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일반 은혜는 하나님의 선하심의 표현으로서, 구원에 미치지 못하는 모든 은혜이며, 이 받을 자격이 없고 죄로 저주받은 세상이 하나님의 손에서 누리는 은혜입니다. 여기에는 진노를 늦추는 것, 우리의 죄성을 완화하는 것, 번영으로 이끄는 자연적 사건, 그리고 인간이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즐기는 모든 선물이 포함됩니다.
인류는 전적으로 타락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기에 합당하지만, 하나님은 자비롭게도 파괴하는 진노를 연기하시고 구원과는 별개로 모든 사람을 은혜롭게 축복하십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일반 은혜라고 합니다. 일반 은혜는 자연인이 하나님의 손에서 받는 모든 부당한 축복, 즉 비, 태양, 번영, 건강, 행복, 타고난 능력과 은사, 죄가 완전히 다스리지 못하는 것 등을 포함합니다. 일반 은혜 교리는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의미에서 "선한" 행위를 할 수 있음을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 일반 은혜는 구원의 은혜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모든 인간은 여전히 하나님과 화해하기 위해 성령의 구원 사역이 필요합니다.
처음부터 "공통"이라는 형용사가 성경에서 명사 "은혜"를 수식하는 데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비그리스도인들을 어떻게 대하시는지 묘사되어 있으므로, 우리가 이 형용사를 사용하는 것은 정당합니다. 우리의 과제는 평생 하나님을 믿지 않고 반역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의미로 주어지고, 어떤 의미에서 작용하는지, 그리고 과연 어떤 의미에서 작용하는지 파악하는 것입니다. (공통 "선함" 또는 "사랑"과 공통 "은혜"에 대한 논의는 존 프레임의 『신의 교리』( The Doctrine of God ) , 429-430쪽을 참조하십시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서 벗어난 인류의 처지를 묘사한 성경적 묘사가 너무나 암울하고 절망적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떠나 인류의 곤경을 묘사하기 위해 여러 구약 성경 본문을 인용합니다.
의로운 자가 없나니 하나도 없고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가치하게 되어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 3:10-12).롬 3:10-12 ).
신학자들은 이것을 전적 타락의 진리라고 부릅니다. 전적 타락이라는 용어는 모든 사람이 가능한 한 악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도덕적 타락과 고의적인 영적 어둠이 그들의 존재 전체, 즉 정신, 마음, 혼, 영, 몸, 애정, 그리고 의지에 스며들어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적 타락"의 의미를 오해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세상에서 보는 것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경험하는 것과 상충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려워합니다. 사회에는 극히 악한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그리스도인은 아니지만 우리가 "선한" 사람이라고 부를 만한 가까운 친구와 친척이 있습니다. 그들은 정직하고, 예의 바르고, 관대하고, 사랑이 많으며, "전적으로 타락한" 모습을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존재를 즐기며 그들의 인격을 보증합니다.
존 머레이가 매우 끈질기게 일련의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긴장감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여전히 누워 있고 지옥의 상속자인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손에서 그토록 많은 좋은 은사를 누리고 있을까요? 하나님의 영으로 구원의 새로움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과 타인의 보존, 현세적 행복, 문화적 진보, 사회적·경제적 발전을 촉진하는 그토록 많은 자질과 은사, 그리고 성취를 나타낼 수 있을까요? 복음의 구원적이고 재생적인 영향력에 영향을 받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인종과 민족들이 어떻게 우리가 인류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에 그토록 크게 기여할 수 있을까요? 가장 포괄적으로 질문을 던지자면, 죄로 저주받은 이 세상이 거룩하고 영원히 축복받으신 창조주의 손에서 그토록 많은 은총과 자비를 누리고 있을까요? ("일반 은혜", 존 머레이 전집 , II:93)
머레이의 질문에 대한 답은 성경이 우리가 하나님의 특별 은혜 또는 구원하는 은혜라고 부르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일반적이고 구원하지 않는 은혜를 구분하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물질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모두, 그의 모든 창조물에까지 확장됩니다. 그러나 그 선하심은 항상 그것을 받은 자들의 구원이나 구속을 의도된 목표로 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일반" 은혜, 즉 보편적이고 따라서 공통적인 신적 선하심과 은총의 은혜 또는 표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는 수혜자이지만, 모두가 같은 정도나 방식으로 그것을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렉 앨리슨이 지적했듯이, 우리가 "공통"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모두에게 동일한 정도로'라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이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세속적'이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일반 은혜는 종종 당연하게 여겨지고 그 근원인 하나님과 동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풍요로운 분야, 의학 발전, 예술적 재능, 사랑하는 가족, 인신매매 근절을 위한 국제적 노력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일반 은혜는 결코 지루하고 평범한 것이 아닙니다"(『기독교 신앙의 50가지 핵심 진리: 신학을 이해하고 가르치는 안내서』 , 206쪽).
예를 들어, 창세기 39장 5절에서 하나님께서 "요셉 때문에 이집트 사람의 집에 복을 주셨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일반 은혜를 생각해 보십시오. 루스드라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너희에게 비를 내리시고 결실기를 주시며 너희 마음을 음식과 기쁨으로 만족하게 하셨으니 선한 일을 행하셨느니라"(사도행전 14:17)라고 선포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께서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해를 비추시며 의로운 자에게나 불의한 자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마태복음 5:4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다"(누가복음 6:35; 또한 누가복음 16:25 참조)라고 묘사됩니다.창세기 39장 5 절에서 하나님께서 “요셉 때문에 이집트인의 집에 복을 내리셨다”고 말씀합니다. 루스드라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너희에게 비를 내리시고 결실기를 주시며 너희 마음을 음식과 기쁨으로 만족하게 하셨으니 선한 일을 행하셨느니라”( 사도행전 14장 17절 )라고 선포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께서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해가 떠오르게 하시며 의로운 자에게나 불의한 자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 마태복음 5장 45절 )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다”( 누가복음 6장 35절 , 또한 누가복음 16장 25절 참조) 라고 묘사됩니다 .
19 세기 개혁 신학자 Charles Hodge는 다음과 같이 믿었습니다.
진리와 거룩함과 생명의 영이신 성령은 모든 형태의 영으로서 모든 인간의 마음에 현존하시어, 진리를 강화하고, 악을 제지하고, 선을 행하도록 자극하며, 지혜와 힘을 부여하십니다. 이는 그분께서 보시기에 선한 때, 장소, 그리고 정도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신학에서 일반 은혜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조직신학 , II:667 참조).
아브라함 카이퍼는 일반 은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하느님 께서 사탄과 죽음, 죄의 작용을 부정적으로 억제하시고, 긍정적 으로 이 우주와 우리 인류를 위해 중간 상태를 창조하시는 행위입니다. 인류는 깊고 근본적으로 죄악을 지녔으며, 지금도 계속 죄를 짓고 있지만, 죄가 그 종말을 이룰 수 없는 상태입니다( 신성 신학의 원리 , 279 참조 ).
머레이는 일반 은혜에 대해 좀 더 간결하고 도움이 되는 정의를 제시합니다. 그는 일반 은혜를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이 자격 없고 죄로 저주받은 세상이 하나님의 손길로 누리는 모든 종류의 은혜"("일반 은혜", II:96)라고 정의합니다. 이제 우리는 세상에서 일반 은혜가 다양하게 나타나는 모습을 알아볼 준비가 되었습니다.
일반 은혜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선하심은 인간의 타락이나 죄의 표현을 억제하는 방식으로 먼저 발견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의 이러한 예방적 작용은 포괄적이지 않으며, 만약 그렇다면 죄는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획일적이지도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모든 남자와 여자는 동등하게 악하거나 동등하게 선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의미하는 것은 인간의 도덕적 타락의 발현과 결과가 그것이 허용할 수 있는 최대치에 도달하도록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경험적 사실은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지상에서의 삶은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일반 은혜가 억제라는 개념이 작용하는 영역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존 머레이는 각 개인의 개인적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억제를 다시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이 행해지는 것을 억제하시어, 인간의 불경건한 애정과 원리들이 그 안에 내재된 모든 잠재력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막으십니다. 또한 타락이 그 모든 격렬함과 폭력으로 폭발하는 것을 막으십니다("일반 은혜", II:98).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표를 찍어” “누구든지 그를 만나더라도 해치지 못하게”(창세기 4:15) 하신 것이 한 가지 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와 성관계를 가지려고 했을 때 “내가 너를 범죄하지 않도록 막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세기 20:6; 왕하 19:27-28 참조). 사도 바울은 불법한 자의 계시를 “막으시는” 분을 언급합니다(살후서 2:7). 이 모든 경우에 하나님(아마도 성령이시겠지만)은 악행이 될 수 있는 일을 예방하는 영향력을 행사하십니다.창세기 4:15 )가 한 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와 성관계를 가지려고 했을 때, “내가 너를 범죄하지 않도록 막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20:6 ; 또한 왕하 19:27-28 참조 ). 사도 바울은 불법한 자의 나타남을 “막으시는” 분에 대해 언급합니다( 살후서 2:7 ). 이 모든 경우에 하나님(아마도 성령)은 악한 행위가 될 수 있는 것을 예방하는 영향력을 행사하십니다.
따라서 우리 세상에서 성령께서 활동하시는 목적 중 하나는 죄악된 마음의 내적 성향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방해하거나, 억제하거나, 억제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분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면, 이 특정 활동을 완전히 없애거나, 철회하거나, 중단시키신다면, 우리 사회는 결국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될 것입니다. 인류의 사악함이 세상을 집어삼켜 극심한 혼돈과 부패의 기로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죄를 억제하시는 성령의 이 사역을 "은혜"라고 부르는 이유는 아무도 그럴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억제하시는 것은 심판받아 마땅한 자들에게 베푸시는 자비의 표현입니다. 이 사역을 "공통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사역이 보편적이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 거듭난 자와 거듭나지 못한 자 모두 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습니다. 이 은혜는 어떤 특정 집단에게만 국한되지 않으며, 반드시 구원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일반 은혜의 또 다른 표현은 인간의 죄로 인해 정당화되는 진노와 심판의 즉각적인 발현을 보류하시려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결심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2장 4절에서 이 진리를 질문의 형태로 제시합니다. "혹은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알지 못하고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과소평가하느냐"(창세기 6:3; 사도행전 17:30; 베드로전서 3:20; 베드로후서 3:9 참조).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자연 창조물 안에 있는 파괴적인 경향을 억제하시는 영향력을 행사하십니다.로마서 2:4 : “혹은 네가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오래 참으심의 풍성함을 과소평가하느냐? 창세기 6:3 ; 사도행전 17:30 ; 베드로전서 3:20 ; 베드로후서 3:9 ?”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자연 창조물 안에 있는 파괴적인 경향을 억제하시는 영향력을 행사하십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인간 마음의 불경건한 경향을 억제하시는 것 외에도, 죄로 인해 정당화되는 거룩한 진노의 즉각적인 발현을 기꺼이 유예하신다는 것입니다. 일반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이나 자비는 그분이 인간의 죄를 억제하실 뿐만 아니라 죄가 요구하는 온전한 심판을 즉시 집행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하심으로, 그리고 물질적 창조물에 대한 당신의 자비의 표현으로, 하나님은 또한 자연에 대한 죄의 저주의 일부인 파괴적인 경향을 억제하십니다. 존 머레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죄는 모든 영역에 분열과 무질서를 초래합니다. 죄는 이성의 영역에서만 의미를 지니는 것이 사실이지만, 죄는 이성과 도덕의 영역 안에서뿐만 아니라 그 영역 밖에서도 파멸적인 결과를 초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결과들을 억제하시고, 이러한 분열이 완전히 진전되는 것을 막으십니다. 그분은 이 세상의 모든 영역에 교정하고 보존하는 영향력을 행사하시어 죄의 파괴력이 그 파괴력을 최대한 발휘하지 못하도록 하십니다("일반 은혜", II:101).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이에 대해 언급하며, 창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사모하는”(롬 8:19) 모습을 묘사합니다. 물질적인 창조물, 즉 우리가 자연 이라고 부르는 것은 “허무한 데 굴복한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신 이로 말미암음이니,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 자신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 8:20-21)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하늘의 권세들이 불타 없어지고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날”(벧후 3:11) 날을 묘사합니다. 이 심판은 하나님께서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벧후 3:13)을 창조하실 때까지 일시적으로 중단됩니다. 죄로 저주받은 이 땅이 즉시 멸망되지 않는 한 가지 이유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까지 최종적이고 불가피한 심판을 억제하시는 일반 은혜 때문입니다.로마서 8장 에서 그는 창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것을 묘사합니다( 롬 8:19 ). 물질적인 창조물, 즉 우리가 로마서 8:20-21 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 베드로는 “하늘의 권세들이 불타 없어지고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날” 날을 묘사합니다( 벧후 3:11 ). 이 심판은 하나님께서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때까지 일시적으로 중단됩니다( 벧후 3:13 ). 이 죄로 저주받은 땅이 즉시 파괴되지 않는 한 가지 설명은 하나님께서 정해진 때까지 최후적이고 불가피한 심판을 억제하는 일반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일반 은혜의 또 다른 측면은 그 추진력이 더 긍정적입니다. 하나님은 인간 마음의 죄악된 작용과 결과를 억제하실 뿐만 아니라, 자연과 인간 모두에게 육체적, 영적 축복을 다양하게 베푸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축복은 구원 그 자체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물질 세계에 축복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여러 곳에서 읽습니다.
주께서 땅을 돌보사 물을 대시며 크게 윤택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며 곡식을 주시니, 주께서 이를 예비하셨음이로다. 고랑에 물을 넉넉히 주시고,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소나기로 부드럽게 하시며, 그 성장을 축복하시나이다. 주께서 은혜로 한 해를 장식하시며, 주의 마차길에 풍성함이 넘치나이다. 광야의 초장이 넘치고,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고, 초원이 양 떼로 옷을 입히고, 골짜기가 곡식으로 단장하니, 그들이 함께 기뻐 외치고 노래하리이다(시 65:9-13; 또한 시 104:10-30; 145:1-16; 136:25 참조).(시 65:9-13 ; 또한 시 104:10-30; 145:1-16 ; 136:25 참조).
머레이는 하나님께서 남녀에게 그들이 받을 자격이 없는 은사와 재능, 그리고 기회를 어떻게 부여하시는지에 대해 다시 한번 우리의 관심을 끌도록 도와줍니다.
그는 재능, 재능, 그리고 소질을 지닌 자들을 미덕을 실천하고, 가치 있는 일을 추구하며, 예술과 과학을 함양하도록 흥미와 목적을 가지고 자극하는데, 이러한 것들은 인간의 시간과 활동과 에너지를 소모하여 인류의 이익과 문명에 기여합니다. 그는 권리의 보호와 증진, 자유의 보존, 지식의 진보, 그리고 신체적·도덕적 조건의 개선을 위한 제도들을 제정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관심사, 활동, 그리고 제도들이 추방적이고 충동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인간의 에너지, 활동, 그리고 시간을 소모하여 덜 고상하고 비열한 활동에 빠지지 않도록 막고, 사회 유기체에 개선적이고, 도덕적이며, 안정적이고, 문명화하는 영향력을 행사합니다("일반 은혜", II:102–03).
우리는 창세기 39장 5절, 사도행전 14장 16-17절, 마태복음 5장 44-45절, 누가복음 6장 35-36절, 그리고 16장 25절에서 이러한 일반 은혜의 표현에 대해 읽습니다.이것이 우리가 완전히 타락한 사람들이 "선한" 것으로 여겨지는 행위를 하고 봉사를 제공한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왕하 10:30; 12:2; 마태복음 5:46; 누가복음 6:33; 로마서 2:14-15 참조).그러나 머레이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에게 돌려지는 선은 결국 상대적인 선일 뿐입니다. 그것은 동기, 원칙, 그리고 목표에 있어서 하나님의 율법과 그의 거룩함의 요구를 충족시킨다는 의미에서 선한 것이 아닙니다"("일반 은혜", II:107)라고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따라서 그러한 행위는 어떤 식으로든 그들을 아버지의 의로운 기준과 요구에 부합하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든 “은혜”의 역사(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불림)가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이유는 그 의도나 결과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낳을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창세기 39:5 , 사도행전 14:16-17 , 마태복음 5:44-45 , 누가복음 6:35-36 , 16:25. 이것이 우리가 완전히 타락한 사람들이 "선한" 것으로 여겨지는 행위를 하고 봉사를 제공한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왕하 10:30; 12:2 ; 마태복음 5:46 ; 누가복음 6:33 ; 로마서 2:14-15 참조). 그러나 머레이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에게 돌려지는 선은 결국 상대적인 선일 뿐입니다. 그것은 동기, 원칙, 목표에 있어서 하나님의 법과 그의 거룩함의 요구를 충족시킨다는 의미에서 선한 것이 아닙니다"("일반 은혜", II:107)라고 상기시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행위는 어떤 식으로든 그들을 아버지의 의로운 기준과 요구에 부합하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든 “은혜”의 역사(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불림)가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이유는 그 의도나 결과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낳을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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