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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이야기

사무엘 울만의 [청춘]에 나오는 꿈꾸는 자 - 이스라엘

by 코리안랍비 2023. 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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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울만의 [청춘]에 나오는 꿈꾸는 자 - 이스라엘

사무엘 울만은 [청춘]이라는 시로 알려진 인물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등장한 민태원의 [청춘예찬]과 더불어서 알려진 인물이라는 것이다. 사무엘 울만의 [청춘]은 ‘인천상륙작전’의 명장 육군원수 멕아더 덕분에 크게 알려졌다. 한국 사람들은 멕아더 원수를 아주 위대한 전쟁영웅으로 인식한다. 그가 사무엘 울만의 [청춘]의 시를 서재에 놓고서 자주 보면서 만년 청춘으로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만년 청춘]의 비결은 바로 자신을 ‘이 땅에 여행하러 온 여행자라는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평생동안 성경과 탈무드를 연구하고 설교하였던 ‘유대인 랍비’로서의 정체성도 크게 가지고 있었다. 그는 랍비로서 절제된 언어를 사용하고, 그리고 친절의 언어를 사용하고, 그리고 문학적이고 예술적인 감수성의 언어를 사용하였다. 그는 한마디로 지혜로운 노인이요, 장로요, 현자로서 지구상의 생을 살았던 것이다.

오늘은 서재에서 그의 시집 [청춘]을 다시 보면서, 그의 시를 잠시 이 지면에 올려본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 가짐을 뜻하나니
장미빛 볼, 붉은 입술, 부드러운 무릎이 아니라
풍부한 상상력과 왕성한 감수성과 의지력
그리고 인생의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신선함을 뜻하나니 ​
청춘이란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뿌리치는 모험심,
그 탁월한 정신력을 뜻하나니

때로는 스무 살 청년보다 예순 살 노인이 더 청춘일 수 있네.
누구나 세월만으로 늙어가지 않고
이상을 잃어버릴 때 늙어가나니 ​

세월은 피부의 주름을 늘리지만
열정을 가진 마음을 시들게 하지 못하지.
근심과 두려움, 자신감을 잃는 것이
우리 기백을 죽이고 마음을 시들게 하네.
그대가 젊어 있는 한 예순이건 열여섯이건
가슴 속에는 경이로움을 향한 동경과 아이처럼
왕성한 탐구심과 인생에서
기쁨을 얻고자 하는 열망이 있는 법.
​그대와 나의 가슴 속에는 이심전심의 안테나가 있어
사람들과 신으로부터 아름다움과 희망, 기쁨, 용기,
힘의 영감을 받는 한 언제까지나 청춘일 수 있네. ​

영감이 끊기고 정신이 냉소의 눈에 덮이고
비탄의 얼음에 갇힐 때 그대는 스무 살이라도 늙은이가 되네.
그러나 머리를 높이 들고 희망의 물결을 붙잡는 한,
그대는 여든 살이어도 늘 푸른 청춘이네.


그런데 우리는 사무엘 울만에 대해서 더 알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저 우리는 고등학교 시절에 듣고 배웠던 것에 너무나 머물러 있다. 그러면서 ‘나이는 가라’ 하면서 청춘에 대한 깊은 관조나 의지가 별로 없다. 그것이 문제라면 문제이다.

서재에서 [청춘] 이란 시집을 다시 보면서, 사무엘 울만의 다른 시들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시는 [꿈꾸는 자 - 이스라엘]이다. 꿈꾸는 자 - dreamer는 창세기의 야곱의 11번째 아들인 요셉을 말한다. 요셉은 형들의 모함을 받아 이집트의 노예로 팔려간다. 그리고 나중에는 감옥에도 투옥이 되었다. 하지만 그에게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있었다. 나중에는 이집트의 총리까지 올라간 인물이 되었으며 형들을 용서하고, 아버지 야곱까지 이집트에 모시고 살게 한 인물이다. 그의 꿈은 바로 [공동체의 꿈이요, 민족의 꿈]이었다. 그가 꿈꾼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인 것이다.

이 이스라엘의 의미가 ‘하나님과 싸우는 자, 씨름하는 자]이다. 그런데 사람과 싸우고, 시대상황과 싸우고, 나중에는 하나님과도 싸우면서도 꿈을 놓지 않는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민족인 것이다. 사무엘 울만은 그래서 [꿈꾸는 자 - 이스라엘]이라는 시를 남긴 이유 같다. 나는 그의 시에서 장엄하고 웅장한 연대기(chronicles)를 느낀다.


이스라엘 - 꿈꾸는 자

경제학자 요셉
사회학자 모세
위대한 장수 여호수아
예언자 드보라
선율의 시인 다윗
현명한 도덕가 코헬레트(솔로몬)
심오한 철학자 욥
숭고한 정신의 시인 이사야
윤리의 교사 미가
선견자인 나사렛 예언자
지주와 노예의 안식일
땅에 가득찬 자유에의 호소
일하는 사람의 임금을 착취하는 범죄
깃발에 쓰여 있도다.
“이스라엘에 들으라
야훼이신 하나님은 유일하시도다”
싸워서 이집트 왕에게 이기고
싸워서 시리아군에게 패배당하고
노예로 일하고 티그리스의 개펄에서 울고
열광적인 신뢰와 함께 사람들을 모아
시온산에 성전을 재건하고
야곱의 하나님께 신의를 맹세하고
하프에 죽을 걸고 새로운 아가를 연주하고
다시금 하나님이 유일하다는 것을 고하고
하만의 음모를 쳐부수고
안티오쿠스 군대를 타도하고
로마 군단에 패배하고
스페인에서 십자가 위에 불태워지고
바다의 조수처럼 흥하고 다시 망한다.
바벨론 강가에서 꿈꾸면서 울고
그 버드나무에 수금(하프)를 걸고 말하기를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솜씨)를 잊게 하라”(시편137편)
시나이의 사막에서 노래하고 기뻐하며
라인과 론 위에서 꿈꾸며 울고
카스티리아 땅에서 싸워 패하여
바다에서 바다로 배로 도망치고
육지에서 육지로 방랑하며 도망치고
피 흐르고 다리와 상처 입은 가슴이
휴식할 장소를 찾도다.
그대 인간의 화로불
이스라엘, 항상 불타오르는 풀숲
이스라엘은 역사에서 ‘슬픔의 인간’
국가들의 희생양
통일을 위하여 애쓰고
축복과 저주
까마귀처럼 여기저기 날아다니고
높은 곳으로부터 홍수를
골짜기에는 물과 파묻힌 폐허를 엿보고
세금을 받아내고 마음에 죄가 있어
선망과 증오가 함께 길을 가로막는다.
하만(에스더서의 악인)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가라.
아니면
약속과 희망의 땅으로 길을 방해하려고 하는
아말렉 사람의 땅으로
점심 때, 밤의 조용할 때, 백열한 정신은 외친다.
“나는 구하노라, 평화, 평화”
그리고 위로의 차분한 말이 들린다.
“그대 내 영을 그대의 자녀들에게 부어 주노라”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꿈
정의와 진실이 모든 사람들을 이끌어갈 때
싸움이 그치고
지평선에서 사라지기 싫어 꺼져가는
히드라의 머리를 지닌 약탈의 괴물
불타는 횃불, 살인의 검을 들고
밤의 암흑에 나타난다.
인간의 잔혹한 힘
돈 강에서 라인 강까지의
공공연한 무질서와 혼란한 지옥을 만연시켜
소요 속에서 트럼펫을 불면서
꿈꾸는 사람 나타난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는다.
꿈에 커튼이 올라가고
시온산 꼭대기에 세워진 커다란 성전이 나타난다.
평화의 창문이 열리고
율법과 사랑으로 가득한 황금의 말씀에서
진실을 배우기 위해
그 성전에서 나가는 자의 꿈을 꾼다.
“율법은 시온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트럼펫 소리 울려 퍼지고
세계는 구원 받도다.


요즘 어디서나 희망을 찾을 수 없다고 여긴 청춘들이 주식 시장과 부동산 시장으로 몰려든다. 있는 돈을 다 끌어 모으고 대출을 받고 심지어 빚을 심하게 내면서 대박의 꿈을 좇아 부동산과 주식에 투자하는 모습을 수시로 접한다. 영혼까기 끌어 모아 투자하는 사람들 [영끌족]들이 등장하면서 그 과열양상이 심상치 않다. 울 수도 없고, 웃을 수도 없는 웃픈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사무엘 울만의 [청춘]이라는 시가 너무나 좋아서 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청춘의 때는 다시 돌이킬 수 없는 나날이다. 이 시를 읽으면서 마음이 맑아지고, 기운이 샘솟기를 소망해본다. 육체적으로 완성되어가는 청춘의 시기, [젊은 그대들]이 밝고 건강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우뚝 서보기를 고대해본다. 청춘의 시기 앞으로 펼쳐질 암울한 미래를 미리 정하고 현재의 생활에 불만족과 불안으로 일관한다면 이 청춘의 시기는 곧 늙음의 시기로 전락하는 것이다. 젊은이의 멋은 ‘도전과 패기’이다.

이러한 ‘도전과 패기’를 이스라엘이라는 시로 써내려간 사람이 바로 [사무엘 울만]이다. 꿈꾸는 자 - 이스라엘, 유대인의 역사와 상황을 들여다보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과 현실은 사실 [조족지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꿈을 잃어버릴 때 마음은 늙는다.
세월은 주름살을 늘려 주지만
열정을 잃으면 곧 마음이 시든다
고뇌, 공포, 실망에 의해서
기력은 땅에 떨어지고
정신은 가벼운 먼지가 된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제대로 도전도 못하고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면서 자신의 보존에만 연연한다면 대학생이라도 노인이나 다름없다. 청년이라도 애늙은이가 된다.


오늘 아침에도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았다.
그리고 연구실에 와서도 거울을 보았다.
수시로 거울을 보면서 세월의 살아있는 흔적 - 주름살을 본다. 약을 먹고 주사를 맞고, 무슨 짓을 해도 세월의 흔적 - 주름살을 막을 수 없다. 그런데 정말 가슴 아픈 것은 마음에 주름살이 하나 둘씩 늘어나는 것이다. 마음에 주름살이 늘어나는 것은 열정이 식어진 것이다. 의욕도 식어진 것이다. 시들어버리는 마음은 먼지처럼 가볍다. 바람이 부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고 휘날려질 뿐이다. 기력은 땅에 떨어진다. 나에게도 [마음의 주름살]이 많이 늘었다. 늘었다는 것은 바로 늙었다로 대비되는 말인지도 모른다. [도전과 패기]를 점차 잃어버리는 것은 [꿈꾸기 싫어하는 마음]이다. 살아있는 한 우리는 꿈꿀 수 있다. 내가 살아있는 증거도 꿈이 있어서다.

나는 자주 성서와 탈무드를 연구하는 학자중에 하나이다.
그리고 반드시 이스라엘의 고대사, 중세사, 현대사도 같이 읽는다. 그러면서 느끼는 것은 ‘꿈과 희망’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반드시 좌절과 절망을 넘어서 흥겨운 ‘청춘가’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은 [청춘과 꿈꾸는 자 이스라엘]과 같이 연결지어 읽고, 사색하고, 이렇게 글로 남길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좋다.



요즘 시절이 아무리 어렵고 세월이 모질고 답답하여도
인생의 봄날인 청춘은 청춘다워야 한다. 청춘을 청춘답게 살아야 더 나이가 들어서도 마음껏 꿈꾸고 마음껏 사랑하고 마음껏 도전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면서 부르는 청춘의 노래, 청춘의 연가(戀歌)는 중단되어서는 안된다.

무기력증과 우울증으로 힘들고 지친 세대는 전 세대에 걸쳐서 일어난다. 그런데 청소년 시기에는 그런 것을 겪을 시기가 아니다. 그런데 요즘 그런 청소년들도 많다고 하니 [시절유감]이다. 하지만 어떤 현인이 자주 사용하는 말을 되새긴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마음만 먹으면 되는 것을 마음을 안 먹으니 문제가 되는 것이다. 현실의 높은 벽 때문에 자꾸 무기력과 우울감에 찾아들려 하면 사무엘 울만의 시를 읊어보면 어떨까? 민태원의 [청춘예찬]을 읽어보면 어떨까? 이도 저도 안 읽는 이, 암송하지 않는 이는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나는 주름살이 많은 노인을 절대 폄하하거나 싫어하지 않는다.
마음에 주름살이 많아서 청춘을 잃어버린 사람을 싫어한다.
젊은이라도 노인보다 못하면 그 젊음은 인정받을 수 없다.
늙음이라도 젊은이들보다 더 왕성하다면 그 늙음은 높게 인정할 수 있다.
우리는 나이와 상관없이 인간으로서 인정받아야 한다.

그 인정의 기준점이 바로 [청춘]이어야 한다.

속히 [마음의 주름살]을 열정의 다리미로 쫙 다려버리길 바란다.
청춘, 그 단어만 보아도 가슴이 뛴다.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도 가슴이 뛴다.
길가의 민들레만 보아도 가슴이 뛴다.
사랑하는 막내 딸아이의 방긋 웃는 미소에도 가슴이 뛴다.
가슴이 뛴다면 나는 아직 청춘인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시편 1편의 일부를 여기에 남긴다.
청춘의 시와 잘 어울릴 것 같아서다.
‘멋있고 근사한 청년들’ ‘젊은 그대들’이 많이 일어서길 바라는 마음과, [만년 청춘]으로 보내고 싶어 하는 이들을 위하여 남긴다.

시편 1편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청춘은 바로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다.

충분한 수분을 먹어서 시들지 않고
철을 따라 싱싱한 열매를 맺고
그 잎사귀가 푸르름을 유지하는
젊은 그대들이
진정 복이 있고, 형통한 인생이리라 ~~
꿈꾸는 청춘이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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