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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이야기

나그네 정신

by 코리안랍비 2022.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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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정신

나그네 인생길 - 구글출처 이미지



대학생 선교단체를 섬길 때였다. 평소 독서를 좋아하는 나는 <금강경>을 읽고, 니체의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즐겨 읽곤 하였다. 물론 나의 신앙은 불타오르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선배중에 하나가 내가 읽는 책에 대해서 딴지를 걸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독교인이 읽어서는 안 될 책들”이라는 것이다.

“그럼 무슨 책을 읽어야 합니까?” “오로지 성경만 읽어라” 라고 하였다. 근본주의자를 넘어서 극단주의자에 가까운 타종교 혐오증을 강하게 갖고 있는 선배였다. 나중에 이 선배는 극단주의적인 성향을 강하게 보이더니 결국 기독교를 버리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도리어 더 깊고, 넓고, 높게 기독교를 이해하는 사람이 되었다.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이 단순히 내세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사실 ‘나그네 신앙’이요, ‘나그네 인생철학’을 강조한다. 이 땅에서 더 나은 이상향을 바라보면서 믿음을 지키고, 말씀을 지키고, 신앙의 전통을 지켜나가야 한다.


유대인들은 이 땅의 인간들을 ‘영적인 여행을 하러 이 땅에 온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여행길에 ‘나그네’라는 개념이나 ‘영적 유목민’이라는 개념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아 있다.


한 관광객이 널리 존경하는 랍비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는 초라한 방 한 칸에 책상과 의자, 그리고 몇권의 성서와 탈무드만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랍비님, 가구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자 랍비는 반대로 질문을 한다. “당신의 가구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자 “저야 이곳을 그저 지나가는 나그네인 걸요” 랍비가 대답했다. “나도 마찬가지요”

 


랍비는 성서와 탈무드에 통달한 인물이다. 여기서 통달했다는 것은 많은 지식을 가졌다는 것과 더불어서 지혜가 같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 인생은 나그네와 같다.

 

신약성서 히브리서 11장 13절을 본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본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지만, 언젠가는 놓고 떠나야 할 땅의 것들에 집착하는 것도 멀리한다.
이러한 관념이나 가치관을 형성한 것은 바로 ‘토라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족장들)의 삶’에 감화를 받아서 그렇다.
구약성경 창세기를 보면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아버지인 야곱이 이집트의 파라오를 만나는 자리가 나온다.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여기서 야곱이 자신을 ‘나그네’라고 말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물론 야곱의 친할아버지가 되는 아브라함도 그런 [나그네길]을 가게 된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래서 그는 고향 우르를 떠나서 나중 이스라엘 지경인 가나안에 다다르게 된다. 바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Promised land'라는 연유가 여기서 생긴 것이다. 나중에는 독립의 발판이 되는 것이 창세기 이 말씀이기도 하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라는 명령은 마치 서울의 좋은 집에서 큰 회사를 경영하면서 잘 지내는 사람에게 가족들을 모두 이끌고 멀리 중동이나 아프리카로 가라는 것과 같다. 그리고 단 한번도 간 적이 없는 곳으로 가는 것과 같다.
나도 물론 이스라엘로 젊은 날 나그네길에 올랐다. 야곱의 말대로 온갖 고생들이 시작되었지만 테러로 인하여서 죽거나,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을 정도는 아니어서 나중에 한국으로 오면서 감사의 제단을 쌓았다.

 

단순히 외국에서 살아간 것이 나그네 길이라면, 우리 인생도 이땅의 시민권을 가지고 수십년을 살아가더라고 여전히 우리는 ‘영적인 여행자요, 나그네요, 외국인’이다. 나그네는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이방지역에 사는 체류자들을 그리스어로 ‘파로이코스’라고 한 것은 멀리 고국을 떠나 이방 지역에 살면서도 그의 생각은 언제나 고향에 있는 사람이다.

 

앞서 <금강경>에 이런 말이 나온다. 불가에서는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나그네와 같이 훌훌 털어버리고 떠날 수 있는 자유를 가진 사람을 부르는 말이 있다. 바로 일체무애인(一切無碍人)이라고 한다.
요즘 현대이들은 어디론가 이동하는 나그네요 유목민과 같은 존재들이다. 마음만 먹으면 언젠든지 아프리카도, 중동도, 유럽도, 남미도 갈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무엇인가에 대한 집착과 욕망이 강하여서 스스로를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여기는 영적인 정체성, 자기 정체성이 상당히 부족하다.
우리는 늘 불안한 삶이 주는 떠돌이가 아니라, 언젠가는 버리고 가야 할 나그네이다. 우리는 ‘나그네 정신’을 가져야 한다. 실제 생활에서 여전히 그 정신이 따라와지지 않더라도 이 정신을 가지려고 애써야 한다. 나그네 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일체에 가진 것에 대한 소유욕이 약하고, 도리어 가진 것을 나누어 주고, 이 땅에서 범죄하지 않으려 애를 쓸 것이다.

 

우리는 험한 세상을 살아갈 때 두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벽을 쌓는 것과 하나는 다리를 놓는 것이다. 물론 벽을 허물면 다리가 된다. 험한 세상에서 다리게 되는 사람은 평화롭고 자유로움을 누리는 사람이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그렇다면 우리의 생각과 신념을 ‘나그네와 외국인’이라는 것에 두어야 한다.
인류사는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는 것이 반복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그네 정신으로 항상 자신의 생명의 날 수를 계수하는 지혜를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이다. 그 옛날 아브라함과 야곱이 그러하였듯이 우리는 우리의 날들을 계수하며 함부로 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 다음의 나그네가 사용하도록 언제나 남기고 갈 수 있는 마음의 준비와 여유가 필요하며, 또한 유언이든 예언이든 남기고 갈 것을 준비하여야 할 것이다. 유대인들은 남길 것이 없으면 신명기 6장 쉐마를 유언으로 남기고 간다고 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가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나그네 정신 - 구글출처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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