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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과 고전 이야기

명길묻37,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by 코리안랍비 2022.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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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출처 이미지 - 막스 베버의 초상

 



[명작에게 길을 묻다] 무단전재 절대금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




# 이 명저를 읽어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전공자나 다독가들도 기피합니다. 베버는 최고의 사회학자이기에 자기 저작을 읽는 사람들이 최고라고 느끼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들 명작이라고 하나 봅니다. 전 다만 나만의 명작을 만들어 보렵니다. 대학원 시절에 읽은 책인데 그 뒤로 세번을 더 읽어보았습니다. 그리고 베버 논문도 써보았습니다. 오늘 베버읽기에 도전해 봅니다.
어렵지만 다 읽은 분들은 깨우침이 있을 것입니다.


  • 구글출처 이미지 - 문예출판사



<프롤로그>

베버는 프로테스탄즘의 윤리가 자본주의의 정신 형성에 어떻게 관여하였는가를 ‘직업소명의식’의 해명을 통해 추적하고 있다. 경영경제학을 전공한 필자의 식견으로는, 경제이론을 고려할 때 항상 문제시되는 영리와 도덕의 양자택일에 관해 이 책만큼 명백한 지표를 제시한 책은 아마 없을 것이다.



베버저작에 대한 INTRO.
베버는 (1864-1920, 56세 일기) 경제학과 법학, 사회학, 신학 등 다방면에 결쳐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원래 위의 저작은 맨 처음 두 편의 논문으로 발표된 것으로 [종교사회학논집] 제 1권에 수록된 수작이다. 이 논문이 발표된 후 여러 저명한 학자들의 논쟁이 벌어졌다. 자본주의의 기원에 대한 논쟁이 오늘날도 이어지고 있다. 중국에서 시작되었는냐? 유태인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느냐? 카톨릭이나 개신교 양진영에서도 첨예한 논쟁이 아직도 이루어지고 있다.

최근 동아시아의 경제발전과 관련하여 베버의 사상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동아시아의 유교윤리가 후발 자본주의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주장이 크게 기되고 있다. (하버드대학의 투웨이밍 교수) 투웨이밍은 서구 선진국의 자본주의의 정신의 청교도 윤리에 버금가는 신유교윤리(위계질서, 교육, 권위, 충성과 효)가 ‘동아시아의 자본주의의 정신’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베버사상과 대립각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베버사상의 연장선이라고 보는 학자가 더 많다.

베버의 독창적인 종교사회학적 접근방식은 궁극적으로 상부구조를 결정하는 것은 토대라고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적인 역사이해와는 크게 대립되는 것이다.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같이 대비하여 살펴보는 것이 이해를 돕는 큰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베버는 인간의 행위에 직접 지배하는 것은 이해관계이지, 이념에 의해서 만들어진 세계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베버사회학의 특징은 다원적 시각이 담겨 있다고 평가되어지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베버와 마르크스의 사상과 입장을 상호보완적으로 보면서 근대자본주의의 역학과 모순에 대한 이해가 더 충실해 질 수 있다. 그들은 각기 자본주의의 정신적 물질적 양측면을 강조하면서도 이념적 기초와 물질적 조건을 서로 경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이든 정신이든 베버는 일원론적이거나 이분법적 세계관을 배척하고 역사에서 늘 다원적이고 복잡한 인과관계의 연관성을 인정했다. 따라서 베버가 자본주의 정신의 발단은 프로테스탄티즘에서 비롯 된다는 것도 충분한 인과관계를 고찰한 후에 주장되어진 것이다.


역사연구란 무수히 다양한 역사적 현실을 어떤 한가지 ‘이념형’ 이나 ‘고정관념’에 의해서 재단된 단편성이 아니라 인과관계의 연관성을 설명하려는 작업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그의 연구자세였다.
오늘날 많은 역사학자들이 베버를 추앙하는 것도 바로 이런 연유이다. 베버는 자신의 이러한 태도가 “이는 문화현상의 총체가 물질적 이해관계의 산물 또는 그 함수로써 연역될 수 있다는 낡은 신앙과는 다른 것이며, 사회현상과 문화현상을 경제적 제약과 중요성이라는 특수관점에서 해석하는 일은 창조적 효과를 가져다주는 과학적 원리의 하나이다. 이를 주의 깊게 활용하고 독단에 빠지지 않느다면 앞으로도 유효할 것이다.

‘세계관’으로서의 역사적 유물론이나 역사적 실재에 대한 모든 관계를 설명해 주는 공통분모로서 역사적 유물론은 결단코 부정되어져야 한다. 그렇지만 경제적 역사해석이라는 작업은 우리 논문의 대단히 중요한 목적중의 하나이다” 라고 말한다.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종교적 동기를 규명

베버는 비교종교사회학이라는 일련의 연구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근대 유럽의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 학문과 예술 등의 모든 영역을 관통하고 있는 ‘합리주의 rationalism ' 가 어떻게 근대 유럽에서만 탄생하고 성장하면서 그 같은 특질을 갖게 되었는가를 해명하고자 노력하였다. 베버가 ‘종교사회학’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유럽의 자본주의의 정신과 루소의 종교개혁과 칼뱅의 신학사상등의 프로테스탄트의 각종파나 교파의 금욕적 생활양식사이에 어떤 결정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을 베버의 사회학적 통찰력이라는 렌즈를 통해 고찰하게 된다.

곧 이러한 관련성의 규명을 통해 유럽의 자본주의에 종교적 동기가 어디까지 관여하고 있는지 밝힐려고 노력했다. 그렇지만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가 자본주의 정신과 동일시하는 것은 결코 하지 않았다. 결정적 동인(Drive)으로서 본 것이다. 자본주의 정신은 자본주의 제도와도 다르게 보아야 한다.


자본주의의 정신
베버가 말하는 ‘자본주의의 정신’이란 무엇인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베버의 ‘자본주의’가 인류의 역사상 언제, 어느 곳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는 영리활동이나 이윤추구의 행위가 아니라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베버의 ‘자본주의 capitalism'은 근대 유럽에만 있는 독자적인 ‘자본주의’라는 것으로서, 자유로운 임금노동자의 노동에 기초한 ‘합리적이고 경영적인 산업조직’의 보급에 의한 사회의 욕구충족을 오로지 ‘시장관계(Price Mechanism) 와 수익성(profitability)을 지향함으로써 수행되고 있는 영리경제를 말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존재했다. 서구유럽이 매우 독특했던 점은 모험가적 자본주의와는 구별되는 합리적 자본주의의 출현에 있다.


그러한 이유로 자본주의의 정신이라는 것은 ‘영리추구의 목적’, '자본가적 정신’ 등은 결코 포함될 수 없다. 그러한 모델로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벤자민 프랭클린’이다.(그외에 리처더 백스터도 있지만 프랭클린만 언급한다.) 그의 근면과 노동, 소질, 정직, 신용 등과 같은 덕목에 대한 유명한 도덕교훈에서 전형적으로 제시되는 정신 혹은 윤리를 가르키는 것이다.

프랭클린의 도덕률에 명백히 제시되어 있는 것은 ‘신용할 수 있는 정직한 사람이라는 이상’이며 특히 자신의 자본을 증식시키는 것을 자기 목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각각의 의무라고 하는 사상이다. 이는 하나의 윤리적 태도, 에토스 Ethos의 표명이며, 이와 같은 에토스가 바로 베버의 ‘자본주의의 정신’이라고 부른 것이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적 역할

근대 유럽의 자본주의의 성립되기 이전에는 대개의 영리행위나 이윤추구는 윤리와는 무관한 것으로 여겨졌고, 도리어 부도덕한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근대에 이르게 되면 경제에서 전통주의는 극복되고, 경제적 영위가 정신적 또는 윤리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이 같은 전환에 결정적인 작용을 한 요인가운데 하나가 바로 종교개혁 이후에 등장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라고 베버는 파악한 것이다.

물론 부의 축적을 중시하는 ‘자본주의의 정신’이 탄생될 때 이른바 산파역으로서 그 요람을 지켜보며 윤리적 태도를 주입하는데 이바지한 것이다. 베버의 주장이 설득력이 강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의 발달이나 정신이 이와 같은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성이 지배성을 갖추었다고 보기도 어럽다. 그 후 카톨릭도 ‘자본주의의 정신’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하는 ‘소명 calling'의 저자 마이클 노박같은 학자도 있다. 일본의 경우는 프로테스탄트즘의 윤리로 경제가 성장한 곳이 아니다. 다만 근면이나 성실 등 그와 유사한 정신적 체계가 만들어 내었다고 보아야 한다.


직업의 소명의식
직업은 독일어로 Beruf 영어의 Calling에는 ‘신의 소명’ 이나 부르심의 의미 이외는 세속적인 직업이라는 의막 포함되어 있다. 세속적인 직업이 바로 신의 부름에 기초한 우리의 사명이라는 사고방식은 프로테스탄티즘의 고유한 윤리개념이었다.

(참고로, 히브리어에 직업이라는 말은 ‘아보다’라고 하며, 직업이라고도 하고, 예배라고도 부른다. 히브리인들은 생활속에서도 예배하는 자세로 직업의무를 수행하라고 본 것이다. 희랍어나 라틴어에서는 윤리적인 색조를 갖는 말은 없다. 소명이라던지 부르심과 관련된 의미를 찾기 어렵다. 다만 스페인어의 ‘vocation'만이 내면적인 부르심beruf,와 같은 일부 의미를 갖는다.)

종교개혁가인 루터는 ‘사람을 의롭게 하는 것은 오직 신앙에 의한 것뿐이다’ 라는 의인론을 통해 카톨릭의 율법준수의 엄격주의와 교리주의를 비판하고 공격을 했다. 그 결과로 수도원 운동의 몰락을 가져왔다. 성직자나 수도자들을 일종의 더 가치있는 직업이라고 여기는 종교적 관행이 타격을 입게 된 것이다. 도리어 그들을 세속의 의미를 도피한 이기주의적 행동이라고 여겼다. 생활속의 각 개인의 위치에서 생겨나는 세속에서의 의무수행이야말로 다름 아닌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사명이라는 주장이다.

  • 구글출처 이미지 - 막스 베버의 명언



루터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직업개념을 비판한다. 즉 신앞에서 의롭기 위하여 아무 쓸모도 없는 수도원 생활은 현세의 의무를 버러지는 냉혹한 이기적인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직업은 신앞에서 단적으로 같은 가치를 갖는다” 라는 평등한 견해가 등장한다. 그리고 점차 더 강조되어 갔다. 그렇지만 베버는 저작에서 모든 직업을 동기치한 것으로 보는 개념이 사회의 신분제도가 신의 뜻이라고 보는 관점에 한계가 있음을 지적한다.

기도하고 또한 노동하라.
(베네딕트 수도원의 아포리즘)
루터파와 비슷한 노선을 같이 하고 있는 칼뱅파의 사람들은 ‘신의 은총에 의한 선택설 - 예정설’이라는 무시무시한(?) 독트린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칼빈에 의하면 인간은 전적 타락하여 전적 구원이 필요한 존재라고 하였다. 그리고 인간의 구원은 절대적으로 신의 자유로운 결정에 의해 이미 영원한 과거(만세전)에 결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칼빈주의의 예정설은 “신이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는 말로써 신과 인간의 관계를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가르침을 따라는 신자들이나 교인들은 자신의 구원의 은혜와 은총으로 구분된 자임을 현세에서는 노동이나 이웃사랑과 같은 실천을 통해서 증명해 보여야 했다. 그들에게 ‘직업의 소명의식’이라는 것은 실은 ‘신의 영광을 드높이기 위한 노력’이며 ‘악마나 죄악의 유혹에 대항하기 위한 싸움’이라는 치열한 전투적 의미를 내포한 것이다.

일상생활에 구석구석까지 조직적으로 철저하게 합리화하고 일체의 쾌락을 멀리하며, 직업노동에 힘써야 한다는 엄격한 생활윤리나 태도가 생겨났다. 그전에는 과거 ‘기도하고 노동하라’는 베네딕트 수도원의 금욕적 생활태도는 그대로 ‘세속’으로 옮겨져 세속에서의 금욕을 통해 직업노동을 ‘성화 sanctification' 시키는 것이 되었다.

칼빈의 직업소명설은 인간의 소명은 신의 선물이므로, 신의 선물에 맞는 좋은 청지기로서 기독교인들은 탐욕을 막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재정적 이익을 축적하는 수단과는 달리, 인간이 소명은 이웃의 사랑을 나타내고 이웃의 안녕을 이루는 정상적인 채널인 것이다.


금욕주의적 직업윤리를 가르친 칼빈주의
칼빈주의는 스위스 제네바를 중심으로 하여, 유럽 각국으로 번져 나갔고, 칼빈주의의 직업윤리는 유럽의 중산계급에 깊이 침투하였다. 베버가 가장 크게 주목한 것은 루터나 칼빈의 가르침 그 자체가 아니라, 이들의 가르침에서 비롯되는 실생활에 대한 영향력이었다. 따라서 이는 에토스적인 문제라고 볼 수 있다.

그 무렵의 중산계급의 에토스는 직업노동의 조직화와 합리화로 집약이 되는데, 이는 무신론적이고 천민(파리아) 자본주의적인 화폐와 재산의 열렬한 추구에 대한 혐오감도 반영이 되어 있었다.

(참고로, 베버는 개신교의 여러 양상인 경건주의, 메서디즘, 다른 교파와 종파들을 저작에서 나열하면서, 서구유럽에 나타난 프로테스탄티즘의 영향력을 살펴보았으나, 지면관계상 실지 않는다.)


금욕적 절약에 의한 자본의 축적

금욕생활을 하면서 조직적 직업노동에 종사하면 당연한 결과로 부가 계속해서 쌓이게 된다. 그러나 부에 기대에 휴식을 취하거나 부를 향유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부는 절약을 통해 더 늘어나며, 또한 다른 사업에 투자되어 더 큰 부를 가져오게 된다. 직업의무의 수행은 처음부터 명령이었기 때문에 정당한 노동으로 손에 들어온 이익은 ‘신의 하사품이나 보너스’로서 정당화되었다. 나아가 이윤획득의 기회에는 신의 섭리라는 의미가 부여받기에 이른다.

베버는 이렇게 설파한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세속적 금욕은 사려와 분별이 없는 소유의 향락에 온 힘을 기울여 반대하고, 소비, 특히 사치하는 소비를 거부하였다. 반면, 금욕은 심리적으로 이윤추구를 합법화하게 하였다. 그뿐 아니라 그것이 직접 신의 의지에 따르는 길이라고 생각하게 함으로써 과거의 윤리라는 질곡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한다...... 육체의 욕망과 사물의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한 투쟁은 결코 합리적인 경영을 위한 투쟁이 아니었다. 비합리적으로 소유를 사용하는 데에 대한 투쟁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소비가 압살되고 영리에 대한 전통적인 비판에서 해방되면서 필연적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금욕적 강제 절약에 의한 자본형성’ 바로 그것이었다. 이득을 소비하지 않으면, 그것은 곧 투자자본이 되어 생산에 이용되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 이루어진다.


직업윤리의 탈종교화

막스 베버는 ‘부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오만과 걱정 그리고 온갖 형태로 세속에 대한 애착도 늘어나게 된다.’ 라고 보았다. 이렇게 하여 점차 직업윤리속에 탐욕이 침투해 들어오게 되고, 애초의 금욕적인 프로테스탄티즘과 단단히 연결되어 있던 ‘자본주의 정신’은 마침내 종교적인 외투를 벗어버리게 된다. 직업윤리속에서 신앙의 뿌리가 상실되고, 신의 모습이 희미해지면서 부, 그 자체가 전면에 크게 확대되게 된다. 현대 기독교인들을 보라. 신보다 돈에 더 치우친 교회내 세속주의의 늪에 빠져 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더 많은 부와 이익을 얻기 위해서 일체의 행위를 합리화하게 되고, 그들을 위한 전력을 다한다는 세속적인 윤리로 변모해 나간 것이다.

이를 ‘공리적 현세주의’라고 부른다. 베버가 이 저작에서 언급한 ‘자본주의의 정신’이라는 것은 다름 아니라 금욕적인 프로테스탄티즘의 직업윤리에서 그 종교적 기반을 제거한 것이다. 따라서 근대의 합리적인 생활양식이나 자본주의화는 그리스도교의 금욕의 정신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전문화, 조직화, 기계화는 근대 자본주의의 숙명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의 내적 연관성을 해명하고, 그에 입각해 현재와 미래에 대한 전망을 서술한다.

“일찍이 퓨리탄(청교도들)들은 직업인기를 바랐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직업인이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금욕정신은 수동원에서 직업생활의 한복판으로 옮겨져 세속적 도덕을 지배하기 시작하자마자 이번에는 기계적 생산조건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 근대적 경제조직이 더 강력한 세계질서를 만들어 내는 데 힘을 더해 주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세계질서야말로 압도적인 힘으로 그 톱니바퀴속에 들어가 있는 일체의 모든 개인 - 직접 경제적 영리에 종사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 의 생활을 결정하고 있으며, 미래 역시 아마도 마지막 한방울의 화석연료가 불태워질 때까지 이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베버는 오늘날 ‘강철과 같이 견고한 외피’로 변해버린 자본주의를 관통하는 합리화 , 곧 전문화·기계화·조직화는 바로 근대의 ‘숙명’이라고 말한다.

“장차, 이 견고한 외피속에서 살아갈 자는 누군인가, 그리고 거대한 발전이 끝날 무렵, 전적으로 새로운 예언자가 등장할 것인가, 또는 과거의 사상과 이상이 강력하게 다시 부활할 것인가. 그 어느 것도 아니라면 거대하게 장치된 기계에 화석화가 일어날 것인가. 이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설령 이를 알지 못한다고 해도 그런 문화속에서 살 ‘마지막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진리일 것다. ‘정신이 없는 전문인’, ‘가슴이 없는 향락인’ 이 처럼 텅 비어 있는 인간들이 일찍이 달성된 적이 없었던 인간성의 최고단계까지 스스로 올라섰다고 자찬할 것이다.”

베버 특유의 역사적 연구는 이처럼 자본주의의 장래에 대한 엄격한 전망으로 끝맺고 있다.
베버는 요즘 활발하게 논의되는 ‘통섭’을 했던 학자로 보아야 한다. 베버는 독일 전역의 4군데 대학에서 수학을 하고, 처음 사회학자로 출발을 했지만, 철학, 법학, 경제학, 정치학, 종교학에 모두다 능통한 최고의 인문학자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도 여러 가지 고전을 섭렵하여 폭넓은 시각으로 사회를 바라볼 필요가 있으며, 자기가 소중하게 여길 가치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토론할 점

1. 왜 베버는 자본주의 제도라고 하지 않고, 자본주의 정신이라고 했는가?

2. 베버의 역사접근과 마르크스의 역사접근은 크게 무엇이 다른가?

3. 베버의 역작에서는 직업윤리가 탈종교화를 걸었다고 하는데, 그러면서 기독사회는 크게 건재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4. 오늘날 베버사상이 우리 생활에 주는 소중한 가르침과 교훈은 무엇인가?

5. 현재의 급속한 자본주의화를 살펴보면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현명하고 바른 것인가(인문학적 통찰력을 요구)?

6. 동아시아의 유교윤리가 과연 동아시아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고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여러 윤리성의 혼재가 발전에 큰 기여를 했는가?

7. 한국자본주의를 살펴보면서, 부동산투기, 정경유착, 부패경제, 빈부격차, 노동문제 등을 보면 베버가 말한 [천민자본주의 ,Paria Capitalism)]에 사로잡혀 있다고 할 수 있다. 금욕적 생활방식과 노동과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없이 욕심으로 가득찬 부의 집착은 결국 천박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베버의 합리적 자본주의를 형성하라는 목소리를 한국사회에 담을 수 있는 길은 없는가?

#독일에는 두 막스가 있어요.
칼 막스와 막스 베버죠. 처음에는 칼 막스가 우세한 듯 했어요. 공산주의가 민주주의를 이갈 줄 알았어요. 그런데 자본주의로 무장한 민주주의가 승리합니다.
#무단전재 절대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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