 골리앗을 죽인 것(삼상 17장), 그리고 사무엘과 다른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 물론 분별력 있는 청취자라면 이 사람들의 믿음의 실패도 떠올릴 것입니다. 기드온의 표적 요구, 바락의 사사 드보라의 동행 없이는 싸우지 않겠다는 태도, 삼손의 나실인 헌신에 대한 경멸, 입다의 어리석은 서원, 다윗의 간음과 살인 등이 그 예입니다. 하나님께서 칭찬하시는 것은 흠 없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약속을 굳건히 신뢰하는 사람입니다.삿 6장 ), 가나안 사람들을 정복하는 바락( 삿 4-5장 ), 블레셋 사람들을 멸망시키는 삼손( 삿 15-16장 ), 암몬 사람들과 아모리 사람들과 싸우는 입다( 삿 11장 ), 새로 기름부음받은 왕이 블레셋의 영웅 골리앗을 죽이는 다윗( 삼상 17장) ),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무엘과 다른 선지자들을 통해 자신의 말씀을 전함.물론 분별력 있는 청취자들은 이 사람들의 믿음의 실패도 기억할 것입니다.기드온이 표적을 요구함, 바락이 재판관 드보라와 함께하지 않으면 싸우기를 거부함, 삼손이 나실인 헌신을 경멸함, 입다의 어리석은 서원, 다윗의 간음과 살인.그것은 백성이 아닙니다.
이 요약에서 개별 신자들의 이름(11:32)과 그들의 행위(11:33-38)는 더 이상 연대순으로 나열되지 않습니다. 믿음의 행위에 대한 요약은 먼저 믿음의 승리가 역사 속에서 명백하게 드러난 사례들(11:33-35a)을 모은 다음, 신자들이 고난, 배척, 빈곤, 죽음을 겪은 상황들(11:35b-38)로 넘어갑니다. 믿음의 승리 중 일부는 특정 구약 성경 본문에서 알아볼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사자의 입을 막았고”(단 6장), 그의 세 명의 충실한 히브리 친구들은 “불의 세력을 멸했습니다”(단 3장). 다윗은 “전쟁에 용맹하여” “외국의 군대를 물리쳤습니다”(삼상 17장). 선지자 엘리야와 엘리사를 통해 “여인들이 죽은 자를 부활로 맞이했습니다”(왕상 17장; 왕하 4장). 반면에 고대 신앙인들은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포기하는 것이라면 “풀려나기를 거부”하며 고문과 죽음을 견뎌냈습니다. 그들은 더 나은 부활을 통해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그리스어로 kreittonos anastaseōs ; ESV: “더 나은 삶으로 다시 일어나다”)을 믿었습니다. 마치 족장들이 더 나은 하늘의 고향을 갈망했기에 이 땅에서 이방인 신분을 받아들인 것과 같습니다(히브리서 11:13-16). 히브리 그리스도인들 역시 더 나은, 영원한 소유를 기대했기에 재산을 빼앗기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10:34). 구약 시대의 신자들은 투옥과 노숙(왕상 17장, 22장, 렘 37장)뿐 아니라 돌, 톱, 칼에 맞아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왕상 19장, 대하 24장, 렘 26장). 믿지 않는 세상은 그들을 멸시했지만, 그 세상은 흔들리지 않는 왕국을 상속받을 믿음을 지닌 자들에게는 “합당하지 아니하였”습니다(히 12:28).다니엘 6장 )과 그의 세 충실한 히브리인 친구들은 “불의 세력을 멸했습니다”( 다니엘 3장 ).다윗은 “전쟁에 강해져서” “외국의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삼상 17장 ).선지자 엘리야와 엘리사를 통해 “여인들이 죽은 자를 부활로 받았습니다”( 왕상 17장 ; 왕하 4장 ).반면에 고대 신앙인들은 고문과 죽음을 견뎌냈고,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풀려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그들은 더 나은 부활을 통해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히브리서 11:13-16 ).히브리인 그리스도인들도 더 나은, 지속적인 소유를 기대했기 때문에 재산 압류를 받아들였습니다(10:34). 구약 시대의 신자들은 투옥과 노숙( 왕상 17장, 22장 , 렘 37장 )뿐 아니라 돌과 톱과 칼에 맞아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왕상 19장 , 대하 24장 , 렘 26장 ). 믿지 않는 세상은 그들을 멸시했지만, 그 세상은 인내하는 믿음으로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28 ) 를 상속받는 자들에게는 “합당하지 않았습니다.”
11:39-40 고대 신자들에 대한 이 조사는 시작과 마찬가지로 끝맺습니다.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을 통해 그들을 “추천”( martyreō , “대신하여 증거”)하셨습니다(11:2, 39).그들의 경험은 “바라는 것들”(11:1)을 확증하는 증거로서의 믿음의 미래 지향적 특징을 보여줍니다.왜냐하면 그들 자신의 구속사적 시대에 그들은 “약속된 것을 받지 못했기”(11:13을 반영) 때문입니다.율법이 “장차 올 좋은 것들”(지금은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시는 축복(10:1; 9:11))의 그림자를 보여주었던 것처럼, 이삭의 탄생(11:11)과 이스라엘의 가나안 상속(11:30)도 “약속”(그리스어 텐 에판젤리아, ESV에서는 “약속된 것”으로 번역됨; 11:39)의 궁극적인 성취에 대한 부분적이고 예비 적인 미리 보기 였을 뿐입니다 . 그 약속은 아들의 성육신을 통해 성취되어 구속 사명을 이루었습니다(고후 1:19-20). 그리스도께서 오시자 마침내 "더 좋은 것"이 도착했습니다. 이제 옛 언약과 새 언약의 믿는 자들은 함께 "온전하게" 되어, 예수님의 단번에 드리신 희생을 통해 우리의 양심이 정결해져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고후 10:14).고린도후서 1:19-20 ). 그리스도께서 오시자 마침내 “더 좋은 것”이 도착했습니다. 이제 옛 언약과 새 언약의 믿는 자들은 함께 “온전하게” 되어, 예수님의 단번에 드리신 희생을 통해 우리의 양심이 정결하게 되어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고후 10:14).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켜 인내하게 합니다(12:1-11)
12:1-4 서두에 나오는 접속사 “그러므로”와 “구름 같이 허다한 증인들”에 대한 언급은 신실한 자들의 역사(히 11장)가 향하고 있는 결론을 드러냅니다(히 12:1).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고대 신자들을 위해 증언하실 뿐만 아니라(11:2, 4, 5, 16, 39), 그들 또한 하나님을 대신하여 우리에게 증언하며,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합니다(11:4, 11, 20-22). 그들의 증언은 우리에게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고, 우리를 가로막는 모든 짐을 벗어버리도록 강력히 권면합니다.히브리서 11장 )이 우리를 인도해 왔습니다(12:1).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고대 신자들을 위해 증언하실 뿐만 아니라(11:2, 4, 5, 16, 39), 그들 또한 하나님을 대신하여 우리에게 증언하며,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합니다(11:4, 11, 20-22). 그들의 증언은 우리에게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고, 우리를 가로막는 모든 짐을 벗어 버리도록 강력히 권면합니다.
고대 범헬레닉 경기 대회(현대 올림픽의 전신)에서 따온 이 스포츠 이미지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로 부르신 부르심의 푯대”(빌 3:14)를 향해 나아가는 자들에게 요구되는 자기 부정과 끈기를 보여줍니다. 저자는 이미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앞서 달리신 분”으로서 하나님의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고, 그곳에 우리의 구원의 소망을 굳건히 세우셨다고 확언했습니다(히 6:19-20). 또 다른 운동 비유를 통해, 저자는 곧 우리가 믿음의 마라톤을 함께 달리는 팀원 으로서 , 특히 약하거나 부상당한 사람들을 위해 서로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줄 것입니다(히 12:12-15).빌립보서 3:14 ). 저자는 이미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앞서 달리신 분”으로서 하나님의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으며, 그곳에서 우리의 구원에 대한 소망을 안전하게 닻을 내리셨다고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6:19-20 ). 또 다른 운동 비유에서 그는 곧 우리가 믿음의 마라톤을 달리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줄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을 방해하는 “무거운 것”은 “꽉 얽매이는 죄”입니다. 저항하지 않는 모든 형태의 죄는 경건함 안에서 우리의 성장을 방해하며, 히브리서는 그러한 죄들을 부도덕과 돈에 대한 중독으로 명시적으로 지적합니다(히 12:16; 13:4-5). 그러나 히브리서가 가장 자주 경고하는 가장 치명적인 죄는 하나님의 아들과 그분의 속죄 제사를 부인함으로써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지는 것”입니다(히 3:12; 4:11-13; 6:4-6; 10:26-31; 12:15-17). 고대 신자들의 삶에서 예시되었던(히 11:27, 35-38) “뒤로 물러서지 않는”(히 10:35-39) 인내 의 필요성은 이제 아버지의 지혜롭고 고통스러운 징계에 대한 사랑하는 아들들의 올바른 반응으로 제시됩니다(히 12:1-11).히브리서 10:35-39 은 고대 신자들의 삶에서 예시되었는데(11:27, 35-38), 이제는 사랑하는 아들들이 아버지의 지혜롭고도 고통스러운 징계에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대한 올바른 응답으로 제시됩니다(12:1-11).
고대 성도들의 간증은 우리의 눈을 성도들 자신에게서 돌리게 합니다.우리의 인내를 지탱하는 힘은 그들의 모범에서가 아니라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는 데”(12:2-3) 있기 때문입니다.그분은 우리의 구원을 확보하신 근원이자 대장( archēgos ; 2:10 참조)이십니다.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자신의 순종적인 고난에 대해 자녀들의 구원으로 보상해 주실 것을 신뢰하셨습니다(2:12-15).따라서 우리는 새롭고 더 나은 언약의 보증이신 그리스도를 신뢰합니다(7:22).예수님은 믿음의 “온전하게 하시는 이”이십니다.그분은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 항상 살아 계셔서 간구하시므로” “ 그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십니다(7:25).
모세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상을 기대하며 그리스도의 비난을 기꺼이 참았던 것처럼(11:25-26),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와 그 수치를 넘어(고전 1:18-25; 갈 3:13; 6:14; 신 21:22-23 참조) “그 앞에 놓인 기쁨”(12:2)을 바라보셨습니다. 그 기쁨에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는 것”이 포함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형제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전하고 자신의 피로 구속한 자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쁨도 포용했습니다(히 2:12, 시 22:22 인용). 이사야가 예언한 것처럼, “…그의 영혼이 죄과를 위해 제사를 드리면, 그는 씨를 보게 되고 그의 날은 길어질 것이다…그 영혼의 고통으로부터 보고 만족할 것이다”(사 53:10-11).고린도전서 1:18-25 ; 갈라디아서 3:13;6:14 ; 신명기 21:22-23 )은 “그 앞에 놓인 기쁨”(12:2)에 대한 것입니다.그 기쁨에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즉위하는 것도 포함되었습니다.그러나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이름을 형제들에게 전하고 자신의 피로 구속한 자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쁨도 포함합니다( 히브리서 2:12 , 시 22:22 인용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그의 영혼이 죄과를 위해 제사를 드리면 그는 씨를 보고 그의 날은 길리라…그 영혼의 고통에서 벗어나 보고 만족할 것이다”( 사 53:10-11 ).
죄인들의 극심한 적대감을 참으셨던 예수님을 생각하면, 배교라는 대죄에 맞서 싸우는 우리 자신의 힘겨움과 낙담에 맞서 우리의 마음이 굳건해질 것입니다(12:3). 사실, 당시 청중들이 겪었던 고난(10:32-34)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살아 있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수치스러운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셨던 예수님(12:2)과는 달리, 청중들의 고난은 순교로 "피를 흘리실 정도"(12:4)에 이르지 않았습니다.
12:5-11 자기 연민과 낙담의 유혹을 물리치기 위해, 듣는 이들은 자신을 박해하는 죄 많은 자가 누구이든, 그들의 역경은 궁극적으로 아버지의 사랑 어린 포용과 현명한 징계를 보여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잠언 3:11-12에서 아들들에게 한 “권면”(또는 “격려”; 그리스어 파라클레시스는 둘 다 포함함; 6:18 참조)은 신자들에게 주님께서 비록 고통스럽지만, 자신이 사랑하고 인정하며 합법적인 자녀로 환영하는 자들을 위해 징계를 예비해 두신다는 것을 확신시켜 줍니다. 잠언의 권면은 하나님의 징계에 대한 두 가지 부정적인 반응을 금합니다. (1) 징계에 대한 거만한 저항으로 “가볍게” 여기는 것, (2) 지쳐서 아버지의 책망을 개인적인 거부로 해석하는 것(히브리서 12:5).잠언 3장 11-12절은 주님께서 사랑하고 인정하며 합법적인 자녀로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는 비록 고통스럽더라도 징계를 예비해 두신다는 것을 믿는 자들에게 확신시켜 줍니다. 잠언의 권면은 하나님의 징계에 대한 두 가지 부정적인 반응을 금합니다. (1) 징계에 대한 거만하고 거만하게 저항하며 징계를 “가볍게” 여기는 것, (2) 지쳐서 아버지의 책망을 개인적인 거부로 해석하는 것( 히브리서 12:5 ).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부유한 남자들은 합법적인 상속자를 낳기 위해 한 아내와 결혼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기생이나 노예 등 다른 여자들과도 관계를 가졌습니다. 그러한 불법적인 결합으로 태어난 사생아는 방탕한 행동이 아버지의 명예나 재산을 위태롭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징계받지 못했습니다”(12:8). 반면에 합법적인 아들과 상속자는 가문의 이름을 물려받았고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을 것이기 때문에 엄격한 규율(노예 제도와 유사, 갈 4:1-2 참조)을 받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자들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징계, 심지어 죄를 저항하고 믿음을 굳게 지킨다는 이유로 받는 고난의 형태조차도 “하나님이 너희를 아들로 대하신다”(12:7)는 증거입니다.갈 4:1-2 ) 그는 가문의 이름을 이어받았고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믿는 자들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징계는, 심지어 죄를 물리치고 믿음을 굳게 지킨 것에 대한 고난의 형태로도, “하나님이 너희를 아들로 대하신다”(갈 12:7)는 증거입니다.
저자는 인간 아버지의 훈계와 하나님의 훈계를 비교하고 대조함으로써, 아들들이 인간 아버지에 대해 갖는 본성적인 존경심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대한 그리스도인의 신뢰와 존경, 그리고 복종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야 한다는 요점을 확립 하고자 합니다(12:9-10). 세 가지 대조가 이 점을 강조합니다.
- 우리의 "육신의 아버지"(ESV)는 우리에게 육체적 생명을 준 "육신의 아버지"(그리스어로 tous tēs sarkos pateras )이고, 반면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적 생명을 준 "영의 아버지"입니다.
- 인간 아버지의 징계는 “잠시 동안”만 지속되지만,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의 삶 전체에 걸쳐 계속됩니다.
- 인간 아버지들은 최상의 상태에 있을 때 “자신들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대로” 아들을 징계했습니다. 그들의 동기는 진실했을지 모르지만, 지혜는 부족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틀림없이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곧 우리가 그분의 거룩함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저자는 “모든 징계가 그 순간에는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12:2-3)에게 고정할 뿐만 아니라, 현재의 고난이 “의의 평강의 열매”(12:11)를 맺을 미래를 향해도 고정 하라고 권고합니다. 아버지의 징계 목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11:1, 26, 35)을 깨닫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끈기 있는 믿음을 표현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힘겨운 싸움에서 지쳐 뒤로 물러설 위험에 처할 때, “시험을 받으시고” 그 너머에 있는 기쁨을 위해 십자가를 참으신 자비롭고 신실하신 대제사장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돕기 위해 준비되어 계십니다(2:17-18).
우리의 천상의 기쁨의 예배는 시내산의 불 같은 공포를 능가합니다(12:12-29)
축 늘어진 손, 약한 무릎, 탈구의 위험에 처한 절름발 등, 더욱 운동적인 이미지들은 지속적인 믿음을 유지하는 것이 공동체의 책임 이라는 주제를 다시금 부각합니다 (3:12-14; 4:1; 10:24-25 참조).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상처 입은 자들과 흔들리는 자들을 격려해야 합니다(12:12-13). 우리는 함께 평화와 거룩함을 추구해야 합니다(12:14). 교회 지도자들은 주님께 책임을 져야 하는 자로서 “너희 영혼을 지키라”(13:17)고 했지만, 여기서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얻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위태롭게 하는 “쓴 뿌리”가 되고(12:15), 에서의 즉각적인 만족에 집착하고 하나님의 장기적인 약속을 경멸하는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12:16-17).
12:12-16 다친 팔다리에 대한 언급(12:12-13)은 이사야의 예언을 암시하는데, 그 예언에서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연약한 무릎을 굳건하게 하라”는 권고는 곧바로 설명됩니다. “ 마음이 불안한 자에게 이르기를 , 강건하라, 두려워하지 말라!”(사 35:3-5). 잠언 4:25-27을 연상시키듯, 다친 관절을 고치는 데 도움이 되는 “곧은 길”은 목표,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도성으로 곧장 이어지는 평탄한 길입니다(히 13:14). 반대와 사회적 거부로 인해, 초기 청중 중 일부는 환멸에 빠지고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을 잃게 된 것 같습니다(4:1; 6:4-8; 10:24-25, 39; 12:15). 이러한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듣는 사람은 “매일 서로 권면(격려)해야” 합니다(3:13; 10:25).영어: 사 35:3-5 ). 잠언 4:25-27 과 비슷하게 , 다친 관절을 고치는 데 도움이 되는 "곧은 길"은 목표,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도성으로 곧장 이끄는 평탄한 길입니다( 히 13:14 ). 반대와 사회적 거부로 인해 초기 청중 중 일부는 환멸에 빠지고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을 잃는 유혹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4:1; 6:4-8; 10:24-25, 39; 12:15). 이러한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청중은 "매일 서로 권면(격려)해야 합니다"(3:13; 10:25).
긍정적으로, 이러한 상호 지원은 "모든 사람과 평화하고 거룩함을 위하여 노력하는"(그리스어로 diōkō , "추구") 형태를 취할 것입니다 (12:14).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아들들을 고통스럽게 징계하시면서 "의의 평화로운 열매"(12:11)를 맺으시므로, 교회 안의 형제자매들과의 우리의 연합과 평화는 현재에 열심히 추구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평화의 매는 줄로 성령의 일치를 간절히 지키라"(그리스어로 spoudazō, "고생하고 모든 힘을 다하라")고 촉구했습니다(엡 4:3). 그리스도의 백성 사이의 평화로운 연합은 그분의 주권적인 영에 의해 창조되지만, 또한 겸손, 온유, 오래 참음, 관용하는 사랑에 대한 우리의 헌신을 요구합니다(엡 4:2). 우리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거룩함에 참여하도록", 즉 그분의 성품의 순수함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징계하십니다(히 12:10). 그러나 12:14에서 생각하는 "거룩함"( 하기아스모스 )은 그리스도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희생에 대한 지속적인 신뢰에 초점을 맞춥니다.히브리서는 동족 동사 하기아조 (ESV, "거룩하게 하다")를 사용하여 예수님의 단번에 이루어진 죽음의 더러움을 제거하는 효과를 설명합니다(2:11; 10:10, 29; 13:12; 9:13-14 참조).우리를 단번에 "온전하게" 하는 것은 우리를 대신한 그리스도의 희생입니다(10:14).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서 볼 수 있습니다.이 "거룩함", 즉 하나님의 임재 안에 서기 위해 헌신한 자로서 이 지위를 추구하려면 우리는 우리의 고백을 굳게 붙잡아 야 하고 (4:14; 10:23) 하나님의 아들과 그의 거룩하게 하는 피에서 떨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6:6; 10:29).엡 4:3 ). 그리스도의 백성 사이의 평화로운 연합은 그분의 주권적인 성령에 의해 만들어지지만, 또한 겸손, 온유, 오래 참음, 그리고 관용하는 사랑에 대한 우리의 헌신을 요구합니다( 엡 4:2 ). 우리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거룩하심에 참여하도록”, 즉 그분의 성품의 순수함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히 12:10 ).
12:15-17 우리가 경계해야 할 위험, 곧 인내하지 못하는 것(ESV “see to it,” 그리스어 episkopeō, “be on watch”)은 세 가지 방식으로 묘사됩니다. 믿는 자들은 (1) 누구든지 하나님 의 은혜를 얻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2) 쓴뿌리가 돋아나는 일이 없도록, (3) 누구든지 에서처럼 부도덕하거나 속된 사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불신앙으로 인해 하나님의 안식에 “이르지 못한”(4:1; 3:12) 불신앙의 광야 세대를 본받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심은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에도 해를 끼칩니다.불신의 씨앗이 완전한 배교로 자라는 사람은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경고한 "쓴 뿌리"와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족속이나 지파의 마음이 오늘날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 저 민족들의 신들을 섬기러 가는 자가 없도록 조심하라. 너희 중에 독이 있고 쓴 열매를 맺는 뿌리가 없도록 조심하라..." (신명기 29:18) 그리스도에게서 돌아서서 옛 언약의 희생 제도로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새롭고 산 길"을 멸시하는 것입니다(신 10:19-20). 그러한 반역은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불신을 퍼뜨리고 다른 예수님 추종자들을 더럽힙니다.신명기 29:18 ) 그리스도에게서 돌아서서 옛 언약의 제사 제도로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새롭고 산 길”을 무시하는 것입니다(신명기 10:19-20). 이러한 반역은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불신을 퍼뜨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다른 사람들을 더럽힙니다.
반대되는 태도는 에서의 태도입니다. 그는 먼 미래 에 약속하신 상속보다 육체적 욕망의 즉각적인 만족을 더 좋아했습니다 (창세기 25:29-34). 모세는 에서의 동기를 간결하게 요약합니다. "이렇게 에서는 장자권을 경멸했습니다"(창세기 25:34). 창세기 27장은 에서가 어머니와 형 야곱의 음모로 인해 장자로서 기대했던 축복을 잃었음을 보여줍니다. 야곱은 칭찬받을 만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장자권과 축복을 모두 얻으려는 그의 결심은 하나님의 장기적인 약속에 대한 선견지명을 보여주었습니다(히브리서 11:13).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닫는 그 믿음은 야곱을 에서와 구별했습니다. 에서가 육욕에 눈이 멀어 자신을 부지런히 찾는 자에게 상을 주시는 하나님의 실체를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11:1, 6). 에서가 간구했지만 얻지 못했던 회개(ESV, “회개할 기회”)는 아마도 아버지 이삭이 야곱에게 “잘못된” 축복을 되돌려 주고 장자의 축복을 에서에게 돌려달라고 눈물 흘리며 간청했던 것을 가리킬 것입니다. 이삭은 이 간청을 거절했습니다(창 27:33-38). 하지만 아마도 에서 자신은 자신의 관능적이고 믿음 없는 삶을 회개할 수 있는 지점을 넘어섰을 것입니다. 에서는 한때 신앙 공동체 안에서 삶을 경험했지만, 결국 떨어져 나가 그리스도를 돌이킬 수 없이 부인하는 자들과 같았습니다(히 6:4-8).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서로 격려하는 것은 지속적인 신앙에 필수적입니다.창세기 25:29-34 ). 모세는 에서의 동기를 간결하게 요약했습니다. "이와 같이 에서는 장자권을 멸시하였다"( 창세기 25:34 ). 창세기 27장은 에서 가 어머니와 형 야곱의 음모로 인해 맏아들로서 기대했던 축복을 잃었음을 보여줍니다. 야곱은 칭찬받을 만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장자권과 축복을 모두 얻으려는 그의 결심은 하나님의 장기적인 약속에 대한 선견지명을 보여주었습니다( 히브리서 11:13 ).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닫는 그 믿음은 야곱을 에서와 구별해 주었습니다. 에서가 육욕에 눈이 멀어 부지런히 찾는 자에게 상을 주시는 하나님의 실체를 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11:1, 6). 에서가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던 회개(ESV, "회개할 기회")는 아마도 그의 아버지에게 눈물을 흘리며 간청한 것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창세기 27:33-38 ). 하지만 아마도 히브리서 6:4-8에서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서로 격려하는 것은 지속적인 믿음을 갖는 데 필수적입니다.
12장 18-29절에서 저자는 우리에게 연약한 신자들을 강하게 하고 다른 사람들의 영적 건강을 해치는 자들로부터 우리의 교제를 보호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생생한 그림을 제시합니다("For"). 우리는 하늘 성소에 들어가 기쁜 예배에 참여하는 특권을 누리고 있는데, 이 두 가지 모두 모세가 율법을 받았던 시내산의 공포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12:18-21 만질 수 있는 산, 시내산에 대한 묘사는 모세의 책에 나오는 여러 본문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시내산의 "타오르는 불과 어둠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 소리와 음성"(신명기 4:11-12; 출애굽기 19:16-19)은 이스라엘을 언약 관계로 부르시기 위해 산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불타는 거룩함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에 큰 두려움을 심어 주어 주님께 직접 말씀하지 마시고 모세를 통해 그분의 말씀을 전해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출애굽기 20:18-21).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은 사람과 짐승이 산에 닿는 것조차 금지하셨는데, 그럴 경우 죽음의 형벌을 받게 됩니다(출애굽기 19:12-13, 20-23). 모세 자신도 주께서 금송아지를 우상화하여 숭배한 그의 백성을 멸망시키실 것을 두려워하여 떨었습니다(신명기 9:18-19; 출애굽기 24장; 32장 참조).신명기 4:11-12 ; 출애굽기 19:16-19 )는 이스라엘을 언약 관계로 부르기 위해 산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불타는 거룩함을 보여주었습니다.하나님의 음성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에 공포를 심어 그들이 주님께 직접 말씀하지 마시고 모세를 통해 말씀을 전달해 주시기를 간청했습니다( 출애굽기 20:18-21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은 죽음의 형벌을 내리시며 사람과 짐승이 산에 닿는 것조차 금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9:12-13, 20-23 ).심지어 모세 자신도 주께서 금송아지를 우상화하여 숭배한 백성을 멸망시키실 것을 두려워 떨었습니다( 신명기 9:18-19 ; 출애굽기 24장, 32장 참조 ).
12:22-24 시내산에서 일어난 무시무시한 현상은 하나님의 위험한 거룩함을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장래 반역을 예고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세운 언약을 어길 것이요,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도다 ”(렘 31:31-32; 히 8:8)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반역은 결국 유배로 이어졌습니다.예레미야 31:31-32 ; 히 8:8 ). 그들의 반역은 결국 유배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산산이 조각난 옛 언약과 동일시되는 그 무서운 산은 더 이상 우리의 예배 장소가 아닙니다.그리스도의 희생이 하나님의 하늘 성소로 들어가는 "새롭고 산 길"을 우리에게 열어주었기 때문입니다(10:19-22).죄책감에 사로잡혀 하나님께 나아가는 대신, 우리는 이제 믿음으로 하나님의 참 성소인 "시온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12:22)에 들어갑니다.거기서 우리는 천사들과 온전해진 성도들이 "새 언약의 중보자"(12:22-24)이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드리는 기쁜 예배에 참여합니다.히브리서는 이미 아브라함과 모든 족장들이 바랐던 "기초가 있는 성읍"(11:10, 16)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새 언약의 신자들도 장차 올 영원한 성읍을 기다립니다(13:14). 요한은 환상에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계 21:2) 보았는데, 그 안에는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이 가득했습니다(계 21:10-23). 하지만 우리가 그 영원한 도성에 이르는 것은 단지 미래적인 것만이 아니라 현재적인 것입니다. “너희는 …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에 이르렀느니라 .” 믿음으로 우리는 예배를 통해 이미 하늘에서 계속되는 축제에 참여합니다.계 21:2 ),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계 21:10-23 ). 그러나 우리가 그 영원한 도성에 들어가는 것은 단지 미래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가능합니다.
우리가 이 하늘의 “축제 모임”에 들어갈 때, 우리는 “수많은 천사들”(12:22)과 함께하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의 승천 때 내리신 명령, “하나님의 모든 천사는 그에게 경배하라”(히 1:6)에 열렬히 순종합니다. 이 회중은 또한 “하늘에 기록된 맏아들의 모임”, 곧 “온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들”(12:23)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지만 아직 그들 자신의 생애에서 온전해지지 않은 고대 신자들입니다(11:39-40). 이제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그들은 우리 모두가 그랬듯이 온전해지고 제사장으로 성별되었습니다(10:14). 믿음으로 하나님의 유일하신 맏아들, 그의 탁월한 상속자와 연합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이 사람들(10:38)은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시는 아들의 특권적인 “맏아들” 지위를 공유합니다(2:11-12; 롬 8:29 참조). 그들은 “하늘에 등록”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름이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계 21:27; 눅 10:20; 빌 4:3; 출 32:32-33; 다니엘 12:1 참조).히브리서 1:6 ). 이 회중은 또한 “하늘에 등록된 맏아들의 회중” 곧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12:23)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지만 아직 그들 자신의 생애에서 온전해지지 않은 고대 신자들입니다(11:39-40). 이제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그들은 우리 모두가 그랬듯이 제사장으로서 온전해지고 성별되었습니다(10:14). 믿음으로 하나님의 것과 연합되었습니다( 롬 8:29 ). 그들은 “하늘에 등록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름이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계 21:27 ; 누가복음 10:20 ; 빌립보서 4:3 ; 출 32:32-33 참조 ; 단 12:1 ).
이 천사와 인간 숭배자들의 예배의 초점은 물론 “만유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12:23-24)입니다.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적으로 죽으심으로써 시작된 그 새 언약(9:14-15)은 깨진 시내산 언약을 계승하여 “더 나은 약속들”(8:6-13)을 확보합니다. 아벨의 피가 자신을 죽인 살인자를 향해 부르짖으며 정의로운 보복을 요구한 반면(창 4:10), 예수님의 피는 “더 나은 말씀을 하며” 죄인들에게 자비를 호소합니다. 그리고 심판자이신 그의 아버지는 그의 간청을 기꺼이 들어주십니다(히 7:23-24; 롬 8:33-34 참조).(창세기 4:10 ) 예수님의 피는 “더 나은 말씀을 하여” 죄지은 자에게 자비를 호소합니다. 그리고 심판자이신 그의 아버지는 기꺼이 그의 호소를 들어주십니다( 히브리서 7:23-24 ; 로마서 8:33-34 참조 ).
12:25-29 시내산의 공포와 하늘의 기쁨의 대조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감사와 경건한 경외심으로 그분을 경배하라고 요구합니다. 우리는 시내산에서 천사들이 전한 율법을 어길 때 어떤 형벌을 받게 되는지 배웠습니다. 그리고 아들의 우월성을 고려할 때, 그분의 구원 선포를 무시하는 자들은 어떤 형벌도 피할 수 없습니다 (2:1-4). 여기서도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땅에서 말씀하신 것과 현재 하늘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대조하여 같은 요점을 제시합니다 . 시내산에서 주님의 음성이 산을 “심히 진동하게” 했고, 이스라엘 백성은 두려움에 떨며 물러갔습니다(출 19:18; 20:18-19). 이제 새 언약의 신자들은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고(히 8:1), 성령으로 능력을 받은 교회 지도자들을 통해 말씀을 전하십니다(2:3-4; 13:7).출애굽기 19:18; 20:18-19 ). 이제 새 언약의 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신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히브리서 8:1 ), 성령으로 능력을 받은 교회 지도자들을 통해 말씀을 전하십니다(히브리서 2:3-4; 13:7).
하나님의 약속대로(학 2:6), 언젠가 하나님의 전능하신 음성이 “땅만 진동할 뿐 아니라 하늘도 진동할” 것이며, “멸망하고” “옷과 같이 낡아질”(히 1:10-12, 시 102:25-27 인용) 온 우주를 무너뜨릴 것입니다. 그 미래의 우주적 대격변은 모세가 말했듯이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신 4:34; 히 12:29)이신 우리 하나님의 거룩함과 공의를 드러낼 것입니다. 그분의 위압적이고 위험한 순결함은 우리가 “경건함과 두려움으로”(12:28) 그분을 경배할 것을 요구합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이미 이 덧없는 우주를 초월할 “흔들리지 않을 나라”를 받고 있습니다(12:27-28). 이처럼 넘치는 은혜는 넘치는 감사를 요구합니다. ESV의 "감사하자"는 그리스어 에코멘 카린(echōmen charin)을 반영하는데 , 이는 (아마도) "감사하자" 또는 (아마도) "은혜를 베풀자"를 의미합니다. 이는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표현한 것인데, 히브리서의 다른 부분에서 카리스(charis)가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2:9; 4:16; 10:29; 12:15; 13:2, 25).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는 그분의 자비에 대한 감사하는 경이로움과 그분의 위엄에 걸맞은 경건한 경외심을 조화롭게 결합합니다.학개서 2:6 ), 언젠가 하나님의 전능하신 음성이 “땅만 진동할 뿐 아니라 하늘도 진동할 것”이며, “멸망하고” “옷과 같이 낡아질” 온 우주를 해체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1:10-12 , 시 102:25-27 인용 ). 그 미래의 우주적 대격변은 모세가 말했듯이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신명기 4:34 ; 히브리서 12:29 ) 우리 하나님의 거룩함과 공의를 드러낼 것입니다. 그분의 무섭고 위험한 순수함은 우리가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그분을 경배할 것을 요구합니다(12:28). 반면에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이미 이 덧없는 우주를 초월할 “흔들리지 않을 왕국”을 받고 있습니다(12:27-28). 그러한 압도적인 은혜는 넘치는 감사를 요구합니다. ESV의 “감사합시다”는 그리스어를 반영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에 예배와 사랑의 봉사, 감사하는 찬양으로 응답하라(13:1-25)
히브리서는 설교에서 서신으로 문체가 전환되며, 신약 성경의 다른 서신들에서 볼 수 있는 간결한 명령, 회중 지도력에 대한 지시, 기도 요청, 여행 계획, 개인적인 인사, 그리고 두 번의 축복으로 끝맺습니다. 윤리적, 신학적, 목회적, 그리고 개인적인 주제 등 다양한 주제들이 빠르게 연이어 언급됩니다. 서두에 나오는 세 가지 명령은 동료 그리스도인에 대한 사랑에 초점을 맞춥니다(13:1-3). 그다음은 부부의 순결과 재정적 만족에 대한 지침입니다(13:4-6). 과거의 지도자들을 기억하고 본받아야 하며, 우리의 마음은 변치 않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안정되어야 합니다(13:7-8). 옛 언약의 희생 제도로 돌아가지 말라는 마지막 경고는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위해 확보해 주신 더 큰 축복에 대한 호소로 뒷받침됩니다(13:9-14). 이러한 은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를 이끌어냅니다(13:15-16). 회중은 하나님께 책임을 져야 하는 현 지도자들에게 복종해야 합니다(13:17). 저자는 기도를 요청하는데, 특히 회중을 다시 방문하고 싶다는 소망에 대해 기도합니다(13:18-19). 첫 번째 축복 기도는 평화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그분의 백성이 그분의 기쁨을 위해 “그분의 뜻을 행하도록” 준비시켜 주시기를 간구합니다(13:20-21). 회중은 이 “권면의 말씀”(13:22)을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야 합니다. 저자는 여행 계획으로 돌아가면서 디모데가 자신과 동행할 수 있다고 언급합니다(13:23). 마지막 축복 기도 전에 서로 인사를 나눕니다(13:24-25).
13:1-3 “형제 사랑( 필라델피아 )을 계속하라”(13:1)는 우리의 의무는 믿음이 약하고 흔들리는 사람들을 격려하는 권면(3:12-13; 10:24-25; 12:12-17)에서 표현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원래 독자들은 과거와 현재에 성도들을 섬긴 것과(6:10) 공개적인 비난과 투옥을 견뎌내는 동료 신자들과 연대하려는 자세(10:32-34)로 칭찬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형제자매(아델포이)라고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으므로 ( 2:11), 영적인 형제자매로서 서로에 대한 분명한 사랑은 유지되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이 형제애는 여행하는 신자들에게 환대(헬라어로 필록세니아 , “나그네 사랑”)를 베풀고, 예수님 때문에 갇힌 사람들에게 구체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데서 실천되어야 합니다(행 13:2-3). 박해받는 환경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따른다고 주장하는 낯선 여행자들을 의심할 수 있고(행 9:26), 배신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집에 영접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에게 베푸신 환대를 자신에게 베푸는 것으로 여기셨습니다(마 10:40-42; 25:34-40). 게다가 아브라함과 롯이 깨달은 것처럼, 알아보지 못하는 손님이 천사일 수도 있습니다(창 18-19). 형제애는 또한 그리스도 때문에 쇠사슬에 묶이고 학대받는 사람들에게까지 확장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러한 고난을 겪는 사람들과 “함께 갇힌” 것과 “몸으로 해를 입는” 것과 같은 동일시를 할 때, 그것은 우리와 그리스도가 연합되어 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의 상처를 자기의 상처로 여기십니다(사도행전 9:4-5).사도행전 9:26 )에 따르면, 배신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집에 영접을 거부했습니다.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베푸는 환대를 자신에게 베푸는 환대로 여기셨습니다( 마태복음 10:40-42; 25:34-40 ).게다가 아브라함과 롯이 발견했듯이, 인정받지 못한 손님이 천사일 수도 있습니다( 창세기 18-19장 ).형제애는 또한 그리스도를 위해 쇠사슬에 묶이고 학대받는 사람들에게까지 확장되어야 합니다.우리가 그러한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갇힌" 것과 해를 입은 "몸 안에 있는" 것과 같이 동일시할 때, 그것은 자기 백성의 상처를 자기의 상처로 여기시는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합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9:4-5 ).
13:4-6 다음으로 성적 순결과 물질적 만족에 대한 권고는 병행어순으로 연결됩니다.
- 결혼은 소중하다(그리스어 ho gamos )
- 돈을 사랑하지 않는 생활 방식(그리스어 ho tropos )
우리는 에서의 육욕을 즉시 충족시키는 데 집착했던 것을 본받지 않도록 경고를 받았습니다(12:16-17). 이제 저자는 에서의 악덕과 정반대되는 미덕을 권장합니다. 결혼의 귀중한 가치(ESV "존중", 그리스어 timios )를 소중히 여기는 데 핵심은 배우자에게만 충실함으로써 성적 완성의 순수성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즉, 잠자리를 "더럽히지 않게" 유지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그러한 충실함에 대한 긍정적인 동기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결혼을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맺으신 언약을 반영하는 것으로 만듭니다(사 62:5; 예레미야 2:1-3; 겔 16장; 엡 5:31-32; 계 19:7-8; 21:2). 여기서 부부간의 충실성에 대한 근거는 부정적 입니다 . 다른 성경에서도 경고하듯이 “음행하는 자와 간음하는 자는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입니다(레위기 20:10-16, 말세 복음 2:10-16).(사 62:5 ; 렘 2:1-3 ; 겔 16 ; 엡 5:31-32 ; 계 19:7-8; 21:2 ). 여기서 부부간의 충실성에 대한 근거는 레 20:10-16 ; 말 2:10-16 입니다 .
13:5-6 “돈을 사랑하는 마음”은 쾌락이나 권력에 대한 갈증에서 비롯될 수 있지만, 여기서 그 동기는 돈이 약속하는 안정감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에 만족하게 하는 그 해독제(빌립보서 4:11-13; 디모데전서 6:6-10 참조)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주님께서는 야곱이 분노한 형 에서를 피해 도망칠 때(창세기 28:15)와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을 정복하는 벅찬 사명에 직면했을 때(여호수아 1:5) 이 약속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다른 표현으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우리를 교회에 보내실 때 이 약속을 하셨습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 28:20). 그분의 약속으로 인해 우리는 고대 시편 기자가 한 차분한 주장, 즉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시는 분 으로서 우리의 두려움을 진정시켜 주신다는 주장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시 118:6; 히 2:16-18; 4:16 참조).영어: 빌립보서 4:11-13 ; 디모데전서 6:6-10 )은 하나님의 약속, "내가 결코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고 버리지 아니하리라"입니다.주님은 야곱이 분노한 형 에서를 피해 도망칠 때( 창세기 28:15 ) 이 약속을 하셨고,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을 정복하는 어려운 임무에 직면했을 때( 여호수아 1:5 ) 이 약속을 하셨습니다.예수님은 또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우리를 보내실 때, 다른 말로 그의 교회에 이 약속을 하셨습니다. "내가 세상 끝날 때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마태복음 28:20 ).그분의 약속 때문에 우리는 고대 시편 기자가 주님의 임재가 우리의 것이 될 것이라는 차분한 주장을 되풀이할 수 있습니다 (시편 118:6 ; 히브리서 2:16-18; 4:16 참조 ).
13:7-8, 17 주님은 그의 영을 통해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지만, 교회 지도자(장로)들은 세대를 거쳐 변화합니다. 그리스도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믿음과 신실한 사역의 마라톤을 완주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본받아야 합니다(13:7). 그들이 세상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안전은 예수님께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13:8)는 진리에 근거합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아들은 우주가 쇠퇴하고 없어질 때에도 "동일하시다"(1:10-12, 시 102:25-27 인용). 그분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제사장으로 영원히 살아 계시며 사역하시므로(7:13-22), 그분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완전히 구원하실"(7:28) 수 있습니다. 그분의 변치 않는 인격과 능력, 그리고 임재는 모든 위협과 두려움으로부터 우리 마음을 안전하게 지켜줍니다. 더욱이, 교회의 현 지도자들은 순종하고 존중받아야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책임을 지고 교회의 안전을 보호할 사명을 지닌 파수꾼이기 때문입니다(13:17; 겔 3:17-21; 행 20:28-31). 이스라엘의 고대 제사장들처럼 새 언약 교회의 장로들도 세대를 거쳐 바뀌지만(히 7:23), 영원하신 하나님이시자 완전한 인간이신 우리 변함없는 그리스도께서는 신실하고 능력 있게 당신의 양들을 돌보십니다(13:20).시 102:25-27 ). 그는 멜기세덱의 반차에 따른 제사장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고 봉사하시므로(7:13-22), 그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7:28). 그의 변함없는 인격, 능력, 그리고 임재는 모든 위협과 두려움으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보호합니다. 더욱이 교회의 현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책임 하에 있는 파수꾼으로서 교회의 안전을 보호하라는 임무를 받았으므로 순종하고 존경해야 합니다(13:17; 겔 3:17-21 ; 행 20:28-31 ). 이스라엘의 고대 제사장들처럼 새 언약 교회의 장로들은 대대로 바뀌지만( 히 7:23 ), 영원한 하나님이시자 완전한 인간이신 우리의 변함없는 그리스도께서는 충실하고 강력하게 그의 양들을 돌보십니다(13:20).
13:9-14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한 과거와 현재의 지도자들은 기억되고 존경받으며 본받아야 합니다. “다양하고 이상한 가르침”이 신자들을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에서 멀어지게 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이러한 위험한 교리에 대해 “음식”, 즉 “장막” 제단에 바쳐진 제사의 고기를 먹는 것과 관련된 오류를 지적합니다. 다시 말해, 이 “이상한” 오류는 옛 언약의 제도(아론의 제사장 직분, 지상 성소, 동물 제사, 음식 규정, 외적인 정결 의식)로 돌아가는 것과 관련이 있으며, 이는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 고백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도들은 “개혁의 때가 오기까지”(9:8-10) 하나님에 의해 세워졌지만, “장차 올 좋은 것들의 그림자”(10:1)에 불과했으며, 예수님의 새 언약의 중재로 인해 쓸모없게 되었습니다(8:6, 13). 유대교 그리스도인들은 고대 제사 제도가 "다양하고 이상한 가르침"으로 묘사되는 것을 듣고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이미 유대교로 돌아가 예수님을 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과 그분의 거룩하게 하는 피를 멸시함으로써(6:6; 10:29)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지는 것"(3:12)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뜻을 완성하기 위해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기에, 아들의 제사가 율법의 의식을 대체했습니다(10:5-10). 돌아서는 것은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강하게 하는 “은혜”는 이스라엘이 화목제에서 남은 음식(레위기 3장)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자들만 양육하는 “제단”의 유익입니다(레위기 13:9-10).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형제자매를 위해 죽으셨습니다(레위기 2:9-11). 그리하여 새 언약에서 약속된 축복, 곧 하나님께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는 데 필요한 용서, 정결, 그리고 헌신을 부여하셨습니다(레위기 8:6, 10-12; 10:19-23).레위기 3장 )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자들만 양육하는 “제단”의 유익(레위기 13:9-10)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형제자매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레위기 2:9-11). 그리하여 새 언약에서 약속된 축복, 곧 하나님께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는 데 필요한 용서, 정결, 그리고 헌신(레위기 8:6, 10-12; 10:19-23)을 주셨습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양육하며,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수반합니다(13:11-14). 대제사장이 황소와 염소의 피를 지성소로 가져온 후, 속죄일에 그 시체는 이스라엘 진영 밖으로 옮겨져 의식적인 “부정함”의 영역(레 13:45-46)으로 불에 타 죽었습니다(레 16:27-28). 저자는 이러한 관습을 염두에 두고 “예수께서도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다”고 말하는데, 이는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장소로, 백성에게 버림받았음을 상징합니다(요 1:11; 19:14-17).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에는 모세가 애굽의 왕자로서의 특권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고난받는 백성과 동참했을 때처럼 “그(예수님)가 참으신 능욕”을 짊어지는 것이 포함됩니다(히 11:24-26). 당시 청중에게 “성전 밖”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성전과 회당에서 배제되고, 심지어 가족과 친구들에게서 배척당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요 12:42; 16:2; 행 18:5-7). 그러나 그러한 상실은 장차 올 영원한 도성(13:14), 족장들의 소망의 대상(11:10, 13-16), 그리고 천사들과 성도들의 경배와 찬양이 거행되는 하늘 성소(12:22-24)에서 우리가 누리는 환영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영어: 레 13:45-46 )—불에 타 없어질 것입니다( 레 16:27-28 ). 저자가 "예수께서도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다"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관습을 염두에 두고서였습니다.그분의 십자가 처형 장소는 그분의 백성에게 거부당했음을 상징합니다( 요 1:11; 19:14-17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에는 모세가 이집트 왕자로서의 특권을 포기하고 자신을 하나님의 고난받는 백성과 동일시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예수)가 참으신 능욕"을 짊어지는 것이 포함됩니다( 히 11:24-26 ). 원래 청중에게 "진영 밖"에서 예수님께 가는 것은 성전과 회당에서 배제되고 가족과 친구에게 거부당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요 12:42; 16:2 ; 사도행전 18:5-7 ). 그러나 그러한 손실은 우리가 다가올 영원한 도시(13:14)로 들어가는 환영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이곳은 족장들이 소망했던 곳(11:10, 13-16)이며 천사와 성도들이 경배하는 하늘 성소(12:22-24)입니다.
13:15-16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감사하는 예배를 이끌어 냅니다. 히브리서 12:28에서 우리는 “흔들리지 않을 나라”라는 그분의 선물이 우리를 감동시켜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께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리게” 해야 한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장차 올 영원한 도성(13:14)을 고대하며 “항상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리라”고, 선을 행하고 우리의 소유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제사를 드리라고 요구합니다. 예수님의 속죄의 죽음은 죄의 죄책감과 형벌을 처리하기 위해 반복되는 동물의 피 흘림이 필요 없게 하셨습니다(10:5-10, 17-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양의 피로 구속받고 “나라와 제사장”(계 5:8-10)으로 성별된 새 언약의 신자들은 이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다른 형태의 제사를 드립니다 . 우리의 "영적 제사"(벧전 2:5)는 이제 우리 몸을 "거룩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롬 12:1)로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우리의 응답에서 흘러나옵니다.옛 언약의 성소에서는 동물을 "찬양의 제사(또는 "감사", 그리스어 tēs thysias tēs aineseōs )"(레위기 7:12-15 참조)로 바쳤습니다.그러나 구약에서도 예배자들은 "하나님께 찬양의 제사(그리스어 thysian aineseōs )를 드리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즉, 서원을 지키고, 여호와를 부르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시편 50:14-15).왜냐하면 "감사(찬양)를 제사( thysia aineseōs ) 로 드리는 자는 나를 영광스럽게 하느니라"(시편 50:23)고 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히브리서도 우리의 “찬양의 제사”( thysian aineseōs )를 우리가 하는 말과 동일시합니다. “그의 이름을 인정하는(혹은 “고백하는”, 그리스어 homologeō ) 입술의 열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고백( homologia ) 의 대제사장 ”(히브리서 3:1)이시며, 우리는 그분을 신뢰한다는 고백을 굳게 잡으라는 권고를 받았습니다(4:14; 10:23). 우리의 예배 행위로서 고백은 단순한 언어적 동의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솔직한 환대입니다. 우리는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나누는( koinōnia ) 것을 “등한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한 제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때문입니다. “등한히 여기지” 말라는 권고는 13:2-3에서도 반복되는데, 거기서 우리는 “선을 행하는 것”이 집 없는 낯선 사람들을 환대하고 포로들과 교제하는 것을 수반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6:10; 10:33-34도 참조). 같은 맥락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감사의 편지를 쓰면서, 그들이 바울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자신의 자원을 "나누어"( koinōnia ) 주고자 하는 열망이 실제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받으실 만한 제사"라고 확신시켜 주었습니다(빌립보서 4:14-19).히브리서 12:28에서 우리는 "흔들리지 않을 나라"라는 그의 선물이 우리를 움직여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께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리게" 해야 한다는 것을 들었습니다.이제 다가올 영원한 도성에 대한 우리의 기대(13:14)는 우리에게 "찬미의 제사를 항상 하나님께 드리라"고 부르며, 선을 행하고 우리의 소유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제사도 부릅니다.예수님의 속죄의 죽음은 죄의 죄책감과 형벌을 처리하기 위해 반복되는 동물의 피 흘림이 전혀 필요 없게 했습니다(10:5-10, 17-18).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양의 피로 구속되고 "나라와 제사장"( 계 5:8-10 ) 으로 성별된 새 언약의 신자들은 이제 우리 몸을 "거룩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롬 12 :1) 로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우리의 응답에서 흘러나옵니다(벧전 2: 5 ). 옛 언약 성소에서는 동물을 "찬양의 제사"(또는 "감사", 그리스어 레위기 7:12-15 )로 바쳤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도 예배자들은 "하나님께 찬양의 제사를 드리라"(그리스어 시 50:14-15 )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감사(찬양)를 제사로 드리는 자"( 시편 50:23 )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히브리서도 우리의 "찬양의 제사"( 히브리서 3:1 )를 밝히고, 우리는 그분에 대한 신뢰의 고백을 굳게 잡으라는 권고를 받았습니다(히브리서 4:14; 10:23). 우리의 예배 행위로서 고백은 단순한 언어적 동의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솔직한 환호입니다. 우리는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나누는 것을 "등한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빌립보서 4:14-19 ).
13:18-19 제사장의 또 다른 특권은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것”(히 4:16)이며, 자신의 소원을 말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중보하는 것입니다(히 7:25). 그러므로 저자는 이제 청중에게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특히 하나님께서 가까운 장래에 자신이 직접 그들을 섬길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는 자신의 권고를 따라 그리스도의 피가 자신의 양심을 깨끗하게 할 것이라고 믿고, 자신의 고백을 굳게 지키며,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함으로써 평화와 거룩함을 추구해 왔기에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청중에게 서로 격려하기 위해 모이도록 권유했기에(히 10:24-25), 다시 직접 만나 예배하고 교화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히브리서 4:16 ) 자신의 기도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중보하는 일도 하라고 권면합니다(7:25). 그러므로 저자는 이제 청중에게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특히 하나님께서 가까운 장래에 자신이 직접 그들을 섬길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는 자신의 권고를 따라 그리스도의 피가 자신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리라 믿고, 자신의 고백을 굳게 지키며,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함으로써 평화와 거룩함을 추구해 왔기에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청중에게 서로 격려하기 위해 모이도록 권면했기에(10:24-25), 다시 직접 만나 예배하고 교화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3:20-21 첫 번째 축복은 이 장엄한 서신 설교의 영광스러운 주제들을 하나로 모읍니다. 성경의 축복은 단순히 다른 사람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전달되지만,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간구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연결 고리로 서도록 허락하신 사람들이 선포합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은 잘 알려진 축복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님의] 이름을 두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가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가 그의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수기 6:24-27). 구원 역사의 훨씬 이전, 살렘의 제사장이자 왕인 멜기세덱은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축복을 선언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늘과 땅의 주재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네 원수들을 네 손에 넘겨 주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하노라!" (창세기 14:19-20; 히브리서 7:6-7 참조).민수기 6:24-27 ). 구속 역사의 훨씬 이전 시대에 살렘의 제사장이자 왕이었던 멜기세덱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축복을 선포했습니다. “하늘과 땅의 주재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 원수를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창세기 14:19-20 ; 히브리서 7:6-7 참조 ) ).
“평화의 하나님”께서 살렘 왕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제사장-왕을 통해 그의 백성에게 복을 내리십니다. 멜기세덱은 “평화의 왕”(히 7:2)을 의미합니다.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를 거룩한 재판관과 화해시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해 줍니다(롬 5:1). 그분의 피는 “영원한 언약”(사 61:8)을 확고히 했습니다. 이 새 언약은 우리의 죄로 인해 결코 깨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그들의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시리라”(히 8:12; 10:17)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부활하실 때 “우리 주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을 때”, 그리스도의 희생이 우리의 모든 죄를 속죄했음을 공개적으로 증명하셨습니다(롬 4:25 참조).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즉위하신 것은 그분의 제사장 직분이 아론의 직분을 무한히 능가하는 이유를 보여줍니다(히 7:16-17, 23-25). 이사야 63장 11절은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는 모습을 묘사하며, 히브리서에서도 그 비유를 인용합니다. “…그는… 그들을 양 떼의 목자들 과 함께 바다에서 인도하여 내셨다 .” 그러나 우리 주 예수님은 “ 양들의 위대한 목자”이십니다. 모세와 아론보다 더 위대하신 분이십니다(히 3:1-6; 5:1-2; 7:11, 27-28). 그분의 죽음으로 양 떼를 구원하신 것은 애굽보다 훨씬 더 악한 원수, 곧 “죽음의 권세를 잡은 자 곧 마귀”(히 2:14-16)를 물리치신 것입니다.히브리서 7:2 ).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를 신성한 재판관과 화해시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했습니다( 롬 5:1 ). 그분의 피는 "영원한 언약"( 사 61:8 )을 확보했습니다. 이 새 언약은 우리의 죄로 인해 결코 깨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그들의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히 8:12; 10:17 ) 고 약속하셨습니다 . 하나님께서 부활하실 때 "우리 주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이끌어 내셨을 때", 그리스도의 희생이 우리의 모든 죄를 속죄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증명하셨습니다( 롬 4:25 참조 ). 예수님께서 끝없는 생명으로 부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것은 그분의 제사장 사역이 아론의 사역을 무한히 능가하는 이유를 보여줍니다( 히 7:16-17, 23-25 ). 이사야 63:11은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는 모습을 히브리서에서도 그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 . . 그는 . . .
하나님의 축복은 그분의 백성을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분의 영의 열망과 능력으로 “갖춰” 주어, 우리가 “그분의 뜻을 행하게”(수혜자들이 행했던 것처럼, 10:36)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우리의 동기와 애정, 관계, 말과 행동은 “그분의 보시기에 기쁘시게” 됩니다. “기쁘시게 하는”( euareston ) 형용사는 우리의 최고 목적이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라는 모티프로 돌아갑니다(12: 28-20 ; 13:16). 우리가 이 높고 거룩한 제사장 직분을 이룰 수 있게 하는 근본적인 변화는 우리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옵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세세토록 영광”을 받으실 분이라는 것은 당연합니다.
13:22-25 마지막 인사와 마무리 축복은 앞서 탐구했던 주제들을 적절한 결론으로 이끕니다. 저자는 자신의 저서를 “권면의 말씀”이라고 정의하는데, 이는 고대 유대인들이 설교를 지칭했던 용어입니다(사도행전 13:15 참조). 이 설명은 “권면”( 파라칼레오 )이라는 용어가 반복되는 것(3:13; 6:18; 10:25; 12:5; 13:19)과 설교 전반에 걸쳐 삽입된 권면적인 부분들(2:1-4; 3:7-4:13; 5:11-6:12; 10:19-31; 12:1-17, 25-29; 13:1-19)을 설명합니다. 더욱이, 히브리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속죄 사역에 대해 풍성한 신학적 설명을 제공하는 목적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예배와 인내, 그리고 서로 돕는 마음으로 응답하도록 권면하고 격려하는 것임을 시사합니다 . 이 설교가 "간결"한 이유는 부분적으로 저자가 청중들을 지치게 하지 않기 위해 (9:5; 11:32) 여러 부분을 간략하게 표현했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13:15 ). 이 설명은 “권면”의 반복을 설명합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목회 제자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소개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감옥에서 풀려났습니다. 그는 저자가 초대 교회를 섬기기 위해 돌아갈 때(13:23) 동행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디모데가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 그와 계속 소통함으로써 “갇힌 자들을 기억하라”는 자신의 지시를 실천했습니다. 디모데의 투옥은 “그리스도의 능욕”을 짊어지는 것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구약 성도들(11:24-26, 35-38)과 초대 청중(10:32-34; 12:3-4; 13:12-13)은 이를 경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너희 인도자들”과 “모든 성도”(13:24)에게 한 인사는 교회의 현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는 저자의 권면을 더욱 강화합니다(13:17). 서문에서 볼 수 있듯이, "이탈리아에서 온 이들" 즉 현재 이탈리아 밖에 거주하는 신자들의 인사는 이 서신 설교가 이탈리아, 아마도 로마에 있는 회중에게 전달되었음을 암시합니다.
마지막으로, 마무리 축도로 “ 은혜가 너희 모두에게 있을지어다”(13:25)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모두를 위해 “죽음을 맛 보시고” 죽음의 두려움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기 위해 인간이 되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였습니다(2:9, 14-15). 예수님은 우리의 자비롭고 신실하신 대제사장이시므로, 우리는 “ 은혜 의 보좌 앞에 나아가 ” “긍휼하심을 얻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4:14-16). 하나님의 은혜 는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을 향한 평생의 순례 여정 동안 소망 가운데 견디도록 우리 마음을 강하게 해줍니다(13:9, 14).
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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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및 권한
1. 존 칼빈, 사도 바울의 서신 (sic) 왜 여기서 "SIC"인가?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신과 성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 (윌리엄 B. 존스턴 저, 데이비드 W. 토런스, 토머스 F. 토런스 편)(그랜드래피즈: 에어드먼스, 1970), 1쪽.
2. 데니스 E. 존슨 저, "히브리서", 이안 M. 두기드, 제임스 M. 해밀턴 주니어, 제이 스클라 편집. ESV 해설 주석 , 12권(휘튼: 크로스웨이, 2018), 23쪽에서 발췌한 "표 1.1: 히브리서의 주요 부분". 허가를 받아 사용함.
3. 그리스어는 ESV보다 대조를 더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 한편으로는 천사들에 관하여 (ESV에서는 생략된 그리스어 men 에 관하여) 그는 말합니다..." 그리고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어 de 에 관하여) 그는 말합니다..."
4. 반복되는 용어들(우리는 위대한 제사장, 하늘/성소, 예수, 굳게 붙잡음, 고백, 확신, 가까이 나아감)은 이 단락들을 연결하며, 히브리서 10장 19-25절이 4장 14-16절에서 소개된 제사장직, 언약, 성소, 희생 제사에 대한 긴 핵심 논의의 마무리를 표시함을 시사합니다. 10장 25절에 이어 배도에 대한 생생한 경고가 이어지고, 이어서 신실한 자들에게 확신을 주는 말씀(10장 26-35절)이 이어지며, 이는 다음 주제, 즉 인내하는 믿음을 통해 하늘 본향에 이르는 길(10장 36-12장 29절)로 이어지는 전환점 역할을 합니다.히브리서 10장 19-25절은 4장 14-16절에서 소개된 제사장직, 언약, 성소, 그리고 희생 제사에 대한 긴 핵심 논의의 결론을 나타냅니다. 10장 25절에 이어 배도에 대한 생생한 경고가 나오고, 이어서 신실한 자들에게 확신을 주는 말씀(10장 26-35절)이 나옵니다. 이는 다음 주제, 즉 인내하는 믿음을 통해 하늘 본향에 이르는 길(10장 36-12장 29절)로 이어지는 전환점입니다.
5. 히브리서에서 “온전하게 하다”(그리스어 teleio ō )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특히 예수님과 관련하여(2:10; 5:9; 7:28)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기 위해 성별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그리스어 구약성경(칠십인역 또는 “LXX”)에서 사용된 것을 반영합니다(출 29:9, 29, 35; 레 8:33).출 29:9, 29, 35 ; 레위기 8:33 ).
6. “씻음”을 뜻하는 그리스어는 밥티스모스(baptismos) 인데 , 이 단어는 9장 10절에서 모세 율법에 따른 피상적인 정결 의식을 묘사하기 위해 다시 등장합니다(9장 13절 참조). 신약성경에서는 다른 단어인 밥티스마 (baptisma )가 그리스도인의 세례를 가리킵니다.
7. FF 브루스, 히브리서 . NICNT, 개정판 (미시간주 그랜드래피즈: 에어드먼스, 1990), 80쪽.
8. 히브리서 7장 27절에서 “그가 이것을 한 번 행하셨다”는 것은 그분이 죄가 없으셨기 때문에 오직 자기 백성의 죄를 위한 제사를 의미할 뿐입니다.히브리서 7:27 “그는
9. 이 그리스어 단어는 사도행전 22장 28절에서 금전적 금액을 가리키는 데 사용됩니다. 신약성경 이외의 문헌에서는 담화의 "핵심 요점"이나 "요약"을 지칭합니다.사도행전 22장 28절에서 이 단어는 금전적 금액을 지칭합니다. 신약 이외의 문헌에서는 담화의 "핵심 요점"이나 "요약"을 지칭합니다.
10. 모세가 기록한 이 언약의 발효에는 이스라엘 백성과 제단 위에 피를 뿌린 일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11. “세상”은 히브리서 1:6과 2:5에서 “오게 될 세상”, 즉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속죄 제사를 드린 후 부활과 승천으로 들어가신 종말론적 영역을 가리키는 “ 오이코우 멘 에 ” 와는 다른 그리스어 단어(코스모스)를 반영 합니다.히브리서 1장 6절 과 2장 5절은 그리스도께서 부활과 승천으로 들어가신 종말론적 영역인 “다가올 세상”을 언급합니다.
12. 히브리어 성경에서 시편 40편 6절은 “당신께서 나를 위하여 귀를 파 주셨나이다”(ESV 각주 참조)라고 되어 있지만, 히브리서는 “당신께서 나를 위하여 몸을 예비하셨나이다”라고 번역한 그리스어 칠십인역(LXX)의 세 가지 주요 사본을 따릅니다.시편 40:6 절에는 “당신께서 나를 위하여 귀를 파 주셨나이다”라고 되어 있지만(ESV 각주 참조), 히브리서에서는 “당신께서 나를 위하여 몸을 예비하셨나이다”라고 되어 있는 그리스어 칠십인역(LXX)의 세 가지 주요 사본을 따릅니다.
13. 사형의 가혹함은 고발이 “두세 증인의 증거”로 입증되어야 함을 요구했습니다(히 10:28; 민 35:30; 신 17:1-7; 19:11-15). 이 요구 사항은 새 언약 아래 교회 규율 문제에도 적용됩니다(마 18:16; 딤전 5:19).히 10:28 ; 민 35:30 ; 신 17:1-7; 19:11-15 ). 이 요구 사항은 새 언약 하의 교회 징계 문제에도 적용됩니다( 마 18:16 ; 딤전 5:19 ).
14. 신약의 다른 곳에서도 '파르에 시아' 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담대함과 개방성을 표현합니다(행 4:13, 29; 고후 3:12; 7:4). 히브리서에서 ' 파르에 시아' ("확신", 3:6; 4:16; 10:19, 35)와 '플루에로포 리아' ("충만한 확신", 6:11; 10:22)는 예수님의 제사장적 중재를 통해 양심을 정결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엄중한 거룩함에 다가갈 때 두려움 없이 나아가는 것을 거의 동의어로 표현합니다.사도행전 4:13, 29 ; 고후 3:12; 7:4 ). 히브리서에서
15. 저자는 믿음을 통해 보이지 않는 실체가 고대 신자들에게 실제로 “보여졌다” 고 주장합니다 !
16. ESV의 “received commendation/commended”는 11:2, 4, 5, 39에 나오는 그리스어 동사 martyre ō를 나타냅니다.
17. 히브리서에서 에우아레스테 오 (euareste ō)를 사용한 것은 70인역 성경이 “하나님과 동행했다”(창 5:21, 24)라는 히브리어 은유를 의역한 것을 따른 것입니다. 하박국 2장 4절(히 10:38)을 인용할 때 동사 에우도케오 (eudokeō)는 기뻐하시는 주체인 하나님의 관점에서 신성한 기쁨을 묘사하는 반면, 에우아레스테오(euaresteō )는 상호 보완적인 관점을 제시합니다. 즉, 믿는 자(에녹)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립니다 (11:5-6).창 5:21, 24 ). 동사 하박국 2:4 ( 히 10:38 )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신성한 기쁨을 묘사합니다.
18. 그리스어 명사 gē 는 특정한 “땅”(11:9처럼)을 지칭할 수도 있고, 온 지구(1:10; 8:9; 12:25-26처럼)를 지칭할 수도 있습니다. 저자는 족장들이 약속의 땅에서 자신들이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것을 근거로, 그들이 가나안보다 훨씬 더 나은 도시와 고향, “더 나은 땅, 하늘 에 있는 땅”(11:16)을 “멀리서 보고 반겼다”고 추론합니다. 11:13에서 ESV의 “땅” 번역은 저자의 주장에 부합합니다.
19. 야곱은 하란에서 시아버지 라반을 위해 14년 동안 봉사하며 라반의 아내 레아(라반의 속임수로)와 라헬(야곱이 사랑한 라헬)을 얻었습니다(창세기 29:15-30). 그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상당 기간 살면서 라반의 가축을 돌보았습니다. 열한 번째 아들 요셉이 태어난 후에야 약속의 땅으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창세기 30:24; 31-33).창세기 29:15-30 ). 그는 메소포타미아에 계속 살면서 상당 기간 라반의 양 떼를 돌보았는데, 열한 번째 아들 요셉이 태어난 후에야 약속의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창세기 30:24; 31-33 ).
20. 히브리서 12장 28절에서 ESV는 그리스어 부사 euarest ōs를 나타내기 위해 “받아들일 만한”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히브리서 12:28 에서 ESV는 그리스어 부사를 표현하기 위해 "받아들일 수 있는"을 사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