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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疏通)하는 인성(人性) 그 철학함에 대하여

커뮤니케이션과 부모교육

by 코리안랍비 2025. 6. 2.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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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疏通)하는 인성(人性) 그 철학함에 대하여

오늘 글은 난해할 수도 있고, 복잡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천천히 나의 사색의 힘을 발휘하여 기술하려고 합니다. 급하고 날렵한 글은 사색부재의 글입니다. 생각하면서 말하고, 생각하면서 글쓰기를 하면 스스로가 공감되고 감동되어서 다른 이들에게 [파급효과]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어떤 사람이 [리더란 누구인가요?]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리더쉽을 오래 공부한 나로서도 내 나름의 제대로된 정의가 없었는데 문득 떠오르는 단어가 바로 [소통(疏通)]이었습니다. 소통을 COMMUNICATION 커뮤니케이션으로 말하지만 사실상 [커뮤니케이션]보다 더 위에 있는 상위개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소통(疏通)]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소통의 한자를 보니, 소(疏)는 트일 소이며, 통은 통할 통(通)입니다. 그런데 이 소통은 반드시 인성(人性)과 같이 만나서 조합을 이루어야 [소통하는 인성을 가진 사람]이 바로 리더라는 정의를 내리게 됩니다.

물론 리더란, ‘끌려가는 사람이 아니라 끌고 가는 사람’이라고 정의하지만 사실 너무나 추상적으로 심적(心的)으로도 먼 정의입니다. 리더는 끌고 가기도 하지만 본인도 따라가는 존재 - 팔로워 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소통이 되지 않으면 반드시 싸움과 다툼이 일어납니다. 현실적인 세상은 늘 ‘싸움과 다툼’이 일어납니다. 사람의 인성은 [함께, 더불어]를 말하지만, 현실의 방향은 [따로, 나만]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현실적으로 우리는 남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능력’이 있고, ‘성공’한 삶이 보장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여러 철학서들이나 윤리서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현실은 자꾸만 ‘인성이 중요해’ 라고 말하면서도 ‘인성을 도외시(度外視)’ 한다는 것입니다.

인성(人性)은 사람의 됨됨이나 바탕을 평가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정신의 크기’를 말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물질의 크기’를 강조합니다. 우리는 사회문제에서는 늘 인성(人性)을 강조하다가도 개인 문제로 가면 늘 물질(物質)이 앞섭니다.

물론 나 자신은 크리스찬입니다. 하지만 앞에 형용사적으로 다시 말하면 ‘현실적 크리스찬’입니다. 하이데거는 말했습니다. “존재(Sein)가 의식(Bewusst-sein)을 결정한다”지만 우리가 눈으로 보는 세상이나 현실은 ‘의식이 존재를 결정한다’라는 것입니다.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느끼는 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생활에서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른 개념을 가진 사람이 바른 언어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나 자신도 바른 개념을 정립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우리가 싸우는 싸움도 크게는 [남과의 싸움과 나와의 싸움]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싸움의 발생은 [소통문제]에서 크게 일어납니다. 남과의 싸움은 더불어 함께 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것이요, 나와의 싸움은 자신과의 대화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라고 봅니다.

자연이든 사람이든,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인간은 만남과 소통 속에서 함께 일하고, 놀고, 싸우고, 사랑하고, 말하며 살아갑니다. 자연을 잘 보면 나름의 ‘길’을 갖고 있습니다.

물의 속성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노자의 [도덕경]에서 보면 물은 무엇인가 장애물을 만나면 돌아가거나 넘어갑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길을 꾸준히 갑니다.
바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람은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돌아가거나 빈 공간을 통해서 지나갑니다. 새들도 새의 길들이 있습니다. 공중의 많은 새들을 보면서도 서로 부딪치지 않고 날개짓을 하면서 자유로이 [자연법칙]을 따라서 날아다닙니다. 자연은 이미 [함께 하는 법과 소통하는 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도 인도(人道)- 인간의 길이 있습니다.
논어(論語)나 맹자(孟子)를 보면 인간의 길에 대한 이해를 명시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인간의 길도 서로 막힘이 없거나, 서로가 사통팔달 통하게 되면 진정 ‘사람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통이 된다는 것은 곧 인성이 좋다]라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하지만 이 땅의 만남과 소통을 잘 보면 피상성이 너무나 강합니다. 유학시절에 마르틴 부버의 [대화사상]을 공부한 적이 있는데 그는 대화의 철학자로 불리웁니다.
그는 “대화는 나와 너의 대화가 진정한 대화이지, 나와 그것, 나와 그것들의 대화는 진정한 대화가 아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의사와 환자의 대화는 기술적인 대화이지, 사랑과 영혼의 대화가 아닙니다. 의사는 환자를 대화의 상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치료의 대상이거나 돈벌이의 대상입니다.

또 상담자와 피상담자의 대화도 기술적인 대화입니다. 상담자는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피상담자를 상대합니다. 피상담자는 상담기법과 기술을 가진 이의 코치와 카운슬링을 받습니다. 물론 거기에서 ‘효과 effect' 라는 것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진정한 대화의 측면은 아닌 것입니다. 마치 연극을 보는 듯한 설정을 우리 삶에서 자주 보는데 그것이 바로 ‘피상성’입니다.

이 피상성이 누구에게나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피상성은 바쁜 세상에서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일종의 ‘겉치레’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피상성을 그렇다면 벗는 길이 있을까요? 바로 피상성을 벗는 길은 그 사람의 인성과 관련이 깊습니다.



탈무드를 보면 그 사람의 인성이나 인격을 판단하는 랍비의 기준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를 미워하는지를 알면 그 사람의 인성을 알 수 있다” 라고 합니다.
미워하는 사람들을 보면 아마 싸움이나 다툼이 수시로 일어났거나, 자신의 성격이나 기질과 안맞거나, 대화에 있어서 일방적이거나 아니면 무시하거나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물론 싸우는 것도 소통이며, 만남도 소통의 양태(樣態)입니다.
싸우는 것은 [함께]하지 못할 때 일어납니다. 반대로 만남은 [함께] 할 수 있을 때 일어납니다. 하지만 싸움도 불합리하거나 부조리한 것, 부당하고 잘못된 것과 싸우는 것은 언제나 [정당방위(正當防衛)]가 성립됩니다. 하지만 그런 싸움이 아니라 밥그릇을 놓고 싸우거나, 자리와 명예를 놓고 싸우거나, 쓰잘떼기 없는 것으로 싸운다면 이 싸움은 소통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런 싸움이 세상에는 늘 일어납니다. 이는 서로를 못 살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래서 [함께, 더불어] 가는 길을 막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 제일 어렵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조금 전에 말한 [물질크기와 사람크기]에 대한 개념을 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정도의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규모(scale)를 가져야 합니다. 물질의 크기가 너무 적으면 자본주의 세상에서 상대적으로 위축되고 힘들어집니다. 물질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세상살이는 편해지기는 합니다. 행복을 둘째치고라도... 하지만 정신의 크기도 물질의 크기 이상으로 커야 합니다. 정신을 물질아래에 두게 되면 그것은 ‘인성(人性)’ 수준이 낮은 사람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 사람의 크기, 그 사람의 됨됨이, 그 사람의 바탕을 평가하는 것은 곧 그 사람이 세상과 어떻게 소통하느냐를 판가름해주는 척도가 됩니다. 인성은 곧 척도입니다.

이 세상이 문제가 많고 소통이 어려운 이유를 공자는
[사리사욕(私利私慾)]에서 보았습니다. 사리사욕(私利私慾)이란 개인의 이익을 앞세우려다가 타인의 손해를 만드는 경우를 말합니다. 갑질을 하는 것도 개인의 이익을 앞세우는 것입니다. 물론 을질도 을의 이익을 앞세우려고 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너가 있는 나]가 되고, [나가 있는 너]가 되기를 바라였습니다. [기소불욕 물시어인 己所不欲 勿施於人]이라는 논어(論語)의 말로 사람들을 계도하였습니다. ‘자기가 하기 싫어하는 일을 남에게 시키지 않는 것’이 바로 [바른 인성]이라는 것입니다.

앞서 [함께,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이 바로 ‘사람의 크기’를 말하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자신이 싫어하는 일을 남에게 시키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사리사욕을 비울수록 다른 이들을 공정하게 대하게 됩니다. 공정할수록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커뮤니티’ 공동체라는 단어를 살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커뮤니티는 ‘컴’이 함께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뮤누스 라는 단어가 붙었습니다. 이 뜻은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즉 공동체는 [서로가 서로에게 선물이 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참 좋은 표현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선물’이 된다면 그 공동체는 ‘법 없이도 사는 아름다운 집합체’입니다.

그렇다면 서로가 서로의 [선물]이 되려면 먼저 나 자신을 돌아보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더불어 함께] 하려면 무엇보다 공자가 말한 [자기비움]이 필요합니다. 즉 물질적인 욕망을 추구하면서도 정신적인 비움도 추구하는 것은 정말 많은 내적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렵게 살 수는 있어도 못나게는 살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의 가치와 평가는 궁극적으로는 그 사람의 [사람의 크기, 즉 인성]가지고 합니다. 현실은 그 정반대로 평가하려고 합니다.

예전에 청년시절에 [독일의 하버마스]로부터 직접적으로 [사회철학특강]을 들은 적 있습니다. 그는 [소통부재의 시대]를 가장 안타깝게 생각한 사람입니다. 그는 한국사회를 보면서, “수직적 문화에서 수평적 문화로의 전향”을 강조하였습니다. [나만 있고, 너는 없는 한국문화]의 속살을 너무나 잘 드러내주는 말이었습니다.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모두가 못 살게 만드는 사고방식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은 곧 소통의 인성을 만들 수 없고, 소통의 인성을 지닌 리더쉽을 만들 수 없습니다. 역사상 수많은 철학자들과 현인들은 소통의 문제를 철학의 문제로 담아왔습니다. [사람다운 사람되기]라는 것은 곧 철학의 근본 주제가 되었습니다. 물론 세상과 우주의 구성원리나 자연과학이 주는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지혜도 중요한 주제입니다만 생노병사를 다루는 인간의 삶에 문제에 대한 지혜로운 대답을 찾기 위해서 노력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노력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이 바로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사리사욕(私利私慾)에 사로잡힌 사람인지 아닌지 모른다면 이는 무지(無知)가운데 죽어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과 더불어 함께 지낼 줄 아는 사람이 곧 자기비움과 공정의 가치를 가진 열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자문자답(自問自答)을 해보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은 물어보아야 합니다. 개인이나 역사의 발전은 질문을 통해서 이루어져 왔습니다.

헬라클레이토스는 “많은 사람들이 피상적인 물음과 앎에 머물러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피상성과 싸워서 진지한 자기 극복[극기]가 필요하다” 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소통하는 인성은 곧 나 자신을 얼마나 잘 알고, 이해하는 자기인식과 자기이해에서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인식을 통해서 다른 사람과의 만남과 대화속에서 자기 자신의 확장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한국사회는 갈수록 닫힌 사회에서 열린 사회로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소통문화에서는 아직도 갈 길이 바쁩니다.

[철학함]의 부족, [생각하고 변화하기에 대한 노력] 부족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하배 교수의 [갑질시대 소통인문학]을 읽어보면 사람들에게 이해(利害 이익과 손해)의 충돌,이해(理解, 상호존중)의 충돌이 한국사회에 너무나 편만하다고 말합니다.

물질적인 추구나 욕망이 강한 나머지 정신적인 판단력이나 분별력이 흐려지게 되면 곧 소통이 아닌 불통이 일어난다고 지적합니다. 철학함이라는 것은 곧 [생각하는 힘을 길러서 세상을 지혜롭게 살자] 라는 것입니다. 나에 대한 생각, 남에 대한 생각, 이웃과 세상에 대한 생각을 과연 제대로 올바르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 자신이 지나친 [피상성]이 강하다면,
나 자신이 [사리사욕]을 너무나 앞세운다면,
이는 곧 소통하는 인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나오지 않습니다. 길게 쓸 일이 없습니다. 나의 글이 다른 이의 길이 되길 바랄 뿐입니다.

이렇게 글을 써도 [소통하는 인성자, 소통하는 리더가 되고자 하는 철학함]이 결여 되어 있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줘도 못 먹는 것은 본인 책임입니다.
알면서도 못하는 것은 본인 책임입니다.
알면서도 못 고치는 것도 본인 책임입니다.

곧 리더쉽은 책임감입니다. !
그 반대는 소통부재입니다. !




정호승의 [봄 길]이라는 시로 나의 글을 마칩니다.
이 글에 아주 유효적절한 시라서 평소 암송하고 있습니다.

봄 길  정 호 승 시인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 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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