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무드인문학 칼럼 하무트 이쉬(Hamut Ish), 다니엘의 거룩한 습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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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무트 이쉬(Hamut Ish), 다니엘의 거룩한 습관
구약성서 다니엘 9장 23절과 10장 11절에 보면 다니엘을 부르는 다른 이름이 있다.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 “큰 은총을 받은 사람 다니엘”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이라는 것은 ‘큰 사랑을 받는 존재(greatly beloved person)’라는 뜻이다.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진정 ‘사랑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히브리어로 하면 ‘하무트 이쉬’가 된다. 이스라엘 유학을 마치고 아내와 돌을 갓 지난 여아를 데리고 한국에 오는 비행기를 탔는데, 마침 이스라엘 출신의 엄마와 아들이 여행차 한국에 오게 되었다. 그때 히브리어로 대화를 나누면서 그 유대인 엄마가 ‘하무다’ 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이는 ‘사랑스럽다’라는 말이다. ‘하무트’와 ‘하무다’는 같은 어원이다. 두 단어를 다른 말로 하면 ‘너는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뜻이다. 어린 소년 시절의 예수님도 지혜와 총명이 자라면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사랑을 받으셨다.
유대인 교육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 사랑과 은총을 받는 사람이 되도록 가르친다. 솔로몬의 잠언 3장 3-4절을 보면,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내 목에 매며 네 마음 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라고 말씀한다.
그렇다면 탈무드는 다니엘을 얼마나 위대하게 평가를 할까? 탈무드 게마라를 보면 ‘비저너리 다니엘 Visionary Daniel’ 이라는 부른다. “어떤 면에서 그들은(여러 선지자들) 다니엘보다 더 위대했고, 어떤 면에서 다니엘은 그들보다 더 위대했다. 그들은 선지자이고 그는 선지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보다 더 위대했다. 학개, 스가랴, 말라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들에게 전하도록 보내졌지만 다니엘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환상(Vision)을 드러내도록 보내지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그는 그들보다 더 위대했다. 왜냐하면 그는 이 환상을 보았지만 그들은 이 환상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탈무드 요마(Yoma 77a)와 탈무드 산헤드린(Sanhedrin 93b)를 보면 “만일 세상 나라의 모든 현자들이 저울 한 쪽에 있고 다니엘이 다른 쪽에 있다면 그가 그들 모두보다 더 나을 것이다.”, “다니엘 자신은 선지자(히, 나비Navee)가 아니라 지혜롭고 성스러운 현자 (히, 하캄 Hacham)로 여겼으나 선지자들도 보지 못한 것을 보았다.”
다니엘 10장 7절은 말씀한다. “이 환상을 나 다니엘이 홀로 보았고 나와 함께 한 사람들은 이 환상을 보지 못하였어도 그들이 크게 떨며 도망하여 숨었느니라.”
다니엘의 환상과 비전은 오늘 우리 청소년, 청년들이 가져야 할 환상이고 비전이다. 환상과 비전 앞에서 숨어서는 안 된다. 거센 시대적 도전, 문화적 도전, 세속적 도전에 저항할 줄 알아야 한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보면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사막 어딘가에 오아시스를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했다.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은 자신의 다니엘서 주석에서 “자신들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 왕의 진미를 단호히 거부한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다.” 라고 평가했다. 다니엘은 우상의 제국 바벨론에서 하나님 앞에 ‘마음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 뜻을 정하였고’, 그 뜻을 하나님 앞에서 굽히지 않았다. 이것은 다니엘의 ‘거룩한 습관 holy habit’이다. 이 거룩한 습관이 대제국 바벨론을 이기고 마침내 승리하는 습관이 되었다.
믿음의 사람은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 하늘의 별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우리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그리고 미래를 짊어질 청년들에게 다니엘과 같은 ‘작지만 강하고 견고한 거룩한 습관’을 길러주어야 한다. 어려서 길러주면 늙어서도 버리지 않는다. 교육의 힘, 특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본으로 삼는 교육은 반드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은총 받고 사랑을 받는 일이다. ‘하무트 이쉬’를 세우는 교육은 4차 산업혁명시대에도 진정 필요한 것이다. 지성, 육성, 심성, 영성의 조화가 있어야 한다. 교육, 특히 기독교 교육은 ‘사람에게 투자하는 것이며, 진리에 투자하는 일’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인류역사와 세계역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영향을 미친 것은 바로 세속적인 이유를 따지고 보면 ‘학문적 우수성’과 ‘학술에 대한 전적 투자’에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땅과 건물이라는 부동산에 투자하고 가상화폐와 주식과 증권이라는 물질적인 것에 투자한다. 투자라기보다는 투기에 가깝다. 우리 믿는 무리들은 도리어 가진 물질을 사람에게 투자하는 일, 인재를 길러내고 인재를 등용하는 일이 물질주의자를 길러내는 것보다 얼마나 중요한지 다니엘서는 적극적으로 보여준다. 다니엘과 같은 ‘하무트 이쉬’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이제라도 ‘하무트 이쉬’를 양성하는데 주력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많은 시간이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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