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의 수상집 [텅 빈 충만] 을 다시 읽으며
코로나 19로 인하여서 집과 근무지에서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코로나19로 칩거하며 지내는 것이
편해지고 있습니다.
잠시 집을 벗어나고 학원겸 연구소를 벗어나면
금새 폭풍우가 불어오는
에밀 브론테가 말한 [폭풍의 언덕]을 만납니다.
사람들은 모두 상기된 표정으로
[코로나 블루]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날보고 외향적이고 무척 개방적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오래 겪어 본 사람들은 무척이나 보수적이고 내향적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오래 겪어보면 비로소 알게 되는게 사람입니다. 많은 책들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은 내향적인 성격이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 조용하고 때로는 침묵을 지킬 줄 아는 라이프 스타일이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 밖은 지금 시끄러워도 사실 우리의 내면이 더 시끄러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내면은 불안이라는 바이러스로 가뜩이나 시끄러울 것입니다. 내면이 시끄러우면 조급해지고 다급해집니다.
그리고 신경질적이 되고 다른 이들에게 함부로 화를 내고 짜증을 냅니다.
이런 내면을 다스리는 좋은 처방전은 사실 없습니다.
가장 훌륭한 정신과 전문의나 심리학 상담자도 하지 못합니다.
어떤 이는 시를 권하고, 음악을 권하고, 그림을 권합니다.
어떤 이는 명상을 권하고, 춤을 권하고, 차와 커피를 권합니다.
어떤 이는 달리기를 권하고,산책을 권하고, 잠을 권합니다.
물론 다 답이 될 수 있는 것이지만 나의 처방은 다릅니다.
그저 [참고 인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나의 처방입니다.
호들갑을 떨지 말고 조용히 [침묵하고 기다리는 법을 배우는 것]이
나의 처방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는 글을 만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대학시절에 읽은 책을 끄집어내 보았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대학교 2학년때 읽었던 [법정 스님의 텅빈 충만]입니다.
그것은 혼자 있을 때 도리어 충만함을 얻는 다는 내용입니다.
조용히 말없이 스스로를 담금질하며 수행하는 모습은
소승불교의 모습입니다.
최근에 가장 시끄러운 집단이 바로 기독교집단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기독교 이단들이 기승을 부립니다.
가짜 기독교 집단들이 기승을 부리고,
가짜 성직자나 목회자들이
기승을 부립니다. 그런 이유때문인지 몰라도 누군가 나에게,
"한국 기독교는 무능력하다" 라고 말했습니다.
무능력하다는 것은 코로나의 위력앞에
힘을 못쓴다는 것이 아니라,
침묵하고 참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말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입닥치고 조용히 근신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시끄럽고 난잡한 한국교회에서 지내왔습니다.
이상하게도 천주교나 불교사찰에서는
확진자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동안 개인경건과 침묵, 자기수행을 쌓은 결과라고 봅니다. 입을 다물고 귀를 기울인 수련에서 비롯된다고 봅니다. 한국의 개신교는 너무나 말이 많아졌습니다. 교회가 마치 클럽에 온 것처럼, 시장에 온 것처럼 시끄럽습니다. 그렇게 해야 마치 교회답고, 신앙생활하는 것 같고, 믿음이 좋은 것처럼 위장됩니다. 한국교회는 이제 법정 스님의 말한데로, 대승적 기독교에서 소승적 기독교로 가야 합니다.
대학교 2학년 시절 읽었던 [텅빈 충만]이 서재에 아직도 있자 이상한 희열감이 돌았습니다. 법정 스님이 80년대 후반에 쓴 수상록이며 수상집입니다. 한국에 많은 수필가가 있지만, 최고의 수필가는 법정 스님입니다. 그의 수필집에서는 [불교 냄새]가 거의 나지 않습니다. 이상하게도 초대 교회의 순수하고 열정적인 [기독교 냄새]가 더 강하게 납니다. 또한 지극히 인간적인 냄새도 나고, 읽으면 읽을 수록 무엇인가 충만해지는 기분을 자아
대학교 2학년 시절 텅빈 방에서 혼자 읽어던 그 책인데,
다시 읽으려 하니 감회가 새로왔습니다.
그 당시 나는 말이 많아 말실수를 많이 하였습니다.
그런데 [텅빈 충만]을 읽으면서 [침묵이 왜 금이 되는지]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어떤 철학자가 말했습니다.
"세상에 열가지 지혜가 있다면, 그중에 아홉가지는 침묵이다"
이제 나이가 지천명이 되니,
법정 스님의 이 말이 그냥 이해되고, 그냥 다가옵니다.
이 글을 법정 스님은 40대에 썼다고 하는데,
지금 우리의 40대는 과연 성숙한지 의문이 듭니다.
우리는 성숙한게 아니라 미숙합니다. 여전히 깨달음이 없는 짐승처럼 삽니다.
법정 스님의 [텅빈 충만]중에
가장 좋아하는 부분을 여기에 담아 봅니다.
입다물고 귀를 기울이라
모처럼 꽃이 피어나고 새잎이 돋아나는
싱그러운 신록의 숲에 와서,
아무 생각 없이 빈 마음으로 입다물고
귀를 기울이면서 가만히 있기만 해도
충만할 텐데 사람들은 그럴 줄을 모른다.
일상에 때묻고 닮아진 자신을 그 어느때 무엇으로 회복할 수 있겠는가,
입다물고 귀기울이는 습관을 익히라.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진리로부터 점점 멀어진다.
말과 생각이 끊어진 데서 새로운 삶이 열린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카톨릭의 관상수도자였던 토마스 머튼 신부는
그의 [관상기도]에서 이런 말을 한다.(참고로, 토마스 머튼 신부님의 책들은 거의다 소장하고 있습니다.)
"침묵으로 성인들이 성장했고, 침묵으로 인해 하느님의 능력이 그들 안에 머물고, 침묵 안에서 하느님이 신비가 그들에게 알려졌다"
그러기 때문에 [홀로 있을 수록 함께 있다] 는 논리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이런 말도 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열렬히 찾고 있지만 침묵 속에 머무는
이만이 그것을 찾을 수 있다.
말이 많은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그가 경탄할 만한 것을 말한다 할지라도
그의 내부는 비어 있다. 무엇보다도 침묵을 사랑하다. 침묵은 입으로 표현할 수 ㅇ벗는 열매를 그대들에게 가져올 것이다"
(여기서 법정 스님의 경계를 허물고, 경계를 넘어서는 초월성을 발견한다)
불교의 초기 경전인 <<수파니파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람은 태어날 때 입안에 도끼를 가지고 나온다.
어리석은 사람은 말을 함부로 함으로써 그 도끼로 자기 자신을 찍고 만다."
우리는 말을 안해서 후회하는 일보다는
말을 해버렸기 때문에 후회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중략>>
자신이 영혼을 맑히기 위해서 매주 월요일을
침묵의 날로 정하고 지킨
마하트마 간디는 이와 같이 타이르고 있다.
"먼저 생각하라. 그런 다음에 말하라. '이제 그만' 이라는 소리를 듣기 전에 그치라. 사람이 짐승보다 높은 것은 말하는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능력을 부당하게 행사하는 것을 서슴치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짐승만도 못하다"
이 글을 끝맺으려는 바로 지금 첫 꾀꼬리 노래가 들려오고 있다.
5월 6일, 해마다 같은 시기에 찾아오는 이 놀라운 질서, 자연의 소리는 사람의 소리에 견줄 때 얼마나 맑고 신선한가.
우리는 그 자연의 소리를 배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입다물고 귀를 기울이라. (89년 6월)
우리는 너무나 성령충만이나
은혜충만 받으려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릅니다.
소리질러야 들으시는 줄 알고...
키에르케고르가 말한데로 혼자 하느님과 대면하고 일대일로 마주서는 시간이 없는 사람은 절대 충만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세상은 너무나 시끄럽습니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고 말합니다.
불교는 무소유를 주장하는데, 기독교는 과소유를 주장합니다.
비워야 충만해지는 것이고, 버려야 얻는 진리를 애써 외면하고 사는 것 같습니다. 깨달음이 없습니다.
나자신도 이러한 글을 쓰지만, 여전히 갈길이 바쁘다. 아직도 수련과 수행이 부족한 사람이다. 가끔 혼자 있을 때 나 자신은 과연 누구인가 싶은지..... 침묵에서 답을 찾고자 합니다.
그분의 [텅빈 충만]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이제 내 귀는 대숲을 스쳐오는 바람소리 속에서,
맑게 흐르는 산골의 시냇물에서,
혹은 숲에서 우짓는 새소리에서,
비발디나 바하의 가락보다 더 그윽한 음악을 들을 수 있다.
빈 방에 홀로 앚아 있으면 모든 것이 넉넉하고 충만하다.
텅 비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가득 찼을 때보다도 더 충만한 것이다.
(89년 3월)
생전의 법정 스님을 뵙지는 못했으나,
오랫동안 만난 분처럼 다가오는 밤입니다.
하루가 천년이요
천년이 하루입니다.<신약 베드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