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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 존슨 신약 히브리서 주석 및 해석 4

구약학과 신약학 자료들

by 코리안랍비 2025. 7. 3.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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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시내산보다 더 나은 새 언약을 중재하심(8:1-13)

8:1-6 히브리서의 이 중심점에서 저자는 “ 우리가 말하는 요점”( 케팔라이온 9 )을 제시하는데, 이는 설교 전체의 핵심 주제입니다(8:1). 이 단락은 4:14-7:28에서 방금 논의된 예수님의 더 높은 자격 (“대제사장”)을 이제 8:7-10:35에서 살펴볼 예수님의 더 높은 제사장 직분 과 연결합니다. 저자는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의 네 가지 측면을 소개하고, 이를 발전시켜 나아갑니다.

  • 앉으신 자세 : 우리의 대제사장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8:1). 1장 3절과 13절에서처럼, 저자는 시편 110편 1절을 암시합니다. 그리스도의 앉으신 자세는 (항상 서서 섬기는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과 대조적으로) 그분께서 “단번에”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우리의 용서와 정결함을 “영원히”(10:10-14) 이루기에 충분 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속죄 사역은 영원히 완성되었습니다.시편 110:1 . 그리스도의 앉으신 자세(항상 서서 섬기는 레위 제사장들과 대조적으로)는 그분께서 “한 번” 자신을 희생하신 것이
  • 하늘 성소 : 우리의 대제사장은 “하늘에 계신 위엄의 보좌 우편에” 계시므로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라 주께서 세우신 참 장막에서” 섬깁니다(8:1-2, 4-5).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이 섬겼던 지상 성소는 우리가 사는 우주의 시공간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하늘 궁전의 “모형과 그림자”에 불과했습니다. 시내산에서 모세는 하늘의 성소를 보고 지상 성막에 그 모형을 재현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출 25:40). 저자는 지상 성소의 설계와 가구를 살펴보겠지만(히 9:1-5), 그리스도께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을 통과하시고 하늘의 “성소에 단번에 들어가셨다”(9:11-12, 23-24)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 결과 우리도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10:19-22).출애굽기 25:40 ). 저자는 지상 성소의 구조와 가구를 살펴보겠지만( 히브리서 9:1-5 ), 그리스도께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을 통과하시고 하늘 성소에 “단번에 들어가셨다”(9:11-12, 23-24)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 결과 우리도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10:19-22) 되었습니다.
  • 온전케 하는 단번의 제사 : “모든 대제사장”이 죄를 속하기 위한 제사를 드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해 하나님의 하늘 성소에 들어가실 때 반드시 합당한 제사를 드리셨습니다(히브리서 8:3). 동물 제사는 외적인 정결만을 제공하고 끊임없는 반복을 요구했지만,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를 단번에 드리심으로써 예배자들의 양심을 단번에 정결케 하시고, 예배 안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도록 그들을 항상 “온전케” 하셨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설명합니다(히브리서 9:6-14; 10:1-18).
  • 더 나은 언약 : 이스라엘 백성이 깨뜨린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시작된 언약과는 대조적으로, 그리스도께서는 더 나은 언약, 곧 “더 나은 약속으로 세우신”(8:6) 새 언약을 중개하셨습니다. 히브리서 8장 8-12절에 전체가 인용되고, 10장 15-16절에 간략하게 다시 인용된 예레미야 31장 31-34절은 시내산 언약이 폐기되고 새롭고 더 나은 언약으로 대체될 것을 암시합니다(8:13). 이 예언은 새 언약의 더 나은 약속들, 곧 마음의 변화, 친밀한 접근, 그리고 죄 사함을 요약하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든 사람을 위해 확보하신 것입니다.예레미야 31장 31-34절은 히브리서 8장 8-12절 에 전문이 인용되고 , 10장 15-16절에도 간략하게 인용되는데, 이는 시내산 언약이 낡아지고 새롭고 더 나은 언약으로 대체될 것을 암시합니다(8:13). 이 예언은 새 언약의 더 나은 약속들, 곧 마음의 변화, 친밀한 접근, 그리고 죄 사함을 요약하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든 사람을 위해 확보하신 것입니다.

8:7-13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은 레위 제사장들의 직분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 그가 중재하는 새 언약이 모세가 시내산에서 중재한 언약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예레미야 31:31-34에 나오는 이 새롭고 더 나은 언약에 대한 약속은 시내산 언약이 “흠이 없지 아니하다”(8:6-7)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언약의 “흠”, 결함은 “그들”에게 있다. 곧 “내 언약 안에 거하지 아니한”(8:8-9)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다. 시편 95편에 나오는 하나님의 안식에 대한 약속이 “하나님의 안식”이 여호수아가 이룬 안식을 초월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과(4:8), 그리고 시편 110편에서 멜기세덱의 반차에 따라 영원히 살아 있는 제사장 왕을 선포한 것이 레위 제사장직의 부족함을 의미하는 것과(7:11), 따라서 예레미야 31장은 이스라엘의 끊임없는 반역으로 인해 모세를 통해 중재된 언약이 완전한 용서, 마음의 변화, 하나님과의 친밀함이라는 약속된 축복을 보장할 수 있는 새로운 언약으로 대체되어야 함을 암시합니다.예레미야 31:31-34은 시내산 언약이 “흠이 없지 아니하였느니라”(8:6-7)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그 언약의 “흠”, 결함은 “그들”, 곧 “내 언약 안에 거하지 아니한”(8:8-9)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었습니다. 시편 95편 에 나오는 하나님의 안식에 대한 약속 이 “하나님의 안식”이 여호수아가 이룬 안식을 초월함을 암시하는 것처럼(4:8), 그리고 시편 110편 에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사는 제사장 왕을 선포한 것이 레위 제사장직의 부족함을 암시하는 것처럼(7:11), 예레미야 31장은 이스라엘의 끊임없는 반역으로 인해 모세가 중재한 언약이 완전한 용서, 마음의 변화, 하나님과의 친밀함이라는 약속된 축복을 보장할 수 있는 새로운 언약으로 대체되어야 함을 암시합니다.

히브리서 8장 8-12절에 인용된 예레미야 31장 31-34절은 신약성경에서 가장 긴 구약 인용구입니다. "새 언약"에 대한 이 예언은 다른 신약성경 구절에서도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성만찬을 제정하신 내용(누가복음 22:20; 고린도전서 11:25)과 바울이 모세의 사역과 새 언약 사역자들의 사역을 대조한 내용(고린도후서 3:3-18)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6절에서 예레미야 31장 33절로 돌아가는 것은 이 예언적 구절이 이 부분 전체(8:7-10:18)의 맥락을 설정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저자는 성소(지상과 하늘, 9:1-11, 21-24), 희생 제사(9:12-14; 10:1-14), 언약의 시작 사건(9:15-20)을 대조합니다.히브리서 8장 8-12절 에 나오는 예레미야 31장 31-34절은 신약성경에서 가장 긴 구약 인용구입니다. 이 "새 언약"에 대한 예언은 다른 신약성경 구절에서도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성만찬을 제정하신 것( 누가복음 22장 20절 ; 고린도전서 11장 25절 )과 바울이 모세의 사역과 새 언약 사역자들의 사역을 대조한 것( 고린도후서 3장 3-18절 )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6절 에서 예레미야 31장 33 절로 돌아가는 것은 이 예언적 구절이 이 부분 전체(8:7-10:18)의 맥락을 설정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저자는 성소(지상과 하늘, 9:1-11, 21-24), 희생 제사(9:12-14; 10:1-14), 언약의 시작 사건(9:15-20)을 대조합니다.

저자가 새 언약의 “더 나은 약속들”(8:6)을 언급함으로써 예레미야 31장에서 인용한 이 약속들에 우리의 주의를 집중시킵니다. 주님과 그의 종 백성 사이의 상호 언약적 헌신이라는 포괄적인 약속, 즉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8:10)는 구약 성경 전체에 나타납니다(예: 출 29:45; 레 26:12; 렘 24:7; 겔 36:28; 37:23, 27; 스가랴 8:8). 이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목표, 즉 그의 변함없는 사랑이 그의 백성의 감사하는 충성과 기쁜 순종으로 충족될 것이라는 것을 표현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그분이 풍성하게 받으실 영광을 받으시고, 그의 백성은 그분이 관대하게 약속하신 축복을 받습니다.예레미야 31장 인용. 주님과 그의 종 백성 사이의 상호 언약적 헌신에 대한 포괄적인 약속인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8:10)는 구약 성경 전체에 나타납니다(예: 출 29:45 ; 레 26:12 ; 렘 24:7 ; 겔 36:28; 37:23, 27 ; 스가랴 8:8 ). 이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목표를 표현하며, 그의 변함없는 사랑이 그의 백성의 감사하는 충성과 기쁜 순종으로 충족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그분이 풍성하게 받아 마땅한 영광을 받으시고, 그의 백성은 그분이 관대하게 약속하신 축복을 받습니다.

 

예레미야 31장은 완벽한 언약의 교제에 대한 일반적인 약속의 세 가지 구체적인 측면을 분명히 설명합니다.예레미야 31장은 완벽한 언약의 교제에 대한 일반적인 약속의 세 가지 구체적인 측면을 분명히 설명합니다.

 

  • 마음과 정신의 깊은 정화 :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는 돌판에 계명을 기록하시고 모세에게 주시어 백성에게 전하게 하셨습니다(출 31:18; 34:1-29; 고후 3:3 참조).새 언약의 더 나은 약속은 "내가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리라 "(히 8:10)입니다.이것은 시내산에서 율법이 외부적으로 전달된 것과 새 언약을 특징짓는 내적 정화 사이의 대조를 의미합니다 .히브리서 9:9-14는 한편으로는 동물의 희생 피가 육체를 깨끗하게 하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양심을 "온전하게" 하고 깨끗하게 하는 효능을 통해 이러한 대조를 발전시킵니다.출애굽기 31:18; 34:1-29 ; 고후 3:3 참조 ). 새 언약의 더 나은 약속은 "내가 내 율법을 너희에게 두리라" (히 8:10 )입니다. 이것은 히브리서 9:9-14 에서 동물의 희생 피가 육체를 깨끗하게 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양심을 "온전하게" 하고 깨끗하게 하는 효능을 다른 한편으로 대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에 대한 친밀한 지식 : “…그들이 각각 자기 이웃을 가르치며 이르기를 ‘너희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가장 작은 자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 것임이니라 ”(히브리서 8:11). 히브리서 9:6-8은 고대 성소의 성소와 지성소에 대한 제한된 접근을 요약하면서, 이러한 제한이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열리지 아니하였느니라”(9:8)는 성령의 신호였다고 지적합니다. 이제 그분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므로,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이는 그가 우리를 위하여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니라”(10:19-20). 새 언약의 신자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우리의 영혼을 지켜주는 지도자들이 필요합니다(13:7, 17). 그러나 이제 우리 모두는 한 분 의 위대한 대제사장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10:21-22; 4:14-16 참조).히브리서 9장 6-8절은 고대 성소의 성소와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이 제한되었음을 요약하며, 이러한 제한이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열리지 않았다”(9:8)는 성령의 신호였다고 지적합니다. 이제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므로,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으니, 곧 그가 우리를 위해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을 따라”(10:19-20)라고 말합니다. 새 언약의 신자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우리의 영혼을 돌봐주는 지도자들이 필요합니다(13:7, 17). 그러나 이제 우리 모두는 …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 죄의 완전한 용서는 영원히 : 세 번째 약속인 "나는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8:12)는 히브리서 10:17에서 반복되고, 그 중요성은 "이것들의 사함이 있는 곳에는 다시 죄를 위한 제사가 없습니다"라는 추가적인 주석으로 강조됩니다.이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수많은 동물의 죽음으로도 할 수 없었던 것을 한 번에 이루셨다는 주장입니다.그분은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시고, 우리의 허물에서 구속을 제공하시고, "많은 사람의 죄를 지고" 죄를 없애시고, 믿는 자들을 거룩하게 하시고, 죄를 없애시고, 그리하여 "거룩하게 되는 자들을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습니다.이 새 언약의 세 번째 "더 나은 약속"은 첫 번째(양심의 깊은 정화)와 두 번째(모든 믿는 자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의 근원입니다.히브리서 10:17 에서 그 중요성은 "이런 것들의 사함이 있으면 다시 죄를 위한 제사가 없느니라"는 추가적인 주석으로 강조됩니다. 이러한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수많은 동물의 죽음으로도 할 수 없었던 것을 단 한 번 이루셨다는 주장입니다. 즉, 그분은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시고, 우리의 허물에서 구속을 제공하시고,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심으로써" 죄를 없애시고, 믿는 자들을 거룩하게 하시고, 죄를 없애시고, 그리하여 "거룩하게 되는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습니다." 새 언약의 이 세 번째 "더 나은 약속"은 첫 번째 약속(양심의 깊은 정화)과 두 번째 약속(모든 믿는 자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의 근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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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가 “다가올 날들”(31:31, 38)에 임할 새 언약을 선포할 때,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이 “낡고 낡아 없어질 것”(8:13)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더 나은 약속들로 이루어진 새 언약을 시작하셨으니, 쓸모없는 제사와 제사장 직분을 지녔던 옛 언약으로 돌아가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하늘 성소는 이스라엘의 지상 성소보다 더 뛰어납니다(9:1-10)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으신 언약의 핵심은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들을 그분의 임재 안으로 이끄시어 그들이 그분의 풍성한 은혜를 받고 감사하는 경배로 응답하도록 충성스러운 사랑의 언약 관계를 시작하십니다. 따라서 히브리서는 이제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중재하신 “첫 언약”에서 정하신 예배 장소와 규례를 탐구합니다(히브리서 9:1). 이를 통해 성막 자체의 설계와 규례가 하나님께 나아갈 더 나은 길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성령의 메시지를 전달했음을 보여줍니다.

 

저자는 옛 언약의 성막의 평면도와 가구를 간략하게 기술한 다음(9:2-5) 천막의 "첫 번째"(바깥쪽)와 "두 번째"(안쪽) 방에서 수행된 제사장들의 사역을 개략적으로 설명합니다(9:6-10). "첫 번째 구역"(그리스어 skēnē , "천막")인 성소에는 등잔대와 열두 개의 빵, "진설병"이 놓인 상이 있었습니다(9:2; 출 25:23-30 참조). 그것은 주변의 열린 뜰("두 번째 휘장"이 암시함, 9:3)과 커튼으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제단에서 도살하고 먹을 동물을 가져왔습니다(출 27:1-19). "두 번째 휘장" 뒤에는 지성소라고 불리는 구역( skēnē , "천막")이 있었습니다. 입구에는 “금향단”이 있었고, 그 안에는 금으로 덮이고 영광스러운 그룹들의 날개로 덮인 “은혜소”가 있는 언약궤가 있었습니다(출 9:4-5; 출 30:1-10; 25:10-22; 레 16:13 참조). 저자는 이 거룩한 기구에 대해 “자세히 말하지” 않습니다(출 9:5). 그의 관심은 각 구역/장막과 관련된 제사장 직무 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출애굽기 25:23-30 ).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제단에서 도살하고 먹을 동물들을 가져온 주변의 열린 뜰( 출애굽기 27:1-19 )과 휘장으로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두 번째 휘장" 뒤에는 그 부분이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30:1-10; 25:10-22 ; 레위기 16:13 ). 저자는 제사장의 직분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이 거룩한 기구에 대해 "자세히 말하지" 않았습니다(출애굽기 9:5).

일 년 내내 정기적으로 많은 제사장들이 첫 번째 구역/장막인 성소에 들어가 “의식적인 의무”(레 9:6)를 수행했습니다. 즉, 매일 등잔대를 정비하고 분향하며, 매주 진설병을 다시 채워 두는 것이었습니다(레 24:1-9; 출 27:20-21 참조). 두 번째 구역에는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속죄일에 혼자 들어갔습니다(레 9:7; 레 16장 참조). 성소에서 많은 제사장들이 하는 일상적인 임무와는 달리, 대제사장은 희생 제물의 피를 지성소로 가져가 자신과 백성의 죄를 위한 속죄를 구해야 했습니다. 제사장 사역자와 두 구역/장막과 관련된 그들의 사역 사이에 그려진 대조는 성경의 신성한 저자인 성령이 "첫 번째 장막"(바깥 방, 전체 지상 성소를 상징함 (히브리서 8:4-5; 9:11, 23-24 참조))이 여전히 기능하고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이 여전히 그곳에서 봉사하는 한 "성소에 들어가는 길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9:8)고 설명한 방식입니다. 저자가 "첫 번째"와 "두 번째"를 사용한 것은 훌륭하고 의도적입니다. 그는 성막의 두 방이 하나님께서 두 연속적인 시대 를 "상징적으로"(9:9) 설계하셨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 서로에 대한 공간적 관계는 한편으로는 대제사장만이 드물게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었던 고대 이스라엘의 "현 시대"와 다른 한편으로는 "현 시대" 사이의 시간적 관계를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반면에 그리스도께서 “이미 온 선한 일들의 대제사장”으로 나타나심으로써 이제 “개혁의 때”(9:10)가 밝아왔습니다(9:11).레위기 24:1-9 ; 출애굽기 27:20-21 ). 두 번째 구역으로 대제사장은 속죄일에 “일 년에 한 번” 혼자 들어갔습니다(레위기 9:7; 레위기 16장 참조 ). 성소에서 많은 제사장들의 일상적인 임무와 대조적으로 대제사장은 희생 제물의 피를 지성소로 가지고 들어가 자신과 백성의 죄를 위한 속죄를 구해야 합니다. 제사장 봉사자들과 두 구역/장막과 관련된 그들의 사역 사이에 대조되는 것은 성경의 신성한 저자인 성령께서 “첫 번째 장막”(바깥방, 상징)이 있는 한,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영원한 희생은 동물 희생 제물의 피를 능가하여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이끕니다(9:11-10:35)

이 부분은 언약의 시작(9:15-20), 성소 봉헌(9:21-23), 그리고 예배자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정결 의식(9:11-14; 9:24-10:18)에서 희생적 죽음의 역할을 탐구합니다. 모세 율법에 규정되어 레위 지파 제사장들이 집행했던 여러 동물 제사와,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제사, 그리고 하나님의 하늘 성소에서 자신의 피를 드리신 사건을 대조하여 논의합니다.

9:11-14 옛 언약의 성소에서 하나님의 임재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제한적이었다는 점(9:6-9)과 그곳에서 드리는 제사의 피상적인 성격(“먹고 마시고 여러 가지 씻는 예식, 몸을 위한 규정” [그리스어 sarx , “육체”])을 지적한 저자는 이러한 규정을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이루어진 좋은 것들”과 대조시킨다(9:11-14). 일 년에 한 번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만이 성막의 성소를 통과하여 지성소에 들어갔다. 그래서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더 크고 온전한 장막”(“하늘”, 4:14)을 통과하여 하늘의 지성소에 들어가셨고, 자신의 피를 가지고 오셨다(9:11-12). 예수님께서 들어가신 성소는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요,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설교가 기록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할 것처럼, 그리고 온 물질적인 하늘과 땅이 결국 멸망할 것처럼 파괴될 수 없습니다(1:11-12; 12:26-28 참조). 죄 많은 사람들을 위해 희생되신 그리스도의 피는 무한한 가치를 지니므로, 그분은 우리에게 “영원한 구속”을 확보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이제 우리 모두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가”(10:19-22) 하늘에 있는 “은혜의 보좌에 가까이 나아갈”(4:15-16) 수 있습니다.

새 언약이 옛 언약보다 우월하다는 것은 저자가 동물 희생을 통한 외적인 정결 이 "흠 없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양심을 얼마나 더 정결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께 나아가 섬기도록 정결하게 할 것인지를 보여준다는 추론을 뒷받침합니다(9:13-14). 육체의 더러움을 제거하기 위해 도살된 염소, 수소, 암소는 육체적으로 흠이 없어야 했습니다(레 4:3, 23, 28, 32; 민 19:2). 그들은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흠이 없고 "거룩하고 흠 없고 티가 없는"(히 7:23) 완전한 인간 삶을 사신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예시했으며 , 그 후 우리의 양심을 정결하게 하는 제사로 자신을 바쳤습니다.레위기 4:3, 23, 28, 32 ; 민수기 19:2 ). 그들은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예시했는데, 그분은 완전한 인간 삶을 사셨고( 히브리서 7:23 ), 그 후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제사로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9:15-20 이 논의는 그리스도의 희생과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옛 언약 아래 약속된 영원한 기업을 받기 위해서는, 그 율법을 어긴 죄에 대한 죽음의 속죄가 필요했습니다. 신명기 28장은 이스라엘과 맺으신 주님의 언약이 너무나 배타적이고 헌신적인 충성을 요구했기 때문에 오직 두 가지 결과만 가능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언약을 지키면 복을 상속받을 것이었고, 언약을 어기면 저주와 죽음을 내리실 것이었습니다. 고대 언약의 비준 의식에는 동물을 도살하는 것(창 15:8-21; 렘 34:8-20)과 피를 뿌리는 것(출 24:6-8)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는 불충실의 치명적인 결과를 상징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9장 16-17절에서 언급하는 의식입니다. 많은 번역이 이 구절에서 그리스어 diathēkē 에 대해 "covenant"에서 "will"(또는 "testament")로 바꾸고 , 18-20절에서는 다시 "covenant"로 바꿉니다. 그러나 더 나은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계약(diathēkē )이 있는 곳에는 계약자의 죽음을 가져와야 합니다 ( pheresthai ). 계약( diathēkē ) 은 시체 ( epi nekrois ) 위에 비준되기 때문입니다 . 계약자가 살아 있을 때는 결코 효력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계약이 동물의 피와 사체를 통해 비준되지 않는 한(계약자가 충성을 지키거나 죽음을 당하겠다는 약속을 상징함), 계약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계약에 대한 헌신(충성 또는 죽음)의 위험이 매우 높기 때문에 시나이산에서 모세가 중재한 "첫 번째 계약"은 피를 흘림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9:18). 죽임당한 동물의 “언약의 피”는 율법책에 뿌려졌는데, 이는 주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지키신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뿌려졌는데, 이는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죽음의 저주를 받게 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출 9:19-20, 출 24:3-8 요약). 이 피비린내 나는 언약 체결 의식이 상징하는 반역에 대한 저주는 그리스도께서 모세를 통해 중재된 첫 언약을 어긴 백성을 처리하시고 , 새 언약을 중재하여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기업”을 주시기 위해 죽으셔야 했던 이유입니다(출 9:15).신명기 28장은 이스라엘과 맺은 주님의 언약이 너무나 배타적이고 헌신적인 충성을 요구했기 때문에 두 가지 결과만 가능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의 언약을 지키면 축복을 상속받을 것이고, 그들이 언약을 어기면 저주와 죽음을 부과할 것입니다. 고대 언약의 비준 의식에는 동물을 도살하고( 창 15:8-21 ; 렘 34:8-20 ) 피를 뿌리는 것( 출 24:6-8 )이 포함되어 불충실의 치명적인 결과를 상징했습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9:16-17 에서 고려하는 의식입니다 . 많은 번역본이 그리스어 용어를 "covenant"에서 "will"(또는 "testament")로 바꿉니다. . 많은 번역본은 그리스어 용어인 출 24:3-8 . 이 피비린내 나는 언약 발효 의식이 상징하는 반역에 대한 저주가 그 이유입니다.

 

9:21-22 하나님의 백성의 죄악된 더러움은 너무나 만연하여, 사람의 손으로 만든 장막과 그 기구들은 희생 제사의 피로 정결하게 되어야 했습니다. 마치 백성 자신이 용서를 필요로 했던 것처럼, 용서는 오직 대속 제사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속죄일 예배는 성소의 정결  백성의 용서 사이의 연관성을 극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 대제사장은 법궤의 속죄소 위에 피를 뿌림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의 부정과 그들의 모든 허물과 죄를 위하여 성소를 위하여 속죄해야 합니다"(레위기 16:16). 모세에게 보여진 하나님의 최초의 성소인 하늘 자체는 "손으로 만들지 않은 더 완전한 장막"(레위기 9:11)이므로 인간의 죄성으로 더럽혀져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지상 성막의 내용물이 동물의 피를 통해 정결하게 되어야 했던 것처럼, “하늘에 있는 것들” 또한 더 나은 제사로 정결하게 되어야 한다고 담대하게 주장합니다(9:23). 그 “하늘에 있는 것들”은 하나님의 죄인들, 곧 “그분의 집”(3:6)이며 용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레위기 16:16 ).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여주신 최초의 성소인 하늘 자체는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닌 더 온전한 장막”(레위기 9:11)이므로 인간의 죄로 더럽혀지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지상 성막의 내용물이 동물의 피로 정결하게 되어야 했던 것처럼, “하늘에 있는 것들”도 더 나은 제사로 정결하게 되어야 한다고 담대하게 주장합니다(레위기 9:23). 그 “하늘에 있는 것들”은 하나님의 죄 많은 백성, 곧 “그분의 집”(히브리서 3:6)이며 용서가 필요한 백성이어야 합니다.

 

9:23-28 이제 논의는 성소 봉헌에서 매년 지성소에서 거행되는 중대한 사건, 곧 속죄일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대제사장은 홀로 “자기 피가 아닌 피”를 가지고 둘째 휘장을 통과하여 이스라엘의 용서를 위해 중보했습니다(레위기 16장 참조). 매년 거행되는 속죄 의식은 히브리서 10장 10절에도 계속 언급됩니다(9장 25절의 “매년”은 10장 1, 3절에 다시 등장합니다). 저자는 여러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 속죄 사역이 고대의 반복적인 의식보다 어떻게 더 우월한지를 보여줍니다.레위기 16장 ). 그것 히브리서 10장 10절 (9장 25절의 “매년”이 10장 1, 3절에 다시 등장함)이 그 예입니다. 저자는 여러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 속죄 사역이 고대의 반복적인 의식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들어가신 성소는 하나님의 참된 거처를 손으로 만든 지상의 복제품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은 “ 하늘 그 자체 ”에 들어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셨습니다”(9:25). 둘째, 아론계 대제사장들과는 달리, 그분은 “자신의 피가 아닌 피”를 가져오지 않으시고 “ 자신의 제사 ”를 드려 “죄를 없이 하셨습니다”(9:25-26). 셋째, 그분의 제사는 온전히 충분했기에, 예수님은 “자신을 여러 번 드려 ” 드릴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오히려 “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려 지셨습니다”(9:27-28). 고대 속죄일에 이스라엘 백성은 대제사장이 언약궤 위의 속죄소에 희생 제물의 피를 뿌려 자신의 사명을 완수한 후, 장막 지성소에서 나오기를 기다렸습니다(9:4-5; 레위기 16:15-16 참조). 마찬가지로, 이제 우리는 하늘로부터 “두 번째로 나타나” 우리의 대제사장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9:28). 그분은 우리에게 온전하고 최종적인 구원을 가져다주실 것입니다.이사야 53:12 (9:27-28). 고대 속죄일에 이스라엘 백성은 대제사장이 언약궤 위의 속죄소에 희생 제물의 피를 뿌려 자신의 사명을 완수한 후 장막 지성소에서 나오기를 기다렸습니다(9:4-5; 레위기 16:15-16 참조 ). 마찬가지로, 이제 우리는 하늘로부터 “두 번째 나타나” 우리의 온전하고 최종적인 구원을 가져다주실 우리의 대제사장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시기를 기다립니다(9:28).

10:1-10 저자는 이스라엘의 연례 속죄일 의식과 그리스도의 단번에 드려진 희생 제사의 대조를 더욱 심화시킵니다. 지상의 장막은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보여 주신 모형을 본떠 만들어졌기 때문에 궁극적인 하늘 성소의 “모형과 그림자”였습니다(8:5). 그 기구들 또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9:23-24)이었습니다. 사실, 모세 율법에 제정된 모든 의식은 “장차 올 좋은 것들의 그림자일 뿐, 참된 실체는 아니었습니다”(히 10:1). “그림자”와 “참된 실체”의 대조는 역사적(즉, 종말론적)입니다. 왜냐하면 “실체”는 미래에 “장차 올 좋은 것들”이며, 이제 그리스도께서 역사 속에 나타나심으로써 이미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9:11).히브리서 10:1 ). “그림자”와 “진짜 형상”의 대조는 역사적(즉 종말론적)입니다. 왜냐하면 “실체”는 미래에 “올 좋은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그림자”가 부족함은 속죄일 제사가 “해마다 계속적으로 드려졌다”(레 10:1-2)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황소의 피(대제사장 자신을 위해, 레 16:11-14)나 염소의 피(백성을 위해, 레 16:15-19)는 “죄의 의식”(히 10:3)을 없애거나 “죄를 없앨”(레 10:4) 수 없었습니다. 그것들은 결코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에 들어가도록 깨끗하게 하고 성별하여 온전하게 할”(레 10:1; 9:9 참조) 수 없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의 양심을 정결하게 할”(레 9:13-14) 수 있었습니다. 사실, 속죄일 제사를 매년 반복하는 것은 죄의 더러움을 제거하는 수단이 아니라 “ 해마다 죄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피투성이 동물 희생 제물은 예배자들의 죄, 곧 그들 자신의 죄와 하나님 자신의 죄를 기억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민 5:15). 이처럼 끊임없이 도살된 것은 율법에 의해 세워진 "그림자" 제도가 "다시는 그들의 죄를 기억 하지 아니 하리라 "(히 8:12; 10:17; 렘 31:34 인용)라는 새 언약의 약속을 결코 성취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습니다.레위기 16:11-14 )나 백성을 위한 염소의 제사( 레위기 16:15-19 )는 “죄의 의식”( 히브리서 10:3 )을 제거하거나 “죄를 없앨”(10:4)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결코 “가까이 오는 자들을”(10:1; 9:9 참조) “온전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의 양심을 정결하게 할”(9:13-14) 수 있었습니다. 사실, 속죄일 제사의 해마다 반복은 “ 5:15 "였습니다.이러한 끊임없는 도살은 율법에 의해 세워진 "그림자" 제도가 결코 새 언약의 약속을 성취할 수 없다는 신호였습니다. 히브리서 8:12; 10:17 ; 렘 31:34 인용 ).

히브리서는 10:5-7에서 시편 40:6-8을 아들이 율법의 무익한 동물 희생이 이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그리스도 자신의 몸을 최종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제물로 바침으로써 폐기되었음을 선포한 것으로 인용합니다(히 10:5-10). 이 시편의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여 "세상에 오셨을 때" 11 받아들인 사명을 표현합니다 .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 자신의 말씀은 사명에 대한 그의 헌신을 반영합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의 뜻은 아들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는 것이었습니다(요 6:38-40).시편 40편 6-8절은 율법의 효력 없는 동물 제사가 이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드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양심을 깨끗하게 하심으로써 폐지되었음을 선포하는 아들의 말씀입니다( 히 10:5-10 ). 이 시편의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요 6:38-40 ) 받아들이신 사명을 표현합니다.

 

저자는 시편 40편을 인용한 후, 이 성경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그리스도께서 드린 최후의 희생으로 동물 희생이 대체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 구절을 재구성합니다(10:8-10). 하나님의 싫어하심을 나타내는 두 가지 표현("원하지 아니하셨고"와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니")이 동물 희생을 묘사하는 네 가지 용어("희생 제사", "제물", 번제", "속죄제")와 마찬가지로 함께 나타납니다. 이러한 희생 제사는 "율법에 따라"(10:8) 드려졌지만, 많은 구약 성경 본문은 하나님께서 항상 순종하는 마음을 기뻐하시고 죽임을 당한 동물을 기뻐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분명히 밝힙니다(삼상 15:22; 시 50:12-16; 51:16-17; 사 1:11-17; 렘 7:22-23; 호 6:6; 미 6:6-8). 시편 40편의 흐름이 뚜렷하게 밝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구속 역사의 그 순간에 동물 희생을 "폐지"하기로 계획하셨고 ,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어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히 10:9)라고 선포하셨다는 것입니다. 시편에서 두 가지 핵심 단어인 “몸” 12절 과 “뜻”을 인용하며,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살과 피에 참여하신 것(2:14)이 십자가를 통해 자신의 몸을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라고 결론짓습니다. 예수님께서 “죄가 없으셨기”(4:15)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흠 없이 이루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의 “뜻”은 죄인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시는 아들의 특별한 사명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뜻”에 순종함으로써, “우리는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즉, 용서받고, 정결하게 되어 하나님의 임재에 들어가 은혜의 보좌에 나아갈 자격을 얻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10:10; 9:12-14, 26, 28; 10:14, 19-22 참조).시편 40편 에서 저자는 이 성경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그리스도께서 드린 최후의 희생으로 동물 희생을 대체할 것을 예언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문구를 재구성합니다(10:8-10). 하나님의 싫어하심을 나타내는 두 가지 표현(“원하지 아니하셨고”와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니”)이 동물 제사를 묘사하는 네 가지 용어(“제사”, “제물”, 번제”, “속죄제”)와 함께 나타납니다. 이러한 제사는 “율법에 따라”(10:8) 드려졌지만, 많은 구약 성경 본문은 하나님께서 항상 순종하는 마음을 기뻐하시고 죽임을 당한 동물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분명히 밝힙니다( 삼상 15:22 ; 시 50:12-16; 51:16-17 ; 사 1:11-17 ; 렘 7:22-23 ; 호 6:6 ; 미 6:6-8 ). 시편 40 편의 흐름은 무엇입니까 (히 10:9 ). 

10:11-14 반복되는 속죄일 제사뿐 아니라 매일 드리는 제사,  속죄제 와 속건제, 성소 뜰의 제단에서 죽여 불태워지는 수많은 제물들은 옛 언약의 제사장 직분과 제사 제도의 부족함을 드러냈습니다(10:11-14). 속죄일에 황소와 염소의 피를 드린 것처럼, 매일 드리는 이러한 동물의 희생은 죄의 죄책감을 없앨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희생을 드리는 제사장들은 “ 매일 서서 ” 반복적으로 희생을 드려야 했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시편 110편은 속죄 사명을 완수하고 하나님의 초대로 “ 하나님 우편에 앉으 신” 제사장 겸 왕을 소개합니다 . 이 위대한 대제사장의 앉으신 자세는 의미심장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분의 속죄를 위한 자기 희생의 사명이 완성 되었으며 , 더 이상 반복되거나 추가될 필요가 없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한 번의 제사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10:12-14).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생각, 소망, 말, 행동을 예수님의 죄 없으심에 일치시키는 주관적인 과정은 우리의 삶 내내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죄를 속죄하기 위한 그분의 자기 희생은 이미 객관적으로 우리를 "영원히" 온전하게 했습니다. 그분의 피로 깨끗해지고 성별된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갑니다(10:19-22).

 

10:15-18 그리스도의 속죄 희생과 그로 인한 양심의 깊은 정결에 대한 탐구를 마무리하기 위해, 이 부분을 소개하는 예레미야 31장(8:8-12)은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에게 새 언약의 더 나은 약속들을 보장해 주었다는 주장을 확정하기 위해 다시 돌아옵니다. 저자는 예레미야 31장 31-34절 전체를 다시 인용하는 대신, 두 가지 새 언약의 약속, 곧 마음과 생각의 정결함과 죄 사함을 제시합니다. 완전하고 영원한 용서에 근거한 이러한 깊은 정결함은 더 이상 죄를 위한 속죄의 필요성을 없애줍니다. "더 이상 죄를 위한 제사가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단번에 영원히 희생하신, 유일하고 완전히 순수한 대속자이신 그분만이 영원한 구원을 보장하고, 양심을 단번에 정결하게 하며(9:12, 14), 더 이상의 희생을 불필요하고 쓸모없게 만들 수 있습니다.이 구절을 소개한 예레미야 31 장(8:8-12)은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에게 새 언약의 더 나은 약속을 확보했다는 주장을 마무리하기 위해 돌아옵니다. 저자는 예레미야 31장 31-34 절 전체를 다시 인용하는 대신, 마음과 정신의 정결함과 죄 사함이라는 두 가지 새 언약의 약속을 인용합니다. 완전하고 영원한 용서에 근거한 이러한 깊은 정결함은 죄를 위한 더 이상의 속죄의 필요성을 무효화합니다. "더 이상 죄를 위한 제사가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한 번만 영원히 희생하신 것, 유일하고 완전히 순수한 대속자만이 영원한 구속을 확보하고 양심을 한 번만 영원히 깨끗하게 하며(9:12, 14) 더 이상의 희생을 불필요하고 쓸모없게 만들 수 있습니다.

10:19-25 예수님의 상위 제사장 직분은 우리가 확신에 찬 신뢰, 우리의 고백에 대한 끊임없는 충성, 그리고 서로 격려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응답을 요구합니다. 이 권면 부분은 예수님의 상위 제사장 직분(5:1-7:28)과 희생 제사(8:1-10:18)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에서 비롯되며, 그 논의를 시작한 “굳게 붙잡고” “가까이 나아가라”(4:14-16)는 권면을 반영합니다. 따라서 이 권면들은 “위대한 대제사장”(4:14; 10:21)이신 예수님의 속죄, 화해, 그리고 중보 사역에 대한 풍부한 설명을 감싸는 하나의 봉투(문학적인 포괄 )를 형성합니다. 그들은 (a) 우리의 고백을 유지하라는 부름 , (b) 확신을 가지고 ( parrēsia ) 하나님의 면전(“은혜의 보좌” 4:16; “성소에 들어가라” 10:19)에 들어가라는 부름, (c) 예수님의 상위 제사장직 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권고의 근거 (4:14; 10:19, 21)를 공유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사장 사역에 대한 탐구(5:1-10:18)는 히브리서 4:14-16에 없었던 추가적인 요소들을 이 결론적 적용에 도입했습니다. 그 서론적 권고는 우리의 약함과 유혹을 경험하신 분으로서 죄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동정심을 강조했습니다 (2:14-18 참조). 이제 초점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위해 이루신 하늘의 성소에 대한 접근 에 맞춰집니다 ("예수의 피로..." 그의 육체로" 10:19-20). 그분께서 친히 하늘을 통과하시고 휘장 뒤 지성소에 들어가 우리의 속죄를 위해 자신의 피를 가져오셨기 때문에(6:19-20; 9:11-12), 이제 우리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하늘 성소에 들어갈 수 있고, "진실된 마음과 온전한 믿음의 확신으로"(10:22)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열어 주신 입구는 “새롭습니다”. 왜냐하면 새 언약의 중재가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한 영원한 용서를 확보했기 때문입니다(8:8, 12; 10:14-18). 옛 언약 아래 성령의 제한적인 규정이 보여주었듯이(9:8) 더 이상 “성소에 들어가는 길은 아직 열리지 않았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모든 백성은 가장 작은 자부터 가장 큰 자까지 주님을 알고 그분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8:11). 그리고 이 새 길은 “살아 있는” 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께서 단번에 자신을 죽음으로 드리셨기 때문에 이제 “세세토록 살아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7:23-25).히브리서 4:14-16 

 

우리 몸의 세례("정결한 물로 씻음")는 성령으로 우리 마음이 정결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며, 성령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우리와 연합을 인치십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양심을 정결하게 하시기 때문에 우리 마음은 "정결하게 뿌려졌습니다" (벧전 1:2 참조). " 우리가 믿는 소망 의 고백을 흔들리지 아니하고 굳게 붙들라"는 권면은 앞서 언급한 권고(벧전 3:6, 14; 6:18)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는 하나님께서 미래에 대해 선포하신 말씀에 따라 행동하고, 그분이 약속에 신실하시다고 믿었던 고대 신앙인들에 대한 앞으로의 평가를 예고합니다(벧전 11:1-40; 특히 11:11).1베드로 1:2 ). “믿음의 고백을 굳게 붙잡으라”는 격려는

마지막으로 저자는 다른 신자들과 함께 서로 지지 할 것을 권면합니다 .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어떻게 할지 생각하자"라고 말하며, 계속해서 서로 만나고 격려해야 합니다(10:24-25).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떠내려가지 말라고 경고하고(2:1) "매일 서로 권면하여 누구든지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지지 않도록 하라"고 권고합니다(3:12-13). 서로의 믿음 안에서의 인내를 강화해야 하는 우리의 공동 책임은 약하고 다친 팔다리를 지지하는 운동의 이미지를 통해 더욱 강화될 것입니다(12:12-13). 원래 유대-기독교 청중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사회적 배척과 그보다 더 심한 위협에 직면했던 것으로 보입니다(10:32-34; 13:13). 이러한 압력은 일부 사람들이 예배와 서로 격려를 위해 교회에 모이는 것을 포기한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임재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대제사장이 하늘로부터 돌아오는 "날"이 다가오고 있으며, 그 "날"은 우리의 구원을 완성해 줄 것이므로(9:28) 믿음 안에서 서로의 끈기를 적극적으로 격려("격려")해야 합니다.

 

10:26-31 그리스도를 배교하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다시 한번 엄중하게 일깨워 주는 구절은 10:19-25에 나오는 권고, 곧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우리의 고백을 굳게 붙들고, 서로 격려하라는 권고에 귀 기울여야 할 절실함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배교자들에게 닥칠 파멸에 대한 세 번째 묘사이며, 배교에 관한 앞의 두 본문의 요소들을 결합하고 있습니다. 첫째, 히브리서 2:1-4은 율법을 어기는 것은 정당한 형벌을 받지만, 주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구원을 무시하는 자들에게는 피할 길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둘째, 히브리서 6:4-8은 눈에 보이는 교회 안에서 역사하는 은혜에서 고의로 돌아서서 사실상 그리스도를 경멸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은 원수들의 편에 서는 자들은 스스로 회복의 손길에서 벗어났다고 선포합니다. 이제 저자는 모세의 율법을 위반 한 13명의 범죄자에게 정당하게 유죄 판결을 내린 무자비한 처벌부터, 하나님의 아들을 고의로 거부한 사람들이 받아 마땅한 "훨씬 더 심한 처벌"에 이르기까지 주장합니다.히브리서 2장 1-4절은 율법을 어기는 것은 정당한 형벌을 초래하지만, 주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구원을 무시하는 자들에게는 어떤 형벌도 피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둘째, 히브리서 6장 4-8절은 눈에 보이는 교회 안에서 역사하는 은혜를 고의로 외면하고, 사실상 그리스도를 경멸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은 원수들의 편에 서는 자들은 스스로 회복의 손길을 놓게 되었다고 선포합니다. 이제 저자는 정당하게 유죄 판결을 받은 자들에게 가해진 무자비한 형벌을 근거로 논증합니다.

모세의 율법은 무지로 저지른 무심코 범한 위반(민 15:22-29; 히 5:2; 9:7 참조)과 주님을 거만하게 거역하는 행위(민 15:30-31; 신 17:12)를 구분했습니다.히브리서는 "의도적으로 죄를 짓는 것"(히 10:26)에 대해 말하면서 이러한 구분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그러나 문맥을 보면 이 특정한 의도적인 죄는 예수님과 그의 단번의 희생에서 돌아서서 대신 레위 제도에 따라 죽임을 당한 동물 제사에서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그런 동물의 피는 결코 죄의 더러움을 없앨 수 없습니다(10:4).옛 언약 아래에서도 그것은 단지 외부적인 의식적 정결에만 효과적이었습니다(9:9-10, 13). 이제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을 시작하시기 위해 오셨으니, 그분은 “첫째 것” 곧 동물 제사를 폐하시고 “둘째 것” 곧 우리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자신의 피와 몸을 세우십니다(10:5-10). 그러므로 구속 역사의 이 시점 에서 “더 이상 속죄하는 제사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10:26). 다시 말해, 단번에 완전히 충분하고 양심을 정결하게 하는 예수님의 죽음 외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와 살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는 새롭고 산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10:19-20).한편으로는 민수기 15:22-29 ( 히브리서 5:2; 9:7 참조 )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님을 거만하게 대하는 행위입니다( 민수기 15:30-31 ; 신명기 17:12 ). 히브리서는 “고의로 죄를 짓는 것”( 히브리서 10:26 ) 에 대해 말하면서 이러한 구별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 그러나 문맥을 보면 이 특정한 고의적인 죄는

그리스도의 희생에 등을 돌리는 자들은 “두려운 심판과 불의 분노”(10:27)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떠나 유대교로 돌아가겠다는 결정을 어떻게 생각하든, 그들의 배교는 경멸의 행위 이기 때문입니다 (10:29).

  • 하나님의 아들을 향하여 그를 짓밟고(6:6 참조)
  • 그는 흘린 피를 거룩하게 하지 않고 “더럽고” 더럽히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 은혜의 영을 향하여, 사도들의 말씀과 기적을 통한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증거를 거부했습니다(2:3-4; 6:5; 요 15:26-27; 행 5:32 참조).요한복음 15:26-27 ; 사도행전 5:32 ).

새 언약 아래서, 하나님의 아들을 선물로 주신 더 큰 은혜는 그러한 은혜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더 큰 심판과 일치합니다. 은혜로우시고 질투하시는 이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원수 갚는 것은 내 것이니 내가 갚으리라”,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시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신 32:35-36).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교회 안에서 자신의 약속을 믿는 자들과 의심하고 돌아서는 자들을 구별하십니다(히 10:30; 3:12-4:2 참조). 오늘날에도 새 언약 아래서 은혜가 온전히 드러나면서, 그리스도의 중보가 없다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떨어지는 것은 무서운 일”(히 10:31)이며, 그분은 “소멸하는 불이십니다”(히 12:29; 신 4:24)라는 사실은 여전히 ​​사실입니다.신명기 32:35-36 ). 그분은 눈에 보이는 교회 안에서 그분의 약속을 믿는 자들과 의심하고 돌아서는 자들을 구별하십니다( 히브리서 10:30 ; 3:12-4:2 참조). 오늘날에도 새 언약 아래 온전히 나타난 은혜 속에서, 그리스도의 중보 없이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떨어지는 것은 무서운 일”(10:31)이며, 그분은 “소멸하는 불이십니다”(12:29; 신명기 4:24 )라는 사실은 변함없이 사실입니다.

10:32-35 6:9-12에서 보여준 것과 같은 목회적 지혜로, 저자는 배교에 대한 무서운 경고 에 이어, 과거 박해 기간 동안 하나님의 은혜가 청중들의 삶에 이미 맺어준 열매를 격려하며 일깨워 줍니다 (10:32-35). “옛날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전파를 통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6:4-5). 예수님을 믿는 그들의 새로운 믿음은 “고난과의 힘겨운 싸움”을 시작하게 했고, 그들은 소망에 찬 확신으로 “견뎌냈습니다.”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견디는 믿음이 다음 부분(10:36-12:17)의 주제가 될 것입니다. 저자는 우리에게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가 되라”(6:12)고 권고한 후, 하나님께서 구약 성경에 대한 믿음으로 칭찬하신 “옛 사람들”의 역사를 살펴볼 것입니다(11:1-40).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을 때 원래 청중이 겪었던 고난은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그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10:32-24). 개인적으로 그들은 예수님 자신처럼 "공개적으로 비난과 환난을 받았습니다"(13:12-13). 이러한 공개적인 굴욕에는 다른 신약 성경 본문에서 보여주듯이 회당과 유대인 공동체에서의 추방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요 9:22; 12:42; 행 17:5-8; 18:4-13; 계 2:9; 3:9). 어떤 사람들에게는 투옥과 재산 몰수도 포함되었습니다(10:34). 이 초기 박해에 대한 그들의 반응에서 가장 고무적인 측면은 적대감의 가장 큰 타격을 받고 있던 동료 신자들과 그들이 보인 연대입니다. 자기 보존을 위해 그들에게서 물러나거나 “함께 모이는 것을 소홀히 하지”(10:24-25)는 대신, 그들은 공개적인 학대를 받는 사람들과 협력했고, 그리스도를 위해 갇힌 사람들과 고통을 나누었습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그들에게 권고될 것입니다(13:3). 그들은 태초에 함께 섰으며, 이제 임박한 박해의 파도에 직면하여 그들의 상호 지원은 계속되어야 합니다(12:3-4). 세상의 소유는 덧없지만(1:10-12; 12:26-28; 마 6:19-21 참조), 우리는 믿음으로 “더 나은 본향”과 영원한 도성을 바라봤던 고대 족장들처럼(11:10, 16; 13:13) “더 나은 소유가 있고 영구한 소유가 있”을 것입니다.요한복음 9:22; 12:42 ; 사도행전 17:5-8; 18:4-13 ; 계시록 2:9; 3:9 ). 어떤 사람들에게는 투옥과 재산 몰수도 포함되었습니다(10:34). 이 초기 박해에 대한 그들의 반응에서 가장 고무적인 측면은 적대감의 여파를 겪고 있는 동료 신자들과 그들이 보인 연대성입니다. 자기 보존을 위해 그들에게서 물러나거나 "함께 모이는 것을 소홀히 하지"(10:24-25) 않고, 그들은 공개적인 학대를 받는 사람들과 협력했고, 그리스도를 위해 갇힌 사람들과 고통을 공유했습니다. 현재에도 그렇게 하도록 권고받을 것입니다(13:3). 그들은 처음에 함께 섰고, 이제 박해의 파도가 임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상호 지원은 계속되어야 합니다(12:3-4). 세상의 소유는 일시적입니다(마 1:10-12; 12:26-28; 마 6:19-21 참조 ). 그러나 우리에게는 “더 나은 소유 곧 영속하는 소유가 있”습니다. 마치 믿음으로 “더 나은 나라”와 영원한 성읍을 기대했던 고대 족장들처럼 말입니다(마 11:10, 16; 13:13).

 

우리가 던져서는 안 될 “확신”( 파레시아 )(10:35)은 예수님의 희생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하늘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확신을 줍니다(10:19; 3:6; 4:16).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희생이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했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의 충만한 확신”( 플루로포리아 )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10:22).14 반대 에 직면해서도 우리의 믿음과 소망의 고백을 굳게 붙잡도록 우리를 강화시켜 주는 것은 바로 그분의 은혜와 그것이 공급하는 시기적절한 도움(4:16; 2:18)입니다(3:6, 14; 6: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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