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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브루타와 코칭 & 멘토링

하브루타 러닝, 논어에서 밝히는 배움과 생각은 서로 동반자

by 코리안랍비 2022.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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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는 말한다. 배움과 생각은 동반자다.

교육 현장에서 오래 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교육이란 무엇인가? 를 넘어서 교육을 어떻게 하면 잘 할 것인가? 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된다. 그러다보니 과거의 교육과 현대의 교육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라는 것도 크게 고민해 보게 된다.

교육은 우리 삶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지적인 운동이다. 모든 사람들은 교육의 의무를 갖고 있다. 반드시 엄마든 아빠든 자신도 배워야 하고, 가족들도, 자녀들도 모두 교육의 대열에 들어가게 된다. 교육의 원래 의미는 라틴어적으로 밖에서 안에 넣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잠재력을 이끌어 내는 능력이니 기술을 말한다.


그런데 논어를 공부하다보면 교육을 매우 중시한 공자의 교육철학이 맨 앞장부터 등장한다. 공자는 철학자이지만 아울러 교육학자였다. 그는 논어의 도입부부터,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라면 삶의 의미를 호학(好學), 곧 배우기를 즐겨하는 것에 두고 있었다. 배우고 익히는 것을 좋은 일이요 즐거운 일로 삼았다는 것을 보면 인간의 배우고 익히는 학습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를 보여준 것이다.

공자는 본인 스스로 배우고 익히는데 하나가 된 사람이었다.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가르치고 배우는 일로 별도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로 생각하였다.

  • 논어-공자-어록
    구글출처 이미지


그런데 논어의 학이편이 아니라 다음 편인 위정(爲政)편을 보면 공자의 교육관이 더 자세하게 나온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로우니라”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좌우명으로 애용되는 명언이 바로 이것이다. 여기서도 공자의 교육사상을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지만, 탈무드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한다. “가르치는 것이 곧 배우는 것이요, 배우는 것이 곧 가르치는 것이다. 그리하여 가르치는 것과 배우는 것은 같은 것이다” 히브리어로 배움을 ‘라마드 Ramad' 라고 하는데 이는 가르치는 것이 곧 배우는 것임을 말한다.

가르치고 배우는 일은 공자나 탈무드의 랍비들은 달리 생각하거나 분리하지 않았다. 공자는 [생각없는 배움] - 사고력이 턱없이 부족한 배움을 경계하였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은 공부를 지식을 많이 얻는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많은 지식이 곧 그 사람을 현명하고 지혜로운 스승으로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동서양의 많은 지혜자나 현자들을 보면 남이 생각하지 않은 생각을 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
물론 철학자는 남이 생각하지 않은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다. 교육자는 남의 생각을 끄집어 내는 사람이다. 제대로 된 배움은 생각과 함께할 수 밖에 없다. 특히 교육 현장에서 갈그치고 배우는 것은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서로 나누는 것을 말한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지식이나 상식을 폭넓게 갖는 것을 강조하였지만 많은 지식이나 상식이 생각이라는 것과 만나지 않는다면 그 많은 지식이나 상식이 무용지물이라고 여겼다. 생각하지 않고 질문하거나 토론하지 않는 교육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들의 교육은 상당히 ‘전투적’인 면이 강하다. 여기서 전투적이라는 것은 교육에 대해서 치열한 생각의 게임을 하고, 마치 싸움의 형태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는 물리적 싸움이라기보다는 높은 수준의 인격과 이타심을 갖고서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면서 자신의 생각과 이상을 밝히는 것을 말한다.


잘 가르치는 사람은 자신이 가르친 것에 대해서 제자들이 의심하거나 데카르트적으로 방법적 회의를 할 수 있도록 가르친다. 이는 바로 배우면서 생각할 수 있는 조건이나 상황을 만들어주는 것을 말한다. 훌륭한 스승은 제자들이 앞으로 펼쳐질 세상에 대해서 길을 만들어주고 이끌어 주는 사람이다.

진정한 교육자는 제자들을 생각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곧 죽은 사람과 다를 바 없다고 여기는 사람이다. 그래서 좋은 스승은 생각의 게임과 생각의 싸움을 하는 것을 돋구어주는 존재이다.

‘청출어람(靑出於藍) 청어람(靑於藍)’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스승보다 나은 제자가 된다는 것이다. 스승보다 나은 제자가 되려면 스승의 가르침만을 그대로 따라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승의 가르침에도 때로는 의심하고 회의하면서 도전(챌린지) 하는 제자를 말한다.

한국은 그동안 스승의 가르침에 대해서 일언반구나 토를 달아서는 안 되는 나라였다. 하지만 스승의 모든 가르침이 진리이거나 반드시 완전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생각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스승의 가르침을 넘어서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래야 ‘청출어람’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면서 스승과 제자의 상호 인성교육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것의 의미도 이러한 상호협력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 배움과 생각은 서로 - 같이 가야 할 - 동반자다
    구글출처 이미지


나를 지도했던 교수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제자는 바로 나의 이론을 밟고서 넘어가는 사람이다” 라고 하였다. 언제까지나 스승의 가르침만 받고 생각을 낮추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과 뜻을 잘 펼치는 사람이 나중에 가르치는 현장에서도 제자들에게 생각의 힘과 질문의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영향을 심어줄 수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배운 것에 대해서 역(易)으로 생각해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반대로 생각해보고, 다른 각도로 생각해보는 것을 통해 더욱더 많은 배움의 욕구가 불러 일으키게 된다.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질문을 하게 된다. 질문을 한다는 것은 바로 ‘품질이 높은 문제’를 출제한다는 것과 같다.

질문을 하기 좋아하는 것을 호(好)문(問) 이라고 한다. 호문을 즐겨하면 그에 대한 답을 찾으려 노력하게 되고, 구체적으로 정보와 지식을 구하게 된다. 타인의 앎을 참고하게 되고, 기존의 지식을 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진정한 배움이 이루어지게 된다.

우리가 누군가를 만날 때 반드시 그 사람으로부터 배울 점이 있는가 없는가를 파악해야 한다. 살면서 자신의 스승이 될 수 있는 사람은 많다. 설사 그 사람이 사기꾼이라도 배울 점이 있다. 어떻게 하면 사기를 잘 칠까를 생각하는게 아니라, 반대로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하는 교훈을 얻게 된다. 그렇다고 그 사람을 스승으로 둘 수는 없다. 도리어 그 사람을 경계하고 멀리해야 한다.

배움은 탐구의 정신과 실천으로 이어지게 한다. 알려진 것을 바탕으로 하여 미지(未知)의 것을 연구하게 되는 진지한 배움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그래서 연구(硏究)하는 자세로 세상을 살아가게 한다. [연구하는 자세]로 살아가는 것을 [구도자(求道者)의 자세]라고 부른다.

구도자의 자세는 바로 배움이 넓어지고 깊어지게 한다. 배움이 깊고 넓어진 사람은 그 배움을 생각과 연결지어서 만들어진다. 그래서 제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존재이다. 진정한 교육이란 배움이 곧 생각이며 생각하기가 곧 배움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공자는 배우고 생각하는 것이 같이 이루어지고 하나가 되어야 함을 특별히 논어(論語)에서 강조한 것이다.

수시로 논어(論語)를 공부하다보면 마치 탈무드의 랍비의 가르침과 흡사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물론 논어(論語)만 아니라 맹자(孟子)나 다른 교육적인 고전들을 탐독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전은 압축된 지식과 탁월한 지혜를 가르쳐준다. 그래서 수시로 고전을 읽고 공부하고 익히면 이 또한 즐거운 일이다.

그런데 우리의 교육현장은 아직도 오랫동안 배움과 생각을 같이 놓고 생각하지 않았다. 공자가 2천년 이전에 가르치고 강조한 배움과 생각을 한가지로 놓고 그 가치를 추구하도록 한 당부를 외면하는 것이다. 주입식(注入式)교육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인습(因習)처럼 교육 현장에 배어 있다보면 결국 높은 사고력(思考力)이나 창조력(創造力)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대학에서의 강단은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강의가 아직도 팽배하고 개선되지 않았다. 도리어 고등학교 교육에서 많은 실험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교육은 교육의 전달자와 교육의 수용자로 나눈다. 교육의 수용자는 배우는 자인데 이들의 입장이 별로 반영되지 않은 것이 우리 교육의 맹점이다.

일방적인 가르침을 능사(能事)로 삼고,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 하나되는 협력(協力)이나 파트너쉽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외면되었다. 유대인들이 뛰어난 것은 이들이 열심(熱心)을 다해서 하는 것보다 협력하여 서로의 생각과 의견을 제시하고 나누는데서 있다.

아직 우리 나라는 교육의 강국은 아니다. 아직도 가르치는 사람들의 노력이 부족해서 생기는 일이다. 이전에 답습(踏襲)한 것을 여전히 지금도 답습(踏襲)하는 것은 퇴행적 교육방식이다. 이제는 가르치는 사람, 교육 전달자가 다양한 노력을 해야 한다. 자기주도적인 것도 심어주고, 협력학습도 하게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수업준비와 열과 성을 다해야 한다.

나 자신도 교육 현장에 머물면서 수업 준비를 잘하고, 학생들에게 자주 질문하고, 그리고 나의 생각과 의견을 말해주는 수업을 했을 때 큰 보람과 재미가 있었다. 준비된 교사가 준비된 학생을 만든다. 준비된 스승이 준비된 제자를 만든다.
이제는 가르치는 자가 준비가 잘 되고 더욱 더 노력해야 해야 하는 시대다. 학생들은 가르치는 자의 열정과 수고를 외면하지 않는다. 좋은 스승은 바로 자신들의 잠든 뇌를 깨우고, 잠든 정신을 깨우고, 이상과 목표를 심어주며 더욱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에 게을리 하지 않는 사람이다.

3월 새학기가 시작되면 배움과 생각은 서로 분리될 수 없음을 실천하는 교육이 대한민국에 일어났으면 한다. 고전의 명언이지만 명언이 명언(明言)으로만 남으면 안된다. 우리가 이제는 교육 현장에서 ‘생각하는 능력과 기술’을 심어주어야 할 때이다.


유대인들은 그래서 “마 아타 호셰브?”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너는 무엇을 생각하냐라는 질문이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으로 우리도 바꾸어야 한다. 질문이 바뀌면 생각하는 것도 바꾸게 된다.

어떤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배움이가 부른다, “생각아 놀자”] 함석헌 선생은 “우리는 생각하는 백성이 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생각혁명]을 강조하였다.
가면 갈수록 생각하는 사람들의 수가 줄고 있다. 그저 생각없이 사는 것이 다반사이다. 생각하기 싫은 것은 귀찮은 것이요, 삶의 의미와 목적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죽음의 수용소]라는 책을 쓰고 로고 테라피를 창안한 유대인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은 “우리 삶이 의미로워지려면 늘 생각하는 것을 멈추어서는 안된다” 라고 말을 했다.

우리 삶이 의미있어 지려면 배우고 생각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저 말에 나는 정신을 퍼뜩 차리게 된다. 그동안 나는 수많은 책을 탐독하고 읽어온 [일만권 독서가]로서 살았다. 배우는 익히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그런데 나에게 가장 큰 약점은 바로 [생각의 능력과 기술]을 크게 신장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교회를 오래 다니면서 성경읽기도 많이 하고, 설교도 참으로 많이 들었지만 묵상하거나 명상하는 시간이 적었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사색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이 참으로 많다.

우리는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을 것이 없다. 그리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이 또한 위태로운 것이다.
[평생교육]과 더불어서 [평생생각]을 같이 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정신을 가다듬과 더 나은 인성과 지성을 갖춘 사람으로 나아가야 하겠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지력이나 두뇌회전력]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배우고 생각하는 것에 하나되어질 때 가능하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배우고 생각하는 것을 외면하고 자신의 육신의 안락만 추구하다보면 정신수준이 급격한 하락을 경험하게 된다.

공자는 참으로 좋은 명언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배움에도 충실하게 생각에도 충실한 사람이 되라는 것으로 받고 싶다. 그리고 스스로 다짐한다. ‘스승같은 사람’이 되자. 그리고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자’ 그래야 계속적 배움으로, 계속적 사고(思考)로 나아가게 된다.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하나요, 배우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의 질과 행복수준을 크게 높여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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