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THE SHALLOWS)
최근 이 책을 만나고서 독서감상문이 아닌,
생존독서(READING SURVIVAL)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리더(LEADER)가 되고 싶은데 그리 리더(READER)는 되지 못한다.
지도자가 되고 싶으면 독서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우린 서서히 독자자의 지위에서 내려오고 있다.
인간은 더 똑똑해지고 있는가?
아니면 그냥 그렇게 보이는걸까?
이 평설을 하기 앞서서
나는 이 책을 읽어 보았는지 물어보고 싶다.
대학시절에 읽었던 걸출한 책인데, 마샬 맥루한의 [미디어의 이해]이다.
읽지 않았다면 이 책을 반드시 읽고, 본서를 읽어보기를 권한다.
이 책에서 마샬 맥루한은 "미디어는 메시지다" 라고 했고,
심지어 "메시지는 마사지다(Message is Massage" 라고도 하였다.
일종의 언어의 유희라고도 볼 수 있지만, 마샬 맥루한은
구텐베리크가 인쇄술로 성서를 인쇄하였던 시점부터 종이의 위력이 언젠가는 약화되고, 앞으로 '전자기술'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는 예측을 하였다. 그 사람만 미래에 전자기술이나 정보기술이 미래를 지배하고, 전세계에 보편화 될 것이라는 것을 내다 본 사람은 아니다.
이러한 전자기술과 정보기술이 세상을 지배하는데는
사실 '컨텐츠'라는 것이 있어서 그렇다. 종이라는 도구에 컨텐츠 - 즉, 내용을 담는 것으로 종이는 세상을 지배해왔다. 하지만 종이는 아날로그의 대명사이다.
그런데 이제는 디지털이라는 가상공간에 내용을 담는다. 바로 인터넷이다.
마샬 맥루한은 [인터넷이 인류 앞에 펼쳐 놓은 축제의 향연]을 예상하였다.
끝없이 확장되고 발전되는 인터넷의 영향력앞에 우리는 많은 우려를 한다.
하지만 그 우려하고 걱정하는 사람들조차도 그 인터넷 장치(기기)가 주는 즐거움(PLEASURE)을 끊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본서의 저자 니콜라스 카는 사실 [인터넷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가진 미래학자이다. 그것도 정보기술 미래학자이다. 그는 IT아이티 월드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니 우리가 반드시 만나볼 인물이다.
사실 그동안 인문학을 읽고 연구한답시고, 미래학에 대하여 소홀히 하였다.
미래학이라는 것은 사실 현실기반학문이다. 피터 드럭커는 "미래가 곧 현실이다" 라고 말하면서, 우리가 우리 가까이 온 미래가 아니라, 현실속에서 미래를 누리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총체적인 모습을 밝힌 것이다. 그런데 인문학을 하면서 인터넷이라는 도구를 사용하면서 나 자신을 비롯한 현대인들은 '미래인'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과거라는 것을 들어가는데 있어서 인터넷이라는 도구를 통해서도 너무나도 빨리 접근하고 있다.
거의 REAL-TIME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정보검색속도는 가공할만하다.
그래서 어느 순간 나는 백과사전을 버렸다. 검색과 클릭만 하면 금새 필요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초스피드로 확보할 수 있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다만 그러한 데이타나 자료들이 나에게는 '정보 INFORMATION'으로 자리를 잡지 못하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빨라진 만큼 잃어버리거나 놓치는 것도 많아진 것이다.
바로 우리는'뇌를 잃어버린 사람들'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로 바뀐 것이다.
그래서 다분히 지성이나 교양적인 문화인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얕고 피상적인 문명인'의 모습으로 바뀐 것이다.
이제 이전의 것들은 이제 '구닥다리'나 '구식'으로 변해버렸다.
구텐베르크식 아날로그의 전성기는 가버린 것이다.
이제는 인터넷이 없으면 안되는 뇌로 바뀐 것이다.
인터넷이 제공하는 방식으로 정보를 제공받고, 더 많은 정보를 받으려는
전자정보 공허감과 허기짐이 더욱 강해졌다. 컴퓨터, 휴대폰이 없으면 이제는 못사는 인간으로 변한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나는 이전의 뇌를 잃어버린 것이다"
(페이지 36)
저자는 그리하여 과거의 역사속에서 인간의 '뇌'에 대한 연구들을 살펴본다.
뇌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철학자들을 고찰한다. 그러면서 등장시킨 인물이 바로 '프리드리히 니체' '프로이드', '르네 데카르트'이다.
인간의 뇌는 변하는가? 아니면 변하지 않는가? 라는 두가지 측면에서
저 세사람의 천재들은 인간의 뇌는 변하지 않는 다고 보았다.
하지만 뇌과학이 발달하면서, 현대에 와서는 인간의 뇌의 가소성을 입증하고 있다.
"인간의 뇌는 그때그때 상황을 봐가며 과거 방식을 바꿔 스스로를 새롭게 정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 제임스 올즈(조지메이슨대 신경과학교수)
이 말은 곧 뇌는 우리가 사고하는 대로 바뀐다는 것이다.(페이지 55)
지금 우리는 기술진보가 가속화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과거에 타자기가 발명되고 나서 문자혁명이 크게 일어났다.
그리고 컴퓨터가 발명되고 나서는 더욱 문자혁명의 거대화, 가속화, 첨단화가 이루어졌다. 나중에는 이러한 기술적인 진보가 인류역사의 전반에 핵심적 영향을 미쳐왔다.
칼 마르크스는 "풍차는 봉건영주를 안겨주었고, 증기 풍차는 자본주의를 안겨 주었다" 라고 하였다. 풍차를 만드는 기술의 진보가 곧 자본주의를 가속화하였다.
초월주의자 랄프 왈도 에머슨은 "사물들은 안장에 앉아 있다. 그리고 사람을 타고 간다" 라고 하였다.
이 말을 잘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기술진보의 시대에 살아가면서 이러한 기술을 배우고 익히는 것은
사실 어렵다고 보아야 한다. 인간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움직일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의 기술을 보라. 이러한 기술을 익히고 배우는 것은 정말 따라가기 힘들다. 다만 우리가 할 일은 이러한 기술이라는 말의 등에 잘 올라타는 것이다. 4차 혁명의 시대가 와도, 이 기술을 잘 이용하는 사람들을 잘 살펴보고 우리도 같이 편승하여 말등에 오르는 것이다.그러면서 4차 혁명시대의 중심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의 뇌는 그렇게 순간 순간 임기응변하면서 사고하는 쪽으로 발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아주 재미있는 글의 전개를 보여준다.
바로 [문자의 역사]를 기술하였다. 문자라고 하면 바로 [읽고 쓰는 것]을 말한다.
사실 모든 문명의 기기들은 문자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저자는 문명의 시작인 수메르로부터 시작하여 이집트나 다른 문명의[문자의 역사]를 개괄하고 있다.
문자의 사용은 바로 사고의 깊이를 더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독서의 중요성을 밝힌다.
[독서의 중요성]
그는 "책을 읽는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사고의 과정을 연습해야 함을 의미하고 하나의 정적인 대상에 대한 지속적이고 방해받지 않는 집중을 요하는 일"이라고 묘사한다.
그래서 과거의 역사속에서 독서에 몰두할 때 일어나는 의식의 놀라운 변화를 밝히고 있다.
"꿈을 꾸는 것처럼 나의 감각과 생각이 집중되는 경지에 들어간다.
그러면 이 침묵의 긴 시간과 함께 기억의 폭풍은 마음속에서
잠잠해지고, 멈추지 않는 깊은 사고로부터 즐거움의 물결이 전해지고,
갑자기 예상치 않은 기쁨이 가슴에서 일어난다" - 시리아의 주교 아이작
또한 구텐베르크가 만든 놀라운 혁명을 밝히고 있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신기관 Novum Organum]에서
구텐베르크의 인쇄기술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 세계 사물의 모양과 양상을 바꾸었으며 어떤 왕조나 종파도, 어떤 별도 인간에게 이보다 더 큰 힘과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라고 높이 찬사를 보냈다.
그 당시에 구텐베르크의 금속인쇄술은 손으로 쓰고 필사하던 필경사나 서기관의 시대를 잠재우고, 인쇄기가 인간의 필기능력을 상쇄시켰다. 그러면서 인쇄술의 발달이 인간의 생각기능이나 사고능력의 저하를 이루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곧 '깊이 읽기'의 저하기 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물론 긍정적인 측면이 그동안 중세의 수도원이나 교회에 갇힌 문자가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공유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위대한 저작들을 읽을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던 것이다.
인쇄술의 발달과 더불어서 책은 시대변화의 가장 중심에 있던 것이다.
책이 지식과 통찰력을 교환하는 주된 수단이 되었고 그 지적 윤리는 문화적 기반이 되었다.(페이지 116)
그러한 책장의 세계와는 다른 곳이 생겨난다.
바로 새로운 지적 윤리가 힘을 얻어가고 있다.
바로 우리의 뇌의 통로는 다시 한번 새로운 길을 찾게 된다.
문자라는 것과 더불어서 스크린의 세계가 바로 다른 곳(another place)이다.
20세기 도래하고 텔레비전과 라디오, 컴퓨터가
지금도 가장 보편적인 특징을 지닌 매체이다.
저자는 문자의 역사를 앞에서 기술하고, 이제는 컴퓨터의 역사도 기술한다.
책과 신문은 문자와 의미지를 보여줄 수 있었지만 소리나 동영상을 다룰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통적인 미디어가 소멸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책과 신문 그리고 잡지를 구독한다. 그리고 여전히 극장에 가고 영화를 본다.
바로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나 융합을 오가고 있는 것이다.
이어령 박사는 이를 [디지로그]라고 불렀다.
이제는 전통적인 매체들이나 미디어들이 인터넷에 잠식당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인터넷의 힘과 위력은 단순히 컴퓨터 스크린의 한 모퉁이에서 끝나지 않는다. 오늘날 도서관을 보면, 인터넷 접속이 이제는 도서관의 가장 인기 높은 서비스로 급속히 자리잡고 있다. 현대의 도서관은 이제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아니라, 자판을 두들기고 검색하는 소리가 들린다.
도서관을 보면 이제 그 중심에 인터넷과 그것이 연결된 모니터들이 지배하고,
인쇄물의 영역은 구석으로 밀려나는 장면이 바로 연출된다.
도서관이 이제는 책을 읽는 곳이 아니라, 그저 인터넷을 중심으로한 문화공간이거나 오락의 장소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독서는 사실 [멀티 감각적]인 것인데, 문자나 활자보다는 스크린으로 우리의 시선이 더욱 가고 있다. 곧 [생각없는 사람들]을 만들어가고 있다.
전자북의 등장을 보면서 전통적인 종이 책이 서서히 종말을 고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는가? 최근까지 디지털 리더시 - 전자책의 인기가 급상승하였다. 그런데 본서의 저자는 그러한 인기가 몇몇 작은 나라나 대도시에서는 크게 일어나지만 미국의 경우는 인기가 그리 높지 않다고 한다.(페이지 154)
그렇지만 이제 전자책의 판매와 보급은 전체 서적 판매량을 언젠가 누르고 주도권을 갖게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것이 바로 아마존의 킨들(Kindle)이다. 킨들은 디지털 리더기의 미래를 바로 보여준다.
3
킨들 예찬론자인 뉴욕 타임즈의 편집장이었던 찰스 맥그래스는 말한다.
"편리함게 그렇게 쉽게 무너진다는 것이 그리고 한때 그렇게 높은 가치를
평가받던 활판의 섬세함과 디자인이 일단 사라졌음에도 이를 거의 그리워하지 않는다는 것이 놀랍다"
그리고 안타깝게 말한다.
"앞으로의 과거의 독서를 상기시키는, 그냥 좋아하는 골동품과 같은 마음으로
책을 간직하게 될 것" 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우려도 한편으로 강하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컴퓨터를 어떻게 사용할지 선택함에 있어
우리는 책의 윤리가 우리에게 안겨 주었던 홀로 고독하게 몰입하는 행위를 이제는 거부했다.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곡예'에 맡겼다." - 경제학자 레비의 지적
곡예하는 뇌
원래 인간의 뇌를 격동시키고 사고형성에 도움을 준 가장 위대한 도구는 책이었다. 책보다 인간의 사고를 형성시킬만한 도구는 인류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인터넷이 책을 대신하고 있다.
인터넷이 인간의 사고방식을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인간이 만든 인공지능이 인간지능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간의 뇌는 혹사당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인간의 뇌는 혹사당하면 산만해진다.
그동안 독서를 통해서 집중력을 발휘하였던 인간들이 인터넷을 통해서
완벽한 산만함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인터넷이 인간의 집중력을 산만하게 한다" 고 지적한다.(페이지 193)
멀티미디어에 따른 집중력의 분산은 우리의 인지적 능력에 더 많은 노동을 가해
학습 성과를 낮추고 이해력도 약화시킨다.
인터넷 항해는 특히 정신적으로 집중하는 형태의 멀티태스킹을 요구한다.
이 뇌의 곡예는 뇌학자들이 우리의 인지력에 '전환비용 switching cost'이라고 부른다. 전환비용은 우리의 정신세계에 더 많은 고통을 가한다.
이 책에서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1879년 루이 에밀 자발이라는 안과의사는
사람들이 독서할 때는 사람들이 전체적으로 조목 조목 아름답게 단어들을 흟어나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책을 정독하여 읽는게 아니라, 일종의 점ㅂ프하듯이 단속성 운동(saccade)을 한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의미인가하면, 사람들은 여러 줄을 읽다가, 어느 지점에서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여러 줄을 읽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대충 대충 읽어나가는 것이 인간의 독서방식이라는 것이다.
이 말에 어느 정도 공감을 한다. 어린아이였을 때는 책을 소리내에서 순서대로 읽었는데, 나이가 들면 소리내서 읽지 않고, 눈으로 읽는다. 눈으로 읽다보면 중요한 부분이나 읽기 편한 부분에 눈이 더 가게 되어 있다. 이런 것을 나는 [편의 독서]라고 부른다.
사람들의 독서습관은 사실 [이리 저리 검색하고 대충 훓어보는 수준]이다.
책에서는 80%가 넘는 사람들이 이렇게 읽는다고 설문조사가 되어 있다.
(페이지 205)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산만함은 나쁜 것이 아니라 옹호되어져야 할 습관]이라는 것을 감지한다. 우리 뇌는 집중하는데 약하다는 것이다. 산만함이 정상적인 모습이라는 것이다. 물론 지나친 산만함은 반대로 집중력의 결여이기에 반드시 고쳐야 할 부분임에는 틀림없다.
또한 이 책에서는 인간의 지식을 두가지로 나눈다.
직접 아는 지식이라고 하여서 자신이 어떤 주제에 따라서 알고 있는 것이고
또 하나 다른 지식은 그 관련 정보나 지식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아는 것이라고 한다.
이 책에서는 [구글 GOOGLE]이라는 회사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저자는 [모든 지식은 구글로 모인다] 라고 한다. (페이지 232)
구글은 사실상 한계를 모르는 끝없는 확장과 변신을 하고 있다.
원래 성서와 탈무드를 검색하는 프로그램에서 출발한 구글의 검색기능이 나중에는 전세계 모든 지식을 총망라하는 빠르고 엄청난 분량의 빅데이터 검색을 하기까지 확장되었다. 이제 구글드 GOOGLED 시대가 온 것이다.
저자는 또다른 문제의식도 제기한다.
구글에서 효율적 정보 수집은 좋지만 반대로 비효율적 사색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수많은 인터넷 검색자들에게 있어서 정보과부하는 영원한 고통이 되고 있다. 이를 치유하려는 시도는 문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이에 대처할 유일한 방법은 훓어보고 건너뛰는 스키핑 능력을 향상시키고, 문제의 원인인 이 놀랍도록 반응력이 뛰어난 기계에 더 깊이 의존하는 것이다.
우리가 독서할 때 건너뛰면서 읽어나가듯이 인터넷 검색이나 북서치도 그런 건너뛰듯이 한다는 것이다. 천재 에머슨은 1858년 자신의 에세이 [ 책] 에서 "독서의 최고의 원칙은 자연의 법칙이지 기계적인 법칙은 아니다" 라고 적었다.
구글은 정말 [천사의 선물인가 아니면 악마의 유혹인가?]
사람들은 구글에 대해서 말한다. "구글은 신이다. 아니면 구글은 악마이다"
저자는 구글은 신도 아니고 악마도 아니라고 한다. 다만 인간 삶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운 것은 사실이다라고 한다. 구글이 바꾸는 세상은 실로 빛을 준게 아니라 어둠을 주는 것일까? 이제 인간의 기술은 광란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말한다.
"기술의 유혹은 거부하기 어렵고
우리가 살아가는 인스턴트 정보시대에서
속도와 효율성이 주는 이득은 그야말로 꼭 필요한 가치라는 생각에
그에 대한 열망은 논쟁의 가치조차 없다.
하지만 나는 우리 인간이 미래의 컴퓨터 과학자들과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머들이 우리의 명령 체계를 작성하는 일에 순응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놓지 않고 있다."
디지털 혁명시대에 우리는 아날로그의 반격을 하고 있다.
우리의 인간적인 요소들을 더 이상 쓸모없고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특히 이러한 추악한 사고방식으로 우리의 자녀들을 양육하고
사람들과 교제한다면 얼마나 슬프고 비참하겠는가?
우리는 우리의 인간적인 요소는 절대 포기할 수 없다.
우리는 인간이다. WE ARE THE HUMAN !
그래서 인문학과 기술의 융합이 곧 우리의 양방향 사고체계를 갖게 한다.
걱정되는 것은 사람들이 너무나도 기계적인 사고, 일방적 사고로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아날로그의 대표주자 책도 붙들고 디지털(인공지능)의 대표주자 인터넷도 붙들라.
생각없는 사람들이 되지 말라. 생각을 멈추면 곧 인간임을 멈추는 것이다.