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 별세
국제 정세를 주도했던 논란의 외교 거물
< BBC 방송 특집기사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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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어록으로 살펴보는 헨리 키신저의 삶과 유산
여러모로 의견이 엇갈리는 인물인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향년 100세를 일기로 지난 29일(현지시간) 코네티컷주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국제 관계에 있어 “현실주의”를 표방하고 실천했던 키신저는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동시에 전범으로도 비난받는 인물이다.
키신저는 미국의 국가안보보좌관, 국무장관으로서 미국과 구소련 및 중국 간 대립을 완화했던 데탕트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도 했다.
또한 양쪽을 오가는 ‘셔틀 외교’를 통해 1973년 아랍 세계와 이스라엘 간 분쟁 종식에도 기여했으며, 1973년 ‘파리 평화 협정’을 통해 미국을 오랜 베트남 전쟁의 악몽에서 구해내기도 했다.
지지자들은 이런 그에 대해 현실을 중시한 ‘레알폴리티크(현실정치)’라고 묘사하나, 비평가들로부턴 도덕관념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우선 키신저는 유혈 쿠데타를 통해 칠레 좌파 정부를 무너뜨린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정권을 암묵적으로 지지했다는 점, 아르헨티나 군부가 자국민을 탄압한 ‘더러운 전쟁’을 외면했다는 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 까닭에 1973년 키신저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코미디언 톰 레러는 “이제 정치 풍자도 한물갔다”는 유명한 촌평을 남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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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신저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으나, 비판도 뒤따랐다
나치 독일 탈출
하인츠 알프레드 키싱어(키신저의 독일어식 이름)는 1923년 5월 27일 바이에른의 중산층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키신저 일가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 뒤늦게 미국으로 이주했고, 1938년 뉴욕에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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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생 월터와 함께 촬영한 11살 키신저의 사진
‘헨리(‘하인츠’의 영어식 이름)가 된 키신저는 원래 수줍음이 많았던 십 대로, 늘 축구를 사랑했으며, 평생 독일어 억양을 구사했다.
키신저는 낮에는 면도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고등학교에 다녔다. 회계학을 전공할 예정이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으로 군에 징집되게 된다.
미 보병대에 배치된 키신저는 뛰어난 두뇌와 언어 능력을 군사 정보기관을 위해 사용했다. 키신저는 벌지 전투에도 참여했는데, 이등병에 불과했음에도 점령한 독일마을 한 곳을 맡아 운영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키신저는 방첩부대에 합류하며 전직 게슈타포(독일 나치 정권의 비밀경찰) 요원 추적팀을 이끌었다. 23살의 키신저에겐 용의자들을 체포하고 구금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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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핵전쟁
전후 미국으로 돌아온 키신저는 그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며 학벌을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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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신저는 1968년 닉슨 전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임명됐다
그러던 1957년, 그는 제한된 방식의 핵전쟁은 승리할 수 있다는 내용의 저서 ‘핵무기와 외교정책’을 출판했다. 이 책을 통해 키신저는 소형 미사일의 “전술적”이고 “전략적”인 사용은 합리적일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키신저는 주목받게 됐다. 평생 이어질 대단한 명성과 영향력의 시작이었다. 그의 이러한 “작은 핵전쟁” 이론은 여전히 오늘날까지도 영향력이 있다.
이후 키신저는 당시 뉴욕 주지사이자 대통령이 되길 꿈꿨던 넬슨 록펠러의 보좌관이 됐다. 그리고 1968년 대선에서 승리한 리처드 닉슨으로부터 국가안보보좌관이라는 요직을 제안받는다.
키신저와 닉슨 대통령의 관계는 복잡했다. 닉슨 대통령은 국제 외교에 관해선 키신저의 조언에 의존했으나, 반유대주의적인 감정 및 미국 유대인에 대한 의심을 놓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당시 냉전은 극에 달해 있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로 전 세계의 종말을 겨우 막았으며, 미군은 여전히 베트남에 남아 있었고, 러시아는 막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했던 상태였다.
데탕트
닉슨 전 대통령과 키신저는 소련과의 긴장을 완화하고자 했다. 이에 양국의 핵무기 보유량을 줄이기 위한 대화를 재개했다.
동시에 저우언라이 당시 중국 총리를 통해 중국 정부와의 대화도 시작했다. 이에 따라 미-중 관계가 발전했으나, 소련 지도부는 자신들의 거대한 이웃이 두려웠기에 외교적 압박을 느꼈다.
키신저의 노력 끝에 닉슨 전 대통령은 1972년 직접 중국으로 향해 저우언라이 총리와 마오쩌둥 초대 주석을 만났으며, 이렇게 중국은 23년간에 걸친 외교적 고립과 적대 관계를 끝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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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국빈만찬에 참석한 키신저와 저우언라이 전 중국 총리의 모습
베트남전
한편 당시 미국은 베트남전의 수렁에서 빠져나오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닉슨은 대선에서 “명예로운 평화”를 약속했고, 키신저는 승리한다 해도 “정치 현실을 고려할 때 베트남전 철수로 인한 성과보다” 못하기에 이미 오래전부터 미군의 베트남전 승리는 무의미하다고 결론 내린 상태였다.
이에 키신저는 북베트남과 협상에 들어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공산주의 북베트남군의 보급로를 끊고자 중립국이었던 캄보디아를 비밀리에 폭격하기로 닉슨 대통령과 결정했다.
이로 인해 민간인 최소 5만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캄보디아에선 사회가 불안정해지며 내전이 발발하고, 잔혹했던 폴 포트 정권이 들어서게 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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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프랑스 파리에서 만나 협상하는 키신저와 북베트남의 레득토. 이 둘은 이후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북베트남과의 다사다난한 협상을 통해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키신저는 남베트남에서 미군이 철수하겠다고 제안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북베트남 정치인 레득토와 함께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는데, 많은 평화 운동가들이 이에 격렬히 반대했다.
키신저는 “겸손한 마음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으며, 상금은 베트남전에서 전사한 미군의 자녀들에게 기부했다.
그리고 파리 평화 협정 2년 뒤,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다시 침공해 점령하자, 키신저는 노벨상을 반납하고자 했다.
현실정치
한편 키신저의 셔틀 외교는 1973년 아랍과 이스라엘 간 전쟁의 휴전을 불러왔다고 평가받는다.
닉슨의 비밀스러운 백악관 도청을 통해 골다 메이어 당시 이스라엘 총리가 닉슨 대통령과 키신저에게 이스라엘을 대하는 방식에 크게 감사했던 것이 드러났다.
그러나 도청 테이프를 통해 메이어 총리가 백악관을 떠난 뒤 더욱더 어두운 레알폴리티크의 모습이 드러났다. 사실 키신저도, 닉슨 대통령도 러시아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에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허용하라며 소련을 압박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키신저는 “소련에서 (이스라엘로) 유대인을 이주시키는 건 미국 외교정책의 목적이 아니”라면서 “만약 그들이 유대인을 소련의 가스실에 집어넣는다 해도 그건 미국의 관심사가 아니다. 인도주의적 관심은 몰라도”라고 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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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칠레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과 악수하는 키신저의 모습
그러나 칠레에서 마르크스주의자인 살바도르 아옌데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미국은 어려움에 부닥치게 된다. 새로 출범한 아옌데 행정부는 친쿠바적인 성향으로, 미국계 기업들을 국유화하기도 했다.
이에 미 중앙정보국(CIA)은 반대파의 새 정부 전복을 돕고자 비밀 활동을 전개한다. 그리고 이 작전을 승인한 위원회의 의장이 바로 키신저였다.
키신저는 “국민들의 무책임함 때문에 한 나라가 공산주의로 향하는 걸 왜 우리가 지켜만 봐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입장이었다. “이는 너무나도 중요한 문제이기에 칠레 유권자들이 스스로 결정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칠레에선 군부가 들고 일어섰고,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의 유혈 쿠데타에 아옌데 대통령은 사망했다. 이후 피노체트의 군인 다수가 CIA로부터 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이후 키신저 또한 칠레 군사 정권하에 자행된 인권 유린 및 외국인의 사망을 조사하고자 열린 여러 법정에서 언급되며 비난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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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대통령직을 승계받은 제럴드 포드 전 대통령은 계속 키신저를 국무장관으로 뒀다
1년 후,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해 물러나며 제럴드 포드가 대통령직을 승계받게 된다. 후임자인 포드 대통령은 키신저를 계속 국무장관으로 곁에 뒀다.
키신저는 로디지아에 압력을 가해 백인 소수자들의 통치를 종식하는데 기여하기도 했으나, 아르헨티나 군부 정권하에 이어지는 반대파들의 “실종”에 대해선 눈 감았다는 비난도 받는다.
‘권력은 최고의 최음제’
이러한 논란은 1977년 키신저가 공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뒤따랐다. 컬럼비아 대학에서 자리를 제안하기도 했으나, 학생들의 항의 시위로 철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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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촬영된 다이애나 전 영국 왕세자비와 키신저의 모습
키신저는 지미 카터, 빌 클린턴 대통령이 중동의 평화를 향한 너무 빠른 도약을 꿈꾼다며 이들 대통령의 외교 정책에 강한 비판자로 나섰다. 키신저는 평화는 오직 조금씩 천천히 이뤄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던 2011년, 9.11 테러가 발생하자 조지 W 부시 당시 대통령은 키신저에게 뉴욕과 워싱턴 DC에서 발생한 해당 테러에 대한 조사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키신저는 자신이 운영하는 자문 기업의 고객 명단 공개 및 이해관계 충돌에 대한 답변을 거부하며 몇 주 만에 조사위원회 의장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2003년 이라크 침공 이후 키신저는 부시 대통령과 딕 체니 부통령을 만나 이들에게 이라크 정책에 대해 조언하기도 했다. 그때 키신저는 “반란에 대한 승리만이 의미 있는 유일한 출구 전략”이라는 조언을 건넸다.
늘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던 키신저는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 백악관을 찾아 대통령에게 외교 사안에 대해 브리핑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크림 반도 점령을 인정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100세가 된 올해, 키신저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의견을 바꿨다. 키신저는 러시아 전쟁 이후 평화가 찾아오면 우크라이나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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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브리핑하는 키신저의 모습
한편 키신저는 인맥도 풍부했고 위트도 있었다. 키신저는 권력에 대해 “최고의 최음제”라고 말하길 좋아했다.
평범한 삶에선 한참 벗어난 삶을 살았던 키신저는 지난 세기 세계사의 여러 굵직한 사건에서 권력의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이었다.
많은 이들의 분노와 비판도 받았으나, 태어난 조국이 아닌 이후 자신의 조국이 된 미국의 이익만을 달려왔던 것에 대해 사과하지 않으며 평생 같은 입장을 유지했다.
살아생전 키신저는 “외교정책에서 도덕적 완벽함을 추구하는 국가는 도덕적 완벽함도, 안보도 달성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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