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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와 새 창조 - 에드워드 W. 클링크 3세

구약학과 신약학 자료들

by 코리안랍비 2025. 5. 30.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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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창조의 텔로스 기독 출처 이미지

정의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 프로젝트, 창조의 본질과 목적, 그리고 모든 것의 궁극적인 목표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인은 창조주이자 구세주의 의도에 맞춰 세상에 충실하게 참여하도록 인도됩니다.

요약

성경이 전하는 이야기는 "창조"로 시작하고 끝납니다. 성경은 세상의 이야기를 하나님의 창조 프로젝트로 제시합니다. 창조와 새 창조라는 주제는 성경에서 연구 주제로만 보기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와 약속 아래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창조에서 구원, 그리고 새 창조로 이어지는 성경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본질과 목적,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의 위치에 대한 목회적 통찰력을 얻게 됩니다. 

성경이 전하는 이야기는 "창조"로 시작하고 끝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라는 서두부터 "새 하늘과 새 땅"(계 21:1)으로 변화된 세상을 묘사하는 마지막 장면까지, 성경은 세상의 이야기를 하나님의 창조 프로젝트로 제시합니다. 창조와 새 창조라는 주제는 성경에서 연구 주제로 보기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와 약속 아래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로 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창조는 단순히 삶의 게임과 구속 사역이 펼쳐지고 나서 버려지는 운동장이 아닙니다. 극명하게 대조적으로, 창조 자체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구속의 영역이며, 새 창조는 하나님의 은혜롭고 구속적인 선물의 최종 결과입니다. 따라서 창조는 성경의 "좋은 소식"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성경이 기록하는 이야기는 창조에서 시작될 뿐만 아니라 새 창조를 갈망하고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시작과 끝”(계 22:13)이신 것처럼, 그분의 사역 또한 창조의 시작부터 새 창조의 목표까지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합니다.창세기 1:1 )에서 “새 하늘과 새 땅”( 계시록 21:1 ) 으로 변화된 세상의 최종 묘사까지 , 성경은 세상의 이야기를 하나님의 창조 프로젝트로 제시합니다. 창조와 새 창조의 주제는 성경에서 연구 주제로 보는 것이 가장 좋지만, 하나님의 은혜로운 공급과 약속 아래 우리가 살고 있는 이야기로 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창조는 단순히 삶의 게임과 구속의 사역이 펼쳐지고 나서 버려지는 운동장이 아닙니다. 극명하게 대조적으로 창조 자체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구속의 영역이며, 새 창조는 하나님의 은혜롭고 구속적인 선물의 최종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창조는 성경의 “좋은 소식” 메시지의 핵심 부분입니다. 성경이 기록하는 이야기는 창조에서 시작될 뿐만 아니라 새 창조를 갈망하고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시작과 끝”( 계시록 22:13 )이신 것처럼, 그의 사역도 창조의 시작부터 새 창조의 목표까지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합니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창조라는 주제를 세상 역사의 처음 며칠 동안만 다룹니다. 그들은 "창조"라는 단어를 들으면 "기원"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성경은 세상과 그 역사 전체를 하나님의 창조 프로젝트로 제시하며, 하나님께서 세상과 그분이 창조하신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목적을 형성하고, 촉진하고, 성취하시는 과정으로 제시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성경은 창조라는 주제를 만물의 시작일 뿐만 아니라 만물의 끝, 즉 만물의 목표로 정의합니다. 성경에서 창조라는 주제는 "처음 것"에 대한 연구인 원시론과 "마지막 것"에 대한 연구인 종말론의 아름다운 결합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에서의 목적, 공급, 그리고 위치를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합니다. 

진화론에 대한 과학적 논쟁 때문에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창세기 1-2장을 "어떻게"라는 질문(즉, 기원)을 다루는 데 사용해 왔습니다. 이 질문은 창조의 의미 나 중요성 보다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방식  거의 전적으로 초점을 맞춥니다 . 더 정확히 말하면 창세기 1-2장은 하나가 아닌 네 가지 질문에 답하려고 합니다. 단순히 "어떻게"라는 질문뿐 아니라 "누구", "무엇", "왜"라는 질문까지 포함합니다. 과학은 선하고 참된 물리적 질문(원인과 결과)을 던지지만, 교회는 형이상학 적 질문(본성과 목적)을 다룹니다. 현대에 "어떻게"라는 질문에 대한 다양한 답이나 접근 방식에 맞서 성경을 설명하거나 옹호하려 애쓰면서, 교회는 인격성("누구"), 계획("무엇"), 목적("왜")과 관련된 다른 세 가지 질문을 설명하고 해결해야 하는 목회적 책임을 망각했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성경 이야기에 대한 공식적인 서론은 단순히 과학적 질문("어떻게")에 답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목회적이고 실용적인 질문들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인가? 누가 그분의 형상을 지닌 자입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창조물 안에서 그리고 창조물을 통해 무엇을 하고자 하십니까? 그리고 하나님은 왜 세상을 만드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떻게" 창조하셨는지에 대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의견이 엇갈릴 수 있는 성경적 여지는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인간이 "어떤 존재"로 창조되었는지,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자 하시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왜" 창조하셨는지,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과 목적을 설명하는 방식에 대해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창세기 1-2장은 "어떻게"라는 질문(즉, 기원)을 다루기 위해 거의 전적으로 창세기 1-2장 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하나가 아닌 네 가지 질문에 답하고자 합니다. 단순히 "어떻게"라는 질문뿐만 아니라 "누구", "무엇", "왜"라는 질문도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은 단순히 과학적인 질문("어떻게")에 답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목회적이고 실용적인 질문들의 집합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입니까? 누가 그의 형상을 지닌 자입니까? 하나님은 그의 창조물 안에서 그리고 그와 함께 무엇을 하려고 하십니까? 그리고 하나님은 왜 세상을 만드셨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창조하셨는지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수 있는 성경적 여지가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이고 인간이 누구로 설계되었는지, 하나님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려고 하시는지, 또는 하나님이 세상을 "왜" 만드셨는지와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과 목적을 설명하는 방식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라는 질문은 너무 쉽게 "태초에 머물러 있지만, "누구", "무엇", "왜"에 대한 질문은 창세기 1-2장에서야 소개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질문들은 하나님의 창조 사업의 본질과 목적을 설명하기 위해 성경 전체의 이야기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창조에 대한 성경적 주제가 기원에 국한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창조주께서 그의 창조물과 그의 피조물, 특히 인간에 대해 의도하신 바와 모든 창조의 의도된 목표에 대한 성경의 전달도 포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창조주(요한복음 1:3)가 "시작과 끝"(계시록 22:13)이신 것처럼 창조와 새 창조에 대한 성경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조와 새 창조의 주제는 성경 이야기의 전체 흐름을 포착하는 창조-구속-새 창조의 체계를 사용하여 세 가지 요점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창세기 1-2장은 하나님의 창조 사업의 본질과 목적을 설명하기 위해 전체 성경 이야기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이것이 창조에 대한 성경적 주제가 기원에 국한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왜냐하면 창조주가 그의 창조물과 그의 피조물, 특히 인간에 대한 의도와 모든 창조의 의도된 목표에 대한 성경의 전달도 포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즉, 창조주( 요한복음 1:3 )가 "시작과 끝"( 계시록 22:13 )이신 것처럼 창조와 새 창조에 대한 성경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창조와 새 창조의 주제는 성경 이야기의 전체 흐름을 포착하는 창조-구속-새 창조의 체계를 사용하여 세 가지 요점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창조

하나님의 창조 프로젝트는 세상의 목적을 드러냅니다 . 성경의 시작부터 창조는 하나님의 프로젝트, 하나님이 성취할 영광스러운 목적을 목표로 하는 선한 일로 제시됩니다. 다른 방식으로 말하면, 창조는 하나님이 행한 일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하고 있는 일입니다 . 온 세상은 "새로운 창조", 즉 모든 것의 완성된 상태를 위해 만들어졌고 그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성경 이야기의 시작 부분에서 밝혀지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를 두 가지 궁극적이고 아름다운 목표를 포함하는 방향성 있는 의도로 설계했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첫째, 창조는 하나님의 우주적 성전이 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창세기 1-2장은 성경의 나머지 부분에서 하나님이 에덴을 창조했고, 따라서 세상을 하나님의 거처인 그의 성소로 창조했다는 것을 확인합니다(겔 28:18; 시 78:69; 사 66:1). 이에 대한 증거는 이스라엘의 장막/성전이 창조 기록을 청사진으로 사용하는 방식(출 25-27장)과 예수님의 오심이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한 세상에 “거하시는/장막을 치는”(요 1:3)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창세기가 창조의 성전 설계를 선포한다면, 요한계시록은 새 창조에서 그 성취를 선포합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 가운데 있어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거하시리니”(계 21:3). 둘째, 인간은 창조의 선지자, 제사장, 왕이 되어야 합니다. 창조의 물리적 형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을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와 역할을 갖도록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여 자신의 형상을 지닌 자로서, 창조물 안에서 창조주와 주님을 대표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이러한 대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지자, 제사장, 왕의 본성과 의무를 부여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그의 후손들을 만드셔서 자신의 왕적, 사역적 본성을 드러내시고, 모든 창조물 가운데 자신의 뜻을 세우시고 그 가치를 드높이셨습니다. 그리고 성경 이야기가 밝히듯이, 궁극적이고 완벽한 표현은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마침내 성취될 것입니다(롬 5:12-14; 골 1:15-20). 세상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거하며 영원토록 하나님의 선하심과 영광의 충만함을 나누는 장소로 창조되었습니다.창세기 1-2장은 성경의 나머지 부분에서 하나님이 에덴을 창조하셨고, 따라서 이 세상도 하나님의 성소( 겔 28:18 ; 시 78:69 ; 사 66:1)이자 하나님의 거처가 되도록 하셨다는 것을 확증합니다. 이에 대한 증거는 이스라엘의 장막/성전이 창조 기록을 청사진으로 사용하는 방식( 출 25-27장 )과 예수님의 오심이 그가 창조한 세상에 하나님의 "거하심/성막 치심"( 요 1:3 )의 시작인 방식입니다. 창세기가 창조의 성전 설계를 알렸다면, 요한계시록은 새 창조에서 그 성취를 알립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어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거하시리라"( 계 21:3 ). 두 번째, 인류는 창조의 선지자, 제사장, 왕이 되어야 합니다. 창조의 물리적 형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인 인류를 하나님과 특정한 관계와 역할을 갖도록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셔서 그의 형상을 지닌 자로서, 그의 창조물 안에서 창조주이시며 주님을 대표하도록 하셨습니다.이러한 대표는 인류가 하나님에 의해 예언자적, 제사장적, 왕적 본성과 의무로 정해졌음을 의미합니다.하나님께서 아담과 그의 후손들이 자신의 왕적이고 사역적인 본성을 나타내고 모든 창조물 속에서 자신의 뜻을 확립하고 자신의 가치를 높이도록 만드셨습니다.그리고 성경 이야기가 밝히듯이, 궁극적이고 완벽한 대표는 마침내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성취될 것입니다( 롬 5:12-14 ; 골 1:15-20 ).세상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거하며 영원토록 하나님의 선하심과 영광의 충만함을 나누는 장소가 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구원

하나님의 창조 사업은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공급을 용이하게 합니다 .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세상은 인간이 예언자적, 제사장적, 왕적 본성과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함으로써 좌절되었습니다. 교회는 인간의 실패를 "타락", 즉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공식적인 거부와 미완성으로 올바르게 정의해 왔습니다. 타락은 성경 이야기의 갈등을 드러내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생각 속에서 성경 이야기를 타락과 구원으로 축소하여 창조와 새 창조를 실제 행위의 단순한 배경으로 여기는 경향도 있습니다. 오히려 성경 이야기에서 인간의 실패는 하나님의 창조 사업 안에 포괄되며, 인간의 죄는 "[그리스도]를 통해 만물을 자기와 화해시키려 하심이라 … 그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화평을 이루사"(골 1:20)라는 하나님의 완전한 의도를 투사합니다. 요셉 이야기가 그리스도인에게 가르치듯이, 인류가 악을 위해 계획했던 것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지금 행하는 일을 이루게 하셨습니다”(창 50:20). 태초부터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목적이 충만하고 궁극적으로 온전해질 세상을 창조하기로 계획하셨습니다.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섰기”(골 1:17)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속주이시기에 창조주(요 1:3)이시며 재창조주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시며 시작과 끝이시”(계 22:13)시며 항상 그러하셨기 때문입니다.골로새서 1:20 ). 요셉의 이야기가 그리스도인에게 가르쳐 주듯이, 인류가 악을 위해 계획한 것을 "하나님은 지금 행하는 일을 이루시려고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창세기 50:20 ). 태초부터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목적이 충만하고 결국에는 완전해질 세상을 창조하기로 계획하셨습니다. "그분 안에서 만물이 함께 붙어 있습니다"( 골로새서 1:17 ).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구속주이시므로 창조주( 요한복음 1:3 )이자 재창조주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항상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끝이시니라"( 계시록 22:13 )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업의 구속적 측면은 하나님의 피조물, 특히 하나님의 백성의 본질과 목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 창조하셨으며, 그분의 형상을 지닌 자로서 그분을 대표하고 창조의 목적을 이루도록 하셨습니다(창 1:26-31). 인류가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을 행하지 못한 것은 명백하고 결정적인 실패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는 이를 전제로 하셨으며, 첫째 아담이 아니라 둘째 아담이 하나님의 온전하고 합당한 형상을 지닌 자가 될 것임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골 1:15). 하나님의 창조 사업의 나머지 부분은 이스라엘에서 시작하여 교회, 즉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인 인류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포함합니다. 구약과 신약은 이 이야기를 점진적이고 따라서 목회적인 방식으로 전합니다. 옛 언약에서 이스라엘이 하지 못한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목양하여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구속적 섭리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신 방식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새 언약을 세우셨을 때, 모든 피조물은 그분과 연합하여 태초부터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형상을 지닌 존재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는 이제 창세기 1-2장에 처음 선포된 "누구", "무엇", "왜"에 따라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고, 그렇게 하도록 명령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계획에 따라 교회는 이제 세상에서 제사장적, 예언적, 그리고 왕적 역할을 수행하며,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원래 계획에 걸맞게 살아갑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의 형상으로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주적 교회는 집합적으로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께서는 그 안에, 그리고 그 성전을 통해 그의 영으로 거하시고 사역하십니다(고전 3:16).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 계획의 원래 계획에 따라 살고, 일하고, 사역하는 참된 아담적 인류입니다.창세기 1:26-31 ).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요구하신 것을 행하지 못한 것은 명백하고 결정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운 마련은 첫째 아담이 아니라 둘째 아담이 하나님의 합당하고 완전한 형상을 지닌 자가 될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가정했습니다( 골로새서 1:15 ). 하나님의 나머지 창조 프로젝트에는 이스라엘에서 시작하여 교회로 확장되는 인류, 즉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이 포함됩니다. 구약과 신약은 이 이야기를 점진적이고 따라서 목회적인 방식으로 전합니다. 이스라엘이 옛 언약에서 하지 못한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목회하여 그리스도, 즉 하나님의 구속적 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새 언약을 세우셨을 때, 이제 모든 피조물이 그분과 연합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의도하신 형상을 지닌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교회는 이제 창세기 1-2장 에서 처음 선포된 "누구", "무엇", "왜"에 따라 세상에서 살 수 있고 살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 하나님의 창조 프로젝트에 맞춰 교회는 이제 세상에서 제사장, 예언자, 왕의 역할을 맡아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원래 설계에 걸맞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의 형상으로서 "그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보편 교회는 집합적으로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께서는 그 안에, 그 안에, 그 안에 거하시고 그 안에 성령으로 사역하십니다( 고전 3:16 ).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성령으로 하나님의 창조 프로젝트의 원래 설계에 따라 살고, 일하고, 사역하는 참된 아담적 인류입니다.

새로운 창조

하나님의 창조 사업은 세상의 완성으로 절정에 달합니다 . 세상의 창조는 항상 새 창조, 즉 하나님의 목적과 섭리의 절정을 목표로 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업은 창조의 완벽한 능력이 완전한 완성에 도달할 때, 즉 하나님께서 우리 구원 때 행하신 일을 우리 세상에 선포하실 때 끝납니다. "다 이루었다"(요한복음 19:30). 하나님께서 창세기에 약속하신 것은 계시록에서 에덴동산이 성전 모양의 정원 도시로 경작될 때 성취되었다고 선포하십니다. 새 창조 안에서 예루살렘 성전에 있던 하나님의 임재의 ​​신성하고 배타적인 장소는 이제 온 세상을 가득 채울 정도로 확장되었습니다. 온 세상은 하나님께 온전히 나아갈 수 있고, 하나님께서도 온전히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새 창조 안에서 복음의 "좋은 소식"이 온전히 실현될 것이며, 종말론적 안식일이 밝아오고 하나님 자신에 의해 확립될 것입니다. 그날에는 환상을 통해서만 보던 것들이 부활한 눈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이 그분의 영광의 충만함 안에 거하며 창조주, 구속주,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온 땅이 그 영광으로 가득하도다”(사 6:3)라고 노래할 것입니다.요한복음 19:30 ). 하나님께서 창세기에서 약속하신 것은 계시록에서 에덴동산이 성전 모양의 정원 도시로 경작되었을 때 성취되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새 창조에서 예루살렘 성전에 있던 하나님의 임재의 ​​신성하고 배타적인 장소가 이제 온 세상을 가득 채울 정도로 확장되었습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께 온전히 나아갈 수 있고 하나님께서도 온전히 나아가실 것입니다. 그리고 새 창조에서 복음의 "좋은 소식"이 온전히 실현되고 종말론적 안식일이 밝아와 하나님 자신에 의해 확립될 것입니다. 그날에는 환상을 통해서만 보였던 것이 부활한 눈으로 보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이 그의 영광의 충만함 안에 거하며 창조주, 구속주,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온 땅이 그의 영광으로 충만하도다"(사 6:3). 

창조와 새 창조, 즉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 사업이라고 부르는 성경적 주제는 하나님의 창조와 피조물의 본질과 목적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을 제공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실천에 목회적으로 유용한 몇 가지 적용이 있습니다. 첫째, 기독교는 간단히 말해 온전한 인간이 되라는 초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형상을 지닌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으로서의 삶과 하나님의 목적 있는 계획에 따라 사는 것의 참된 의미를 설명하고 인도합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의 삶은 단순히 영적인 삶일 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삶이기도 합니다. 즉, 창조 안에서 그리고 창조주와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보이는 영지주의적 경향(즉, 영혼과 육체의 분리)이나 내세적 도피주의는 하나님이 구원자이자 창조주이시라는 진리, 그리고 창조주로서 세상이 "매우 좋게"(창세기 1:31) 만들어졌으며 하나님께서 거하실 곳으로 의도하셨다는 진리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창조 사업이라는 성경적 관점을 통해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고, 창조주의 의도에 자신을 맞추고, 창조 사역에 온전히 참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러한 성경적 사고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시작된 새 창조를 반영하는 몇 가지 자세를 함양하게 할 것입니다. 즉, 몸과 영혼에 대한 통합된 관점, 하나님의 특별 은혜(구세주로서)와 일반 은혜(창조주로서)에 대한 감사, 물리적으로 창조된 세상(지구)의 선함에 대한 감사와 기대,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 사업과 그 사업이 추구하는 인간 번영에 부합하는 창조(즉, 문화 창조)를 가꾸고자 하는 열망입니다.창세기 1-2장 . 기독교는 인간으로서의 의미와 하나님의 목적적 설계에 따라 사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설명하고 인도합니다.둘째, 그리스도인의 삶은 단순히 영적인 삶이 아니라 육체적인 삶이기도 합니다.즉, 창조물 안에서 창조주와 관계를 맺으며 사는 삶입니다.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의 영지주의적 경향(즉, 영혼과 육체의 분리)이나 다른 세상으로의 도피주의는 하나님이 구원자이자 창조주이시라는 진리를 오해하고 있으며, 또한 창조주로서 세상은 "매우 좋게"( 창세기 1:31 ) 만들어졌고 하나님이 거하실 곳이라는 진리를 오해하고 있습니다.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창조 사업이라는 성경적 렌즈를 통해 자신과 세상을 보려고 열심히 노력해야 하며, 창조주의 의도에 자신을 맞추고 창조 사역에 올바르게 참여해야 합니다. 이러한 성경적 사고방식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시작된 새로운 창조를 반영하는 몇 가지 자세를 길러줄 것입니다. 즉, 육체와 영혼에 대한 통합된 관점,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구세주로서)와 하나님의 일반 은혜(창조자로서)에 대한 감사, 물리적이고 창조된 세상(지구)의 선함에 대한 감사와 기대,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 프로젝트와 인간의 번영 추구에 맞춰 창조(즉, 문화 창조)를 발전시키려는 열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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